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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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의 최대 위기,서부의 옅은 녹색이 스웨덴 점령지역. 중부와 동부의 짙은 녹색은 루스 차르국 점령지역. 남서부의 노란색이 연방에 남은 영토.
1. 개요
2. 배경
3. 혼란의 시작 - 흐멜니츠키의 봉기
4. 재앙으로 - 루스 차르국의 참전
5. 스웨덴의 침공
6. 연방의 반격
7.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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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The Deluge
폴란드어: Pоtор szwedzki/Potop
리투아니아어: Švedų tvanas/Tvanas
Potop. 17세기 중후반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일어난 국가적 대혼란. 좁게는 1655~60년에 있었던 스웨덴과의 북방전쟁만을 가리키지만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는 1648년 흐멜니츠키가 일으킨 카자크 대봉기에서부터 1667년에 끝난 러시아와의 전쟁까지의 기간을 모두 포함한다. 대홍수 이전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러시아 사이에서 동유럽의 대부분을 석권한 강대국이었지만 대홍수의 결과 연방은 인구의 1/3을 잃고 영토를 상실하였고, 동유럽의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포토프 슈베즈키'와 '스베두 트바나스'는 대홍수 당시의 스웨덴의 침공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카자크 대봉기에서부터 러시아와의 종전까지 이어지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대홍수는 단순히 '포토프'란 단어를 사용한다. 리투아니아어로는 '트바나스'이지만 잘 쓰지는 않는듯 하다. 당시에는 쓰이지 않았다가 19세기 폴란드의 민족 문학가이자 쿠오 바디스의 저자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가 이 시기를 다룬 소설 대홍수(Potop)[1]를 저술하면서 역사용어로 편입되었다.

2. 배경


발단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우크라이나 카자크들과 슐라흐타[2] 간의 갈등에서 터졌다. 당시 카자크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고 경제적 지원까지 해주고 있는 폴란드 국왕에게 맹목적인 충성과 등록 카자크군으로서 복무해왔다. 허나 폴란드 귀족들은 카자크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해왔고 거기에 농노제와 가톨릭 신앙까지 강요하려 하자 결국 오랫동안 묵은 응어리가 카자크인 슐라흐타 보흐단 흐멜니츠키[3]의 야심과 결합하여 이전까지의 봉기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의 봉기로 발전했다. 심지어 당시 유럽 최강이던 폴란드 기병에 맞서 카자크의 약점인 허약한 기병을 보완하기 위해 흐멜니츠키는 카자크와 원수지간이던 크림 칸국타타르 기병[4]까지 봉기에 끌여들었다.

3. 혼란의 시작 - 흐멜니츠키의 봉기


1648년 1월 25일 흐멜니츠키는 시치[5]가 열리는 장소인 호르티치아 섬을 경비하던 폴란드 군인들을 죽인 후 시치를 열어 폴란드에 맞서 봉기를 일으킬 것을 결정하였다. 그달 말 라다[6]에서 헤트만에 선출된 흐멜니츠키는 곧바로 카자크 헤트만국의 건국과 폴란드에 대한 선전포고를 선언하였다. 동년 4월 카자크의 봉기 소식이 바르샤바에 전해지자 폴란드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조우티보디 전투에서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군에게 전멸당했고[7] 코르순 전투에서 다시 격파당하면서 어느 편에 설까 망설이던 카자크들이 대거 흐멜니츠키 편에 가담하였다. 때맞춰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슐라흐타에 대항해 민란을 일으키고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성직자, 귀족, 농민 가리지 않고 폴란드인들은 죄다 학살당하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흘러가게 된다.
