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프강 오베라트
1. 개요
독일의 축구선수로 1. FC 쾰른에서만 커리어를 보냈다. 귄터 네처와 경쟁했던 독일 역사상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62년에 1. FC 쾰른에 데뷔한 오베라트는 1년만에 팀의 핵심 선수로 성장하면서 1963-64 시즌 분데스리가 출범 후 30경기 8골을 기록하며 초대 우승컵을 쾰른에게 안겨주었다. 오베라트는 그 후에도 쾰른의 게임을 만드는 플레이메이커로서 맹활약했으며, 1967-68 시즌 클럽 최초의 DFB-포칼 우승을 이끌었다.
오베라트는 1977년까지 해외 클럽들의 러브콜에도 불구하고 쾰른에서만 549경기에 출전해 초대 분데스리가 우승, 특히 은퇴 시즌에 통산 DFB-포칼 우승을 차지하며 은퇴한다.
2.2. 국가대표 경력
쾰른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었던 오베라트는 서독 국가대표에도 승선한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우베 젤러,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우루과이, 소련을 격파하고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잉글랜드와의 결승전에서 제프 허스트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하여 2:4로 패배 준우승에 그친다.
이후 오베라트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확고한 주전으로 활약하고, 서독은 오베라트의 활약에 힘입어 3전 전승으로 8강에 진출하지만 디펜딩 챔피언이자 4년 전 결승전에서 패배를 안겨준 잉글랜드를 만난다.
노장 보비 찰튼에게 밀리던 서독이었지만 찰튼이 교체된 이후 베켄바워의 맹활약으로 승부를 뒤집는데 성공하며 역전승을 거두며 4강에 진출하지만 4강에서 이탈리아에게 연장 접전 끝에 패하고 만다. 이후 3·4위전에서 오베라트는 우루과이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어 서독이 3위를 차지하는데 공헌을 한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오베라트는 1차 리그에서 호주를 상대로 골을 넣어 3:0 승리에 공헌했고, 2차 리그에서 스웨덴을 상대로 동점골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으며 서독은 2차 리그에서 3승을 거두며 결승전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였다. 경기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페널티 킥을 허용하고 네스켄스에게 페널티 킥 선제골을 내줘 0:1로 끌려갔으나, 파울 브라이트너의 페널티 킥 동점골과 게르트 뮐러의 결승골로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3. 플레이 스타일
오베라트는 왼발의 예술가라고 불릴만큼 강력하고 정교한 왼발 킥을 갖추었던 플레이메이커였다. 또한 오베라트는 환상적인 슈팅과 패스 뿐만 아니라 활동량도 뛰어나 오베라트의 수비가담과 스피드는 서독에게 큰 힘이 되었다.
4. VS 귄터 네처
우베 젤러로부터 주장 완장을 이어받아 프란츠 베켄바워 이전까지 주장을 역임했다.
당대 독일에서 그와 함께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였던 귄터 네처와의 경쟁 관계로 유명했다. 오베라트가 네처보다 한 살 많았다.
이들의 경쟁 관계는 산드로 마촐라와 지아니 리베라와의 경쟁 관계와 비슷하다. 볼프강 오베라트가 산드로 마촐라처럼 기동성, 체력적으로 우위를 점했고 귄터 네처가 지아니 리베라처럼 기술적, 패싱력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평가받지만, 두 선수 모두 기본적으로 기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뛰어난 선수들이었다.
1960년대 후반 오베라트와 네처가 분데스리가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 헬무트 쇤은 이 두 플레이메이커를 공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 둘의 공존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쇤 감독은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의 주전 플레이메이커로 오베라트를 선택했다. 오베라트는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며 그해 발롱도르 투표에서 5위를 차지했고, 쇤 감독은 오베라트를 서독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임명했다.
네처는 비록 대표팀 주전에서 탈락했지만 리그에서 활약을 이어갔다. 국가대항전이 없었던 1971년 네처는 클럽에서의 활약만으로 발롱도르 투표 4위에 올랐다. 사실 클럽에서의 커리어는 오베라트보다 네처가 앞서 있었다. 오베라트가 분데스리가 중위권팀이었던 쾰른 소속이었던 반면, 네처는 당시 FC 바이에른 뮌헨과 분데스리가를 양분하고 있던 명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소속이었다. 네처가 오베라트에 비해 팀빨을 받았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반대로 네처의 활약이 묀헨글라트바흐가 바이에른 뮌헨을 젖히고 2년 연속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대표팀에서 오베라트와 네처의 경쟁도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던 와중 UEFA 유로 1972를 앞두고 오베라트가 부상을 입게 되고, 결국 네처가 유로 1972의 주전 플레이메이커로 발탁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대표팀 주장직도 프란츠 베켄바워에게 넘어가고 만다. 오베라트에 비해 정교한 패싱 능력이 뛰어났던 네처는 유로 1972에서 맹활약했다. 네처는 현란한 패싱으로 베켄바우어와 함께 경기를 조율했고, 서독 대표팀은 다른 우승 후보들을 여유있게 누르고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유로 1972의 맹활약으로 1972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공동 2위에 오르는 등 유럽을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가 되었고, 마침 클럽에서 헤네스 바이스바일러 감독과 불편한 사이였던 네처는 유로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 된다.
그러나 UEFA 유로 1972 이후 네처는 부상으로 반 시즌 정도를 날리게 되었고, 다시 오베라트가 대표팀에 승선하게 된다. 네처가 부상에서 회복된 후 1974년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우승을 노리던 서독 국가대표팀의 쇤 감독은 다시 오베라트와 네처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서독 국민들은 UEFA 유로 1972에서 강한 임팩트를 남긴 네처를 선호했으나 1974 서독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발탁된 이는 오베라트였다. 사실 네처는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 부진에 빠져 있었다. 유로 1972에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이후 자기 관리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1974 서독 월드컵에서 네처는 서독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동독전에만 출장했고[1] , 나머지 경기에는 모두 오베라트가 주전 플레이메이커로 출전했다.
[1] 서독-동독전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는데, 당시 상황상 서독은 동독에게 지고 조2위로 8강 리그에 오르는 것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결국 서독은 동독에게 지고 8강에서 유고슬라비아, 스웨덴, 폴란드와 같은 조가 되어 비교적 여유있게 결승전에 오르게 된다. 반면 서독을 이기고 조1위가 된 동독은 8강에서 네덜란드, 브라질, 아르헨티나와 같은 조가 된다. 다만 이 경기는 서독과 동독 대표팀간의 처음이자 마지막 A매치였는데, 서독에게 최대의 군사적 위협이 되고 있었던 동독에게 패한 것에 대해 분개하는 서독 국민들도 많았고 때문에 헬무트 쇤 감독은 동독전 패배 후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