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팔 가스 누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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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팔: 현재진행형 비극. 1984~2004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참사의 원인
4.1. 직접적 원인
4.3. 대규모 인명피해
5. 결과
6. 후유증
7. 이후
8. 영향
9. 창작물에서
10. 참고 자료


1. 개요



1984년 인도마디아프라데시 주 보팔에 있는 화학공장에서 유독가스가 대량으로 누출되어 발생한 '''역사상 최악의 산업재해'''. 인명피해 숫자만 보면 인류 최대의 환경 재앙이라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가뿐히 능가할 정도다. 영문으로는 아예 '''Bhopal disaster''', 즉 '''재앙'''으로 칭할 정도다. 보팔이라는 이름은 죽음, 기업과 정부의 부적절한 대처, 태만을 뜻하는 말로 남게 되었다.
피해자 수치는 다음과 같다.
  • 사고 현장에서 3787명 사망.[1]
  • 가스 누출로 후유증을 얻은 사람 1만 6천명 이상 사망.
  • 558,125명 이상의 부상자 발생.

2. 배경


유니온 카바이드 인도 현지법인(UCIL; Union Carbide India Ltd) 보팔 공장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유니온 카바이드(Union Carbide)는 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화학기업이자 부동액 프레스톤으로 유명한 기업이다. 이 기업은 인도 등 개발도상국에 다수의 공장을 두고 있었으며, 개발도상국들도 이러한 투자를 매우 반겼다. 보팔 공장은 1969년에 설립한 사고 당시 15년 된 공장으로, 인도 투자자들과 유니온 카바이드가 49.1%:50.9%로 합작투자했던 공장이었다. 당시 인도에서는 외국 기업이 지분의 51% 이상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투자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 공장은 시작부터 문제점들이 있었다. 보팔이 선택된 이유는 운송 기반시설이 좋았기 때문이지만 이 공장부지가 위치한 곳은 경공업 및 상업활동지구로 설정된 곳이지, 잠재적 위험이 있는 산업을 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공장은 원래 다른 곳에서 준비한 화학물질을 이용해 살충제를 생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비용을 절감하고 시장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원재료 역시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원재료를 생산하는 것은 '''더''' 위험한 과정이었다.
UCIL 보팔 공장은 위험물질의 유출 등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당시 기술로선 최첨단인 여러 안전 장치들을 두고 지속적으로 이를 개선해 나갔으며, 공장 입지 자체도 인구가 거의 살지 않는 황무지를 선정했다. 그러나 실제 작업 과정에서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이 공장의 안전설비와 생산 과정은 미국에서 준수하는 기준에 한참 못 미쳤는데 말이다. 1976년부터 일부 근로자들이 안전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눈치채고 사측에 항의했으나 무시당했다.
1980년대 초에는 흉년과 기근이 닥치면서 농부들이 살충제에 투자할 돈이 없어졌고, 수요도 줄어들었다. 보팔 공장은 생산량을 줄였고 UCC는 바이어를 찾아나섰다. 그리고, 1981년부터 포스겐이나 사염화탄소등 각종 독극물들이 누출되어 근로자들이 사망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당하는 등 크고 작은 재해가 잇따르면서 불길한 전조가 나타났다.

