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종(고려)

 


고려 제7대 대왕
穆宗 宣讓大王
목종 선양대왕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묘호
민종(愍宗) → 목종(穆宗)
시호
정공극영위혜효사선양대왕
(靖恭克英威惠孝思宣讓大王)[1]
군호
개령군(開寧君)
작위
양국공(讓國公)
절일
장령절(長寧節)
성씨
왕(王)

송(誦)

효신(孝伸)
왕후
선정왕후(宣正王后)
부왕
경종(景宗) 헌화대왕(獻和大王)
모후
헌애왕후(獻哀王后)
능호
공릉(恭陵) → 의릉(義陵)
사망지
고려국(高麗國) 개경(開京) 개성부(開城府) 적성현(積城縣)[2]
생몰연도
음력
980년 5월 20일 ~ 1009년 2월 3일
양력
980년 7월 5일 ~ 1009년 3월 2일 (28세)
재위기간
음력
997년 10월 27일 ~ 1009년 2월 3일
양력
997년 11월 29일 ~ 1009년 3월 2일 (12년)
1. 소개
3. 생애
3.1. 초중기의 업적
3.1.1. 서경 우대
3.1.2. 국가 체계 관련
3.1.3. 인재 등용
3.1.4. 불교 정책
3.1.5. 외교 정책
3.1.6. 국방 정책
3.1.7. 민생 정책
3.1.8. 신하들에 대한 대우
3.1.9. 기타 긍정적인 일화
3.2. 몰락과 비극적인 최후
4. 평가
5. 가족관계
6. 이야기거리
6.1. 동성애
6.2. 한라산 분화
7. 대중매체에서
7.1. 드라마 천추태후
8.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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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 왕조 제7대 임금. 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대왕(宣讓大王). 능호는 의릉(義陵). 휘는 송(誦), 자는 효신(孝伸). 경종천추태후의 아들. 왕자 시절의 군호는 개령군(開寧君)이다.
고려 역사상 처음이자 공식적으로 신하에 의해 폐위되고 시해당한 군주이다.[3] 동성애 의혹+폐위 후 시해당한 왕으로 신라 혜공왕과도 비슷한 의혹이 있다.
태조 왕건 사후 고려 광종에게서 이어진 광종계 왕통의 마지막 국왕이다. 이후 고려 왕은 제34대 공양왕까지 전부가 안종 왕욱의 혈통이다.

2. 시호, 묘호, 능호


목종은 고려 왕사에서 1번째로 시해당한 군주이다. 그를 시해한 강조(康兆)는 죽은 군주의 묘호를 민종(愍宗), 시호를 선령대왕(宣靈大王)이라 하였다. 이어 능호를 공릉(恭陵)이라고 자기 맘대로 태묘에 올렸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처음 강조가 올린 묘호, 시호, 능호는 영 좋지 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묘호 민종(愍宗)의 민은 근심할 민 자고 시호였던 선령(宣靈)은 베풀 선 자까지는 좋다.[4] 근데 뒤 령 자는 시법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후한 영제 등 나약한 암군에게 주어졌던 시호였기에 강조는 묘호와 시호 모두 좋지 않게 올린 것이다. 능호마저 공릉(恭陵), 공손하다 할 때의 공으로 그다지 좋지 않은 능호였다.
후계자 현종이 고쳐 올린 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선양대왕(宣讓大王)이다. 묘호는 나름 괜찮은 한자다. 시호가 의미심장한데 앞의 베풀 선 자는 유지했지만 뒤 영 자를 사양할 양 자로 바꾸었다. 즉 목종이 현종에게 양위했다는 의미의 시호인 것이다. 강조 때문에 어정쩡한 상태로 즉위하게 된 현종의 고심이 엿보이는 부분.
이후 시호가 계속 추봉되어 공식 존호는 목종(穆宗) 정공극영위혜효사선양대왕(靖恭克英威惠孝思宣讓大王). 능호도 의로울 의 자를 써서 의릉(義陵)으로 바꾸었다.

3. 생애


고려의 역대 왕위 후계자
왕치(정윤)

왕송

왕흠(왕태자)
고려의 역대 개령군
대수
작호
이름
초대
정윤(正胤) 개령군(開寧君)
왕치(王治)
2대
개령군(開寧君)
왕송(王誦)

성종 재위 9년(990년) 12월, 교(敎)하다.

