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트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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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축구선수 출신 코치. 선수 시절 포지션은 최전방 공격수. 익히 알려진 'der Bomber(폭격기)', '득점 기계'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과 바이에른 뮌헨소속으로 각종 대회에서 수많은 득점 기록을 보유한 전설적인 스트라이커. 은퇴후 1992년부터 FC 바이에른 뮌헨 II 수석코치를 맡아오다 2014년 건강문제로 물러난후 2015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다.[3]
70년대 경이로운 누적 득점 커리어를 쌓으며 수많은 우승을 이뤄냈다. 분데스리가 통산 최다 득점자(365골)[4] 이자 분데스리가 단일 시즌 최다 득점 1,2,3위 기록을 독식하고 있다[5] . 그리고 분데스리가 득점왕 7회에 오르며 리그 최다 득점왕 기록도 보유중이며[6] , 유러피언컵[7] 득점왕 역시 4회나 기록했다. 또한 바이에른 뮌헨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565골)[8] 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러피언컵, 월드컵, 유로 대회에서 우승과 득점왕을 모두 차지한 역사상 유일한 선수이자, 역시 역사상 유일하게 해당 대회 모두에서 우승을 결정짓는 결승전의 결승골을 기록한 선수이다. 또한 호나우두가 2006년 월드컵에서 경신[9] 하기 전까지 32년간 월드컵 통산 최다 골 기록(14골)을 보유했었다.[10] A매치에선 62경기 68골로 경기 수보다 골 수가 더 많을 정도이다.[11]
1970 멕시코 월드컵에서 10골을 몰아치며 대회 득점왕에 올랐고 이 활약으로 그 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프란츠 베켄바워, 제프 마이어 등과 함께 서독의 유로 1972, 1974년 월드컵 연속 우승[12] , 70년대 바이에른 뮌헨의 유러피언컵 3연패와 분데스리가 4회 우승을 합작하며 서독 대표팀과 바이에른 뮌헨의 최전성기를 활짝 열었다.
2. 선수 경력
2.1. 초창기
1945년 11월 3일, 독일 뇌르들링겐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축구를 좋아했고,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항상 축구를 했죠." 그리고 그는 항상 뉘른베르크에서 뛰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출신 지역 팀인 뇌르들링겐에서 1963년 데뷔했는데, 몸담은 2시즌 동안 리그에서 31경기 51골을 기록했다.
2.2. FC 바이에른 뮌헨
그리고 1964년, 그의 재능을 알아본 스카우터가 그를 스카웃해갔다. 그 팀은 다름 아닌, 당시까지는 분데스리가 신흥 강호로서 팀 몸집을 불리고 있던 바이에른 뮌헨이었다. 그리고 그는 팀에서 소중한 동료들을 만나는데, 그 동료들이 다름 아닌 프란츠 베켄바워와 제프 마이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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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 중 하나로 손꼽히는 1970년대의 바이에른 뮌헨'''
그 전까지만 해도 리그 우승이 1회에 불과했던 바이에른 뮌헨은 1970년대 이후 독일 축구의 제왕으로 등극한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지금과는 달리 세계 최고의 리그였다. 강력한 경쟁자로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가 있었는데, 당시에는 베르티 포크츠, 귄터 네처, 유프 하인케스 등이 버티는 독일 최강의 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에서 4회, DFB-포칼에서 4회 우승하는데, 이 때의 주역은 분명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였다. 베켄바워의 다큐멘터리는 이렇게 반복된다. "이 경기에서 프란츠 베켄바워가 잘했다. 그리고 게르트 뮐러가 결승골을 넣었다.(반복, 반복, 반복...)" 그야말로 게르트 뮐러가 없었다면 바이에른 뮌헨은 이러한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프란츠 베켄바워, 울리 회네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파울 브라이트너, 제프 마이어 같은 동료들이 모두 인정한 부분. 그야말로 바이에른 뮌헨의 구단 역사에서 최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분데스리가 득점왕 7회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2회'''로 당대 유럽 최고의 리그였던 분데스리가를 완전히 평정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정신나간 조합"을 내세운 바이에른은 1970년대 들어 마침내 유럽무대를 정복한다.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 우승. 그것도 '''3연패'''.[15][16]
