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우

 

1. 우크라이나의 도시
1.1. 개요
1.2. 역사
1.2.1. 초기, 루테니아 왕국의 지배 (1256~1349)
1.2.2. 폴란드의 지배 (1349~1772)
1.2.3. 오스트리아의 지배 (1772~1918)
1.2.4. 전간기 (1918~1939)
1.2.6. 전후 (1945~ )
1.3. 관광
1.3.1. 근교(?) : 체르니우치 & 카미아네츠-포딜스키
1.4. 정치
1.5. 여담
2. 우크라이나의 주


1. 우크라이나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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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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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리비우 역사 지구
영어
L'viv – the Ensemble of the Historic Centre
러시아어
Ансамбль исторического центра Львова
프랑스어
Lviv – ensemble du centre historique
국가·위치
우크라이나 리비우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8년[1]
등재기준
(ii)[2], (v)[3]
지정번호
8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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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 : '''Semper fidelis'''(언제나 충성스럽게)
우크라이나어 : '''Львів (리비우)'''
폴란드어 : Lwów (르부프)
독일어 : Lemberg (렘베르크)
러시아어 : Львов (리보프)
영어 : Lviv, Lvov, Lwow 등 여러 가지 표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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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개요



우크라이나 서부 최대의 도시로 리비우 주의 주도이다. 2015년 현재 인구는 729,429명이며 우크라이나에서 7번째로 큰 도시다.[4]
13세기에 설립된 이후 도시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뀐 굴곡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에 따라 도시 명칭도 리비우, 르부프, 렘베르크 등으로 바뀌었다. 루테니아인들에 의해 세워진 도시지만 역사를 지나면서 폴란드의 지배기간이 길었고 도시 다수를 폴란드인이 점한 기간 역시 길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도시에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리비우는 키예프와 더불어 오랫동안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했기 때문에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자신들의 정신적, 문화적 수도로 여긴 곳이었으며 지금도 리비우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주요 문화 중심지이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났지만 구시가는 기적적으로 보존되었고 여러 문화가 융합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기에 그 역사성이 엄청난 점을 인정, 유네스코는 1998년 120헥타르에 이르는 구시가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1.2. 역사


리비우는 1256년 건립 당시부터 지금까지 적루테니아(Red Ruthenia)와 갈리치아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 지역의 원주민인 루테니아인들은 1349년부터 1991년까지(1918년 잠깐을 제외하고) 나라 없이 지내야 했고 리비우도 폴란드, 오스트리아, 러시아(소련)의 지배를 돌아가며 받았다. 이 기간동안 폴란드의 지배가 특히 길었고(1349~1772, 1920~1939) 루테니아 왕국 시절부터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한 폴란드인들이 도시의 다수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도시는 상당부분 폴란드화 되었기 때문에 리비우는 키예프를 비롯한 다른 우크라이나 도시들과는 다소 차별화된 외관을 가지고 있다. 폴란드인들은 나라를 잃은 뒤에도 도시의 다수를 차지하며 리비우를 폴란드인의 문화 중심지로 가꾸어갔다. 하지만 동시기 유대인과 우크라이나인도 도시의 상당수를 점하고 있었기에 리비우는 이들의 문화중심지, 그리고 특히 우크라이나인 민족운동 본거지 역할도 겸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도시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처음엔 그 방식이 극단적이진 않았기에 1차 세계대전 전까진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은 전반적으로 서로 큰 대립없이 공존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두 민족은 도시의 민족적 정체성을 두고 크게 다투기 시작했다.
리비우의 근세사가 영광을 누리던 한 다민족 국가의 흥망과 함께한 역사였다면, 근대사는 상기한 바와 같이 나라 없는 두 민족의 공존과 대립의 역사였다. 이런 역사를 지나는 동안, 리비우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갈망의 도시였고 냉전 말 도시가 드디어 우크라이나인의 품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커지자 도시엔 우크라이나인들이 몰려들어 현재 도시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우크라이나인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 그리고 현 우크라이나가 서쪽의 우크라이나인, 동쪽의 러시아인으로 나뉘어 대립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시의 다수가 우크라이나인으로 구성된 역사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리비우는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우크라이나인들과 가까운 도시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어쨌든, 이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가진 도시의 좀 더 자세한 역사는 다음 문단부터 기술하겠다.
지배자들이 그들의 언어로 도시를 부름에 따라 도시의 이름도 자주 바뀌었다. 따라서 이 장에선 리비우의 이름을 도시를 지배하는 세력이 바뀜에 따라 그들의 언어로 도시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기술하도록 하겠다. 기본명칭이자 우크라이나인들이 부르는 이름인 리비우를 기본으로, 폴란드인들은 이 도시를 르부프(Lwów)라 부르고 오스트리아인(독일인)은 렘베르크(Lemberg)[5] 러시아인은 리보프(Львов)라 부른다. 라틴어 표기는 레오폴리스(Leopolis)이고,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서는 이를 자국어로 변형해서 레오폴리스(Leópolis), 레오폴리(Leopoli)라고 부른다.