"주(周)가 인적(麟趾)[5]

들을 봉(封)하여 번병(藩屛)[6]을 예우해준 것과 한(漢)이 제후를 봉한 제(制)는 종지(宗支)[7]를 의(義)로써 대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대명(大命)[8]

을 사방(四方)에 펼쳐 본지(本支)[9]를 백세(百世)동안 전했다. 나(予) 또한 성공한 전례를 당연히 따를 것이다.

숭덕궁(崇德宮)[10]

의 적남(嫡男) 송(誦)은, 태조영손(太祖令孫)이자 과인(寡人)의 유자(猶子)[11]이다.

어려서 부터 바름(正)을 길러냈고 빼어난 재주를 가졌다. 덕을 키우는데있어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니 이미 성인의 그릇(成人之器)을 가졌다.

옛 일을 떠올리고 되뇌이니 친족을 아끼는 것은 백세(百世)의 양규(良規)이고 어린 친족을 보다듬는 것은 오상(五常)의 아지(雅旨)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감히 소봉(疏封)[12]

함을 아낄 수 있겠는가? 곧 아름다움을 펼칠 것이라 믿고 오늘을 시작으로 은혜를 내리겠다.

지금 공관어사(工官御事) 지도성사(知都省事) 박양유(朴良柔)와 사부전중감(使副殿中監) 조광(趙光) 등을 보내 지절(持節)과 예(禮)를 갖추어 널(爾) 개령군(開寧君)으로 책봉한다.

나라를 자신의 집으로 삼고 효(孝)를 바꾸어 충(忠)으로 삼으라. 군신(君臣)을 부자(父子)의 규범으로 대하고 위엄과 의례를 잃지 말라. 예(禮), 악(樂), 시(詩), 서(書)의 가르침을 배우고 열심히 살라.

사치해지지 말고 주색을 탐하지 말라. 씨앗을 심고 거두는 것의 어려움을 알고 조정을 보조해야 한다.

존경하라! 진중하라! 내 명령을 저버리지 말라."

고려사 성종 세가 중 발췌. 서경 본궐에서 후계자를 공인하다.

왕송은 경종 재위 5년 차에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1년만에 붕어해버린 탓에 어머니 헌애왕후와 함께 숭덕궁에서 살게 되었다.
왕송은 10살이 되던 날에 재위 중이던 삼촌 성종을 따라 서도(西都)에 행차한다. 성종은 장락궁에 도착한 뒤에 자신의 조카인 왕송을 한 때 본인의 군호였던 '개령군(開寧君)'을 물려주어 그가 자신의 뒤를 이을 것이라고 천명했다.[13][14]
현화사비 기록에는 993년, 목종이 13살 때 헌정왕후붕어(崩御)하자 성종은 잠룡(潛龍)[15] 목종을 시켜 제사를 대리하게 했다. 아마 누나의 제사를 통해 2대 개령군의 입지를 다져 놓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목종은 삼사청(三司廳)[16] 안에 빈소를 차리고 제궁빈비(諸宮嬪妃)[17]와 문호양반(文虎兩班)[18]을 이끌고 금봉문(金鳳門)[19] 앞에서 발상(發喪)했다고 한다.
그리고 5년 뒤에 왕송은 17살의 보령으로 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3.1. 초중기의 업적


초기에는 제법 의욕적인 면모로 정사를 돌봤는데 어머니 천추태후섭정을 맡았다는 기록을 통해 목종이 이룬 업적들의 전부 또는 대부분이 사실 그녀의 업적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20] 다만 실제로 강조의 정변을 보면 천추태후는 종교 정책을 제외하면 그냥 아들을 좀 도운 수준일뿐 실권은 목종이 다 쥐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목종의 업적이 맞다고 볼 수 있을 듯.[21] 하지만 의욕적인 종교 정책과 친인척들을 동원해 목종의 즉위를 돕는 등 천추태후도 아들에게 꽤 도움을 주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3.1.1. 서경 우대


목종은 본래 서경과 인연이 깊었는데 본래 성종(고려)의 명칭이었던 '개령군'이라는 군호를 이어 받았다. 다시 말해서 목종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로 임명된 장소가 바로 서경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연 탓인지 목종은 즉위하자마자 서경을 호경(鎬京)으로 개칭하는 한편 서경의 관부도 태조 대의 낭관으로 환원시켰으며 자주 행차하여 제사까지 지냈다. 뿐만 아니라 서경에 대한 조세 감면과 사면 조치도 여러 번 내렸고 서경 관리들과 군인들을 진급시키거나 포상했으며 서경 안의 노인들과 과부들에게 물건이나 명예직을 내리는 등 후히 대접했고 오랫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50세 이상의 남자들에게 모두 벼슬을 내리는 등 재위 기간 내내 서경을 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3.1.2. 국가 체계 관련