당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는 "나의 군사적 지도력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카자크를 이용해 연방 남쪽 크림 칸국의 타타르들과 그 종주국 오스만 제국을 도발할 생각이었지만 "국왕이 쓸데없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입법부 세임의 반대와 어린 아들 지그문트 카지미에시를 잃은 슬픔에 그 계획을 잠시 미루다가 카자크들의 대봉기에 충격을 받아 죽고 만다. 이후 사태는 성직자로 있다가 새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환속한 그의 동생 얀 2세 카지미에시가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image]한편 흐멜니츠키의 봉기군은 민란을 일으킨 농민들과 합세해 필랴우치 전투에서 다시 폴란드군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진격했다. 서부 우크라이나의 대도시 르부프를 공략하려던 흐멜니츠키는 몸값을 받는 조건으로 도시 공략을 포기한 후 다른 도시인 자모시치를 공략하던 도중에 브와디스와프 4세의 사망과 얀 2세의 즉위 소식을 전해들었으며 동시에 얀 2세로부터 카자크 및 정교회 신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할 터이니 봉기를 중지하라는 편지를 전해받고 흐멜니츠키는 이를 받아들여 동쪽으로 돌아갔면서 봉기는 일단락되었다. 1648년 성탄절 당일, 키예프에서 흐멜니츠키는 성대한 개선식을 열었고 우크라이나인들은 해방자의 등장에 열렬히 환호했다.
그렇게 해서 1649년 1월 키예프 근교 페레야슬라우[8]에서 카자크 및 정교회 신자들의 지위에 관한 폴란드와 카자크 간의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2월 흐멜니츠키는 자신을 "루스인들의 유일한 독재관"임과 동시에 "리비우, 헤움, 할리치까지 닿는 우크라이나와 포돌리아, 볼히니아 전역의 권력자"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서 폴란드는 흐멜니츠키가 단순한 카자크의 지도자가 아니라 독립된 국가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리하여 카자크와 폴란드 사이의 전쟁은 재개되었다. 1649년 여름 즈바라즈 전투와 즈보리우 전투에서 흐멜니츠키는 폴란드군을 다시 한번 격파했고 특히 즈보리우 전투에서 격파한 폴란드군은 국왕 얀 2세가 친정한 군대였다.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 폴란드는 8월 17일 카자크-타타르 연합군과 즈보리우 조약을 체결하여 카자크 헤트만국은 키예프, 브라츨라우, 체르니히우 3개 주에서의 완전한 자치와 4만 명의 군대를 보유함과 헤트만국의 신료들은 전원 우크라이나인으로 임명하며 정교회 신자들의 특권 등을 인정받았다. 세임까지 승인한 즈보리우 조약이었으나 우크라이나의 가톨릭 신자들은 이 조약을 인정하길 거부했으며, 가톨릭 신자와 카자크 및 정교회 신자 간의 갈등이 커지자 폴란드는 카자크 헤트만국을 다시 공격했다. 종전과 달리 이번에는 폴란드가 유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1651년 6월 베레스테츠코 전투[9]에서 폴란드군이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고 9월 빌라체르크바 전투에서 폴란드군이 다시 승리를 거두자 카자크 헤트만국은 휴전을 요청하여 9월 28일 빌라체르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결과 카자크 헤트만국의 지배는 키예프 주 1개 만으로 축소되었으며 군대의 숫자도 2만 명으로 감축해야했으며 조약을 비준할 세임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왕의 자비를 베푼 것에 감사를 표해야 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 및 국왕에게 완전한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다.
하지만 카자크 세력을 대거 꺾어놓는 내용의 이 조약은 세임에서 비준되지 못했다. 카자크에게 허용한 군대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 세임이 리베룸베토를 선언한 것인데 흐멜니츠키 또한 굴욕적인 내용의 조약에 불만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 휴전 기간이 끝나자마자 카자크는 반격을 개시하여 1652년 바티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베레스테츠코의 패배를 되갚아주었다.[10] 하지만 여전히 폴란드 세력은 강성했고 그에 반해 카자크의 세력은 너무나 미약했다. 베레스테츠코에서의 대패를 기점으로 카자크인들의 독립국가라는 꿈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흐멜니츠키는 최후의 수로 같은 루스 세력인 '''러시아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 결정으로 흐멜니츠키의 봉기는 '''폴란드 전역을 생지옥으로 바꿔놓는 대재앙으로 번지게 되었다.'''

