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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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樂晴
1938년 1월 10일 ~ (86세)
소개 웹사이트
1. 개요
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 정치 평론가.
출판사 창작과비평사의 발간인으로 유명하다. 1962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순수문학을 비판하고, 민족문학, 참여문학을 주창하며, 이에 대한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고, 나아가 이를 세력화하여 대한민국 문학계의 주류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제시한 민족 문학론, 분단 문학론은 대한민국 문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반독재, 반미 운동 등 사회 운동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직접 작품을 쓰는 문학가가 아닌 문학 평론가에 불과하지만 현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원로'''', ''''정신적 지주'''' 대우를 받으며 '문화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또한 정치 평론, 논쟁 등에 참여하고 선거 때 후보 단일화를 주도하는 등 정치권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2. 생애
친가는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었지만, 1938년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친일 관료 백붕제였다. 아버지가 고위 친일 공직자였기 때문에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
1955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브라운 대학교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어학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어 고등학교 때 이미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경기고 재학 중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 주최하는 세계 고교생 토론 대회에 한국 대표로 선발되어 참가한 바 있다.
해당 영상은 1954년 당시 방송에 출연한 모습을 담고 있다.
브라운 대학교 졸업 당시 전체 졸업생을 대표하여 졸업 연설을 하였고,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영문과에 진학했다. 석사를 마친 후 일시 귀국하여 군 복무를 마쳤는데, 명문가 자손,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라는 남다른 배경 외에도 자진 입대한 것 때문에 지식인 사회에서 주목을 받았다. 유학이 합법적 군 기피 수단이었던 시절에 입대를 위해 귀국한 그의 사연은 1960년 한 일간지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1962년 24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강사로 부임했고 얼마 후 서울대 전임 강사[1] 가 되었다.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 1월 당시 27세로 서울대 전임 강사이던 때에 공평동 태을다방 옆 문우 출판사 한 켠을 빌어 창작과비평 1호를 펴냈다. 130여쪽에 불과한 얇은 잡지에서 그는 순수문학을 “지배 계급의 오락과 실리에 이바지”하는 도구라고 폄훼, 비판하면서,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서민의 고통을 대변하며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것이 문학과 지식인의 소명임을 선언했다. 그는 문인을 시대를 이끄는 지식인으로, 문학을 민중의 현실을 보듬는 손길이라고 주창했다.
그 후 '창작과비평' 편집인으로서 진보적 평론 활동으로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창비는 당시의 시대적, 정치적 정황과 맞물려 민주화를 열망하던 지식인 사회의 통로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아르놀트 하우저가 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완역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 진보 문학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1974년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해직되었다가 1980년 복직되었다.
1974년 11월 고은과 함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 실천 문인 협의회' 결성을 주도했다. 자유 실천 문인 협의회는 우리나라 진보, 참여 문학계를 대표하는 단체로 자리잡았으며, 1987년 '민족 문학 작가 회의'로 확대 개편되었고 2007년 '한국 작가 회의'로 또다시 명칭을 바꾸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백낙청은 꾸준히 참여하면서 이사장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백낙청은 자신이 발행하는 창비와 작가회의 활동을 통해서 참여문학, 민중 문학계의 대표주자로 고은을 띄워주기 시작한다. 백낙청은 당시 성추문으로 얼룩져 있던 고은의 과오를 철저히 묻어둔 채 고은을 ''''우리 문학사의 우뚝한 존재, 미당 서정주를 쉽게 넘어선다.''''고 찬양하여 고은을 한국 문학계를 대표하는 문학가로 만들었다.[2]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창비가 고수해온 민중ㆍ민족문학 기조는 거의 무너졌다고 보는 게 대체적 시각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선거 때마다 진보 지식인 사회를 대표하여 민주 개혁 진영 후보단일화를 주문한 것에 대해서도, 민주 개혁 진영이 보수 성향의 국민들로부터 오히려 외면을 받게 만든 것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일부 정치인들은 "선출되지도 않은 권력인 이른바 '진보 원로'가 왜 민주적 정당성도 없이 뒤에서 정치인들을 배후 조종하느냐"란 이의 제기를 하기도 하였다. 특히나 부친과 백부가 납북된 처지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 보수로부터 받는 비판보다 진보로부터 받는 비판이 더 크다. 후보 단일화로 진보 진영을 민주당계의 '민주 개혁' 세력의 종속물로 만들고, 계급적 좌파 정치 세력보다 우파 정치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2002년 국내유일의 시청자 참여방송인 재단법인 시민방송 RTV의 이사장역할을 맡았다.(2007년까지)
2003년 교수직을 정년 퇴임하였고 현재는 명예교수이다.
정년 퇴임 이후에도 민족 문학론의 관점에서 통일운동 등의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그는 '연방제 통일론'을 적극적으로 설파하여 ''''연방제 전도사''''라고 불린다.[3]
2005년 6.15 공동 선언실천 남측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06년에는 북핵문제에 관해서 미국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안전 보장을 해주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북한의 주장을 미국이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06년 노무현 정부 말기에 진보 계열에서 조차도 노무현 정부가 실패라는 비판이 이어지자, 노무현 개인의 스타일 때문이라는 투로 이야기했다. 그는 "참여정부에 모든 책임 있는건 아니다. 책임은 참여 정부에도 분명히 있고, 진보개혁세력에도 있고 보수적인 거대 야당이나 거대 언론에도 골고루 있다. 참여 정부의 책임 중에서도 정부의 정책 실패와 대통령 통치 스타일에 관한 부분 등을 구별해야 한다. (국민 지지도 하락에) 정부의 정책 실패도 있고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국민의 지지를 잃게 한 면도 분명히 있다"라고 말했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때 범여권 후보 단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2010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 진영의 후보 단일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곽노현 후보로 단일화를 이끌었다.