3. 전개


운명의 1984년 12월 2일 23시를 갓 넘겼을 무렵. 한 직원이 이상 현상을 발견했다. 농약 제조에 쓰이는 독성 화학물질인 아이소사이안화 메틸(methyl isocyanate; MIC)을 저장하는 610번 탱크의 온도가 갑자기 미친 듯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목격자 말에 따르면 온도를 표시하는 바늘이 '''한 바퀴 돌았다.''' MIC는 들이키면 체내의 수분과 반응해 폐에 출혈을 일으키며, 극소량이라도 인체에 노출되면 매우 심각한 반응을 초래하는 굉장히 위험한 물질이다.
당황한 공장 측은 당장 사용 가능한 모든 안전대책을 총동원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하나도 작동하지 않거나 무위에 그쳤고, 시간만 흘러갔다. 이미 MIC의 유출이 시작되고 있었던 12월 3일 00시 50분, 이미 공장 내부의 가스 농도가 심각하게 높아진 데다가 610번 탱크의 콘크리트에마저 균열이 발생해서, 보팔 공장은 비상 사이렌을 울리는 것과 동시에 전 근로자 대피명령을 하달했다.
마침내 12월 3일 새벽 2시 15분, 610번 탱크가 폭발했고, 저장되어 있던 42톤 규모의 MIC 가스가 본격적으로 유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스는 남동풍을 타고 땅바닥에 바짝 붙어 주민들의 거주지로 흘러갔고 이내 몇 분 후, 주변 마을에선 갑자기 숨쉬기가 어렵고 목과 눈이 따가운 증세가 발생하여 사람들이 단체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들 중에는 달리다가 쓰러진 사람도 있었고, 공장에서 일을 했던 직원들은 무슨 사건이 벌어졌는지 파악을 하고 차를 타고 위험지역을 빠져나간 사람도 있었다. 첫 환자가 새벽 2시에 병원에 도착하는 것을 기점으로 단 몇십 분만에 주변의 모든 병원은 마비상태에 몰렸다. 환자들은 병실에서, 복도에서, 병원 밖 길거리에 나앉아 하염없이 치료를 기다렸다. 그러나 병원 역시 상태가 열악한 데다가 병원의 의사들이 무면허인(!) 경우가 많았고, 면허가 있는 병원들마저 의사들이 가스 중독에 대한 치료법을 모르거나, 심지어 해독제마저 없는 총체적 난국이었던 까닭에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보팔의 병원과 영안실은 금세 꽉 찼다.
보팔 공장은 2시 10분 사이렌과 함께 대피 경보를 울렸으나 사람들이 대피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초대형 참사가 터지고 말았다. 가스를 들이마신 사람들은 목과 눈이 화상을 입어 타들어가고, 구토를 하고 입에 거품을 물며 끔찍하게 죽어갔다.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지옥이었다. 공포에 질린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탈출을 시도하면서 도시는 대혼돈에 휩싸였다. 이 와중에 마디아프라데시 주의 수상 아르준 싱은 주민들을 내팽개쳐두고 혼자만 살겠다고 보팔 외곽의 자기 궁전[2]으로 도망갔고, 이로 인해 고발당했다.

4. 참사의 원인



4.1. 직접적 원인


직접적인 원인은 610번 MIC 저장 탱크로 1,000~2,000갤런(약 3785~7570L)의 이 유입되었다는 것이 지목되었다. 대량의 물과 MIC의 만남은 곧 화학적 작용을 통해 급격한 온도 상승을 일으키고, 여기에 탱크내부의 이 화학작용을 촉진시키며 탱크의 폭발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화합물질은 치명적인 가스로 바뀌어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새어나갔다.
사측에서는 이 물의 유입에 대해서 직원의 사보타주로 추정만 할 뿐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으나, 노동조합 측에서는 MIC 탱크와 바로 근처에 있는 처리시설과 관련이 있음을 지적하였고, 설계 상 존재하지 않는 파이프의 존재에 대한 현지 직원들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그 외에도 저장탱크에 가해진 과도한 압력도 사고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4.2. 안전 시스템의 붕괴