챔피언스리그에서의 활약은... '''득점왕 4회'''로 설명이 끝난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클럽이 3연속 우승했던 때에 맞춰서 득점왕 역시 당시 전무했던 '''3연패'''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17] 챔피언스리그와 UEFA컵을 포함한 유럽 클럽대항전에서만 때려넣은 골이 '''69골'''. 2010년 말에 라울과 인자기가 경신하기 전까지 확고부동의 1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있는게 과거의 유러피언컵은 지금처럼 경기 수가 많지 않았다. 00년대 이후의 챔피언스리그는 조별리그 6경기에 결승까지 향하면서 7경기를 더 치러 13경기나 뛸 수 있다. 또한 90년대에는 퀄리파잉 라운드에 2차 조별리그까지 합쳐 굉장히 많은 경기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득점을 할 기회도 많았다. 그러나 뮐러가 활동하던 시기인 70년대의 유러피언컵은 모든 라운드가 토너먼트였고, 1라운드부터 결승까지 가는데 8~9경기밖에 치르지 않았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30년 가까이 깨지지 않은 기록을 작성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백미인 것이 바로 1972-73 시즌 작성한 '''단일 시즌 최다 골 기록(66골)'''.[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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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전설에게'''
리오넬 메시는 게르트 뮐러의 기록을 경신하고 그에게 자신의 사인과 "게르트 뮐러에게, 저의 존경을 담아"라고 적힌 유니폼을 보내며 경의를 표했다. 현재 이 유니폼은 바이에른 뮌헨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20] 게르트 뮐러는 리오넬 메시의 기록 경신을 대단히 축하하면서도, "그의 유일한 단점은 바이에른 뮌헨 선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라며 유머를 던지기도.
1978-79 시즌 이후 그는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게 된다. 당시 감독과의 불화가 있었고 전성기에서 내려오던 시점인 게르트 뮐러는 떠나기에 적절한 시기였다고 판단한 것 같다. 사실 FC 바르셀로나에서 그를 강력하게 원했다. 계약서까지 준비되며 사실상 입단이 확정되었지만, 무려 '''독일 정부'''에서 이적을 막았다. 그리고 바르셀로나는 그의 대체자로 영입한 사람들이 요한 크루이프랑 요한 네스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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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파견된 폭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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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에서 만난 인생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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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서 적으로'''
결국 미국의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로 이적한다. 처음 5경기 동안은 무득점이어서 많은 비판을 들었으나, 6번째 경기에 4골을 꽂아넣으며 폭격기는 다시 임무를 시작했다. 그렇게 미국에서도 2경기 1골이라는 놀라운 노익장을 과시하고 은퇴한다. 이 당시 조지 베스트와 함께 뛰기도 했다. 그러나 좋은 시너지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게르트 뮐러는 조지 베스트가 자신을 시기한 것 같다고 말한다. 조지 베스트는 스타가 되기를 즐겼으며 항상 팀의 중심이 되기를 원했다. 그런 상황에서 게르트 뮐러라는 스타가 있는 것은 조지 베스트에게는 성에 안 차는 일이었을 것이다. 조지 베스트는 게르트 뮐러에게 절대로 패스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조지 베스트는 적응하지 못하고 곧 팀을 떠나야 했다.
2.3. 국가대표
1966년에 국가대표로 데뷔한 게르트 뮐러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주전 선수로 활약한다. 조별리그 1차전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2:1 승리를 이끌었고, 2차전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선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5:2 승리, 3차전 페루와의 경기에서도 해트트릭을 달성하여 3:1 승리를 이끌어 서독은 간단하게 8강에 진출했다.
