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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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의 후궁
옥산부대빈 장씨 | 玉山府大嬪 張氏
'''
'''존호'''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1]
'''빈호'''
희빈(禧嬪)
'''출생'''
1659년(효종 10년) 11월 3일
한성부 북부 연은방 불광산계[2]
'''사망'''
1701년(숙종 27년) 11월 8일, 또는 9일[4]
(향년 42세)
한성부 창경궁 통명전 앞마당
'''사당'''
대빈궁(大嬪宮)
'''원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대빈묘
'''재위'''
'''숙원'''
1686년 ~ 1688년
'''소의'''
1688년 ~ 1689년
''''''
1689년
'''왕비'''
1689년 ~ 1694년
''''''
1694년 ~ 17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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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인동(仁同)
'''본명'''
옥정(玉貞)[27]
'''당호'''
취선당(就善堂)
'''부모'''
[28] 장형, [29] 윤씨
'''부군'''
조선 숙종
'''자녀'''
2남
(장남) 조선 경종
(차남) 대군 성수 (조졸)[30][31]

1. 개요
3. 평가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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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淑媛)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 장현은 국중(國中)의 거부로서 복창군 이정과 복선군 이남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의 옥사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곧 장현의 종질녀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12년 12월 10일

조선 숙종후궁. 경종의 생모이다. 조선 역사상 궁녀 출신으로 정실 왕비까지 올라간 유일한 여성이다.[5] 또한, 나이를 따지면 숙종 임금을 거쳐간 모든 여인들 중에서 유일하게 숙종보다 나이가 많다.[6]
본명은 장옥정(張玉貞).[7] 몇몇 사람들은 '''장희빈'''을 본명으로 잘못 알고 있다. 조선 내명부 정1품 후궁 ''(嬪)으로서 받은 작호가 '희빈'인 것이다. 게다가 하필 그녀의 오빠의 이름이 또 장희재라서 '희'자 돌림인 줄 알고 착각하기도 쉽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그녀의 외모가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조정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8][9][10][11] 오죽하면 대놓고 장희빈을 폄하하려 쓴 인현왕후전과 사씨남정기도 장희빈의 외모는 폄하하지 못했을 정도다. 이 때문인지 후대에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에서는 장희빈 역할을 맡는 배우는 무조건 당대를 대표하는 미인을 캐스팅한다. 역사적 인물을 재해석한다고 해도 미인이 아니었다는 설정을 적용하거나 미인이 아닌 배우를 캐스팅하는 경우는 없다.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그녀를 추존했기에 그녀의 정식 칭호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12]이다. 그녀를 기리는 사당도 대빈궁(大嬪宮)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묘소(대빈묘)는 왕을 낳은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원'(園)이 아니라 '묘'(墓)다. 또한 현재 대빈묘(大嬪墓)는 왕을 낳은 후궁치고는 매우 초라하다. 이는 경종이 재위 기간이 짧아 추숭할 여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는데 영조의 경우에는 오래 재위해서 자신의 생모를 추숭했다.
그녀에 관해 널리 알려진 일화로는 임금의 승은을 받은 궁녀였던 숙빈 최씨를 잔혹하게 매질했다거나 사약을 거부하며 저항하다 비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까지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공식 기록상 남겨진 악의적 행동은 폐비돼 빈으로 강등된 사유가 된 사건과 숙종과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다 인현왕후 앞에서 울며 인현왕후에게 보란듯이 전하께서 저를 희롱하신다 말을 전한 경우가 대표적이다. 기황후, 천추태후, 명성황후 혹은 서진가남풍이나 청나라서태후 등과는 반대로 나라의 쇠퇴나 멸망에 기여한 인물이 아닌데도 악녀의 전형으로 드라마화됐다. [13]

2. 생애




3. 평가


파란만장하게 살았던 여인으로 영국헨리 8세의 총애를 받다 몰락하여 죽은 앤 불린과 닮은 구석이 많다.[14] 그녀는 사극에서 단골 소재, 아니 단골 정도가 아니라 사골 수준으로 우려먹는 등장 인물로 아마 태종, 세조, 연산군, 광해군, 정조, 이순신, 김두한, 과 더불어 막상막하일 것이다. 사극 내에서도 남자 배우 최고의 배역이 이순신, 여자 배우 최고의 배역이 장희빈이다. '''한국의 여성 역사 인물 중 가장 많이 사극화된 인물.'''[15]
앤 불린이나 장희빈이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현대에 들어선 당대의 평가만큼이나 악한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실 왕조 시대에 국왕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금기였던 만큼 치세가 불만이라도 해도 국왕을 직접 비판하진 못하고 측근인 간신이나 요녀에게 비판의 화살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와 정반대격인 인물은 국왕에 같이 묻어가버린 똥별 원균이다.[16]
물론 정말로 왕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진정한 권신도 존재했지만, 실질적으로 왕이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면 충분히 억제할 수 있는 경우도 숱하게 많다. 현재 둘 다 권력을 쥐고 있는 남편, 왕에 의해 희생되었다고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희빈도 앤 불린도 알고보면 평가가 상당히 갈린다.
그녀의 일생을 다룬 사극만 해도 여러 편이며 대부분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출연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MBCKBS는 같은 시간대에 장희빈을 주인공으로 한 사극을 방송해 경쟁을 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4. 기타


