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진갑

 

* 정치인/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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邊鎭甲
1896년 5월 21일 ~ 1977년 7월 14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본관은 황주(黃州).
1896년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안평리[1]#에서 장성면장을 지낸 변승기(邊昇基)[2]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7년 4월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18년 용인군 서기, 1919년 함평군 서기, 1920년 장성군 서기, 1921년~1922년 장성군 속, 1923년~1925년 담양군 속, 1926년~1927년 함평군 속, 1928년 나주군 속, 1935년~1936년 전라남도 내무부 지방과 촉탁 등 일제 치하에서 관료 생활을 하였다.#
해방 직후 장성읍장을 지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장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형법에 규정되었던 낙태죄를 삭제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존치안에 밀렸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을 폭로하였다. 다만 사망자 수는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가 발표한 수보다는 조금 적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헌정동지회, 정우회 등에 속하였다가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농림위원회(현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자유당 중앙위원도 역임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라남도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1년 3.15 부정선거 가담을 이유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1963년 허정신정당에 입당하였다가 탈당하고 국민의당에 입당하였다. 같은 해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전라남도 장성군-담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박승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정치를 그만두고 고향인 장성군에서 노인들을 위해 지팡이 만드는 일에 전념하였다.

[1] 황주 변씨 집성촌이다.[2] 봉남일기의 저자 변만기(邊萬基)의 남동생으로, 그의 저서 회산일기(晦山日記) 또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99호 '장성 손룡정사 소장고문서 및 전적류' 가운데 하나이다. 1908년 장성군주사에 임명되었으며#, 대한협회·호남학회 등 애국계몽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으나, 동시에 친일 성향의 유림단체 대동학회에도 회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장성군 서기가 되어 1914년까지 근무하였고, 1919년부터 1933년까지는 장성면장을 지냈다.# 이후 1934년 퇴직하였다.# 한편, 그 동안 조선농회 전남지회 상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1916년~1917년에는 장성지방금융조합 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장성면장으로 있던 1930년과 1933년 각각 히로히토 즉위 대례기념장, 국세조사기념장을 수여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