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이천 서씨 3대 배향공신
정민공 서필
장위공 서희
원숙공 서눌
고려국 내사문하성 내사령
고려국 태사
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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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장위공(章威公)[1]
삼사
태사(太師)[2]
직위
내사령(內司令)[3]
본관
이천 서씨
이름
희(熙)
아명
염윤(廉允)[4]
아들
서눌(徐訥, 적자)
서주행(徐周行, 서얼)
서유걸(徐維傑)[5]
아버지
서필
생몰연도
942년 ~ 998년 8월 8일
《고려사》 서희 열전
1. 개요
2. 성장과 여요전쟁 초기
3. 역사에 남은 외교 담판
4. 강직한 재상
5. 그 후의 이야기
6. 평가
7. 그 외
8. 대중 매체에서
9.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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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성종 대의 문신. 고려 외교관의 대명사쯤 되는 인물로 신라김춘추,[6] 조선최명길, 이예[7] 등과 함께 한국 외교사를 대표하는 인물 중 1명이다. 외교관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실제 서희는 외교관뿐만 아니라 재상까지 지낸 장기적인 안목을 지닌 전략가이자 원칙과 책임 의식을 지닌 정치인이기도 했다.

2. 성장과 여요전쟁 초기


여요전쟁 이전 서희의 관직
향직 품계
좌승(佐丞)[8]
향직 품계는 태조가 만든 정식 품계로 성종 대까지 사용되다가 문산계로 교체되면서 명예직으로 밀려났다. 서희 때는 아직 정식이다.
직위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

내의시랑(內議侍郞)

병관어사(兵官御事)
병관어사는 병관의 장관이다. 병관은 지금의 국방부이다.
내사시랑(內史侍郞)
내사시랑은 당시 최고 정부기관 내사성[9]의 차관이다.
서희의 북송 관직
검교직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걸쳤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병부상서는 병부의 장관이다. 병부는 지금의 국방부. 즉 서희는 북송의 명예 국방부장관인 셈.
포스 넘치는 철혈 군주 광종 앞에서도 바른 말을 잘했던 강직한 재상 서필의 아들이다.[10] 서희는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전전하였고 982년 북송으로 가서 단절된 국교[11]를 회복하고 돌아왔다. 이 때 송태조는 서희의 품격을 보고 감탄하여 '검교(檢校) 병부상서'라는 정3품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12]
소손녕 침입 당시 임시 편성된 북계 군단
상군사(上軍士)
중군사(中軍士)
하군사(下軍士)
시중(侍中) 박양유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
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고려)
기타 지휘관
제도(諸道) 병마제정사(兵馬齊正使)
993년에 거란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중군사 자격으로 북방에 참전했다(1차 여요전쟁). 이 때 소손녕은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 군사가 80만 대군이라고 선전하며 항복하라고 고려 조정을 협박하였는데 고려는 항복하자는 의견으로 모았다. 항복 방식을 두고 그냥 화친하자는 화친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요나라에 떼어준 후 화친하는 할지론으로 갈렸다.
사실 80만 대군은 뻥이었다. 당시 소손녕의 군대는 많아봤자 6만명을 넘기 힘들었다는 것이 오늘날의 추측이다. 당시 거란의 원정은 도통(都統) 이상이 지휘하는 원정과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으로 크게 구분이 가능한데 도통이 지휘하는 원정군은 15만명 이상인 경우가 많았으나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원정은 최대 6만명 정도였다. 소손녕의 당시 직책은 동경(東京)[13] 유수로 도통이 아니었으니 소손녕이 지휘할 수 있는 병졸의 수는 최대 6만명이거나 그보다 적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허풍이 먹혔던 것은 최전방 봉산성에서 윤서안(尹庶顔)의 선봉대가 이 병력에게 크게 패했기 때문이다. 고려가 동원할 수 있는 병졸의 수는 6만명보다 많았지만 전투 가능한 병력을 동원하고 집결시키는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데 시간을 벌어주는데 실패했다. 전투 이후 고려가 파견한 사신 이몽전(李蒙戩)에게 소손녕이 다짜고짜 "무조건 항복이나 하라"고 큰소리를 쳐댄 통에 고려 정부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14]