2010년 천안함이 폭침하자 적극적으로 나서서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지금까지 나온 정부 발표는 모두 엉터리라고 주장했다. 또 정부가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안함의 침몰은 북한의 어뢰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남북 대결 상태를 원하는 어떤 세력들이 침몰시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정일이 지시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김정일 위원장이 그러한 정치적 결정을 내렸을 리가 없다며 일축했다. 천안함 사건 민군 합동 조사 결과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이 나고 이명박 대통령의 담화가 발표되자 “이번 대통령 담화는 거의 초법적인 조치였다. (중략)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내놓은 7·7 선언 이래 남북 관계 22년의 성과를 단번에 없애버리는 것이다. 동시에 남북 관계의 발전과 맞물려 진행되어온 '''한국 민주주의를 다 뒤엎을 수 있는 엄청난 행위'''다. (중략) 박정희는 말하자면 일시불로 정변을 일으켰고, 전두환은 12.12와 5.17의 2회 할부로 헌정 질서를 뒤집었다. 이번 정권은 군사 쿠데타를 안하는 대신 5년 장기 할부제로 야금야금 대한민국의 헌정 질서를 변질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라면서 일종의 쿠데타에 비유하며 극렬히 반발했다. 백낙청은 이후 각종 강연과 인터뷰에서 지속적으로 천안함 폭침의 진실 규명을 촉구했다.
특히 2015년에는 신경숙의 표절 사건과 관련하여 많은 문인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표절인데도 '의도적 표절로 볼 수 없다.'며 무리하게 실드를 쳐주다가 역풍을 맞은 것.[4]
2015년 11월 25일 창비 편집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아직도 창비 지분 31.1%를 보유한 최대 주주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데다 새 발행인, 주간, 부주간을 맡게 될 차세대 인사의 상당수가 그와 사제 관계 등으로 엮여 있기 때문에, 아직도 창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그 후 공적인 자리에 등장하지 않았다 2020년 7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자살하자 시민대표로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3. 가족 관계
백부가 백병원으로 유명한 백인제이다. 형은 인제대학교를 설립한 백낙환[5] 이다.
먼 친척으론 시인 백석[6] 과 백선엽, 백종원이 있다.
원불교 여성회 초대 회장 및 사단 법인 한울안 운동의 대표를 맡은 한지현 前 광운대 교수가 부인이다. [7]
백영경[8]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교수가 백낙청의 딸인데, 창비 편집 위원직도 맡고 있다.
장남 백웅재[9] 는 미식 평론가 및 전통주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4. 비판
군사정권의 서슬퍼런 칼날 속에서 저항한 공이 있으나 그런 그에게도 과가 존재한다. 가장 큰 과는 성추행을 일삼기로 악명이 자자했음에도 거짓말로 일관한 고은 시인을 한국 문단의 원로 위치에 올리고 과감하게 내치지 않은 것이다. 그가 어떤 연유로 고은의 성폭행 문제를 고발하지 않고 묵인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권력이 없었더라면 일개 파계승 시인에 지나지 않을 고은을 한국 문단이 미투 운동이 시작될 때까지 고발하지 못하게 한 것은 최종적으로 그가 묵인했기 때문이다. 고은의 성폭행 논란은 성범죄를 시작한 고은이 뒤늦게 정당한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흐지부지되었으나 백낙청에 의해 뒤틀린 한국 문단의 구조를 청렴하게 개편할 필요가 있다.
또한 북한에 대해 지나치게 미온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비판 대상이다. 북한이 (주로 안보 문제로) 논란과 사건사고를 일으킬 때마다 주로 다른 세력이 북한에 악영향을 준 것이라는 논점일탈을 고집하기만 하였다.
[1] 현재는 없어진 제도이나 사실상 정교수가 보장된 자리[2] 결국 이문열처럼 고은을 비판한 작가는 그로 인해 문인들 사이에서 왕따가 되었고 한국 문단에 백낙청과 고은을 중신으로 한 악성 파벌이 형성되어 2017년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나서야 백낙청과 고은의 오점이 재조명되었다.[3] 하지만 연방제 통일은 가능성이 거의 없다. 통일반대론 참고.[4] 이때 백낙청과 창비에 대한 비판의 선봉에 선 사람이 숙명여자대학교 국문과 권성우 교수이다. #[5] 194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 을류(의예과에 해당)에 입학하여 1951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6] 항렬로는 백석이 백낙청의 할아버지 뻘이다.[7] 백낙청 교수는 원불교 영어교전 번역을 주도하는 등 부인과 함께 원불교 내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무교지만 원불교의 가르침에 매우 호의적이다.[8] 서울대 서양 사학과 졸업. 미 존스 홉킨스대 문화 인류학 박사.[9] 서울대 중어 중문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