왕의 모친 황보씨(皇甫氏)를 왕태후(王太后)로 승격시켜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라는 존호를 올렸다.[22] 왕의 생일을 장령절(長寧節)로 명명했고 선왕과 선후(先后)들의 휘호(徽號)를 덧붙였으며 해당 관청에 선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법식을 확정지었다. 과거법(科擧法)을 정비해 확정지었고 필요없다고 판단되는 직책과 지방관들을 심사하여 정리하였으며 3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훈호를 내리고 9품 이상으로 벼슬한지 만 20년이 된 자는 개정된 관복을 착용하게 했다.

3.1.3. 인재 등용


즉위하자마자 성종의 붕어로 인해 진사(進士)가 되었음에도 등용이 지체되었던 사람들을 급제시켰다. 그리고 매해 꾸준히 인재를 등용하여 확인되는 숫자만 해도 약 250여 명이고 이름이 확인되는 경우만 해도 주인걸(周仁傑), 강주재(姜周載), 송굉(宋翃), 박원휘(朴元徽), 황주량(黃周亮), 최충(崔冲), 주저(周佇)[23], 조원(趙元)[24], 손원선(孫元仙) 등이 있다. 1006년에는 6품 이상의 문관들에게 유능한 사람들을 각각 1명씩 추천하게 하여 사실 여부에 따라 추천자에게 상벌을 내리는 조치를 공표한다.

3.1.4. 불교 정책


즉위하자마자 승려들의 계급을 1등급씩 올려주었고 개경 남쪽에 진관사(眞觀寺)를 지어 태후의 원찰로 삼았으며 몇 년 후에는 그 절에 9층탑을 쌓았다. 숭교사(崇敎寺)를 창건해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1006년에는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승려로서 대덕(大德)[25] 이상에게는 법호를 덧붙여주었고 환갑을 넘은 승려들은 차등을 두어 승직을 올려 주었다.

3.1.5. 외교 정책


즉위 직후 합문사(閤門使) 왕동영(王同穎)을 거란(契丹)에 보내 왕위를 계승한 사실을 알렸고 거란에서도 수 차례 사신을 보내 목종의 작위를 높이는 등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이부시랑(吏部侍郞) 주인소(朱仁紹)를 송에 보내서 '우리나라는 중국의 풍속을 사모하는데 거란에게 위협당해 방해를 받고 있다.'고 하는 등 송나라요나라 양국 사이에서 무난한 외교를 전개한다.

3.1.6. 국방 정책


전시과를 개정하고 덕주(德州)[26], 평로진(平虜鎭)[27], 등주(登州)[28], 귀성(龜城)[29], 용진진(龍津鎭)[30], 흥화진(興化鎭)[31], 익령(翼嶺)[32], 울진현(蔚珍縣)[33] 통주(通州)[34] 등 많은 곳에 성을 쌓았을뿐만 아니라 1003년에는 새로 쌓은 덕주성을 포함하여 가주(嘉州), 위화(威化), 광화(光化)의 성들을 보수하였다. 새로 쌓은 많은 성들이 훗날 여요전쟁에서 주요 전장이 된 것을 고려하면 매우 현명한 조치였다. 또한 많은 공사들로 군사들이 힘들어하자 육위(六衛)의 부대에 소속된 군사들에게는 잡역을 면제해주는 등 사기 저하를 막으려고 노력했고 동여진의 침공에도 장수를 보내 대응하였다.

3.1.7. 민생 정책


즉위하자마자 국내 산천의 신령들에게 모두 훈호를 붙였고[35] 행차가 지난 주와 현은 1년치의 전조(田租)를 감면하였다.[36] 1006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의 조세와 공물을 탕감하고 창고의 곡식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빌려준다. 경주 사람 융대(融大)가 보낸 노비들을 사실 양민인 줄 알면서도 받은 평장사 한인경(韓藺卿)과 이부시랑(吏部侍郞) 김낙(金諾)을 유배보내고 마찬가지로 노비를 받은 궁인(宮人) 김씨(金氏)에게는 구리 100근으로 벌금을 내게 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를 듣고 경하하였다.