거란의 동경으로부터 우리 안북부(安北府)까지의 수백 리 땅은 모두 생여진(生女眞)이 살던 곳인데, 광종께서 그것을 빼앗아 가주(嘉州)[15]

· 송성(松城) 등의 성을 쌓은 것입니다. 지금 거란이 내침한 뜻은 이 두 성을 차지하려는 것에 불과한데 그들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겠다고 떠벌이니 실제로는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의 군세가 강성한 것만을 보고 급히 서경 이북 땅을 할양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게다가 삼각산(三角山)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인데[16] 저들이 끝없이 욕심을 부려 자꾸만 땅을 떼어달라 하면 우리 국토를 모조리 줄 수 있겠습니까? 적에게 국토를 할양하는 것은 만세(萬世)의 치욕이니, 바라옵건대 주상께서 도성으로 돌아가시고 신들에게 한 번 그들과 싸워보게 한 뒤에 다시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겠습니다.

《고려사》 제94권 〈열전 7: 서희〉

그러다가 서경 이북을 할양하는 할지론으로 논의가 굳어져 서경의 곡식백성들에게 나눠주거나 버리고 있었다. 이 때 소손녕의 의도를 파악한 서희는 할지론을 강력히 반대하여 이를 막았고 곡식을 버리는 짓을 멈추게 했다. 사실 군신들이 사태를 조금만 더 냉정하게 파악했다면 소손녕의 군대가 80만명일 수 없다는 것 쯤은 쉽사리 눈치챌 수 있었다. 80만명이나 되는 병력은 당장 병참을 유지하기가 어려워 장기전에 돌입하면 부대가 무너지기 십상이었다. 이렇듯 오랫동안 군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전쟁속전속결로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여야 했는데 수 양제가 113만명을 동원하였던 고구려 원정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손녕이 고려로 넘어와서 벌인 전투는 몇 되지 않는다. 이 점을 감안하면 80만명치고는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의심을 해야 옳았다.
이후 안융진 전투에서 중랑장 유방대도수가 거란군을 막아내자 조정은 할지론에서 강화론으로 돌아섰다. 안융진 전투 이후 더이상 공세적 군사 행동이 어렵게 된 소손녕이 줄기차게 회담을 요구하자 서희는 단신으로 거란 진영에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벌이게 되었다.
이 때 성종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누가 거란 진영으로 가서 언변으로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라고 물었는데 아무도 응답하고 나서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서희가 홀로 일어나서 "신이 비록 불민하나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이를 기특하게 여긴 성종은 강가까지 나가서 서희의 손을 잡으며 서희를 전송했다.

3. 역사에 남은 외교 담판


여요전쟁 참고.

4. 강직한 재상


여요전쟁 이후 서희의 관직
삼사
태보(太保)
태보, 태부, 태사 순으로 태사가 제일 높다.
직위
평장사(平章事)
내사시랑에서 바뀐 직명.
내사령(內史令)
내사령은 명목상 내사성의 최고위 직위다. 명예직으로 고위 왕족, 공신들에게 임명했다.

자꾸 서희를 우리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외교관이 아니라 국정 설계자였어요. 이건 다른 거에요. 앞으로 있을 모든 (거란과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공을 세운 사람은 서희에요. 거란 전쟁을 대비해서 우리가 싸울 수 있는 전략적 토대를 만들어 놓은 것. 그래서 위대한 국정 지휘자지,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를 내밀게 아니라고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6부 고려 vs 거란 전쟁 1편. ##