  • 조선왕조의 왕비들 중에서 명성황후 민자영, 순정효황후 윤증순과 함께 이름이 알려저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다.[17]
  • 장희빈의 묘인 대빈묘에 참배하면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20대 ~ 30대 젊은 여성들에게 알려져 인기를 끌었다. 대빈묘에 절을 하거나 특정 행동 주로 춤을 추는 행동을 해서 장희빈의 기를 받으면 된다는 것인데, 2008년도경에 잠시 유행했다. 당시 기사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 한국 대표 미남 배우 중 하나인 장동건이 바로 이 장희빈과 같은 인동 장씨이다.
  • Why? 한국사 시리즈에서 주인공 중 하나인 장미소의 선조로 설정되었다. 거기다가 이 두명이 실제로 만나는 것이 그려졌다. 어떤 책에서는 아예 생각시 시절 같은 방을 쓴 룸메이트다.[18] 다른 책에서는 미소가 고모인 승은 상궁 장씨의 빽으로 입궐해 아기나인이 된다.[19]
  • 2018년 1월 1일 모바일 게임 크래시 피버 5번째 초위저드 유닛으로 나올 예정이다. 게임 스토리에선 숙종이 바람잘날 없이 사건을 일으키다 보니 이성계의 한숨이 깊어 정도전이 그녀를 숙종에게 소개 시켜줘 문제는 일단락 되었으나... 그녀의 매력에 홀려버린 숙종이 ALICE 한국 지사의 메모리 관리 권한을 그녀에게 맡긴 채 메모리 관리 지역 입구를 봉쇄하게 되어 버리는 사건이 터져버렸다. 그 사건을 막기 위해 장길산이 부대를 데려가서 막으러 가는 스토리.
  • 만화가 우양숙의 작품 중 순정만화 잡지 르네상스에 연재했던 고교 장희빈이라는 만화가 있다. 물론 실제 역사의 장희빈과는 무관하게 등장인물의 이름만 빌려 온 학원물[20]이지만 작중에 희빈과 인현왕후가 조선시대로 타임슬립해서 진짜 장희빈을 만나는 에피소드가 있기는 하다.
  •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21]와 유사점이 여럿 있다. 장희빈과 의빈 성씨는 100년(정확히는 94년) 간격으로 유사한 삶을 살았다. 정사에 기록된 건 아니지만 조선 시대 빈들 중 이름(장옥정, 성덕임)이 알려진 경우 역시 두 사람 뿐이다. 희빈 장씨와 의빈 성씨 모두 중인 출신 궁녀였으며, 각각 웃전인 장렬왕후(숙종의 증조 할머니)와 혜경궁 홍씨[22](정조의 어머니)의 예쁨을 받았다. 웃전의 처소에서 왕(숙종, 정조)을 처음 만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23] 첫 아이(경종, 문효세자) 출산 시기도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0살로 같으며[24], 둘째 아이(성수, 옹주) 출산 시기도 32살로 같다. 왕의 사랑을 받았으나 각각 43세,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사약, 병사)을 맞는다는 점에서 최후도 비슷하다.[25] 하지만 장희빈이 왕비 인현왕후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과는 달리 의빈 성씨는 왕비 효의왕후와 사이가 좋았다.[26] 또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 오를 만큼 야심 있는 성격이었던 것과는 달리 의빈 성씨는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할 만큼 욕심 없는 성격이었다. 또한 장희빈과 숙종의 이야기가 적힌 《인현왕후전》이 한글 소설이라 장희빈 역시 대중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반면, 의빈 성씨와 정조의 러브 스토리가 적힌 《어제의빈묘지명》은 굉장히 긴 한문으로 되어있어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5. 사극에서