3.1.8. 신하들에 대한 대우


자신을 호종하거나 자신의 행차가 지난 주와 현의 관리들에게 잔치를 열어주며 물건을 하사하고 진급시키기도 하고 여러 군과 현의 호장(戶長)으로 70세가 된 자를 안일호장(安逸戶長)으로 삼아 직전을 내려 대우한다. 1차 여요전쟁에서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으로 유명한 서희가 57세의 나이로 죽자 예를 갖춰 장사지내고 후한 부의와 창위(彰威)란 시호를 내린 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하시중(門下侍中) 한언공(韓彦恭)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그의 본관인 중원부(中原府)[37]에 행차했을 때 그 곳을 단주(湍州)로 승격시킨다. 그가 병에 들자 의원과 약을 보내주고 온천에 가서 목욕하게 하면서 타고 갈 수레도 보냈으며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줄 것을 각 주현에 명하고 왕실에서 쓰는 말 세 필을 내려 쾌차를 기도하는 제물로 쓰게 한다. 그러나 결국 그가 죽자 서희 때와 마찬가지로 후한 부의와 정신(貞信)이란 시호를 내리고 내사령(內史令)을 증직하여 예를 갖춰 장사지냈다.

3.1.9. 기타 긍정적인 일화


일본에서 도요미도(道要彌刀) 등 20호가 와서 의탁하자 이들을 이천군에 정착시켰다. 5품 이상의 중앙 관리들에게 나랏일을 지적하게 하여 폭넓은 의견을 경청했을뿐 아니라 화폐 제도가 실익은 적고 백성들의 불편은 가중된다는 한언공의 상소를 받아들여 다점이나 주점 등 일부에서만 화폐 사용을 강제하도록 제도를 완화하였다.

3.2. 몰락과 비극적인 최후


여기까지만 보면 괜찮은 군주의 무난한 행보로 보여진다. 그러나 나름대로 정치를 잘 해나가던 목종의 불행은 섭정을 맡은 그의 어머니 천추태후가 초래했다. 천추태후는 목종이 섭정이 필요가 없는 나이임에도 섭정을 맡으며 권력을 장악했고[38] 오래 전 함께 통정하다가 자신의 친오빠 성종에 의해 쫓겨났던 김치양을 다시 궁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맺고 권력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목종은 이를 저지하기는 커녕 이것의 스트레스화 되어 엉뚱한 곳에 빠졌는데, 그 것이 동성애였고 덩달아 유행간과 남색 관계를 맺고 그를 권신으로 키워 국정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마침내 천추태후가 김치양의 아들을 낳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급기야 그 둘은 자신들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음모까지 꾸미며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당시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였던 대량원군까지 제거하려고 했다. 이에 목종은 대량원군을 불러들여 확실히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 계획을 세우고 이내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를 개경으로 불러들였지만 도리어 그에 의해 폐위당해 어머니 천추태후와 함께 유배를 가던 도중 적성현[39]에서 그가 보낸 추격자들에 의해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고 만다. 자세한 이야기는 강조의 정변 항목을 참조할 것.

4. 평가


예로부터 목종에 대해서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전횡을 막지 못한 무능한 군주라는 부정적 시선이 강했으며 이제현은 목종의 비극에 대해서 '목종의 불행은 국가적으로는 다행이었다.'고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목종이 과연 나약한 군주였는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데 자세한 것은 강조의 정변 항목에서 '의문점' 항목을 참조할 것.

5. 가족관계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목종

경종
광종
태조
신명순성왕태후
대목왕후
태조
신정왕태후
헌애왕후

대종
태조
신정왕태후
선의왕후
태조
정덕왕후
고려 초기에는 고려 태조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근친혼을 많이 했기에 이 사람의 조부모는 모두 형제자매였으며 외할아버지랑 친할머니는 아예 친남매였다. 즉, 이 사람의 증조부는 친가, 외가 모두 고려 태조 단 1명 뿐이다. 족내혼을 안 하는 경우에는 4명이 돼야 하나 이 4방향의 증조 할아버지가 모두 1명인 것. 사촌이자 아내인 선정왕후와 자녀를 갖지 못했다.