4. 재앙으로 - 루스 차르국의 참전


러시아와 폴란드는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 관계였다. 양국은 리보니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의 지배권을 두고 자주 전쟁을 벌였는데 특히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기고 러시아에 혼란 시대가 찾아오자 기회를 노린 폴란드가 러시아를 공격해오면서 수도 모스크바가 함락당하고 러시아의 차르가 바르샤바로 끌려가 국왕 앞에 무릎을 꿇으며 폴란드 왕세자[11]를 잠시나마 러시아의 차르 자리에 앉히는 등 굴욕을 찍기도 했다. 러시아의 귀족 미하일 로마노프가 폴란드군을 몰아내고 차르로 즉위해 로마노프 왕조를 세우면서 혼란 시대를 끝냈으나 스몰렌스크와 체르니히우 등 기존의 영토를 대거 폴란드에게 넘겨주었고 이에 러시아는 폴란드에게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며 칼을 갈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같은 루스인인 흐멜니츠키가 폴란드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고 이에 러시아에게 지원을 요청해온 것은 러시아에게 있어서 복수를 실행할 최적의 기회였다.
흐멜니츠키는 러시아의 지원을 얻는 조건으로 러시아에게 신종할 것을 맹세하였고 이에 차르 알렉세이 1세는 흐멜니츠키의 요청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1651년 3월 러시아의 의회 젬스키는 카자크들을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킬 것을 결의하였으나, 폴란드에 적대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망설였다. 알렉세이 1세는 1653년 11월 젬스키가 카자크 헤트만국을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삼으며 폴란드에게 선전포고를 함을 결의할 때까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보류했다. 마침내 다음해인 1654년 1월 페레야슬라우에서 카자크 헤트만국이 러시아의 속국으로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는데 페레야슬라우조약의 결과 카자크는 광범위한 자치권과 더 많은 군대의 보유, 키예프 대주교구의 권리 존속 등을 받아내었으며 그 조건으로 러시아에 대한 신종 및 외교권의 박탈을 댓가로 치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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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화살표가 러시아군, 분홍 화살표가 폴란드군
그리하여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의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1654년 7월 4만 1천 명의 러시아군이 폴란드를 침공해 벨리와 도로고부시를 점령하였으며 곧바로 대 러시아 전진기지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인 스몰렌스크의 공략에 나섰다. 또한 스몰렌스크의 공략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오르샤를 점령하고 8월 슈클로우 전투를 치뤘으며[12] 셰펠레비체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폴란드군을 격파하였다. 폴란드는 카자크군과 이를 지원하는 러시아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후 전쟁은 폴란드에게 불리해져 갔다. 러시아군의 공세에 버티던 스몰렌스크마저 9월 23일 러시아군에게 넘어갔다. 한편 우크라이나 방면에서는 러시아 - 카자크 연합군이 진격에 나섰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군이 므스치슬라우와 로슬라블을, 카자크군이 호멜을 함락시키면서 드네프르 강과 드루지나 강 사이의 전 지역이 러시아 - 카자크 군 손에 들어갔으며 리보니아 - 벨라루스 방면에서는 프스코프에서 출발한 러시아군이 네벨(7월 1일)과 폴로츠크(7월 17일), 비쳅스크(11월 1일) 등 벨라루스의 도시들과 루자, 레제크네 등 폴란드령 리보니아의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흐멜니츠키가 지휘하는 카자크군은 볼히니아 지방으로 밀고 들어가 그해 말까지 오스트로흐와 리우네 등을 함락시켰다. 러시아 - 카자크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동부 전역을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국토의 동부 전역이 전화에 휩쓸리자 폴란드는 뺴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반격에 나섰다. 1654년 겨울 ~ 1655년 봄 리투아니아 대공국마그나트[13]이자 야전 헤트만인 야누시 리지비우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고 벨라루스 지방에서 반격을 개시해 오르샤를 탈환하고 마힐료우를 포위하였으며 폴란드군이 오흐마티우 전투와 자시키우 전투에서 러시아 - 카자크 연합군을 연달아 격파한 것을 기점으로 전쟁은 이제 밀고 밀리는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나쁘게 돌아가자 알렉세이 1세는 군 지휘관들에게 위협적인 칙령을 내리면서 사기 고무를 시키고 대규모 공세를 펼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리투아니아 대공국군은 러시아 - 카자크 연합군의 공세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6월 러시아군은 슬로님과 클레츠크, 벨리시를 함락시켰고 1655년 7월 3일 민스크와 체르카시가 흐멜니츠키의 카자크군 수중에, 7월 31일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던 빌노가 러시아군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14] 여름의 대규모 공세의 성공에 힘입어 러시아군은 8월 카우나스와 흐로드나까지 점령하였으며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군은 여세를 몰아 갈리치아를 공략, 9월 브레스트 근처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한 후 르부프를 공격하고 루블린에 입성했다.