[1] 왕을 낳은 다른 후궁들과는 다르게 시호를 받지 못하였다. 옥산부대빈은 존호(尊號)이지 시호(諡號)가 아니다.[2] 서울특별시 은평구 불광동 331(연신내) 일대. [3] 李?, 숙종한테는 할아버지뻘로, 숙종의 조부인 효종과 중종(효종의 현조부)을 공통 조상으로 하여 갈라진 이복 10촌 형제지간이다.[4] 숙종이 그녀에게 자진(自盡, 자결)을 최종적으로 명한 것이 음력 10월 8일이고, 공식적인 사망 확인은 음력으로 10월 10일이다. 다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상으로 봤을때 음력 10월 9일까지 왕가(王家)의 먼 후손인 승지 이야[3] 등이 숙종과 대면하여 왕세자를 위해서라도 희빈 장씨를 구명해달라는 건의와 상소를 연달아 하고있는 점을 봤을때 최소 음력 10월 9일까지는 그녀가 생존해있었던 듯 보이며, 그러나 실록 기록에 의하면 숙종의 언급으로 장씨가 자살했으니 너네는 장례 준비를 시작하라는 언급만 있을 뿐 정확한 사망 시점이 언급되어 있지 않아 장희빈이 정확히 언제 사망했는지는 미상, 추정으로 볼 수 밖에 없다.[5] 처음에 후궁으로 궁궐에 들어왔다가 이후에 정실 왕후로 승격된 경우는 가끔 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도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한 후 정비인 공혜왕후 한씨가 사망하자 왕비가 되었다. 얄궂게도 두 여성의 운명은 비슷하였다.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 윤씨도 간택된 후궁 출신이다. [6] 숙종은 1661년생, 인경왕후는 숙종과 동갑인 1661년생, 인현왕후는 1667년생, 희빈 장씨는 1659년생, 숙빈 최씨는 1670년생, 인원왕후는 1687년생이다. [7]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閔鎭遠)이 쓴 <단암만록(丹巖漫錄)>에 기록되어 있다.[8]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頗有容色(숙종실록 1686년 12월 10일).", "사간원의 한성우가 궁인 장씨를 염려하여 왕에게 미인을 경계하라는 상소를 올렸다(숙종실록 1686년 12월 14일).", "김창협이 장씨의 미색에 마음이 현혹되어 은총을 열어준다는 비난을 없게 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숙종실록 1686년 9월 13일)."[9]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람의 외모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 자체가 거의 없는데 임진왜란 당시 포르투갈 상인이 중국에 판 흑인 노예 출신의 용병 등 매우 특별한 경우에만 구체적인 묘사를 했다.[10] 장희빈을 제외하고서는 실록에 미인으로 기록된 사람은 양녕대군의 애첩이던 어리밖에 없다.[11] 여담이지만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의 직계 후손이 바로 그 장동건이다.[12] 본관(인동 장씨)인 인동(현 경상북도 구미시칠곡군 각 일부)의 별칭인 '옥산'에서 따왔다.[13] 장희빈의 죽음으로 남인의 몰락이 균형을 이루던 붕당의 붕괴를 초래해 조선이 쇠퇴했다는 일간의 평가도 있다.[14] 다만 그녀의 아들인 경종(조선)아라곤의 캐서린의 장녀인 메리 1세와 자주 비교된다.[15] 기생 황진이도 장희빈보다 출연빈도가 적었다. 다만 명성황후와 출연빈도가 비등비등하다.[16] 다른 간신들은 대중들이 왕이 싫어도 직접 비판할 수 없어서 대신 비판의 화살을 돌려 왕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었다면, 반대로 원균은 대중들 절대다수가 대상 인물에 대한 진심어린 혐오 때문에 직접 비판하는 것이었는데 선조가 자신에게까지 비판의 화살이 쏠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영웅화한 존재이다. 정리하자면 다른 간신들은 국왕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에 비판받는 것이었고, 원균은 국왕을 비판할 수 없기 때문에 옹호받은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왕을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왕조 시대의 기본 기조가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17] 다른 일반적인 왕비들은 원경왕후 민씨, 소헌왕후 심씨, 정순왕후 김씨 처럼 성은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18] 한국사 시리즈 주인공 3명 중 유일하게 생전 선조랑 대화했다, 강마루의 경우는 선조의 영혼이 나타났기에 생전 선조는 아니다. 하지만 신천지가 조상 신돌석을 만났다...[19] 고모라하면 아버지의 여자 형제를 일컫는 말이니 책 설정상 장희재의 딸이었을듯. [20] 실제 희빈 장씨의 본명 대신 '장희빈'을 그대로 주인공의 이름으로 쓰고 있다. 또한 장희빈의 절친이자 더블 주역에 해당하는 캐릭터는 인현왕후.[21] 정조가 20년간 사랑한 첫사랑으로 잘 알려져 있다.[22] 정조의 할아버지 홍봉한의 집의 청지기의 딸이 의빈 성씨였으며 사도세자가 사망한 해에 혜경궁 홍씨와 정조가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의 집에 잠시 머물렀으며,다시 혜경궁 홍씨가 의빈 성씨를 궁궐로 입궁시켜 양녀처럼 길렀다.[23] 사도세자가 죽은 해, 정조의 외할아버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의빈 성씨의 아버지의 영향으로 홍봉한의 집에서 처음 만났다는 설도 있다.[24] 늦은 출산에는 각각 이유가 있는데, 장희빈은 명성왕후 청풍 김씨(현종의 정비)에 의해 7년간 쫓겨나 있었기 때문이고,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 청풍 김씨(정조의 정비)가 임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15년간 승은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몇 년 동안 어떤 여인도 왕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결국 장희빈이나 의빈 성씨가 낳은 아들이 각각 숙종과 정조의 첫 아들이었으며, 세자로 책봉됐다.[25] 그렇지만 장희빈이 이후 숙빈 최씨명빈 박씨 등, 다른 후궁에게 총애를 빼앗긴 것과 달리, 의빈 성씨는 죽을 때도 임신 중이었고 죽은 후에도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26] 뿐만 아니라 장희빈이 시어머니 명성왕후나 시누이 명안공주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과는 달리, 의빈은 시어머니 혜경궁이 딸처럼 기른 궁녀였고 시누이 청연공주, 청선공주곽장양문록을 궁녀시절에 함께 필사할만큼 가까운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