1.2.1. 초기, 루테니아 왕국의 지배 (1256~1349)


6세기 경부터 이 지역에 마을이 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1256년 루테니아의 왕이었던 갈리치아의 다닐이 이 지역에 도시를 세우면서 리비우의 도시로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도시의 이름은 다닐의 장자였던 레프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1261년 리비우는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룬다이가 이끄는 몽골군의 침입을 받아 파괴되고 말았다. 1270년 다닐의 후계자 레프는 도시를 재건했고 리비우를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루테니아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당대 우크라이나 지역에 도시가 얼마 없던 데다 얼마 전까지 최대의 도시였던 키예프가 1240년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사실상 사라지면서 리비우는 일대 최대의 도시이자 무역 중심지로서 기능했고 독일인 아르메니아인 등을 포함한 수많은 상인들의 터전이 되었다. 또, 당시 기근을 겪던 크라쿠프에서 피신해 온 폴란드인들이 대거 리비우에 자리잡으면서 인구도 크게 늘었다. 1323년 루테니아 로마노비치 왕조의 대가 끊기자 이 지역은 피아스트 왕가의 일원이던 마조프셰의 볼레스와프 예지 2세에게 주어졌다.[6] 그가 사망하자 이 지역의 권리는 볼레스와프의 사촌이자 당시 폴란드 왕이던 카지미에시 3세(카지미에시 대왕)에게 돌아갔지만 현지 귀족들은 리투아니아 대귀족이던 드미트로 데코(Dmytro Dedko)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뽑았고 이 사실에 열받아 루테니아를 침공한 폴란드군을 격퇴했다. 1349년 데코가 죽자 카지미에시 3세는 드디어 리비우(르부프)를 포함한 적루테니아 전체를 얻을 수 있었다.

1.2.2. 폴란드의 지배 (1349~1772)


1356년 카지미에시 대왕은 도시에 마그데부르크법에 의거한 도시 특권을 주었다. 시 의회를 설립하고 시장을 따로 뽑을 수 있게 된 시민들은 도시 발전을 가속화했다. 르부프는 흑해와 발트해 무역권 한 가운데에 위치하는 도시로서 두 무역권을 연결하며 수많은 상품들이 거쳐감에 따라 부유한 도시가 되어갔다. 도시는 점차 다양한 민족들,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국제도시가 되어갔고 이에 따라 라틴어를 쓰는 카톨릭 성당,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정교회 성당이 모두 세워지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7] 로마 가톨릭, 아르메니아 가톨릭이 이 도시에 대주교를 두었다. 17세기 초, 르부프는 25,000명의 인구에 30개의 장인 조합을 가진 도시로서 그단스크, 크라쿠프와 더불어 연방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였다. 이 시기 도시의 요새화도 잘 이루어져 르부프는 연방 남서쪽의 주요 방어막이 되었다.
17세기 중순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쇠퇴가 가속화되면서 르부프도 여러차례 방어전을 치르게 되었다. 연방이 대홍수에 휩쓸리던 시기에, 카자크 반란이 루테니아의 자포로제 지역에서 발원한 탓에 도시는 반란군의 주요 타겟이 되었다. 1649년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가 이끄는 카자크 반란군에게 공격당했으나 함락되지 않았다. 뒤이어 1655년 연방을 침공한 스웨덴군이 르부프까지 내려와 도시에 공성전을 펼쳤고 위기에 처한 당시 연방의 왕 얀 카지미에시 2세는 르부프 라틴 성당에서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8]를 폴란드의 수호자이자 여왕으로 대관하며 국가 방어 의지를 다졌다. 이런 결의에 힘입어서인지, 1년의 공성에도 르부프는 떨어지지 않았고 전세도 바뀌어 연방은 각지에서 스웨덴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듬해 르부프는 트란실바니아군의 공격도 받았으나 역시 함락되지 않았다. 1672년 오스만 제국메흐메트 4세가 연방을 침공하여 르부프도 공성전을 받게 되었으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 연방은 전쟁에서 패했으나 도시는 함락되지 않았다. 3년 뒤, 연방이 약해졌다고 판단한 오스만에서 또다시 침공해 왔지만 폴란드에는 1674년 새로운 왕으로 폴란드 민족의 군신 얀 3세 소비에스키[9]가 즉위해 있었다. 오스만군은 이번에도 르부프를 포위 공격했지만 얀 3세 소비에스키가 도시 근처에서 훨씬 적은 군세로 오스만군을 크게 격파함에 따라(르부프 전투. 1675년 8월 24일) 오스만군은 물러나고 3년 전 패배로 잃은 영토도 어느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수많은 공성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연방에 충성하며 함락되지 않았기에, 도시의 새로운 모토는 '''Semper fidelis'''(언제나 충성한다)로 정해졌다. 하지만 1704년 대북방전쟁의 와중에 스웨덴의 카를 12세가 이끄는 스웨덴군에 역사상 처음으로 함락되어 약탈을 당하고 말았다.
연방의 국운은 기울어도 르부프는 함락당한 경험이 적은 데다, 새로운 건축물들이 많이 세워지면서 도시는 여전히 발전해갔다. 연방의 쇠퇴가 가속화되어 1772년 1차 폴란드 분할이 일어나는 지경에 처했을 때, 르부프(렘베르크)는 연방의 갈리치아 영토 상당부분과 함께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1.2.3. 오스트리아의 지배 (1772~1918)