8강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잉글랜드와 만났는데 4년전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전에서 서독은 제프 허스트에게 해트트릭을 허용해 2:4로 패배, 준우승에 그쳐 복수하려고 작정을 하였고, 후반까지 2:0으로 밀리고 있다가 보비 찰튼이 빠지자 프란츠 베켄바워, 우베 젤러, 그리고 게르트 뮐러 본인이 결승골을 넣으며 연장전 끝에 3:2 역전승을 달성한다.
4강전 상대는 잔니 리베라, 루이지 리바, 자친토 파케티가 버티는 이탈리아였고,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보닌세냐에게 8분 만에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카를하인츠 슈넬링어의 기적적인 동점골로 연장전에 돌입한다. 서독은 프란츠 베켄바워의 부상 투혼과 게르트 뮐러가 2골을 넣으며 치열한 명승부를 벌였지만, 잔니 리베라에게 결승골을 허용, 결국 3:4로 패배하고 만다. 이후 3·4위전에서 우루과이를 상대로 승리하여 3위를 차지한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뮐러는 10골을 넣으면서 7골을 넣은 브라질의 자이르지뉴를 3골 차로 제치며 득점왕을 차지하였고, 이때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하였다.
UEFA 유로 1972에서도 뮐러의 활약은 대단했다. 벨기에 전과 소련 전에서 각각 2골을 넣으며 총 4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유로 1972 우승을 차지하였다.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 월드컵에서 뮐러는 7경기 4골로 뮐러치고는 부진한 성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또 다시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독일의 월드컵 우승의 1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 월드컵 결승은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와 프란츠 베켄바워의 서독간의 대결로 많은 이목을 집중시켰다. 시작 1분만에 16번 공을 돌리던 네덜란드는 요한 크루이프에게 공을 패스했고, 요한 크루이프는 무서운 스피드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PK를 얻어냈다. 1분 만에 요한 네스켄스가 PK를 성공시켰고, 이후 네덜란드는 서독을 농락기키며 공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독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자신들이 PK를 얻어내며 파울 브라이트너가 PK를 성공시켰고, 게르트 뮐러가 결국 환상적인 역전 결승골을 꽂아 넣었다. 사실 게르트 뮐러는 후반에 한 번 더 골망을 흔들었다. 분명 명백한 골인데도 오프사이드 판정이 내려졌지만 게르트 뮐러는 항의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이렇게 심판이 오심을 하더라도 항의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월드컵에서 우승하여 진정한 커리어 끝판왕이 되었다.'''내가 앞으로 달려가는데, 네덜란드 수비수 3명이 나를 마크하러 오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살짝 뒤로 빠졌고, 공을 받아 구석으로 꽂아 넣었다. 뭐 그게 다다.'''
'''게르트 뮐러와 프란츠 베켄바워보다 좋은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펠레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21]
호나우두 등장 이전 월드컵 최다 득점자이다. 월드컵에서만 13경기 14골로, 2014년 현재로는 클로제의 16골과 호나우두의 15골에 이어 3위다. 당시 월드컵 경기 수가 지금보다 적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의 기록과 단순비교하기엔 더욱 가치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호나우두가 뮐러의 기록을 32년 만에 드디어 경신했다고 전 세계가 떠들썩했던 걸 생각하면...[22]
3. 은퇴 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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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를 마치고 평화롭게 착륙한 폭격기'''
그는 프란츠 베켄바워나 요한 크루이프처럼 쇼 비즈니스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았어요. 그는 슈퍼스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삶을 선호했고, 가족들과 조용히 살고 싶어했죠. 사람들은 그가 거칠고 무뚝뚝한 사람일 것이라 예상하지만, 아니에요. 그는 부드러운 사람입니다. 만약 단 한 명의 절친한 친구가 필요하다면, 게르트 뮐러로 충분합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충직한 사내입니다. 그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져요.
– 파울 브라이트너
우리는 그를 옛 뮌헨 공항에서 만났는데, 그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라기 위해서 심리학을 공부할 필요도 없었다. 프란츠 베켄바워, 울리 회네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해서 논의했고 바로 다음 날 그를 보드진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했다.