이쯤 되면 폴란드가 당장 항복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폴란드의 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5. 스웨덴의 침공


스웨덴은 당시 발트 해의 지배권을 손에 넣는 숙원을 이루기 직전까지 도달하는가 하면 30년 전쟁에서 단련된 군대를 보유하는 등 황금기를 달리고 있었지만, 군대를 유지할 자금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겪고 있었다. 전쟁 당시에는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종전 이후에는 프랑스의 지원이 끊어졌고, 새로 확보한 영토에서 벌어들이는 세수도 한계가 있었다.[15] 재정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는 한탕 제대로 뽑아 재정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바티흐 전투에서 정예군이 쌈싸먹히고 한창 러시아 - 카자크 연합군과의 전쟁으로 정신없는 폴란드는 스웨덴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으로 보였다.
한편 스웨덴 왕으로서는 폴란드 왕위를 주장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도 했다. 당시 폴란드를 다스리고 있던 얀 2세의 가문은 바사 가문이었다. 바사 가문은 본디 스웨덴의 귀족 가문으로 덴마크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독립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스웨덴의 왕위를 차지하게 된 가문이었다. 이 바사 가문이 폴란드 왕위를 차지하게 된 계기는 지그문트 3세였다. 지그문트 3세는 스웨덴에서 나고자란 스웨덴 토박이였으나 어머니가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국왕이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리하여 1587년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된 지그문트 3세는 아버지 요한 3세가 1592년 사망하자 스웨덴 왕위까지 물려받으면서 스웨덴과 폴란드의 동군연합을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지그문트 3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루터교가 다수를 차지하던 스웨덴을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려놓으려하자 가톨릭화 정책에 반발한 스웨덴 귀족들이 1599년 숙부 칼 9세를 앞세운 뒤 반란을 일으켜 지그문트 3세를 스웨덴 왕좌에서 몰아내버렸다. 쫓겨난 지그문트 3세는 당연히 스웨덴 왕위를 주장하며 스웨덴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칼 9세가 사망한 후 스웨덴 왕으로 즉위한 칼 9세의 아들이자 지그문트의 사촌은 바로 무씨무씨한 당대의 사자왕 결국 지그문트는 1629년 알트마르크 조약으로 스웨덴 왕위를 되찾기는 커녕 리보니아 전쟁을 통해 얻은 리보니아 지역만 잃어버렸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전사하고 딸 크리스티나 여왕을 거쳐 1654년 구스타브 2세의 외조카 칼 10세 구스타브가 스웨덴 왕위에 오르면서 바사 왕가가 끝나고 스웨덴에는 팔츠츠바이브뤼켄 왕가가 들어섰으나 폴란드의 바사 왕가는 지그문트 3세가 사망하고 그 자식들인 브와디스와프 4세, 얀 2세 카지미에시 대에도 계속해서 스웨덴 왕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바사 왕가의 이러한 주장이 불편했던 칼 10세는 폴란드를 제압함으로써 왕위 주장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해버리고 자신의 왕위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동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폴란드 왕위를 내놓으라는 명목으로 제 2차 북방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결속력은 형편없었다. 국왕 얀 2세는 폴란드 슐라흐타들에게 인기가 없을뿐더러 그들의 문화였던 샤르만티즘을 경시했다. 더구나 그는 전직 예수회 수도자추기경이기까지 했다. 종교를 핑계로 폴란드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개입하려 했던 말썽 많은 얀 2세에 대한 반발은 수많은 귀족들을 스웨덴 국왕 칼 10세에게 가담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16] 특히 스웨덴 편에 가담한 일부 슐라흐타들은 칼 10세[17]에게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할 것을 권유하는 막장극까지 선보였다. 어째든 스웨덴군은 약체화된 폴란드군[18]을 격퇴하고 결국 무저항 상태의 바르샤바를 함락시켰고 국왕 얀 2세는 슐레지엔으로 도망가고 만다. 그러자 러시아 측은 폴란드와 휴전, 곧바로 스웨덴령인 리보니아를 공격했다.