서희는 유명한 담판으로만 대중적으로 알려져서 '최고의 외교관' 정도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외교에만 뛰어났던 인물은 아니었다.[17]
한 번은 성종과 함께 해주에 갔는데 성종이 서희가 묵는 장막에 들어오려고 하자 서희는 "신의 장막은 존귀하신 왕께서 들어오실 만한 장소가 아닙니다"라고 거절했고 또 성종이 술을 가져오라고 명하자 서희는 "신이 가진 술은 임금께 드릴 만한 술이 못 됩니다"라며 술을 가져가지 않았다. 결국 성종이 직접 어주를 가져다가 천막 밖에서 서희와 술을 마셔야 했다.
그리고 공빈령 벼슬에 있던 정우현이라는 사람이 정치에 관한 일곱 가지 문제에 대해 논평한 글을 성종에게 올렸는데 이 글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성종은 재상들을 모아 "이거 좀 건방시러워서 손 좀 보고 싶은데 어때?" 라고 물었고 재상들 역시 왕의 의견에 찬성했는데 서희는 홀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간관의 간언이 직분상 제한이 없었는데 어찌 처벌하겠습니까? 저는 졸렬한 자질을 가지고 부당하게도 재상의 지위에 앉아서 직책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관직이 낮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교화에 대한 잘못을 논하게 하였으니 모두가 저의 잘못입니다. 정우현의 견해는 실로 적절하니 마땅히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고려사》 제94권 〈열전 7 : 서희〉

성종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정우현을 오히려 감찰어사로 등용했고 정신을 차리게 해 준 서희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서희의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을 보여주는 일화. 국제 정세 파악 능력과 전략적 안목의 소유자였던 데 더해 이런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까지 갖춘 강직한 관료였기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강화 사신으로 담판하러 갔고 거란군 진지에서도 담대한 행동과 함께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5. 그 후의 이야기


어쨌든 회담 이후 이 지역을 요새화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너무 무리한 탓인지 성종 15년부터 자리에 눕게 되었고 개국사라는 절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성종은 직접 문병을 가고 서희의 쾌유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997년에 되려 성종이 먼저 승하했고, 서희는 성종이 죽은 이듬해인 998년에 57세로 사망.
아들인 서눌(徐訥)도 재상 자리에 올라서 이 집안은 살아서는 3대가 재상을 지낸 빵빵한 집안이 되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왕과 함께 종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리고 서눌의 딸은 현종의 6비 원목왕후인데, 자식은 두지 못했다.

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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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시에 있는 서희 동상
여요전쟁 승리의 포석을 마련한 국정 설계자이자 전략가로 많은 사람들이 외교관으로 평가하지만 사실상 대 거란 전쟁의 가장 큰 밑그림을 제시한건 서희다. 마찬가지로 장량도 유방에게 앞으로의 세상에 대한 밑그림을 제시했단 점에서 대 거란 전쟁에 한해서는 장량에 비견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보통 거란의 1차 침입을 물리친 인물로 등장하지만, 위의 임용한 교수가 언급했듯이 사실상 대(對)거란 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1등 공신이라 할 만한 인물이 바로 서희다. 이후의 거란 전쟁 동안 양규강감찬 같은 명장들의 활약이 컸지만 서희가 이 지역을 요새화하지 않았더라면 이들도 제대로 활약할 수 없었을 것이고, 거란 전쟁 동안 개경이 몇 번이고 함락되었을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훌륭한 외교관의 대명사로 손꼽힐 만큼 협상과 언변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장기적인 전략적 안목과 대국을 보는 시야를 갖춘 탁월한 전략가이자 명재상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는 외교관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이긴 하지만, 서희에 대해 그저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만 내세우는 것은 어쩌면 서희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18]

세상은 한갓 에 구준과 부필[19]

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나 고려에 서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시 서희의 계책이 아니었다면 절령 이북의 땅을 어찌 보존할 수 있었겠는가?