은퇴 후에 목숨을 잃을 뻔 하기도 했다. 동료들은 미국 진출이 큰 이유였다고 말하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진출한 것이 실수였다는 것이다. 그는 알코올 중독에 빠져 간 수치가 무려 2,000에 달할 정도로 사망 위기까지 갔으나, 그의 곁에는 프란츠 베켄바워, 울리 회네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의 보드진이 된 그들은 게르트 뮐러를 구해주기로 하고 그에게 1992년 팀 코치직을 주었다. 그렇게 1군 팀에서 몇 년 코치를 하다가 2015년 현재까지 2군 팀에서 코치를 하고 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이것이 그의 저평가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하지만 공식 석상에도 꽤나 모습을 자주 드러내고, 광고도 찍으며, 인터뷰도 한다. 물론 다른 전설들만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나 자주 소식을 들려 주고 있다. 1992년 이후로 술에 입도 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옥토버페스트 같은 행사에서도 모습을 찾을 수 없다.그는 완전히 자신의 삶을 되찾았어요. 그는 정말 훌륭한 인간이고, 그와 우리의 관계는 정말 강합니다.
– 울리 회네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는 소식이 나왔다. 2020년 11월 2일, 그의 아내가 뮐러가 아주 위독한 상태라고 밝혔다. 하루 24시간의 대다수를 누워서 잠을 자며 보내며, 아주 조금씩 정신이 들어 눈 깜빡임으로 의사를 표현해야한다고 하는 정도. 아내가 직접 뮐러가 서서히 잠들어가고 있다며 그의 마지막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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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후계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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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광고도 찍었다. '뮐러 우유'라고...(실제 이름이다.)'''[23]
4.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게르트 뮐러가 주워 먹기 공격수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연히 아니다.[24] 물론 그의 위치 선정이 큰 장점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또 현재 세계 최고의 선수로 군림하고 있는 메시같이 엄청난 테크닉과 드리블 능력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고, 호날두처럼 완벽한 신체조건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완성형의 스트라이커였으며, 스트라이커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들을 가지고 있었다. 완벽한 트래핑, 번개 같고 정교하게 이를데 없는 슈팅력[25] , 지칠 줄 모르는 체력[26] , 역도 선수같은 하체에서 나오는 완벽한 밸런스, 그리고 양발을 완벽하게 자유자재로 썼다. 슈팅 테크닉도 대단해서 중거리슛, 발리슛, 심지어 로빙슛까지 못하는게 없었다. 때문에 굳이 위치선정 능력을 빼더라도 그는 월드클래스의 스트라이커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골을 집어 넣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쉽게 주워 먹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았을 것이고, 그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는 주워먹기에만 능했던 선수라는 오해를 산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경기를 보면 동물적 감각으로 원터치 슛을 넣는 장면도 많지만 중원에서 스스로 드리블로 돌파하거나 오늘날의 티키타가를 연상시키는 주고받는 패스를 통해 상대 수비진을 뚫고 들어가 득점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득점했다. 실제로 72년 서독 국가대표팀은 유럽에서 티키타카의 조상 쯤 되시는 람바참바 축구를 구사하기도 했다. 골대에서 주워먹는다는 말이 왜 생겼는지 의아하게 생각될 정도.'''전 수비수가 언제 실수를 할지, 아니면 언제 긴장을 풀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제 안의 누군가가 지시를 내려요. 그것이 저의 득점력의 원동력입니다.'''
그리고 어시스트도 상당히 많이 찍었는데, 이게 바로 연계가 안 된다는 말에 반박하는 증거다. 이타적인 플레이어였던 게르트 뮐러는 페널티 박스 안에서 훌륭한 원 터치 패스와 센스 있는 패스로 어시스트를 상당히 많이 찍었다. 차비처럼 완벽한 패스를 뿌려야만 훌륭한 연계인가? 다시 말하지만 게르트 뮐러는 스트라이커였다. 그리고 스트라이커는 무엇보다도 득점을 해야하는 포지션이다. '''한 마디로 그는 스트라이커라는 역할을 그 누구보다도 잘 소화해낸 선수였다.'''