그러나 이런 화학플랜트에는 이런 일에 대비해서 늘 견고한 안전 시스템을 겹겹이 갖추기 마련이며 UCIL 보팔 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안전 시스템들은 아래와 같은 이유들로 무력화되었다.
  • 가장 근원적으로 MIC 탱크와 연결되는 일부 파이프를 화학처리시설에서 끌어와서 쓰고 있었다. 그리고 화학처리시설에선 폭발의 원인인 물을 이용해 막힌 부분을 뚫어 주는 작업을 자주 하였는데,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해당 파이프라인엔 물과 MIC의 혼입을 막아 줄 방지 장치가 달려있지 않았다. 원인은 담당자가 파이프 부설이 있기 1주일 전 해고된 뒤 대체인력이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 어처구니없게도 그 방지 장치는 아주 간단한 것으로, '손바닥만한' 크기의 동그란 판이었다.
  • MIC 저장 탱크의 내부 온도를 0도로 유지시켜야 하는 냉각 시스템이 무려 5개월동안 가동되지 않았으나, 공장 근로자 중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
  • 또한 MIC 저장 탱크를 만약에 대비해 질소로 충전시켜 보호하는 장비가 있었으나,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압이 새고 있었음에도, 보고는 경영진 선에서 지속적으로 무시되고 있었다.
  • 냉각 시스템을 재가동하지 않으면서 610번 탱크의 온도 경보기도 리셋시켜 버렸다. 그래서 온도가 미칠듯이 오르는 급박한 와중에도 경보기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 냉각 시스템과 온도 경보기의 무력화에 대비하여, 유독가스가 배출될 경우 이를 자동으로 세정시켜 주는 세정기[3]도 있었으나, 1달 넘게 고장나 있었다.
  • 세정기까지 고장나는 막장 사태에 대비해 유출된 가스를 즉각 태워버리는 강력한 소각 시스템[4]이 대비하고 있었으나, 파이프가 고장나는 바람에 당시에는 작동이 불가능했었다. 실무진 측에서는 누누이 신규 파이프를 요구했으나 역시 묵살당했다.
  • 가스 유출+세정기 무력화+소각장비 무력화라는 최악의 최악, 그리고 최후의 최후를 대비하여 MIC 증기를 수용액화 시켜 확산을 막도록 소방호스를 비롯한 방수장치가 있었고 다행히 이 장치는 제대로 작동했으나, 장치가 제대로 작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와 수압이 작아 앞서 말한 소각 시스템 굴뚝까지 물이 닿지 못했다. 이 역시경영진 선까지 보고가 되었고, 본사에서도 더 큰 방수 설비가 필요함을 권고하였으나, 실질적 예산 투입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 심지어 근로자 대피명령을 하달할 때마저도 막장이었는데, 전술했다시피 근로자 대피명령은 12월 3일 새벽 0시 50분에 이루어졌지만, 이 때는 사이렌을 공장 내에서만 간략하게 울린 다음 근로자들만 대피시켰고, 공장 밖에서도 들을 수 있게 사이렌을 제대로 울린 것은 가스가 본격적으로 누출되기 직전인 새벽 2시 10분이었다.
  • 여기에 더해서 새벽 1시부터 공장 근처에 거주하는 주민과 근로자들이 가스 누출로 인해 대피하고 있다는 경관들의 보고를 받은 보팔 경찰이 1시 25분과 가스가 본격적으로 누출되기 5분 전인 새벽 2시 10분 보팔 공장에 두 번이나 문의를 했는데, 보팔 공장은 그때까지도 공장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며 사건을 은폐했다. 차라리 이때라도 경찰에 알렸다면 인명피해를 그나마 줄일 수 있었을 지 몰랐을 일. 가스 누출 사실이 경찰에 통보된 건 가스가 누출되고 몇 분 후 한 직원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이 막강한 안전 시스템이 연쇄적으로 붕괴된 이유로는, 본사 측에서는 '현지 인도인 직원들이 영어로 된 기기 매뉴얼을 몰라서 혹은 너무 복잡한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주장했으며, 노동조합 측에서는 '본사측의 운영비용 감축 압박으로 인하여 위험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안전비용을 삭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4.3. 대규모 인명피해


공장이 설립된 1969년만 해도 보팔은 매우 작은 도시였고, 공장 주변은 황무지라 인구가 얼마 없었다. 하지만 일자리가 매우 부족한 개도국들의 특성 상 큰 공장을 지으면 그 주변에 인구 밀집지대가 반드시 형성된다. 10년도 안되어 급격한 이농현상으로 공장 주변에는 근로자와 가족들이 사는 무허가 주택이 난립했고, 공장이 지어진 직후인 1970년 36만 명 가량이었던 보팔 시의 인구는 1984년 약 80만명으로 불어났다. 보팔 시는 급격히 커진 도시인 만큼 인프라가 매우 열악했고, 이런 곳에 대형 재해가 터지니 50만에 달하는 인명 피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바람이 불지 않았었더라면 유독물질이 공장에 정체되어 있어서 약간의 시간이라도 벌 수 있었겠지만, 하필이면 사고 당시 보팔 전역은 남동풍이 부는 상태여서 유독물질이 결국 주택가로 흘러가 버렸다.