또 한편 러시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야전 헤트만인 야누시 리지비우는 리투아니아의 다른 마그나트들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해체하기 위해 스웨덴과 결탁. 연방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분리해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이루며 리투아니아는 다시 2개의 공국으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또 하나는 종제 보그스와프 리지비우가 가져 스웨덴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케다이네이 협정을 맺고 말았다. 한마디로 매국을 한 것이다. 다만 리투아니아에서는 리지비우를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독립영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리보니아의 복잡한 정세가 멀리 우크라이나의 정세에 악영향을 미쳤다. 연방을 적으로 보는 흐멜니츠키는 스웨덴을 동맹자로 보고 있었고, 이 휴전을 러시아의 배신이라고 생각해 1657년 8월 급사할 때까지 차르와 손을 끊기 위한 계획을 준비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1656년 브란덴부르크까지 연방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브란덴부르크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실질적으론 완전 독립 상태였으나 형식상 연방의 속국인 프로이센 공국의 공작이기도 했기에 이 사실은 그의 심기를 불편하기까지 했을 것이다. 이에 그는 프로이센의 완전 독립을 위해 선전포고를 하고 곧바로 폴란드의 서부로 군대를 파견한다.
이 당시 폴란드는 덴마크, 신성 로마 제국, 네덜란드 등의 지지를 받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도움은 거의 받지 못했고,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었던 트란실바니아왈라키아, 몰다비아 등의 선전포고까지 잇따랐다.

6. 연방의 반격


그러는 동안 조국이 외세에 짓밟히는 것을 본 국민들이 레지스탕스를 조직해 점령군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고 1655년 12월 망명 중이었던 얀 2세를 지지하는 티쇼프체 연맹이 결성되었다.
거기에 쳉스토호바의 야스나 구라 수도원에서 소수의 폴란드군이 거의 10배에 달하는 스웨덴 군의 공성을 격퇴함으로써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레지스탕스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에 산재하던 점령군들을 격퇴하기 시작했고 봉기한 군세는 폴란드 야전 헤트만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와 리투아니아 대헤트만 얀 파베우 사피에하의 지휘 아래 통합되었을 때 그들은 카를 구스타프에게 충성을 맹세한 세력을 배제한 뒤 공격을 시작했다.
바르샤바 교외의 바르카 전투에서 스테판 차르니에츠키는 스웨덴군에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후 폴란드군은 장기간의 공성전 끝에 바르샤바를 재점령했다. 이에 경악한 칼 10세는 대규모의 군세를 이끌고 숫적으로 우세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군을 패배시켜서 바르샤바를 재점령했으나 마찬가지로 큰 피해를 입었던 탓에 다시 떠나버리고 말았다. 10월 8일에는 프로스트키 전투에서 스웨덴군이 폴란드군에 전멸한다. 당시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폴란드 쪽으로 군대를 더 보낼 수 없었고 이후 1657년 완전히 스웨덴군을 몰아낸다. 이해 야노시 리지비우가 사망한다.
이후 같은해 트란실바니아와 브란덴부르크와의 전쟁에서 이겼지만 리투아니아 방면으로 아직 러시아군이 잔재하고 있는 상황으로 결국 폴란드는 브란덴부르크를 상대로 프로이센 공국을 독립시키는 베라우 조약을 맺고 브란덴부르크와의 전쟁을 종전시킨다.