렘베르크는 오스트리아의 구성국인 갈리치아 로도메리아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처음 오스트리아의 지배는 강압적이지 않아서 1773년에는 렘베르크 최초의 신문이 발간되기도 했다. 1784년에는 분할로 잠시 문을 닫았던 대학이 다시 열었고 강의는 폴란드어와 라틴어,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19세기부터 오스트리아 행정부는 지역 귀족들의 무능을 비판하며 도시의 게르만화를 진행했다. 이에 따라 교육기관들은 독일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독일, 체코인들이 도시로 상당수 이주함에 따라 1840년 경 도시는 폴란드-우크라이나인과 독일인이 양분하게 되었다. 도시에는 독일인을 우대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이런 행동으로 말미암아 렘베르크는 1848년 오스트리아 전역에 퍼진 혁명에 동참하여 게르만화에 반발하기도 했다. 놀란 오스트리아는 혁명이 진정된 후 렘베르크에 다시 폴란드어, 우크라이나어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이 시기, 도시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폴란드어 방언이라 할 수 있는 르부프 방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오스트리아의 통치는 점점 더 느슨해졌고 1861년에는 도시에 갈리치아 의회가 만들어졌다.
1866년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한 뒤 심각한 민족주의의 위협에 시달리자, 제국의 다른 피지배민족들의 땅과 더불어 갈리치아에도 1867년부터 광범위한 자치가 허락되었다. 게르만화는 중단되었고 폴란드어가 다시 도시의 주된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언론에 대한 검열도 취소되었다. 이와 함께 도시는 아름답게 가꾸어졌다. 많은 건물들이 새롭게 올라왔고 오스트리아의 통치에 크게 거부감이 없던 갈리치아인들은 오스트리아 스타일의 건물도 많이 지어 올렸다. 과거부터 번영하던 도시의 토대 위에 새로운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어 시가지를 형성했다. 또한 19세기 말 유럽 전역에 퍼진 벨 에포크의 분위기가 렘베르크에도 미쳐 도시에는 극장이 새로 생기는 등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했다. 같은 갈리치아에 속한 크라카우와 더불어 렘베르크는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폴란드 민족들의 문화적, 정치적 중심지로 기능했다. 이 도시는 폴란드인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본거지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인 역시 도시 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들의 문화를 보존해 나갔다. 우크라이나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어를 금지하고 우크라이나인의 자치, 문화적 자유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상당수가 렘베르크로 이동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렘베르크는 세계 최대의 우크라이나인 문화 유산 집합소가 되었다. 또한 경제, 문화, 정치 각 분야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단체가 세워졌다. 이 무렵, 유대인들도 도시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했으며 크라카우와 함께 갈리치아의 유대인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세계 최초의 이디시어(Yiddish)[10] 일간지가 렘베르크에서 발간되었다.
하지만 문화적 성장과는 별개로 도시는 경제적으론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였다.[11] 이에 따라 갈리치아의 농민들은 더욱 렘베르크로 몰려들었고 도시의 인구는 이렇게 좋지 않은 이유로 인해 크게 늘었다. 분할 당시 약 3만이던 인구가 1910년 196,000명이 되었고, 빈, 프라하, 부다페스트에 이어 제국에서 4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도시는 산업화의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고 무역 중심지의 타이틀도 잃어버렸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바르샤바, 독일 제국의 지배를 받던 포젠이 산업화를 통해 경제적으론 크게 성장하던 것과는 달리 렘베르크의 폴란드인들은 자치와 자유,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얻은 대신 경제적으론 힘겨워했다.
1914년 9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트리아를 몰아붙이던 러시아는 렘베르크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오스트리아는 도시를 탈환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붕괴가 확실해지자 1918년 11월 1일, 현지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독립하여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을 만들었고 렘베르크(리비우)를 이 나라의 수도로 삼았다.

1.2.4. 전간기 (1918~1939)