5. 결과


결국 직접 사망자가 최소 3,787명, 주장되기로는 16,000명 이상(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최대 2만 명까지 늘어난다), 그리고 부상자는 55만 명 이상에 달하는 충격적인 인명 피해를 내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사망자와 부상자 중에는 특히 어린이들과 노인 등의 노약자가 많았는데 이는 이들이 잠자고 있다가 미처 대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아동들은 직접적으로 가스에 노출되기 쉬운데다 젊은이들보다 유독물질에 더 취약한 편이라...
뭐 물론 유독가스의 특성상 건장한 젊은이라고 나았던 것은 아니었다. '''살기 위해 달렸던 사람들이 더 빨리, 많이 죽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달리느라 숨이 가빠져서 보다 호흡을 많이 하고, 그 결과 가스를 더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물에 뛰어들었다가 죽은 사람도 많아 당시 보팔의 강엔 '''시신들이 물과 함께 흘렀다고 한다.'''
운 좋게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상당수는 실명 등의 중상을 입어야 했으며, 가임여성들은 이후 유산 및 기형아 출생 등으로 고생해야 했다. 인도 정부는 유가족 1가구당 고작 835달러만 지급했다. 그런데 골때리게도 이 돈마저도 '''몇 년이나 지급이 미뤄졌다.''' 당시의 인도는 브릭스로 통칭되는 경제대국도 아닌 아프리카보다 낮은 소득의 빈곤 국가였고 1984년의 인도 1인당 GDP라고 해봐야 고작 288달러였다.
즉 835달러라면 당시 인도인의 3년치 월급인 것. 2017년 기준 인도의 1인당 GDP는 1,942달러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평균 1인당 소득인 1,573달러를 여유있게 능가하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에는 현재 아프리카에서도 막장으로 취급받고 있는 콩고민주공화국이나 짐바브웨조차 1980년대에는 인도보다 1인당 GDP가 월등히 높았다. 인도의 1인당 GDP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의 1인당 GDP를 앞선 것이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고, 2010년대 중반에 들어와서야 생긴 일이다. 물론 835달러 준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겠냐만은...
더 씁쓸한 것은, 이건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거다. 2018년 5월에 우타르프라데시 주 바라나시에서 건설중인 고가도로가 붕괴해 4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사망자 보상금은 고작 50만 루피로, 한화로 850만원에 불과하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인도의 1인당 GDP가 2019년 추산으로도 2천 달러에 불과하고, 특히 인도에서도 비하르 주 다음으로 낙후되어 GDP가 1천 달러에도 채 못 미치는 우타르프라데시 주라는 것을 감안하면 말도 안되게 후려친 금액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러한 업보로 말미암아 유니온 카바이드는 제대로 망했다. 대참극을 벌여놓고도 당시 현장 책임자는 '''"인도인에게 800달러가 넘는 돈이라면 너무나도 과한 보상이다. 한 450달러만으로도 충분하다."''' 는 망언을 하여 전 인도를 분노하게 만들었는데, 이 말은 인도 전역으로 대문짝만하게 보도되었고, 일반 인도인들은 물론 힌두 극우파들까지 이 말 한 사람을 죽여버리겠다고 분노하여 그는 미국으로 서둘러 달아났지만 결국 해고됐다. 하여튼 이 망언 덕에 이 업체는 인도 전역에서 비난 대상이 되었다.
사고 소식을 들은 당시 UCIL CEO였던 워렌 앤더슨은 인도 정부가 재앙의 후유증을 감당할 수 있게 도울 기술진을 꾸려 황급히 인도로 날아왔으나 공항에서 바로 체포, 구금되었다.[5] 기술자들은 가스 누출의 원인을 평가하고 지역사회로 의료장비와 물품을 실어오기 시작했고, '''길거리에 온통 사람과 동물의 시체가 어지러이 널려있는 것을 목격했다.'''
앤더슨은 호출되면 언제라도 다시 인도로 돌아와 법정에 서겠다는 약속을 한 뒤 2,100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강제출국당했고, 유니온 카바이드의 주가는 제대로 폭락 크리. 거기다 엄청난 이미지 추락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매출이 떨어졌다. 사고 10일 뒤 앤더슨은 미국 의회에서, 자신의 회사에는 안전의 책무가 있고 두번 다시 유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행동을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 후 몇달 간 이 비극에 희생된 자신의 직원들을 위해 12만 달러 규모의 구호기금을 설립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1985년 4월에는 기금이 7백만 달러로 늘어났다.