한편 흐멜니츠키가 사망한 후 후계자로 선출된 이반 비호프스키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안에 고립된 스웨덴군을 격파해 국외로 몰아낸 폴란드와 하쟈치의 조약을 맺어 화해하는 것을 선택했다. 이런 사태를 맞이하자 차르 알렉세이는 스웨덴과 자국에 유리한 바리엘사리 휴전을 맺고 1658년 10월 폴란드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화평이 보장된 2년 사이에 벨라루스의 귀족과 카자크 지도층은 폴란드 지지로 입장을 바꾸고 벨로루시 지방에서 러시아군을 맞아 싸우는 폴란드를 지원했다. 어쨌든 폴란드의 입장에서는 숨통이 좀 트인 격이였다.
이후 카자크들은 단독으로 북부에서 빌노를 봉쇄하려고 했지만 유리 돌고루코프에 의해 봉쇄되었고 남부에서도 비호프스키가 이끄는 카자크들은 세레메테프에게서 키에프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1569년 비호프스키와 동맹자 크림 칸국은 공동으로 트루베츠코이가 이끄는 군대에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주어 괴멸시키고 코노트프 마을을 포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원정이 실패로 끝난 것도 모르고 있던 러시아인들의 불안은 8월 점령지 키에프를 출발한 세레메테프와 그의 휘하 부대에 의해 제거되었다. 비호프스키는 치히린(Chyhyryn)에서 세레메테프에게 패배해 폴란드로 망명하고, 반폴란드 성향의 카자크들은 그를 해임하고 흐멜니츠키의 후예 유리를 새로운 카자크 헤트만에 선출하고 폴란드와의 관계를 끊어버린다.
허나 1660년 얀 2세는 제 2차 북방 전쟁을 끝내기 위해 폴란드의 모든 전력을 러시아로 집중시킨다. 이에 1660년 말까지 러시아군을 벨로루시에서 몰아냈으며 계속 러시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한다. 이 시기 가장 유능한 폴란드 장군은 스테판 차르니에츠키였다.[19] 그는 포론카 전투에서 돌고르코프의 부대를 물리치고, 1661년 빌뉴스를 탈환했다. 기타 리투아니아 대공국 내의 여러 도시도 하나하나 폴란드 - 리투아니아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이러한 반격에 러시아는 스웨덴과의 새로운 전쟁을 회피하고 리보니아와 잉그리아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는 굴욕적인 카르디스 조약에 서명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발트 지방에서 철수하였다.[20]
1663년 말, 폴란드 왕과 그의 군대는 드네프르 강을 건너 카자크 영역을 포함한 좌안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폴란드군의 진로에 있던 여러 도시는 반란이 진행되는 동안 쇠락해졌기 때문에 아무 저항도 없이 폴란드에 굴복했으나, 다음해 1664년 1월 흘루코프 공성전에서 실패해 커다란 희생을 냈고, 노브고로드-세베르스키까지 퇴각했다. 이 전쟁의 최후의 큰 전투는 1664년 여름에 벌어져 러시아군은 비텝스크 근처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뒤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1664년부터 1667년 1월까지 질질 끌면서 시간을 보냈다. 허나 폴란드 측에서 다된 밥에 흙이 뿌려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예지 루보미르스키란 자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폴란드 측에서 급박해져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인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러시아에게 스몰렌스크의 요새 및 키요프를 포함한 좌안 우크라이나로 불린 우크라이나 동부를 할양했다. 다만 카자크들을 공동으로 통제하는 것과 20년 후 좌안 우크라이나를 반환하는등 폴란드의 요구 조건도 잊지 않았다.[21]

