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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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의 제5대 임금. 묘호는 경종(景宗), 시호는 헌화대왕(獻和大王). 휘는 주(伷), 자는 장민(長民). 광종 대성대왕의 장남이자 공인된 후계자였다. 모후는 대목왕후.
고려의 후삼국 통일 후 태어난 첫 번째 임금으로 20살에 즉위해 26살에 요절한 청년 군주였다. 마음이 굳세지 못했고 음주가무를 좋아했지만 정종, 광종의 대숙청으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 속에 빠진 조정을 안정화시키고 전시과를 시행하는 등의 치적을 남겼다. 경종은 광종의 숙청 기간과 성종의 발전 기간 사이에 있는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고 이 기간 동안 경종은 무난하게 정치를 펼치며 성종에게 바통을 넘겨주었다.
2. 묘호와 시호, 별칭
후계자 성종이 올린 공식 묘호는 경종(景宗)이다.
경종의 시호는 여러 고려국왕들이 그렇듯 두 버전이 있다.
- 고려사 경종 세가 총서 기준:
- 지인성목명혜헌화대왕(至仁成穆明惠獻和大王)
- 고려사 경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
- 공의정효순희명혜성목헌화대왕(恭懿靖孝順熙明惠成穆獻和大王)
시호 헌화(獻和) 중 헌(獻) 자를 돌림으로 경종의 네 왕후는 모두 헌 자 돌림 시호를 받았다.[6]
경종 재위 7년차에 만들어진 '지곡사진관선사비'엔 경종이 영주(英主), 고려는 대방(大邦)으로 등장한다.
3. 생애
아버지 광종의 호족 숙청 작업으로 인해 차기 후계자라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 이유는 광종이 호족들이 태자를 등에 업고 난을 일으킬까봐 두려워한 탓에 항상 태자를 의심하고 경계하여 야단을 쳤기 때문. 그럼에도 숙청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경종이 광종의 살아있는 유일한 아들[7] 이었기 때문이었기도 하지만 어머니인 대목왕후 덕분으로도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최승로는 시무 28조에서 "경종께서는 깊은 궁궐에서 태어나 아녀자의 손에서 자라서 궁궐 문 밖의 일에 대해서는 일찍이 알지 못하였으나 다만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였기 때문에 후회와 과실을 면하고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녀자의 손에 자랐다는 것은 어머니나 외가 쪽 세력의 보호 아래서 자랐음을 의미한다.[8] 천성이 총명하였으므로 후회와 과실을 면했다는 부분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무사히 왕위를 계승했음을 은유하고 있다. 한편 975년 광종이 향년 51세의 보령에 붕어함으로써 왕위를 이어받았다.
선왕이 피를 너무 많이 묻혔고 자신 역시 늘 위협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탓에 공포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목숨을 잃은 혼란상 때문에 사회 전체가 그야말로 원한이 판을 쳤던 탓인지 몰라도 경종이 임금이 되자마자 한 일은 사회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호족과의 화합 정책을 펼치는 것이었다. 호족 출신의 왕선을 집정(재상)으로 채용하고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효자 표창도 많이 하는 등 백성들에게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였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왕선이 건의한 법안, 그러니까 호족들에게 합법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법안인 복수법을 통과시키면서 사단이 났다. 경종이 이 법안을 통과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사실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경종이 효도를 강조했던 성향을 가진 것으로 보건데 진짜 복수법이 옳다 생각하고 이 법을 승인했을 여지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광종 시절 득세했던 세력들이 모조리 버로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볼 때 이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나중에 가면 왕선과 호족 세력이 이를 악용하는 문제가 생겼고 이 와중에 경종의 삼촌들[9] 이 이 법에 얽혀 살해당하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된다.