6. 후유증


수천 명에 달하는 생존자들은 암, 시력 상실, 신경장애, 면역장애 등의 후유증과 계속 싸우고 있다. 참사 이후 공장 주변 지역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에서도 많은 정신적, 육체적 기형으로 고통받는 경우가 많으며, 사실 1969년 공장이 문을 열었을 때부터 이미 이 지역에서는 기형아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공장의 위험 폐기물들이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를 일절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독성이 있는 물을 마신 것이 선천적 장애를 일으켰다는 장기적 연구 역시 안타깝게도 전혀 없다.
심지어 사건 후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이 다시 낳은 아이들, 즉 '''3세대'''에 해당하는 아이들(21세기 이후 출생)에게서도 2세대와 똑같은 선천적 장애가 발생하고 있다. 해당 지역에 상수도가 2010년에 이르러서야 설치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오염된 지하수를 마시며 살아왔던 2세대 아이들의 몸에 또다시 독소가 축적되었던 것이다.
공장 내에 남게 된 독극물은 한참 동안이나 방치되었다. 시설에 녹까지 슬고 있어 문제가 되었으며, 심지어 예산 문제로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아이들이 공장을 놀이터 삼아 노는 형편. 드디어 2012년 인도는 독일의 독극물 처리업체와 계약을 체결했으며 독극물을 선박으로 독일까지 실어나른 다음 독일에서 소각하여 처리한다고 한다. 그러나 독극물만 사라진 상태이지 여전히 공장 부지는 오염된 상태여서 여전히 문제가 된다. 사회활동가들은 안전 문제를 이유로 독성 폐기물을 다른 곳으로 옮겨 소각하려는 정부의 계획에는 반대하고 있다. 2015년, 해당 부지에서 가져온 소량의 폐기물을 시험삼아 소각해 보았는데 방출되는 내용물은 다행히 허용 한계 안쪽이었다.
사고가 났던 보팔 공장은 사고가 난 후에도 한동안 살충제를 계속 제조하였다. 물론 이 사람들이 바보여서 이런 건 아니고 위험물질인 MIC가 차 있는 다른 탱크를 비우기 위해서였다. 그 방법은 살충제를 제조하여 없애는 것뿐이었기 때문. 꼬박 일주일이 걸렸고, 그 기간 동안 수십만명이 살던 보팔은 주민들이 모두 대피해 떠나 유령도시를 방불케 했다고 한다.

2년 뒤 터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함께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산업 재해이자 환경 재앙으로 각인받고 있으나 체르노빌 사고가 원자력 사고라는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묻히고 있다.
이 사고의 영향인지 인도에 건설되는 화학플랜트에 들어가는 기기는 EN 10204 Type 3.2가 요구되는 경우가 많다. EN 10204는 자재인증에 대한 유럽규격으로 Type 3.2는 철판이나 파이프를 제작할 때부터 OWNER의 감독관이 파견되어서 쇳물 단계부터 검증하는 가장 까다로운 등급이다. 유럽에 설치되는 기기라도 Type 3.2가 적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인도는 반대다. 그만큼 충격적인 참사였다는 것이다.