하지만 독립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 도시의 다수를 차지하던 폴란드인 역시 도시와 동부 갈리치아를 확보해 신생 폴란드에 붙으려 했고, 곧 우크라이나인들과 충돌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군 조직을 가지고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이 도시를 장악했고, 도시는 그대로 서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다. 충격에 빠진 폴란드인들은 곧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십대의 농민 자식들로 구성된 1400명의 우크라이나 주둔군은 이 봉기를 막을 수 없었고 폴란드인들은 도시의 대부분을 장악한 뒤 약 340명의 우크라이나인, 우크라이나인을 지지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그리곤 우크라이나인의 단체를 모두 폐쇄하고 체포하는 등 폭압적인 통치를 실시했다. 이런 와중 1919년 2월 14일 신생 폴란드군은 서우크라이나를 침공해[12] 갈리치아와 리비우를 점령했고 서우크라이나를 사실상 멸망시켰다. 우크라이나의 공산주의자들은 곧 소련에 구원을 요청했고 알다시피 전쟁은 소련과 폴란드 간 전면전으로 번진다. 폴란드는 소련의 반격에 크게 밀려 영토의 60%를 점령당했고 리비우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자신의 전공을 위해 탐내던 도시로 1920년 7월부터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세묜 부됸니가 지휘하는 소련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8월 중순 소련의 북서부 전선군이 바르샤바 전투에서 궤멸됨에 따라 리비우 공략에 들어가는 힘도 약해졌고, 리비우를 공략하던 소련군 역시 8월 말 폴란드군의 반격을 받아 격파되어 철수했다.
이후, 리가 조약으로 전쟁이 폴란드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르부프는 동부 갈리치아와 함께 다시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고 르부프 주의 주도가 되었다. 전간기 르부프는 수도 바르샤바에 이어 두번째로 중요한 문화, 경제 중심지였고[13] 타르기 프스호드니아(Targi Wschodnie, 동부 박람회)라는, 루마니아, 헝가리, 소련을 아우르는 주요 무역 박람회가 1921년부터 매년 르부프에서 열렸다. 1931년 경 도시의 인구는 31만에 달했고 그 중 63%가 폴란드인, 24%가 유대인이었으며 11%는 우크라이나인이었다. 폴란드 정부는 이 소수 우크라이나인들을 차별했다. 우크라이나인 학교들은 문을 닫았고 시 의회에 우크라이나인은 없었다. 우크라이나인을 도발하려는 목적에서인지 시 의회는 1918~1920년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폴란드인들을 기념해 행진 세레모니를 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빈에서 1929년 세워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집단(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은 르부프에도 영향을 미쳐 르부프의 폴란드인 경찰국장을 암살하기도 했다. 이것은 2차 대전기 도시에서 일어날 비극의 서막이었다.
정작 폴란드 제2공화국 시절의 르부프는 굉장히 가난한 지역이었다. 오헝 제국이 제국 내부 개발에도 버거워할 정도로 내부 사정이 복잡한 나라라서 갈리치아 개발을 방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르부프는 러시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계선 즈음에 위치해 있었다. 따라서 오헝 제국 입장은 더더욱 르부프를 방치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제2공화국의 르부프는 폴란드 정부가 열심히 개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서 루블린과 더불어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당시 폴란드는 비스와 강을 경계로 이른바 '폴란드A'로 불리는 비스와 강 서쪽의 '부자 지역(대표적으로 그디니아, 카토비체, 바르샤바, 크라쿠프, 우치 등)'과 '폴란드B'라고 불리는 비스와 강 동쪽의 '가난한 지역(르부프, 루블린, 빌노, 브제시치[14], 비아위스토크 등)'으로 나뉜 상태였는데 르부프는 '폴란드B'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그래서 르부프 시는 당시 사회주의 토지개혁을 부르짖는 폴란드 농민당의 최대 표밭이었다. 폴란드 농민당은 유대인과 폴란드인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우크라이나인에 대해서는 차별을 주장했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사회주의자에 가까웠지만 농민당과는 선을 그었다. 피우수트스키는 르부프 내의 우크라이나인이나 독일인도 이끌고 가려고 했지만 정작 피우수트스키는 르부프에서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

1.2.5. 제2차 세계대전 (1939~1945)


르부프는 9월 12일 독일 제1산악사단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르부프는 폴란드와 루마니아 국경지대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지휘부는 폴란드군의 루마니아 철수를 위해 르부프를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르부프는 일주일 넘게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는데, 9월 20일 르부프에 당도한 소련군이 독일군으로부터 자리를 넘겨받고 르부프를 공격했다. 결국 9월 21일 도시는 소련군에 항복했다. 커즌 선에 따라 폴란드 동부를 차지한 소련에 의해 르부프는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르부프를 점령하던 소련군은 도시 내 우크라이나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군의 르부프 점령을 환영했다. 하지만 소련은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모두를 억압했고 1940년에만 약 3만명의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들이 도시에서 쫓겨나 소련 내륙으로 이송되었다.

리비우에서 소련 NKVD가 벌인 학살.