7.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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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상당한 영토를 상실한다. 일단 프로이센이 독립해버렸으며, 카자크 영역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대 전부를 러시아에 할양해야했다. 거기에다가 대러시아 전진 기지 겸 방어 거점 스몰렌스크도 덤으로 러시아에 할양되었다. 연방의 국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러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대홍수 시기 수천명의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카자크들에게 학살되었고 얀 2세의 경우 계속되는 전쟁과 반란에 진절머리가나 왕위에서 퇴위해 프랑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제르맹테프레의 명예 수도원장으로 지내다가 1672년에 죽는다. 또한 연방을 배신했던 리지비우가는 두 배신자로 인해 주변에 경멸을 받았고 야노슈의 종제인 보그스와프 또한 멸시를 받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2년 뒤 반환될 키에프를 반환하지 않고 계속 힘을 비축해 결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삼키게 되었고 브란덴부르크는 프로이센을 손에 넣은 뒤 눈에 보이지 않은 성장을 하며 국명을 프로이센 왕국으로 바꾸며 점차 강대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 독일 제국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카자크들의 경우 좌우로 나누어 러시아령이 된 좌안 우크라이나에서 카자크 헤트만국이라는 자치 국가를 세우게되나 결국 18세기 자포로제 카자크가 해체되면서 서서히 자치권을 잃어버렸고 스웨덴은 러시아와의 전쟁 끝에 맺은 카르디스 조약으로 발트해 전체를 석권하나 결국 대북방전쟁의 결과, 표트르 1세의 러시아 제국에 의해 리보니아와 잉그리아 등을 잃고 국왕인 칼 12세가 전사하는 등 불운을 겪으며 발트해의 강국의 위치를 잃고 2류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어째든 이 대홍수를 전후해 유럽의 강대국의 위치가 바뀌게 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1] 시엔키에비치의 폴란드 역사 소설 3부에서 대홍수는 2부에 해당한다. 1부는 우크라이나 카자크 봉기(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봉기)를 배경으로 한 <불과 칼로써>, 3부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배경으로 한 <보우오디요프스키 대령>으로, 모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전성기가 끝나고 쇠퇴해가는 시기가 다루어졌다. 폴란드에서 영화화되기도 했다.[2] 폴란드의 특권 계급, 즉 귀족. 다른 나라의 귀족들과는 비교도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쥐었다. 이 시기 폴란드는 그냥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에서 다 해먹고, 국왕은 그냥 상징/국회 의장 정도로 보는게 더 편하다. 국왕도 선출직이었고, 당시 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권력은 귀족 의회에 있었다.[3] 원래 예수회 신학교까지 다닐 정도의 친폴란드 헤트만이었으나 마그나트 알렉산데르 코니에츠폴스키(Aleksander Koniecpolski)에게 땅을 빼앗기고 가족까지 폭행당하는 불상사를 겪은 후 카자크에 대한 귀족들의 폭정을 하소연하기 위해 2번씩이나 바르샤바를 찾아갔으나 슐라흐타의 반대로 인해 거부당하고 만다. 이에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킬 세력을 모집하던 도중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당국에게 체포되었고 바르샤바로 끌려가던 도중 동료들의 도움으로 탈출했다.[4] 타타르 기병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흐멜니츠키는 크림 칸국에게 기독교인 노예를 제공할 것을 약조하였다.[5] Січ.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열린 우크라이나 전역의 카자크 대표의 자치적인 회의기구였다.[6] Козацька рада. 시치가 여는 회의로 군사적인 성격이 강하다. 여기서 카자크의 지휘관인 헤트만을 선출한다.[7] 이 때 유명한 윙드 후사르 부대도 참전해 패배를 겪는다.[8] Перея́слав. 1943년 페레야슬라우흐멜니츠키(Перея́слав-Хмельни́цький)로 이름이 바뀌었다.[9] 얀 2세가 친정한 폴란드군 8만 명이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타타르 연합군 20만 명을 말 그대로 학살한 전투이다. 카자크-타타르 연합군이 전사자만 3만 명을 낸 것과 달리 폴란드군의 사상자는 많이 잡아야 1천 명 미만을 기록했다.