《여사제강》[20]

권3 성종기 계사 성종 12년

조선 시대 선비들이 심심해서 그때까지의 역사 인물 모두를 인재풀로 하는 드림팀 내각 설정 놀이를 할 때, 항상 외교를 담당하는 예조판서 자리에는 서희를 넣었다고 한다.[21] 서울 서초구 서초2동 외교안보 연구원에도 그의 흉상이 있다. 대한민국 외교관의 롤 모델인 셈.
이런 사람이다 보니 거꾸로 중국 학계에서 서희를 대하는 입장은 다소 박하고 싸늘하다. 동북공정과 관련해서, 서희가 고려를 고구려의 후계라고 소손녕에게 일갈한 것을 두고 "일개 장군 나부랭이가 뭘 알기나 하고 떠든 말이었겠냐"며, 소손녕이 서희의 말에 반박을 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린 것은 전략적인 퇴각[22] 내지는 소손녕의 실수이고, 서희가 고려가 곧 고구려다 운운한 것은 서희의 허풍 내지 거짓말이라고까지 몰아세우기도.[23] 하지만 송 태조도 서희를 보고 그의 인품을 칭찬하면서 검교병부상서(정3품) 관직을 주었고 중국의 송사, 고려도경에서 일관되게 "고려는 원래 고구려다"라고 적고 있다는 점을 보면 이는 꽤나 악의적인 평가라고 볼 수 있다.[24] 사실 거란 전쟁 이후 국력이 강해진 고려가 송나라와의 외교에서 온갖 재미를 보자 소동파 같은 인물이 고려를 대차게 깠던 걸 감안하면...

7. 그 외


  •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협상'에 관하여 단골로 나오는 인물이다.
  • 서희는 무관직을 제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장군이 아니다. 서희가 받은 병관어사(兵官御事)는 상서성 소속의 문관직이며 여요전쟁 당시 받은 중군사(中軍使) 직은 고려가 임시 군단을 조성한 뒤 비상설직으로 봉하는 지휘관 정도의 직위라 정식 무신 직위에 임명된 적이 없다. 고려시대 군권은 문신들에게 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겼다고 본다.[25] 1980년대 ~ 1990년대에 나온 역사 만화 등을 보면 서희는 갑옷을 입은 장군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아직도 여주에 있는 서희 묘 안내판에도 '서희 장군묘'라고 쓰여 있다.
  • 2003년 4월, 이라크의 재건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한 공병 부대인 '서희 부대'는 그의 이름을 땄다.
  • 서희의 후손들도 여러 이야기를 남겼다. 제주도 설화에 서희의 5대손인 서린이 제주 판관으로 부임해 왔는데 그 지역에는 100년 묵은 구렁이가 판을 쳐 사람들이 매년 그 구렁이에게 마을의 처녀들을 바치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서린이 군졸들을 이끌고 구렁이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구렁이를 죽였다고 한다. 이에 무당이 어떤 일이 있어도 뒤돌아 보지 말라고 했고 서린 역시 뒤를 보지 않고 달리다가 제주성 동문에서 자신의 부하가 소리치자 뒤를 돌아보다가 말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고작 19세 때의 일. 뱀 날에는 이 사람의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서린이 마을 산적이나 도적을 토벌하다가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
  • KBO 리그 역사상 첫 단일 시즌 200안타를 친 서건창이 서희의 후손이다.

8. 대중 매체에서


이 시대를 다루는 드라마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거의 등장이 없지만 제국의 아침 드라마와 괴작이라고 불리는 천추태후에서 등장한다. 배역은 한범희와 임혁. 제국의 아침 드라마에서는 막바지에 등장하며, 천추태후 드라마에서누 천추태후의 편이지만 그녀를 따라 반란을 일으키거나 하지는 않는다. 배우 임혁이 맡은 배역들이 다 그렇듯이 굉장히 강직하게 나온다.