리비우에서 독일군이 벌인 유대인 박해를 촬영한 영상.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 리비우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다. 독일 국방군이 도시에 당도하기 전, NKVD는 리비우의 두 정치범 수용소에서 남아있던 제소자 약 8000여 명을 처형했다.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침공을 환영했다. 이들은 과거 오스트리아의 지배 시절을 떠올리며 독일 역시 마찬가지로 관용적인 정책을 베풀어 주고 폴란드와 소련의 통치에서 자신들을 해방시켜주리라 믿었다. 6월 30일 도시가 독일에 함락되자 OUN은 리비우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정부의 복원을 선언했는데, 이와 함께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유럽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협력하기로"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나치는 우크라이나인의 해방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9월에 스테판 반데라, 야로슬라프 스테츠코 같은 OUN 고위인사들을 모두 체포해 강제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지하로 들어간 OUN은 더욱 극단적으로 변해서 나치, 폴란드인, 소련 모두와 싸우기 시작했다. 폴란드인 지식인이 처형되고 무작위 일제검거가 일어나는 등 나치의 통치는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모두에게 가혹했다. 이는 소련의 통치보다 훨씬 잔혹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도 유대인들만큼 고통스럽진 못했다. 르부프는 바르샤바, 우치에 이어 폴란드에서 세번째로 큰 유대인 공동체로, 전쟁 직전 도시의 유대인 인구는 약 11만으로 불어났다.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뒤, 폴란드 서부의 많은 유대인들이 르부프로 탈출함에 따라 독일군 점령 직전 유대인 인구는 무려 22만에 달했다. 하지만 르부프마저 독일에 점령당하자 이들 유대인들에겐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르부프 주둔 SS사령관은 가장 악명높은 살인마 중 하나였던 SS 집단지도자[15] 프리츠 카츠만(Fritz Katzmann)이었다. 도시를 점령한 독일은 우선 NKVD가 정치범 수용소에서 학살을 벌일 때 유대인들이 협력했으며 희생자는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선동했다. 물론 실제로는 소련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모두가 NKVD 학살의 피해자였다. 하지만 선동에 넘어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반 유대인 성향의 시민들이 르부프의 폴란드계 유대인을 닥치는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총은 기본이요 몽둥이, 칼 등 현지인이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무기가 동원되어 학살이 행해졌다. 이와 함께 아인자츠그루펜 역시 도시의 유대인을 학살하여 한 달이 안되는 기간에 약 1만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했다. 역사는 이를 르부프 포그롬(Lviv pogroms)이라 하는데, 폴란드 타 지역에서의 유대인 학살과 달리 현지인들이 주가 되어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11월 8일 르부프 교외 자마르스티니프(Замарстинів) 구역에 게토가 만들어졌고 약 12만명의 유대인들이 게토에 수용되었다. 게토로 이동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페우테브나(Pełtewna)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이 다리에 서 있던 SS들은 걸음걸이가 느린 노인, 장애인들을 그 자리에서 총살했고 약 5,000명의 유대인들이 이 다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다른 게토들과 마찬가지로 르부프 게토의 상황 역시 끔찍하기 짝이 없었으며 게토의 유대인들은 독일인 식량 배급의 10%만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했다. 첫 절멸수용소 이송이 이루어지기까지 약 4개월의 기간동안 1만명이 질병과 기아로 사망했다. 르부프 게토는 절멸수용소 이송이 가장 빨랐던 게토 중 하나로 1942년 3월 15,000명의 유대인이 베우제츠 절멸수용소(Belzec extermination camp)로 이송되었다. 그 뒤 8월 약 5만명의 유대인들이 추가로 베우제츠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1943년 1월에는 프리츠 카츠만의 지시로 약 2만명의 유대인과 유대인 경찰 전부가 도시 근교에서 총살당했다. 1943년 6월 나치는 게토를 없애기로 했는데 남아있던 12,000명의 유대인들은 게토 속에 숨겨져있던 피신처로 숨고 일부는 발악적인 저항을 했다. 나치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은신처를 불로 태워 많은 유대인들을 산 채로 태워 죽였다. 극히 일부만이 하수도를 통해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며, 르부프 게토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은 유대인은 '르부프 임시 유대인 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823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1944년 6월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폴란드 이동의 독일군이 전면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의 폴란드 영내 진입이 눈앞에 다가오자 소련군보다 먼저 폴란드 주요 도시를 자력 탈환하고 폴란드 독립국가를 세울 목적으로 영국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폭풍 작전'에 따라 폴란드 지하국가(Polskie Państwo Podziemne, 속칭 PPP)에 폴란드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르부프에서도 1944년 7월 21일 PPP의 주력인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속칭 AK)을 중심으로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4일의 전투 끝에 국내군은 도시를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해방 직후 도시를 점령한 소련군은 이들의 봉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봉기에 참여한 국내군에게 소련 지휘하의 폴란드군에 편입될 것을 강요했으며 따르지 않은 국내군을 모두 체포해 굴라그로 보냈다. 르부프에서 전쟁은 끝났지만 결과는 결코 해피 엔딩이 아니었다.

1.2.6. 전후 (1945~ )