최승로는 경종 시대에 복수법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후생[10] 들이라서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라고 까면서도 두 왕자에 대해서만은 "광종도 연좌시켜 처벌하지 않고 관용한 사람들"이었다며 살아있었다면 족히 왕실의 웃어른 노릇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자뭇 아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다만 광종이 이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은 것은 이들의 뒷배경이었던 천안시와 진천군이 광종의 외가였던 충주시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광종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도 있다.[출처]
이렇게 복수법의 폐단이 우후죽순 번지자 이를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경종에 의해 입안자인 왕선은 파직된 뒤 지방으로 쫓겨났고[11] 이후 사적인 복수를 행한 사람들을 모두 처벌하는 동시에 복수법을 없애버렸다. 이 정책으로 인해 다음 왕인 성종 시대에 등장한 최승로가 쓴 시무 28조에서 까이게 된다.
그러나 경종은 이후에 전시과를 실행하여 관료들의 급여 체제를 확립[12] 시켰는데 이는 조선 시대까지 쓰이게 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 그러면서 광종 시절에 자리잡은 과거 제도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면서 꽤 안정적인 정치를 펼쳐나갔다.
하지만 말년에는 주색과 바둑에만 몰두하며 정사를 돌보는 것을 소홀히 했는데 이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는 광종 시절의 공포 정치와 그 이후로 끊임없이 반복된 호족들 사이의 정쟁, 그리고 복수법의 참상으로 인해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 똑같이 정치에 환멸을 느껴서 노는 소년이 된 만력제와도 얼추 비슷한 부분.
과인(寡人)은 사조(四朝)[13]
의 위대함을 이어 삼한(三韓)의 패도(霸圖)를 이어받으니 산천토전(山川土田)을 지키게 되었다.종묘사직(宗廟社稷)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매일 걱정하며 사니 7년의 시간이 지났다. 근로(勤勞)로 인해 질병(疾疹)에 걸리니 부담을 놓아 정신을 편하게 하고, 거룩함을 전해 아름다운 자에게 넘기고자 한다.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치(治)는 나라의 현명한 친척이며 내(予)가 아끼는 자다. 그는 반드시 조종(祖宗)의 대업(大業)을 받들고 국가(國家)의 창기(昌基)[14]
를 보호할 것이다.''''''아! 너희(爾) 공경재신(公卿宰臣)들아, 내 개제(介弟)[15]
를 존경하고 보호하라. 우리(我) 대방(大邦)[16] 을 영원히 빛나게 하라.'''과인(寡人)이 늘 예경(禮經)을 보니 '남자는 부인(婦人)의 손을 잡고 죽지 않는다'라 했으니 늘 이를 보고 감탄하였다. 그리하여 금일(今日) 좌우빈(左右嬪)을 물러가게 했으니 혹시나 대기를 맞이하더라도 한스럽게 여길게 뭐가 있겠는가?
제사의 일정은 한제(漢制)에 맞춰 1일을 1달로 계산하라. 원릉(園陵)의 제도(制度)는 검약(儉約)하게 하라.
서경(西京),안남(安南),등주(登州) 등(等) 제도(諸道)는 진수(鎭守)해야 할 임무(任)가 있으니 궐(闕)로 달려 오지 말고 각지에서 애도하라. 3일 안에 상복을 벗게 하고 나머진 사군(嗣君)[17]
이 알아서 하라.
붕어 1달 전인 981년 6월에 병이 들었고 다음 달인 7월에 도학군자로 이름이 높았던 사촌동생 정윤 개령군 왕치에게 자신의 뒤를 이으라는 유조를 남긴 뒤 26세라는 무척 젊은 보령[18] 에 붕어했다.王溫良仁惠, 不好遊戲. 末年, 厭倦萬機, 日事娛樂, 沈溺聲色. 且好圍碁, 昵近小人, 踈遠君子, 由是, 政敎衰替.
왕은 성품이 따뜻하고 어질었으며 놀이 따위를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말년에는 정치에 염증을 내어 매일 오락을 일삼고 주색에 탐닉했다. 또 바둑을 좋아하며 소인들을 가까이 하고 군자들을 멀리하니 이에 정치와 교화가 점점 쇠퇴해졌다.