뮐러는 주어먹는 선수라는 잘못된 편견으로 인해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박스 근처에서만 머무르던 선수가 아니었다. 측면과 중앙을 쉴새없이 오가는 스위칭 플레이로 상대 수비수를 끌어내 공간을 창출하는 플레이에도 능했고, 팀이 밀리는 상황에 따라서는 3선 지역까지 내려와 수비에 가담하고 후방 빌드업 단계에 관여하는 등 당시의 전형적인 타겟형 스트라이커들과는 다른 현대적인 개념의 스트라이커의 면모를 선구적으로 보인 선수였다.
게르트 뮐러의 위치 선정 능력은 탁월했는데, 이 위치 선정 능력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축구에 대한 시야, 경기 흐름을 읽고 미래의 플레이를 예측하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뮐러는 전형적인 스트라이커지만 당시의 일반적인 타겟형 스트라이커들과 다르게 민첩한 몸놀림으로 간결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순간적인 훼이크 동작을 포함한 빠른 몸놀림으로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였고, 전후좌우 다양한 위치로 빠졌다가 드리블, 침투, 그리고 연계 플레이로 상대 수비벽을 순식간에 와해시키고 골, 혹은 어시스트로 연결하기도 했다. 상대 입장에서는 스트라이커가 경기 내내 전후 좌우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으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상대 수비진을 기만하고 혼란시키기 위해 게르트 뮐러는 민첩한 움직임으로 수시로 다양한 위치로 이동하고 있었고 때로는 중앙 미드필더, 윙어 같은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드리블과 돌파 능력도 매우 탁월했고 중앙이나 측면으로 빠져 있다가 직접 드리블로 수비진을 돌파하여 그러는 동안 먼저 들어와 있던 젤러, 오베라트, 베겐바워 등에게 어시스트를 하기도 했다. 이런 플레이스타일로 인해 어시스트도 의외로 많이 찍었던 것. 상대를 혼란시키기 위해 부단히 이곳저곳 돌아다녔기 때문에 골을 넣기 힘든 위치에 있을 때도 많았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어시스트나 연계 플레이로 기회를 창출하거나 아니면 희한한 폼으로 어떻게든 본인이 해결하기도 했다. 게르트 뮐러의 스페셜 영상을 보면 골대 바로 앞 좋은 위치에서 참 쉽게 골을 넣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영상에 드러나지 않은 나머지 시간 동안 부단히 이곳저곳을 누비며 상대 수비들의 기만했고, 그동안 다른 동료들이 침투해 슛을 날리기도 했고, 이렇게 경기 내내 상대 수비들의 혼을 빼놓은 다음 수비들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결정적인 순간에 골대 앞으로 침투해 들어가 있다가 골을 넣기도 하였다. 물론 다양한 각도에서의 중거리 슛, 중원에서 직접 돌파하거나 연계 플레이로 돌파 후 슈팅하는 등력도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에 대한 이미지는 보통 우승한 74년 월드컵으로 대변되는데 안타깝게도 이 대회는 그의 진가가 그다지 드러나지 않은 대회였다. 원래 서독 대표팀과 뮐러는 70년 월드컵과 특히 72년 유로에서 대단히 창의적인 플레이로 유명했지만, 74년 월드컵에서 헬무트 쇤 감독은 이런 창의적인 축구로 준우승까지는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브라질 같은 뛰어난 개인기를 가진 남미팀과 상대할 때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74년 월드컵에서 대단히 보수적인 전술로 임했다. 때문에 72년 브라질과 비견되며 람바참바 축구로 찬사받았던 서독은 74년 월드컵에서 이런 창의력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고 조직력과 체력에 기반한 축구를 구사했다. 때문에 게르트 뮐러도 원래 움직임이 상당히 자유로웠지만 이 대회에서는 타겟형 스트라이커의 전형적인 롤에 집중한 편이었고 때문에 이 대회에서 유독 줏어먹는 골이 많이 나온 편이었다. 전술적인 이유 때문에 게르트 뮐러의 진가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한 이 대회는 안타깝게도 후세에 게르트 뮐러라는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을 규정하게 되었다. 이 대회보다는 72년 유로에서 뮐러의 창의성 넘치는 플레이가 잘 드러나 있는 편이며, 70년 월드컵 때도 74년 월드컵 때보다 다재다능한 플레이를 펼치고 있다.