7. 이후


처음에 유니온 카바이드는 법적 책임을 면해 보려고, 1989년 인도 정부와 재판 없는 합의를 통해 4억7천만 달러를 지불했다. 하지만 이는 가스 노출에 따른 장기적인 건강 문제와 피해자 수를 크게 과소평가한 것이었고, 결국 2001년 인도 정부와 함께 자금을 대어 피해자들을 치료할 병원을 건립하고 10만 명의 비용을 감당할 건강보험 기금을 조성했다. 하지만 30년 넘게 지난 시점까지도 생존자들은 만성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가족들과 함께 여전히 보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부 집단청구소송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유니온 카바이드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과 형사소송은 몇 년 동안 질질 끌며 이어졌고, '''2010년'''에 이르러서야 최종 판결이 났다. 참사 당시의 경영자 7명이 업무상 과실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징역 2년에 벌금 2천 달러.'''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겠지만 인도 법에서는 이게 법정 최고형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들은 모두 자국민인 인도인이며, 이 중에 미국인은 한 명도 없다. 자국의 법이 닿지 않다 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CEO 워런 앤더스는 1991년 보팔 당국에 의해 과실치사로 고발되었고, 인도 정부는 그를 살인 혐의로 기소하려 했으나 미국이 인도 정부의 송환을 거절해 끝내 인도 법정에 그가 서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인도 정부도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정부 요인들이 뇌물을 받아먹고 여러가지 악재들을 나 몰라라 했다는 주장도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당시 보도를 은폐하려던 것이 드러나기까지 했다. 물론 피해가 워낙 컸기에 은폐는 불가능했지만 말이다.
결국 80년 역사의 초거대기업이었던 유니온 카바이드는 1999년 다우 케미컬에 88억 9천만 달러에 인수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뉴욕에 있던 본사 건물JP모건 체이스 은행이 사들였고, 2019년 철거되어 재건축 예정이다. 이에 따라 해당 건물은 자발적으로 철거된 건물들 중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었다.
다우 케미컬 측은 보팔 참사에 대한 법적 책임을 받아들이기를 단호하게 거부해 왔다. 법정 소송은 1989년에 종결되었고, 희생자들에 대한 지속적 진료와 새로운 보상 요구, 공장부지 오염 제거의 책임 등은 이제 모두 마디아프라데시 주 정부에 있다고 말한다. 참고로 주 정부는 1998년부터 해당 지역의 통제를 맡았다. 인도 정부는 이런 교착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일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
2012 런던 올림픽 후원사 중 하나가 다우 케미컬인데, 인도 정부 및 선수들은 다우 케미컬의 스폰을 철회할 것으로 요구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올림픽 보이콧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다.
LG화학에서도 2020년에 비슷한 사고를 쳤다. LG폴리머스인디아 가스 누출 사고 문서 참조.

8. 영향


행정학적인 측면에서 '''전 세계 환경정책의 기조 자체를 바꿔버린 사건'''으로 인식된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인 1970~80년대는 신자유주의를 행정에 받아들인 소위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의 영향이 절대적인 시기였다. 환경정책 역시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기존의 정부에서 오염물질 배출 제한을 설정하고 직접 감시하는 CAC(Comand & Control) 방식 환경정책의 비효율성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가해졌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MBR(Market Based Regulation) 방식의 환경정책이 제안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MBR 방식의 환경정책은 환경문제의 해결을 시장원리(수요와 공급)에 맡기자는 것이었다. 정부실패에 지친 나머지 시장경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으로 추앙되던 시기였기에 MBR 방식을 주장한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정부와 시민의 역할을 축소하고 오염물질의 관리를 시장경제의 원리에 의해 해결되도록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MBR 정책 중 대표적인 것이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오염물질 배출권 거래' 이다. 각 국가나 회사별로 오염물질 배출량의 한계를 정해 놓고, 남는 배출량을 국가나 회사들이 '거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국가별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거래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MBR 방식의 환경정책을 주장한 학자들은 환경이나 인간의 생명에 무관심한 거대 기업이 부패한 정부와 결탁할 경우 MBR 방식의 환경정책은 환경문제를 극도로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으며, 그것이 최악의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보팔 가스 누출 사고였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 이 사고 이후, 행정학에서의 환경정책은 CAC로의 회귀와 함께 정부와 시민의 적극적인 개입을 전제로 하는 IBR(Information Based Regulation)로 변화하게 된다.

9. 창작물에서


리졸리 앤 아일스의 원작 소설 시리즈 중 하나인 <파견의사>에서 이 사건이 언급된다.
김수용의 소설 울산, 보팔 혹은 우황청심환에서도 언급된다.
2019년 6월, 이 사건을 다룬 연극 <보팔(Bophal, 1984~)>이 국내에서 공연되었다. 포그머신을 사용해 탱크 폭발 장면에서 정말로 무대 위에서 연기가 발생하는 연출을 보여줬다.

10. 참고 자료


  • 로버트 F. 하틀리. 윤리경영 - 고객이 존중하는 기업 만들기(2006) 21세기북스
  • 샤나 호건 외. 범죄의 책(2017) 지식갤러리
  • 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2015)

[1] 911테러의 사망자가 2,996명인걸 생각해 보면 얼마나 엄청난 수치인지 알수 있다.[2] 인도는 민주주의 국가지만, 중앙과 떨어진 대부분의 지역은 몇백년 전부터 그곳을 다스리던 왕족(라자라고 부른다)의 후손들이 세습 통치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3] 공학명칭: Scrubber[4] 공학명칭: Flare stack[5] 그러나 경찰서가 아니라 가택연금이라는 특별대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