6. 이야기거리



6.1. 동성애


한국사에서 명시적으로 처음 등장하는 동성애 성향을 지닌 임금이기도 하다.[40]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에게는 도통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아내도 선정왕후(宣正王后) 유씨 1명[41] 뿐이었거니와 슬하에 자식도 없었으며 이 때문인지 젊은 나이에 후사를 걱정하는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왕으로 있는 동안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사내들을 곁에 끼고 살다시피했다.
『고려사』열전의 유행간 편에서는 목종은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였던 유행간을 매우 아껴서 용양(龍陽)의 관계까지 맺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용양이란 것은 소위 말해 남색(男色), 동성연애를 하였다는 의미이다. 이후 유행간은 목종의 측근이 되어 별다른 공이나 재주가 없으면서도 합문사인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라 목종의 곁에서 정사를 좌지우지했는데 성품이 오만해서 신하들을 깔봤으며 고개와 눈짓으로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또한 유행간이 소개한 발해 유민 출신인 유충정 역시 별다른 이유 없이 목종의 총애를 받아서 유행간과 더불어 목종의 곁에 붙어다니면서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는데 유충정 또한 목종의 동성 연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은 있지만 유행간과는 달리 목종과 유충정이 동성애를 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유행간은 강조의 정변 이후 국정을 농단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으나 유충정은 어떻게 되었는지 불확실하다.[42] 목종이 죽고 20여 년 뒤인 1030년 발해부흥운동 세력인 흥료국에서 고려에 지원을 부탁할 때 유충정의 이름이 다시 언급되는데 단순히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름이 한자까지 같고[43] 발해계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목종의 실각 이후 발해 땅으로 가서 발해부흥운동에 몸담았을 여지도 있다. 이렇게 보면 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인물. 가끔 유충정이 신체가 뛰어난 탓에 유행간의 소개를 받아 목종의 총애를 받았다는 말이 돌아다니고 있으나 사실 사료적인 근거는 없다.

6.2. 한라산 분화


한국사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제주도 한라산이 분화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002년 6월에는 5일간의 분화가 있었고 1007년에는 일주일간 분화가 일어나 산이 솟아 올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5년(1002년) 6월. 탐라산(耽羅山) 네 곳에 구멍이 나면서 붉은 물이 솟아나더니 닷새만에 그쳤으며 그 물은 모두 와석(瓦石)이 되었다.

10년(1007년)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에 상서로운 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났기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전공지(田拱之)를 보내 살펴보게 했더니 탐라(耽羅)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산이 처음 솟아나올 때에 구름과 안개로 어두컴컴했으며 땅이 진동하여 우레가 치는 것 같았습니다. 이레 밤낮 만에야 비로소 걷히니 산의 높이는 백장(丈)이 넘고 둘레는 40리(里)가 넘었으며 초목은 없고 연기가 그 위를 덮고 있어 바라보면 석류황(石硫黃)과 같기에 사람들이 두려운 나머지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전공지(田拱之)가 직접 산 아래까지 가서 그 모습을 그려서 바쳤다.

고려사』 권55, 지제9, 오행(五行)3 산붕

이 기록을 끝으로 한라산은 분화기록이 없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간간히 지진 기록이 나오는 것이 전부. 그래서 한때 휴화산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4년부터는 한라산 내부에 마그마방이 여러개 존재하는 것이 확인 되면서 다시 활화산으로 지정, 관리에 들어가고 있다.

7. 대중매체에서



7.1. 드라마 천추태후


[image]
드라마 천추태후에서의 목종
천추태후(드라마)에는 주인공의 아들인 만큼 비중있게 등장. 배우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광해군을 연기했고, 이후 근초고왕에서 아직기, 추노에서 봉림대군 역을 맡은 배우 이인. 그런데 이 극에서는 목종이 실제 이룩한 업적을 모두 천추태후에게 빼앗겨 버리고 본인은 대단히 의욕 없는 임금으로 전락해버렸다.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많이 닮은 편인데다 성종이 아기 때부터 그를 천추태후와 떼어놓았고 이로 인해 사실상 성종의 아들로 성장했기에 한 달에 한 번 볼까말까인데다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주변 환경과 성향이 다른 친어머니를 꽤나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쨌든 어머니를 싫어하지는 않지만 어머니 옆에 있는 김치양을 매우 싫어해서 그리고 왕의 자리가 싫어서 김치양과 왕위에 관련해서는 어머니에게 매우 대들었으나 그나마 사촌 동생인 대량원군과는 친한 편이다. 처음에는 마치 고자처럼 등장하더니 결국 유행간과의 동성 연애도 재현되었다. # 일단 부인이나 후반 갑툭튀한 김씨나 유행간과 할 수 있었던 걸로 봐서 고자는 아니니 다행이다. 그리고 김치양의 반란 즈음해서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부인과 어머니를 극진히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팬들 사이에서는 다중인격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그야말로 안습.

