박양유
1. 개요
고려왕조 초기의 문관. 여타 고려 초기 인물처럼 생몰연도가 불확실하며 제대로 된 기록도 없다. 현존 기록을 살펴보면 최소 경종, 성종 두 임금을 섬겼다.
2. 상세
자세한 기록이 전무해 박양유에 대해 잘 알기 어렵지만 경종의 신임을 받아 성종 때도 꽤 높은 자리에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이 자신의 조카 목종을 서경에 데려가 개령군 군호를 물려줄 때 성종의 봉책문을 받든 두 신하 중 하나다. 이 때의 관직은 건축 및 건설 담당 부서인 공관의 장관이자 6관의 부관리자였다. 여기서 계속 승진해 시중 직위까지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 외교 관련으로도 꽤 뛰어났는지 서희, 최량과 함께 상군사로 북방에 나가기도 했다. 후 거란과의 교섭에도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단편적인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이게 끝. 나름 경종의 배향공신인데다 후계자 책봉식의 주역, 북방 군단 지휘 등 굵직한 일은 다 했는데도 열전 하나 없고 가족관계나 언제 태어나 죽었는지도 모른다.
고려사 태묘 예지에 기록된 배향공신 중 개국공신에도 임명된 신하는 시호에 개국(開國) 미칭이 붙어있다. 박양유 또한 시호에 개국이 붙어 있어 그가 고려 개국에도 일조했음을 알 수 있다.
3. 역임 관작
[1] 좌복야, 우복야 두 자리가 있다. 좌우복야 위에 상서령이 있지만 명예직이기 때문에 좌우복야가 최고 실권 관리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