[10] 이때 카자크는 베레스테츠코의 복수라는 이유로 사로잡은 8천여 명의 폴란드군을 내장을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전부 학살하였다.[11] 이 왕세자가 바로 위에서 설명한 브와디스와프 4세이다.[12] 이 전투는 특이하게도 일식 중에 치뤄진 전투이다. 전투가 벌어진 1654년 8월 12일 유럽 일대에서는 일식 현상이 발생하였다. 전투 결과는 양측 모두 서로 승리를 주장하였다.[13] 폴란드 귀족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크고 부유한 대귀족. 참고로 폴란드 귀족은 크게 4가지로 나뉜다. 마그나트(Magnate), 부유한 귀족(Szlachta Zamozna), 소작인 귀족(Szlachta Czynszowa), 길거리 귀족인 거지 귀족(Holota). 폴란드는 귀족층의 인구 비중도 동시대 다른 나라들에 비해 2배 가량 많았고 같은 귀족이라도 대지주이자 세임 내 한 파벌을 이끄는 마그나트급의 대귀족들과 가난한 귀족들의 빈부격차는 엄청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상으로 정치적 권리는 '''귀족층 내에서는 모두 평등했다''' 명목상 귀족층 내 평등한 정치적 참여권은 귀족 공화정에 대한 강력한 이념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긍정적 효과도 있었지만 악명 높은 귀족 공화정의 비효율성을 굳혀버리는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14] 이 때 러시아군은 빌노의 유대인 공동체들을 학살하기도 했다.[15]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로 스웨덴이 획득한 슈트랄준트 일대 서부 포메른 해안가는 원래 오데르 강발트해를 만나는 지점으로 무역 통제를 통해 막대한 관세를 누릴수 있는 지방이었지만 30년 전쟁이 남긴 파괴가 생생했던 17세기 중후반에는 애초에 주 전장이었던 동부 독일 일대가 쑥대밭이 되었고 회복이 늦었기 때문에 막상 땅을 차지했어도 한동안 제대로 뽕을 뽑지도 못했다. 그 와중에서 브란덴부르크는 그나마 외교적 줄타기로 이웃 지방들이 박살나는 와중 그나마 피해를 덜 입었던 덕분에 훗날 프로이센이란 강대국으로 성장할 배경이 되기도 했다[16] 여기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이중공화국의 정치 시스템이 이 시대 전 유럽을 강타한 종교 문제와 맞물려 막장스런 개판 조직력을 명백하게 보여주는데, '''이 모든 개판의 발단이 된 흐멜니츠키의 봉기를 유발한 과정도 우크라이나 흑토지대 개척 슐라흐타의 카톨릭 강압이었음에도, 교법화(confessionalization) 과정을 겪던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왕실의 중앙 정부가 이렇게 강압적 종교 통합을 통해 통치력과 국가 관료 체계를 강화하려는 시도는 온갓 지랄난리부르스를 추며 반대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가톨릭 교회의 세력을 늘리는 것도 철저하게 중앙정부가 아닌 자기들 지역 귀족들의 재량으로만 이루겠다는 소리고, 아예 서방의 다른 가톨릭 강대국이었던 스페인 제국처럼 종교적 통합 자체를 중앙 권력의 강화 수단으로 쓸건지, 아니면 전통적인 정책이었으며 전 세대까지만 하더라도 비교적 잘 작동했던 교파적 외교 자체를 포기하고, 종파를 불문한 귀족적 평등주의를 통해 불만세력을 잠재울건지 한쪽으로 뚜렷히 노선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던 이중공화국의 내부적 마비는 최악의 시너지 효과를 불러왔다.[17] 얀 2세의 종제였으므로 연방 국왕이 될 자격은 충분했다.[18] 사실 카자크 대봉기 당시 폴란드군의 피해가 컸고 러시아는 대군을 동원하여 폴란드 군을 공격하는 와중에 군대의 일축을 맡은 카자크가 러시아 편에서 싸우면서 폴란드군의 절대 다수가 러시아 방면에서 싸우고 있었으며 후방에 남아있는 병력은 얼마 없었다. 그나마 후방에 남아있는 병력 또한 상당수가 지휘관인 귀족들을 따라 스웨덴 편에 가담하는 바람에 결국 이하 생략.[19] 이 사람은 폴란드 국가에도 나온다.[20] 러시아로서는 발트해가 북유럽과 교역할 수 있는 유일한 바다였고, 이 때문에 계속 스웨덴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에 표트르 대제 때 발트해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21] 하지만 러시아가 폴란드의 요구를 들어줄 리는 만무했으며, 얀 3세의 재위 기간인 1686년에 체결된 항구적 평화 협정으로 러시아는 좌안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구적인 지배를 확정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