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붕제

 

白鵬濟
1910년 ~ ?
친일 관료, 변호사. 본관은 수원(水原).[1] 백인제의 동생, 백낙청의 아버지다.
1910년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 남양동[2]#에서 태어났다. 일본 마쓰야마(松山) 고등학교[3]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및 행정과 양과에 합격했다.[4]
경상북도 내무부에서 커리어를 시작하여 군수를 거쳐 이사관으로 승진했다. 해방 당시 35세의 나이에 전라남도 내무부 사회 과장까지 승진했다.
일제강점기 관료로 재직 중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군수품 공출, 국방 헌금 모금 등 전시 업무를 수행하여 '지나 사변 공적 조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관료 부문에 수록되었다.[5]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경기도 재무 부장에 임명되어 재직하다 변호사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형 백인제와 함께 납북되어 이후 행적은 미상(未詳)이다. 가족들에 증언에 따르면 형 백인제 박사가 북한군서울에 들어올 때 피신했다가 잡혀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가겠다"고 하여 7월 19일에 집에 잠시 들렀는데, 그때 북한군이 집에 숨어 있던 백붕제를 발견하고 형제를 같이 끌고 간 것이라고 한다.
15세에 안숙온(당시 18세)과 혼인하였으나 2년 뒤 안숙온은 장남을 낳고 6개월만에 병사하였다. 후에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최귀란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장남 백낙환은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백부 백인제의 의업을 이어 받아[6] 인제대학교를 설립하고 인제 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차남은 백낙청이다. 4남 백낙서는 미국 윌리엄스 대학교를 나와 통일원 기획 관리 실장과 인제대 교수를 지냈다. 3녀 백미영은 서울대 음대를 나온 피아니스트로 단국대 교수를 지냈다.


[1] 인주공파(仁州公派) 26세손 ◯제(濟) 항렬[2] 수원 백씨 집성촌이다.[3] 이 당시 고등학교는 대학 예과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구제고등학교 참조. 마쓰야마 고등학교는 현재 에히메대학의 전신이다.[4] 지금으로 치면 사법시험행정고시에 모두 합격한 것에 해당된다.[5] 과거 편집에 자작 작위를 받았다는 서술이 있는데, 친일파 708인 명단 - 조선귀족명단 및 친일인명사전 수작/습작 명단에 수작했다는 기록이나 근거가 없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물려받은 경우(습작)를 제외하고 새로 수작한 이는 이항구가 유일한데 그는 이완용의 아들(!)이며 작위도 가장 낮은 남작이다. 일개 관료가 군수지원 업무로 대대손손 세습되는 귀족 작위를 받는 일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다. 자세한 것은 조선귀족 문서를 참조할 것.[6] 생후 6개월에 친모가 사망할 당시 아버지 백붕제는 17세에 불과했다. 할아버지가 맡아서 키우다가 이후 백부 백인제의 슬하에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