9. 같이보기


[1] 고려사 기록, 사후 목종이 추시. 고려사절요엔 창위공(彰威公)이라 되있음.[2] 사후 덕종이 추증.[3] 생전 직위가 이어져 추증됨.[4] 서희의 '자'라고 적은 서적도 있는데, 고려사 서희전의 원문을 보면 '소자(小字)'라고 적혀 있다. 이 단어는 어린 시절의 이름을 뜻하는 한자어다.[5] 서공 묘지명 기록.[6] 만주 때문에 김춘추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한국인이 아닌 신라인으로서의 김춘추는 무결점의 외교관이자 영웅이었다.[7] 조선 초기에 활약한 정치인 겸 외교관. 중인 출신이었으나 왜구의 침입 때 군수를 끝까지 따라가 그 충성심을 인정받아 중인 신분에 벗어났다. 세종 대에 대일 외교의 최전선에서 큰 활약을 했으며 조선과 일본 양국의 문물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예도 서희와 함께 국립외교원동상이 같이 세워져 있다.[8] 3품 2등위 품계.[9] 부서명은 내의성 → 내사성중서문하성 순으로 바뀌었다.[10] 서필은 당시 광종이 귀화외국인들 (ex : 후주 출신의 쌍기)에게 땅을 주기 위해 신하들의 토지를 빼앗자 '어차피 뺏길 테니 그냥 미리 제 집을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인물이다. 동시에 과거제 같은 광종의 개혁 정책에 찬성하며 적극적으로 서포트하는 등 광종의 최측근이기도 했다..[11] 10년 전에 송나라가 건국되자 송나라는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했는데 송나라 사신이 항로로 고려로 향하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어서 실패했다.[12] 동아시아 전근대 국가에서 다른 나라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는 경우가 다 그렇듯 역시 명예직이다. '검교'라는 수식어가 원래 명예직임을 표시하기 위해 붙는 것. 하지만 이러한 처우는 그만큼 서희를 예우했다는 뜻이다.[13] 일본 도쿄가 아니라 거란의 5경 중 하나인 요양부(遼陽府)를 말한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요녕성)의 지급시인 랴오양시(요양시)로 남아 있다. 고구려요동을 편입하고 요동성을 설치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현재는 지력(地力)이 떨어져 농업이 쇠퇴하고 산업 발전도 정체된 지역이다. 공업화가 일본 제국만주국 시절에 이루어졌던 동네라 중화인민공화국의 동부 해안 지역이 경제 개발할 동안 쇠퇴해버린 것.[14] 당시 거란군은 대부분 기병이었다. 보통 전근대에 기병은 보병 10명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기에 6만명이었다한들 고려 조정은 60만 군대가 쳐들어온 것 같은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15] 지금의 평안북도 운전군 가산[16] 여기에는 당장 고려의 수도인 개경도 포함된다(!).[17] 사실 서희의 아버지 서필도 광종의 숙청에 직언을 날린 강직한 재상이었다. 그리고 과거제 등등 여러가지 개혁 정책에선 찬성을 표했던 인물이기도 하다.[18] 이렇게 한 가지 이미지에 고착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는 비슷한 예로 정몽주가 있는데, 정몽주 역시 지나치게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라는 이미지에 치우쳐 있는 나머지 제도 개혁을 위해 노력했거나 왜구에 포로로 잡힌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한 명재상이라는 면이나 왜구 토벌에서 활약했다는 등의 능력과 업적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19] 북송의 재상들로 거란의 침입과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다. 구준송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맞자 겁을 먹은 진종을 설득해서 진종을 친정하게 만든 재상이고, 부필 역시 거란과의 외교에서 활약한 인물이다.[20] 조선 현종 때 학자인 유계가 지은 고려 시대 역사서. 동국통감에도 동일하다.[21] 그리고 병조 판서 자리에는 항상 이순신이 들어갔다고... 1999년 말기에도 사람들을 상대로 비슷한 설문 조사 설정 놀이가 있었는데, 외교 장관에는 서희, 대한민국 대통령에는 세종대왕,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에는 이순신이 뽑혔다.[22]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23] 딱 일본에서 안용복을 대하는 시선이 어떠한가를 생각하면 된다.[24] 출처 : 박용운 <고려의 고구려 계승에 대한 종합적 검토>[25] 강감찬윤관, 김부식도 마찬가지. 이들 중 윤관은 지군국중사(知軍國重使)라는 별도의 임시 직위를 받았기에 임시 무관 정도로 볼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