전후 폴란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그대로 소련의 구성국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도시의 폴란드인들은 모두 추방되었고 추방된 이들은 주로 폴란드가 새로 획득한 독일 영토에 정착했다.[16] 전후 리비우는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압적인 러시아화가 진행되었으나 스탈린 사후 이 정책은 완화되었고 리비우는 서부 우크라이나의 문화중심지로 다시 기능하게 되었다. 50~6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도시에 수많은 공장과 발전소가 세워짐에 따라 도시의 인구는 다시 크게 늘었다. 이 중 리비우 자동차 공장도 있었는데, 무려 30,0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며 소련에 공급되는 대부분의 버스를 생산했다. 공업화는 도시에 경제력을 부여하긴 했지만 도시의 서구적인 색체를 일부 지워냈다. 1980년대 말 소련이 개혁개방정책을 시행할 때, 리비우는 소련으로부터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요구하는 우크라이나 국민운동(People's Movement of Ukraine, Ру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리비우의 인구 대다수를 우크라이나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1991년 소련 해체 후, 리비우는 독립 우크라이나의 도시로서 약 600년만에 다시 우크라이나인의 품으로 돌아왔다. 도시는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주요 문화중심지로서 우크라이나인의 문화를 잘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은 서구적인 도심지를 가지고 있다. 1998년 유네스코는 동유럽과 서유럽의 문화가 조화롭게 융화되었다는 점, 이 도시가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들의 문화적 중심이 되었다는 점을 인정해 리비우 구시가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2014년 우크라이나 위기로 키예프를 포함한 나라 동부가 혼란에 빠졌을 때 리비우는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우크라이나인이 압도적 다수라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리비우가 오랫동안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의 중심지였음을 고려하면 현재 리비우는 앞서 역사 장 인트로에서 언급했듯 서부의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정신적으로 가장 가까운 도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1.3.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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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비우 오페라 하우스
리비우는 구시가지와 문화 유산이 매우 잘 보존된 도시이다. 현대 리비우 시의 도심은 구시가지를 거의 그대로 개조한 것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 관광하기에 더욱 편리하다. 역사적으로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은 도시라 한국에는 나름대로 유명해진 폴란드의 역사도시 크라쿠프와 비슷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다만 그 역사적인 중요성에 비해서 리비우는 크라쿠프보다는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편인데, 프라하-빈-부다페스트-크라쿠프로 이어지는 한국인들의 중부유럽 주요 여행코스에서 리비우는 너무나 많이 비켜나 있다. 따라서 리비우에는 유럽 관광객은 좀 있지만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 관광객은 매우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돈바스 전쟁이 일어나 대한민국 외교부에서는 리비우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전역을 여행 자제 지역으로 지정했는데, 비교적 영향이 적음에도 같이 여행 자제로 묶인 서부의 리비우[17]가 앞으로 한국의 관광객들에게 그 진가가 드러내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여행자 보험 받기도 상당히 까다로운데, 리비우에서 동부 우크라이나까지 가려면 기차타고 하루종일 가도 모자른 상황인데도, 여행자 보험 회사들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전역을 싸그리 묶어서 여행자 보험 신청조차 안 받아준다.
가는 방법은 쉽지 않다. 기차를 타고 간다면 크라쿠프와 부다페스트에서 직통으로 갈 수 있는데, 크라쿠프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야간열차로 새벽 4시 경 이루어지는 국경검문 포함 약 7시간 반 정도 걸리며 매일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여름 기준으로 아침에 출발해 저녁에 도착하여 하루 일정을 모두 날려버리는 것, 그리고 초저녁에 출발해 다음날 오전에 도착하는 야간열차 이렇게 두 편이 있으며 모두 13시간 반 정도 걸린다. 물론 폴란드와 헝가리, 슬로바키아의 다른 도시에서도 시간표를 확인해 기차편을 요리조리 연결해서 갈 수 있지만 역시 하루 일정 전체를 잡아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따라서 크라쿠프에서 들어가는 편이 '일정상'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가격은 가장 싼 침대칸도 50,000원 정도로 비싼 편이다. 크라쿠프에서 출발하는 훨씬 저렴한 야간 버스도 있다. 물론 교통 스케줄은 매년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여행하시는 분이 직접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항공편 가격이 예전에 비해 더 저렴해졌기 때문에 항공편으로 리비우 시를 방문하는 방법도 적어본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이스탄불 공항을 이용하여 터키항공 직항 비행기로 리비우 시를 여행가는 코스를 추천한다.[18] 이스탄불 사비하 괵첸 국제공항에서 리비우로 직항하는 페가수스 항공 비행기가 있긴 하지만 한국 사람 입장에서는 사비하 괵첸 공항을 이용하기에는 거리 문제상 좀 껄끄럽다.[19] 터키 이스탄불이나 폴란드 바르샤바 이외에 다른 나라 다른 도시에서 항공편으로 리비우 시로 이동하게 될 경우에는 대게 우크라이나 국제항공을 통해서 키예프를 경유하여 이동하는 것도 좋은 옵션이다.[20]
공항에서 도심으로 택시로 이동하는 경우,[21] 5배 이상 바가지 쓰기 싫다면 무조건 우버나 얀덱스 앱으로 택시를 잡아야 한다.[22] 우크라이나의 택시 기사들은 우크라이나어나 러시아어를 못하고 영어만 하는 관광객들을 아예 대놓고 호구로 보며, 심지어 혼자 택시에 타는 외국인 여자 승객의 몸을 더듬는 개객기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23]
1박 2일이면 넉넉하게 주요 관광포인트를 둘러볼 수 있다. 다만 첫날 저녁에는 꼭 발레 감상을 일정에 넣도록 하자. 리비우 오페라 발레 극장에서 믿을 수 없는 가격으로(3000원~가장 좋은 좌석도 우리 돈 20,000원 내외) 수준 높은 발레를 볼 수 있다. 다만 7월 중순~8월 중순까지는 유럽의 다른 극장들과 마찬가지로 스케줄이 없으니 주의하기 바란다. 도시의 치안은 전반적으로 안정된 편이다.[24] 소매치기는 보기 힘들며, 마트에서 먹을 걸 사서 호텔로 돌아올 때 특정 확률로 뜬금없이 행인 한명이 나타나서 한입만 달라고 귀찮게 구는 정도이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비해서 숙박비를 비롯한 여행물가가 훨씬 저렴한 편이다. 2019년 1월 기준으로 도심 호텔 레스토랑의 런치세트는 100흐리브냐(4천원...) 정도.