74/75 시즌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서도 게르트 뮐러의 진면목이 잘 드러나는데, 이 경기는 전반전에만 두 명의 선수가 부상으로 아웃되는 악재에 리즈의 강력한 압박이 겹치면서 바이언에게 답답한 흐름이 이어졌던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뮐러는 수비 도중에 베켄바우어와 한 장면에 잡힐 정도로 적극적으로 후방 지원에 나섰는데, 경기를 결정지은 선제골은 뮐러가 '''센터라인''' 근처에서 왼쪽 풀백인 바이스와 짧은 원투패스를 주고 받은 뒤 박스를 향해 논스톱으로 올린 크로스를 토르텐센이 잘 받아내 로트에게 전달하면서 만들어낸 골이었다. 그 6분 뒤에 뮐러다운 움직임으로 수비수 뒤를 순식간에 돌아가며 1골을 추가한 건 덤.
뮐러는 언제든지 전개에 가담할 수 있는 우수한 연계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단지 뮐러가 뛰던 시대에는 스트라이커는 박스 안에서 득점에 집중하게 하고 그 외 전개를 다른 선수들이 전담하는 전술이 일반적이었으며 어지간히 팀이 밀리는 게 아닌 이상 뮐러를 전개에 가담시키는 것보다 내버려두고 득점에 집중하게 두는 것이 팀 차원에서도 훨씬 득이 되었기 때문에 굳이 뮐러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을 뿐이다.
물론 뮐러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플레이메이킹을 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사실 그는 플레이메이킹에도 재능이 있었고, 실제로 전술적 상황에 따라 무척 창의적인 플레이와 연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팀에는 항상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프란츠 베켄바워가 있었다. 대단히 보수적인 전술로 임했던 74년 월드컵에서 플레이메이킹 역할을 베켄바워에서 몰아주고 상대 골에어리어 안에서의 플레이에 집중했기에 이런 능력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게르트 뮐러보다 위로 뽑히는 선수들은 모두 플레이메이킹에 능한 선수들이다. 이를 퍼포먼스적인 능력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게르트 뮐러가 스트라이커로서 보여준 퍼포먼스도 이들에게 밀리지 않는다. 물론 게르트 뮐러보다 뛰어난 플레이메이킹을 보여주고 경기를 지배하면서 게르트 뮐러만큼 훌륭한 커리어나 공격 포인트를 쌓은 선수들은 당연히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프란츠 베켄바워는 위에도 설명했듯이 그야말로 경기를 가지고 놀았기 때문에 게르트 뮐러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퍼포먼스라는 측면에서 게르트 뮐러에게 그것이 부족하다고 폄하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였으며, 골을 넣는다는 본인의 역할에 있어 역대 최고 수준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선수였다.
그는 굉장히 겸손한 선수로 유명한 데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기자가 "현대 축구에도 당신이 통할 것 같냐"라고 묻자 "'''요즘 축구는 오히려 나에게는 좋은 환경이다. 내가 뛰던 시절에는 스트라이커만 수비하는 수비수가 무조건 있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더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을 것 같다.'''"라며 평소와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는 곧 자신있다는 뜻 되겠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에 더해 언론에 노출되는 걸 즐기는 스타성이 없어서 저평가 된다는 측면도 있다.
또 그는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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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이런 그의 명언을 훌륭하게 대변했다.'''모든 골은 같다. 골 라인을 넘어가면 골인 것이다.'''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려한 개인기나 기술이 아니라 순간적인 재치와 판단력이다.'''
