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량(고려)
1. 개요
고려왕조 초기의 문관. 광종, 경종, 성종 세 임금을 섬겼으며 성종의 큰 신임을 받았다. 경주 최씨 호족으로 최승로와는 먼 친척이다.
2. 상세
광종대왕이 시작한 과거로 뽑혀 커리어를 시작했다. 박사 직위를 얻어 학문에 힘쓸 수 있었는데 당시 왕실의 일원이던 왕치와 매우 친했다. 광종이 붕어하고 경종 헌화왕이 즉위, 후사 왕송이 너무 어려 왕치에게 자리를 넘겨 대방(大邦)을 맡기니, 그가 바로 성종 문의대왕이다. 성종은 왕족 시절 눈여겨 봤던 최량을 기용해 대간 직을 맡겨 정치를 논하고, 자신의 숙위를 맡기고, 높은 재상의 자리에 앉혀 뜻을 펼칠 수 있게 하였다.
최량은 후 거란과의 전쟁에서 하군사로 북방에 가기도 했고, 조정의 고위 관직에 앉아 국정을 총괄하기도 했다. 민관 장관이 되어 호적 및 정부 지출 관리를 담당하기도 했고 사관의 장관이 되기도 했다.
994년, 최량은 성종의 선지(宣旨)[1] 를 받들어 '갈양사혜거국사비'를 제작했다. 이 때의 직위는 내사문하평장사(內史門下平章事)[2] - 감수국사(監修國史)[3] - 태자소사(太子少師)[4] 이다.
성종이 재위 중이던 995년 4월에 죽었고, 성종은 매우 슬퍼하며 그의 가족에게 곡식, 한약재를 하사하고 태자태사[5] 에 추증해주었다. 후 계속 추증되어 품계 삼중대광, 명예직 태사 및 내사령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광빈공으로 목종이 성종의 묘정에 배향했다.
3. 역임 관작
[1] 황제, 천자의 명령을 통틀어서 선지, 성지(聖旨)라고 한다.[2] 내사성의 차관.[3] 사관(史館)의 장관. 사관은 실록 제작 담당 부서이다. 사관(史官)들의 장관인셈.[4] 태자의 자문객.[5] 태자의 스승. 당시 태자는 없었지만 후계자 개령군 목종이 있었음으로 목종의 스승으로 추증된 것이다.[6] 임금에게 간쟁하며 시사를 논의하던 부서.[7] 정원은 2명으로 좌산, 우산 기상시가 있었다.[8] 실록 및 국사 기록을 담당한 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