《고려사》
4. 평가
분명 복수법이라는 실책을 저질렀고 말년에는 정사를 멀리하며 주색에 탐닉하는 등 놀고 먹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후대의 평가가 생각보다 괜찮은 편이며 불우한 유년기로 인해 그를 동정하는 여론도 꽤 많다. 전시과라는 훌륭한 제도를 성립시켰다는 점을 볼 때 꽤 유능한 군주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경종의 뒤를 이은 성종 대부터 고려는 본격적으로 안정된 왕조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목종 때의 일을 예견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후계자가 버젓이 있었음에도 나이가 어려서 왕위 계승 분쟁을 우려한 것인지 사촌이자 매부인 성종에게 왕위를 넘겨줬는데 성종은 지방 제도와 여러 업적을 남기고 결과야 어찌되었든 고려 행정 체계의 기초를 닦고 유학 중심의 정치 체제 확립에 노력을 기울이는 등 경종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스스로 증명해보였다.
5. 가족 관계
왕후 관계가 그야말로 족내혼의 극치를 달린다. 왕후 넷 모두 사촌관계일 것으로 추정된다.
1번째 왕후는 헌숙왕후 김씨로 신라 경순왕의 딸로 경종의 외사촌일 확률이 높다. 2번째 왕후는 헌의왕후 유씨로, 경종의 삼촌인 문원대왕의 딸로 경종의 사촌이 된다.
제3비와 제4비는 자신의 작은아버지이자 외삼촌되는 대종의 딸들이다. 제3비는 '''천추태후'''로 유명한 헌애왕후로 경종의 유일한 아들 '''목종'''을 낳았다.[19] 제4비는 헌정왕후. 경종이 빨리 승하한 탓에 언니와 동생이 여러모로 남자 문제로 물의를 빚었다.
후궁인 대명궁부인 유씨는 자신의 고모 흥방궁주와 태조와 제6비 정덕왕후 유씨 사이에서 태어난 원장태자의 딸이다.
6. 기타
6.1. 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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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북도 개성특급시[20] 에 있는 고려 경종과 헌숙왕후가 안장된 영릉. 북한 치하의 고려왕릉들 중에서는 보존 상태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21]
6.2. 연호 사용?
고려 경종이 태평(太平)이란 연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근거는 금석문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경기도 하남시 선법사에 있는 보물 981호 마애약사여래불의 명문(銘文)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하지만 경종의 독자적인 연호인지의 여부에는 다소 논란이 있다. 당시에 고려는 송나라와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고서 연호도 갖다 썼는데 당시 송나라 황제인 송태종의 연호가 '''태평흥국(太平興國)'''이었기 때문에 자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참고로 송태종의 태평흥국 연호는 976년 12월부터 썼기 때문에, 977년은 '''태평흥국 2년'''이다.
太 平 二 年 丁 丑 七 月 二 十 九 日 古 石 佛 在 如 賜 乙 重 脩 爲 今 上 皇 帝 萬 歲 願 。'''태평 2년'''(977년) 정축년 7월 29일 여사을에 계시는 옛 석불을 금상이신 황제를 위해 중수하오니 만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선법사 마애약사여래불 명문(銘文).
7.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제국의 아침에서는 아역 김민우가 연기했다. 대목왕후의 외가에서 보살피다가 평주 호족들의 반란으로 억울하게 누명을 씌우고 광종으로부터 사약을 내린다고 하였다. 하지만 신료들의 간곡한 목소리와 대목왕후의 자결 위협으로 태자를 동궁에 유폐시켰다가 후에 사면하여 태자에 책봉되었다.
천추태후(드라마)에서는 최철호가 열연. 강한 인상을 남기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22]
다만 이 광증(狂症)은 매우 과장된 것이다. 최철호는 이 당시 광기어린 모습과 이에 대비되는 아들에 대한 절절한 부성애 연기를 선보이며 큰 호평을 받고 굵직한 조연급에서 이후 내조의 여왕과 열혈 장사꾼 등 드라마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하게 된다. 하지만 바로 다음해 여성 폭행 논란 사건 이후 다시 조연급으로 추락하고 말았다.왜 이리 풍악 소리가 작은 게냐? 오늘은 즐거운 날이 아니더냐? 근심 걱정 다 떨치고, 마시고 취하는 날이란 말이다!
'''풍악! 풍악! 풍악! 풍악을 더 크게 울려라! 풍악! 풍악...! 하하하... 풍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