'''공을 나에게 줘,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그냥 스탯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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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통산 '''780경기 724골'''[27]
클럽 통산 '''718경기 656골'''
국가대표 통산 '''62경기 68골'''
월드컵 통산 '''13경기 14골'''
그렇게 넣은 골이 바이에른 뮌헨의 리그 경기에서만 '''453경기 398골.'''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최다 득점은 물론이요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다 득점이다. 경기당 0.87골. '''분데스리가 40주년 최우수 선수''' 선정의 내공은 이 정도다.
말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80경기 40골.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2경기 1골이라는 스탯을 쌓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사람인지가 의심된다.
그리고 국내 컵대회와 유럽 컵대회, 미국 시절 등을 합하면 클럽에서는 통산 '''718경기 656골'''을 넣었다. 기타 컵대회를 제외하고 리그, FA컵, 유럽 클럽 대항전만 포함해도 691경기 630골이다.
국가대표로 나가면 한술 더 뜬다. '''62경기 68골'''.[28] A매치에서 1경기 1골 이상 기록을 세운 선수들은 역대로 따져봐도 쥐스트 퐁텐의 21경기 30골, 산도르 코츠시스의 68경기 75골이다. 100년이 넘는 유럽 축구사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준인 것이다.
사실 축구선수로 드물게 상당히 오래전 선수임에도 오직 기록만으로 선수의 설명이 가능한 경우이며 그래서 그 위엄이 더욱 절실하다. 여기에 미미하긴 하지만 FIFA 클럽 월드컵의 전신인 인터컨티넨탈컵이나 UEFA 슈퍼컵, 인터-시티 페어스컵[29] 을 포함하면 골 수가 더 늘어난다.
아무튼 그가 등장하고, 은퇴한 이후 골과 관련된 기록은 대부분 그가 가지고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하나 둘씩 깨져가긴 했지만 정말 대단한 기록들이라고 할 수 있다.
5. 게르트 뮐러에 대한 말, 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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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 뮐러는 독일 대표팀에서 뛴 '''62경기에서 68골''', 1970년과 1974년 '''두 번의 월드컵에서 통산 14골'''을 기록했다. 그 위대한 펠레조차 네 번의 월드컵에서 12골이니까 게르트 뮐러의 뛰어난 득점력은 이 숫자로 증명이 되는 셈이다.
– 데트마어 크라머
우린 매 경기 자신감에 차 있었어요. 축구가 쉽게 느껴지면서도 뭔가 웃겼어요. 경기가 아무리 안 풀려도 그가 딱 한 순간, 한 번만 공을 건드리기만 하면 골이 터질 거라는 느낌이 있었죠. 게르트 뮐러가 팀에 있다면 전술이란 게 필요 없어요. 그가 없다면 전술적으로 완벽한 경기를 펼친다고 해도 승리할 수 있었을지, 아니 최소한의 도움은 되었을지 의문이네요. 우리 팀의 성공을 위해선 게르트 뮐러가 필요했고, 우리에겐 그가 있었죠.
– 파울 브라이트너
아니요. 제가 보기엔 게르트 뮐러 본인도 자신의 비밀을 모르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고 나니 궁금함조차 사라졌죠. 독일에서는 그냥 게르트 뮐러에게 '''제 7의 감각'''이 있다고 해요. 그는 수비수가 공을 어디로 걷어낼지 그 수비수보다 먼저 알고 있었죠.
– 파울 브라이트너, 게르트 뮐러의 득점력에 관한 비법을 알고 있냐는 질문에 대해.
그가 사는 이유는 승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기술적으로 뛰어나지 못하다고 하지만, 그는 분명 뛰어난 기술을 지녔다고 말씀드릴 수 있어요. 뮐러는 굉장한 선수였어요. 완벽한 선수였고, 특히 헤더는 더 뛰어났죠.