1.3.1. 근교(?) : 체르니우치 & 카미아네츠-포딜스키


체르니우치: Чернівці́, Chernivtsi / 카미아네츠 포딜스키: Ка́м'яне́ць-Поді́льський, Kamianets-Podilskyi
리비우 남쪽으로 약 250km 떨어져 있어 리비우 근교라고 말하기엔 모호하나, 주변에 중심이 되는 도시가 리비우밖에 없기 때문에 이곳에 설명한다. 서부 우크라이나를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꼭 여행해 볼 만한 곳으로, 체르니우치에는 잘 보존된 구 시가지와 2011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체르니우치 대학이 있다. 체르니우치에서 북동쪽으로 약 70km 떨어진 카미아네츠 포딜스키는 14세기에 지어진 성이 있는 곳으로, 루테니아인들이 세운 성채 중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다. 해외 매체에서 우크라이나 베스트 여행지를 소개할 때 꼭 들어가는 곳으로,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이 지역만의 스타일로 지어진 성이기에 굳이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번 가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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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니우치 신학 대학은 19세기 부코비나와 달마치아 대주교가 살던 궁전으로 궁전 앞 양 측면에 두 개의 정교회 성당이 있는데, 체르니우치 주변 지역의 건축양식이 모두 혼합되어 매우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성당 중 하나는 비잔티움 건축 방식으로 지어졌고 다른 두 건물들은 고딕 양식과 바로크 양식이 혼합되어 있고 빈~트란실바니아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무늬로 수놓아진 박공 지붕을 쓰고 있다. 주변 지역의 영향을 받은 외관과는 달리 인테리어는 루테니아 양식 성화가 가득 그려져 있어 상당히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2011년 그 독특함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도 체르니우치는 구시가지가 잘 보존된 소도시로 반나절 쯤 거닐기 좋으며 구시가 곳곳에 광장과 동상, 정교회 성당이 있고 아르메니아 현지가 아니면 보기 힘든, 특유의 연필심 같은 지붕을 가진 아르메니아 정교회 성당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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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아네츠 포딜스키는 성 자체도 아름답지만 푸른 녹음과 어우러진 전원적인 우크라이나 시골의 모습을 보여준다. 성과 함께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키예프까지 가지 않는다면, 리비우에서 체르니우치로 간 다음 숙소를 잡고 하루는 체르니우치를 둘러보고 다음날은 카미아네츠 포딜스키(이하 KP)를 둘러본 후 체르니우치로 돌아와서 다시 리비우로 가는 일정이 좋다. 체르니우치와 카미아네츠 포딜스키를 연결하는 버스는 30분~1시간 간격으로 자주 있고 약 두어 시간 쯤 걸리는데, 아침 일찍 KP로 가서 한나절 동안 성과 마을을 둘러보고 체르니우치로 돌아온 후 오후 기차를 타고 리비우로 돌아가면 된다. 성의 야경이 아름다우니 리비우에서 버스를 타고 바로 KP로 가 첫날 KP를 둘러본 뒤 다음날 체르니우치로 가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KP에는 부킹닷컴에 올라온 저렴한 숙소도 여럿 있다. 다만 개인 짐은 어떻게 할 지, 숙소는 어떻게 할 지 여행하는 분이 각자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리비우에서 체르니우치로 가는 기차는 아주 아침 일찍 있거나(새벽 5시 50분) 저녁에 있어 도착하면 밤 11시가 되는 등 시간표가 좋지 못하다. 우크라이나 열차 시간표는 들쭉날쭉하므로 반드시 확인해 보고 가야 할 것이며 기차가 여의치 않으면 아침 버스도 있기에 이것을 활용하면 될 것이다. 리비우에서 KP로 바로 가는 기차는 없다. 다만 KP행 버스는 이른 아침에 두어 편 있다. 키예프까지 여행할 분이라면 리비우-체르니우치-키예프로 일정을 짜거나 그 반대로 하면 될 것이니 이 부분에 대해선 여행하는 분이 각자 생각을 해 보기 바란다.
교통편은 버스편우크라이나 철도청에서 확인하면 된다.

1.4. 정치


이곳은 전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주의가 가장 강한 곳이다. 우크라이나 서부는 2차대전 이전에는 러시아나 소련의 영토였던 적이 없었고,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과 다르게 러시아인들과 같이 살아보거나 러시아어를 쓰거나 했던 경험이 없다. 도시 근교로 조금만 이동해도 러시아어가 아예 하나도 안 통한다. 반러감정이 우크라이나, 아니 세계에서 가장 강한 곳 중 하나로 구시가지의 재래 시장에 나가보면 푸틴의 얼굴이 그려진 화장실 휴지를 많이들 팔고 있다(...).
흔히 러시아인들이나 러시아 시각에서 쓰여진 역사책에서는 서부 우크라이나가 친폴란드적이라는 선입견이 존재하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폴란드에 대해서도 썩 우호적이지 못하다. 폴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에도 좋지 못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
반폴란드, 반러시아 성향을 가진 극우 정당 자유당의 지지도가 높은데, 폴란드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 대통령이 서부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극우 청년한테 계란을 맞았다.
2019년 대통령 결선에서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전 지역에서 이기는 동안 재외국민과 함께 페트로 포로셴코가 이긴 지역이기도 한다.

1.5. 여담


도네츠크에 기반을 둔 FC 샤흐타르 도네츠크유로마이단의 여파로 일어난 돈바스 전쟁으로 2014년 이후 동부 돈바스 지역이 친러 분리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자 도네츠크 대신 이곳 리비우에서 홈경기를 치르고 있다.
공업이 발달하지 않고 농업이 주 산업인 우크라이나 서부 특성상, 우크라이나 서부 전역의 대학생들이 리비우로 몰려든다. 우크라이나어를 전혀 몰라도 도심지에서는 영어만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고전배우 폴 무니, 영화감독 안드레이 줄랍스키가 이곳에서 출생했다.