8. 관련 항목


[1] 고려사 목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2] 현 경기도 파주시다. 당시엔 수도 개성부에 속한 속현이었다.[3] 혜종이나 정종도 시해당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목종이 최초 사례이다.[4] 그러나 묘호는 기본적으로 찬양의 의미를 담은 한자를 쓰기 때문에 민이라는 단어는 전혀 좋은 묘호가 아니다. [5] 기린의 친족, 즉 왕실의 일원들을 의미.[6] 제후국의 별칭. 한국사에선 보덕국신라의 번병을 자처했다.[7] 역시 왕실을 의미.[8] 임금의 천명(天命).[9] 국가, 왕조의 다른 말.[10] 목종의 어머니인 헌애왕후의 관저.[11] 조카를 의미하는 고대 한자어.[12] 봉토(봉)를 내려줌(소).[13] 봉지로 하사된 개령은 현 대한민국 경상북도 김천이다.[14] 성종이 서경에서 후계자를 공인한 것처럼 예종도 서경에서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 했지만 김인존이 반대하여 개경에서 했다고 한다.[15] 현화사비 원문 기록이다. 임금이 왕위에 오르기 전 상태를 의미한다.[16] 삼사 부서의 관사. 삼사는 정부의 재정을 담당했다.[17] 고려는 후비나 여성 왕족들에게 궁(宮), 전(殿), 원(院)을 하사하여 작위로 봉했다. 그래서 '제궁의 비빈들'이라 한 것이다.[18] 조정의 문신과 무신들. 원문 기록으로 혜종(고려)의 이름 무(武)를 피휘했다.[19] 발해 상경성과 조선 경복궁에도 금봉문이 있었다.[20] 사극인 천추태후도 이러한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21] 현대에서는 17세가 미성년 고교생이지만 과거에는 15세에 관례식을 하여 성인으로 보았다.[22] 흔히 천추태후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23] 송나라 온주(溫州)에서 고려에 건너와 의탁했다고 한다.[24] 귀주대첩으로 대표되는 3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 1만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은 인물이다.[25] 고승 중 최하위 등급[26] 現 평남 덕천[27] 現 평북 영변[28] 現 함남 안변군[29] 現 평북 귀성군[30] 現 함남 정평군[31] 現 평북 의주군[32] 現 강원 양양군[33] 現 경북 울진군[34] 現 평북 선천군[35] 불교가 도입된지 오래되었으나 토착 신앙도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이는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조치로 추측된다.[36] 군주의 행차가 지나가는 지역은 여러가지 준비를 해야 돼서 힘들었다. 흔히 군주가 사냥을 자주 나가면 백성들이 힘들어했다는 이유도 같은 이유이다. 수양제의 경우 그가 행차했던 지역에는 죽은 이들이 널렸다고 하며 건륭제 또한 할아버지 강희제에 비해 여러 지역을 행차하며 지나치게 경비를 쓴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37] 現 충북 충주[38] 대부분 섭정자는 임금이 성인이 되면 섭정을 거둔다.[39] 지금의 파주시 적성면.[40] 신라 제36대 혜공왕도 "본래 여자로 태어나야 했으나 억지로 남자로 태어나게 한 탓에 행동이 여성스러웠다"는 식의 기록이 적혀있긴 하지만 삼국유사불교 설화적 뉘앙스가 짙은 기록이고 뉘앙스가 그렇다는거지 구체적으로 동성애 성향을 서술하지는 않고 있다. 따져보면 혜공왕의 경우 동성애자가 아닌 트랜스젠더로 볼 여지도 충분한 편이다. 트랜스여성은 자신의 성정체성여성으로 생각하기에 남성을 좋아할 경우 성적 지향이 이성애자인 것이다.[41] 물론 첩이지만 요석댁궁인 김씨도 있기는 하다.[42] 일단 목종이 궁궐에서 도망쳐 나올 때 유충정이 옆에서 보좌했다. 그리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유충정을 목종, 유행간을 죽일 때 같이 죽였다고 썼지만 고려사 원문에는 유행간 등 7명을 죽였다(殺行簡等七人)라고만 했지 유충정도 죽였다고 명시하지는 않았다.[43] 유충정이란 동명이인은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 한국의 주요 역사서를 통틀어 더이상 나오지 않을 정도라서 흔한 이름이라고 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