– 파울 브라이트너
그는 사람들의 편견과는 다르게 훨씬 더 기술적인 선수이다. 만약 누가 실수를 한다면 그는 그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가 갖고 있는 퀄리티는 분명하게 믿을 수 없을 정도였고, 그는 박스 안에서 앞을 내다 볼 수 있었다. 그는 빨랐고 그는 박스 안에서 다른 누구보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 아르센 벵거
뮌헨과 독일이 성취한 그 모든 것들은 게르트 뮐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 프란츠 베켄바워
축구는 골에 관한 스포츠이다. 아무리 플레이를 잘한다 해도 골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 게르트 뮐러는 아주 간단히 말해서 골에 관해서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증인이었다.
바이에른 뮌헨은 오늘날 세계 정상에 있는 클럽이 되었다. 게르트는 그 기원이다. 게르트의 골들로 바이에른은 세계적인 클럽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내 눈에는, 그는 FC 바이에른 뮌헨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수이다.
당신이 '가장 가치 있는 선수'를 묻는다면 게르트 뮐러가 바로 그 정답이다. 게르트는 MVP였고, 그런 관점에서 그는 가장 중요한 선수였다.
– 프란츠 베켄바워
네이마르의 몸값이 2억 2,200만 유로라면, 게르트 뮐러의 몸값은 여기에 몇백만 유로를 더해야 한다. 골을 만드는 것에 관해서는 아무도 그를 따라갈 수 없다.
– 프란츠 베켄바워
처음엔 그저 볼품 없는 공격수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그는 전술이 통용되지 않는 선수였다.
– 요한 크루이프
나는 그가 세계가 봤던 그 어떤 스트라이커 중에서도 최고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트라이커다. 나와의 호흡도 정말 훌륭했다. 내가 그를 돕고, 그가 골을 넣었다.
– 우베 젤러
그가 우리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 울리 회네스
그의 믿기지 않는 기록은 영원할 것이다.
– 루디 푈러
게르트는 나에겐 최고의 우상입니다. 내가 어린 선수로 바이언 2군에 왔을 때, 나는 그와 서로 알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서로를 잘 이해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내가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 있는 공격수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와 같은 팁을 알려줬습니다. 이에 대해 나는 오늘날 매우 감사합니다. 나는 항상 처음부터 게르트를 굉장한 사람이라고 여겼어요. 그의 득점률을 독일에서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겸손했으며 특별히 자만한 적이 없습니다. 게르트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친절한 사람 중 1명입니다. 그는 모든 팬들을 매우 친절하게 대하며 모든 팬들에게 항상 싸인을 해 줍니다.
– 토마스 뮐러
'''게르트 뮐러에게, 제 존경심과 동경, 그리고 포옹을 담아 보냅니다.'''
– 리오넬 메시, 게르트 뮐러에게 한 시즌 최다 골 기록을 경신한 이후 보낸 자신의 유니폼에 적은 문구.
Der "Bomber der Nation" (The "bomber of the nation") 나라의 폭격기
– NDR (북독일 공영 방송국) - 게르트 뮐러의 75세 기념 기사 당시 헤드라인
6. 기록
6.1. 대회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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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C 바이에른 뮌헨 (1964~1979)
6.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70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67, 1969
- FIFA 월드컵 브론즈볼: 1970
- FIFA 월드컵 골든슈: 1970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70
- UEFA 유로 골든부츠: 1972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72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72-73, 1973-74, 1974-75, 1976-77
- 분데스리가 득점왕: 1966-67, 1968-69, 1969-70, 1971-72, 1972-73, 1973-74, 1977-78
- 분데스리가 40주년 최우수 선수: 1963–2003
-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968-69, 1969-70, 1971-72, 1972-73
- 유러피언 골든부츠: 1969-70, 1971-72
- FIFA 공로훈장: 1998
- FIFA 100: 2004
- 옹즈 드 옹즈: 1976
- 바이에른 뮌헨 역대 베스트 XI : 2005
- 골든풋: 2007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9, 1971, 1972, 1973, 1974, 1976, 1977, 1978
- 브라보 오토[30] : 금상(1973, 1974), 은상(1975), 동상(1972, 1976)
- IFFHS 레전드: 2016
6.3. 통산 기록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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