2. 우크라이나의 주



리비우 주 (우크라이나)

Львівська область. 위의 리비우를 포함하는 우크라이나의 주. 주도는 리비우.
인구는 2,534,174명(2016년), 면적은 21,833 km2이다. 폴란드 국경과 바로 붙어있으며,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 신도가 많지만 그렇다고 딱히 폴란드에 우호적인 지역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동부보다 토질이 척박하고 제조업도 덜 발달한 관계로 우크라이나 내에서도 비교적 가난한 지방에 속한다.

[1] 2008년 등록확장[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4] 보다 큰 도시는 키예프, 하르키우, 오데사, 드니프로, 도네츠크, 자포리자 순이다. 모두 우크라이나 중~동부에 있다.[5] 다만 요즘은 렘베르크라 부르기보다는, 그냥 우크라이나어를 음역해서 Lwiw(르비프)라 부른다.[6] 루테니아의 공주였던 갈리치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 따라서 루테니아 왕국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1323년부터 1340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정교회로 개종하고 이름도 유리로 바꿔 루테니아 통치를 시작했지만 현지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귀족들은 그를 잡아 가둬버리기도 했다.[7] 현재도 리비우를 중심으로 우크라이나 최서단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으며, 우크라이나 서부에 약 500만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다.[8] 폴란드 가톨릭 최고의 성물로 실롱스크 주 쳉스토호바의 야스나 고라 성당에 모셔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폴란드 항목의 종교 장을 참고하기 바란다.[9]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잘 알다시피 그는 1683년 9월 12일 비엔나를 공성하던 약 15만의 오스만군을 크게 쳐부수고 오스트리아를 구원했다.[10]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쓰는 언어이다. 아슈케나짐 유대인은 알자스~러시아에 걸쳐 중, 동부 유럽에 기반을 둔 유대인 그룹으로 홀로코스트 당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이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600만명을 포함해 전 세계에 약 1200만명이 살고 있다.[11] 폴란드 분할 이후에도 여전히 귀족, 지주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각종 개혁의 물결이 이곳까지 미치지 못했고 농민들에 대한 교육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데다 지역 자체가 워낙 척박하여 농사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국 중심부와 갈리치아를 잇는 교통망 건설에도 실패하여 갈리치아는 점점 더 고립되고 무역의 혜택도 줄어갔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각종 산적한 국내 문제로 인해 산업화에 큰 관심을 보일 수 없었는데, 갈리치아는 그 작은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이전부터 척박한 땅 때문에 만성적으로 이어지던 갈리치아의 빈곤은 19세기 말 절정에 달했다.[12]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서막이다.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지만, 폴란드와 소련 간 전면전이 발생할 것이라고는 당사자들 그 누구도 전쟁 당시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폴란드의 예상과는 달리 소련은 우크라이나의 공산주의자들을 전면적으로 지원했고 전쟁은 소련과 폴란드간 전면전으로 번졌다. 전쟁의 원인은 폴란드의 고토 수복 욕망, 그리고 소련이 공공연하게 설파하던 '혁명 이념의 수출'에 대한 예방 등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제 3국의 국민이 두 나라의 책임 여부를 단정하기는 어렵다.[13] 오스트리아의 지배기간 동안 르부프는 크라쿠프를 추월해 갈리치아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14] 현 벨라루스 브레스트인데, 프랑스 브르타뉴 레지옹의 브레스트하곤 엄연히 다른 도시이다![15] Gruppenführer. 중장에 상응.[16] 상당수의 시민이 폴란드가 새로 얻은 실롱스크의 최대도시 브로츠와프에 정착했는데 이를 주제로 한 씁쓸한 농담이 있다. A: 자네 말투가 왠지 낯설지가 않구만. 어디에서 왔나? B: 브로츠와프에 살아. A: '''이런 우연이 있나! 나도 르부프 출신인데!'''[17] 론리플래닛 동유럽판에서도 유로마이단 이후 우크라이나 동부와 크림 반도의 여행 정보는 빼 버렸지만,(즉 론리플래닛 편집진이 판단하기에도 그 지역들은 관광객이 갈 상황은 아니라고 본 것) 키예프와 리비우는 남아서 계속 갱신되고 있다.[18]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항공을 통해 직항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다.[19] 기내식이나 이동거리를 함께 계산하면 이스탄불을 통해서 터키 항공을 이용하는 게 더 저렴하다.[20] 참고로 우크라이나 국제 항공은 트립 어드바이저 리뷰가 악평이 많긴 하지만, 대부분 장거리 노선인 뉴욕-키예프-델리 노선의 운영 미숙 문제이며, 단거리 노선의 경우는 한국인 입장에서 익숙한 동남아 저가 항공사에 비해서는 훨씬 훌륭한 편이다.[21] 17분 정도 소요.[22] 4천원에서 7천원 사이가 적정 가격이다.[23] 우버 택시나 얀덱스 택시 같은 경우에는 택시 기사에게 별점 평가를 매기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이런 개객기 기사는 금방 퇴출당한다.[24] 다만 몇몇 젊은 남성들이 종종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째려보는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