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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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독일의 前 축구선수. 1970년대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의 FC 바이에른 뮌헨이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유프 하인케스, 울리 슈틸리케, 베르티 포크츠, 우베 란, 알란 시몬센와 함께 그들의 리그 독주를 저지한 주역으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로컬 보이였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네처는 FC 묀헨글라트바흐 유소년팀에서 뛰었으나, 프로 데뷔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했다.
1963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 데뷔한 네처는 환상적은 패스로 '센티미터 패서'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네처를 비롯한 베르티 포크츠, 유프 하인케스 등이 활약하던 묀헨글라트바흐는 1969-70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하며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렸으며, 1970-71 시즌에도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리며 분데스리가 2연패를 달성했다.[1]
당시 분데스리가에서는 FC 바이에른 뮌헨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라이벌 관계가 뜨거웠는데,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 등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던 네처의 플레이는 환상적이었다.
네처는 1973년까지 10년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뛰며 분데스리가 우승 2회, DFB-포칼 우승 1회, 1972-73 시즌 UEFA컵 준우승[2] 을 차지했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했고,[3] 묀헨글라트바흐 시절보다 기량이 떨어졌지만 네처는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레알 마드리드의 코파 델 레이 우승에 공헌했다. 1년 후 파울 브라이트너도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했고, 네처는 브라이트너와 함께 라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네처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4시즌간 활약하며 라리가 우승 2회,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를 차지하였다.
이후 그라스호퍼 클럽 취리히에서 1년간 뛰다가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네처의 첫 메이저 대회 출전은 UEFA 유로 1972였다. 네처는 환상적인 패스와 플레이메이킹을 선보이며 베켄바워와 뮐러랑 함께 벨기에와 소련을 꺾고 서독의 UEFA 유로 1972 우승을 이끌었다.[4]
그러나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는 전술상의 문제로 네처는 1경기 밖에 출전하지 못했지만[5] 월드컵 트로피는 들어올렸다.
3. 플레이 스타일
'''센티미터 단위로 패스를 조절할 수 있었다는 선수'''로 그는 10번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드리블, 프리킥, 연계 플레이, 테크닉까지 당대 최고 수준의 미드필더였으며, 특히나 패스 능력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따라올 선수가 거의 없었다. 그의 패스를 묘사한 당대 사람들의 말을 따르면 '''공간을 찢어버리는 패스'''.
FC 바르셀로나의 황금세대를 이끌었던 패스 마스터 차비 에르난데스와의 플레이 스타일 비교도 종종 있는데, 차비 에르난데스가 중앙에서 공격 템포를 조절하면서 천천히 전진해나가는 안정적인 패스를 중시했다면 귄터 네처의 경우는 드리블을 통해서 전진해 원투패스를 주고 받거나 전방의 동료를 향해 침투 패스를 시도하는 모험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평가가 강하다. 물론 패스의 속도와 정확도는 당대 최고.
참고로, 현역 선수중에서는 토니 크로스를 언급할 만 하다. 실제로, UEFA 유로 2016 중 독일 언론에서는 토니 크로스를 귄터 네처에 비유하는 기사를 내기도 하였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1972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72
-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965-66, 1966-67, 1967-68, 1968-69, 1969-70, 1970-71, 1971-72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72, 1973
- 독일 올해의 골: 1971, 1972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72, 1973, 1975
-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
5. 여담
당대 그와 함께 독일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였던 볼프강 오베라트와의 경쟁 관계는 산드로 마촐라와 지아니 리베라와의 경쟁 관계와 비슷하다. 볼프강 오베라트가 산드로 마촐라처럼 기동성, 체력적으로 우위를 점했고, 귄터 네처가 지아니 리베라처럼 기술, 패싱력에서 우위를 점했다.
때문에 귄터 네처는 UEFA 유로 1972에서 엄청난 활약으로 자국을 우승시켰음에도 불구하고,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는 볼프강 오베라트가 수비가담, 기동성이 뛰어나 팀 경기력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그에게 대표팀 주전자리를 빼앗겨 본선에서 단 한경기 출장에 그친다.[6] 그때 당시 독일 대표팀은 자국 리그에 소속된 선수들을 대표팀 주전으로 쓰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엔트리에 오베라트까지 있는 상황에서 당시 레알 마드리드 소속이었던 귄터 네처가 더더욱 기용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독일 역대급 패스마스터였으나 동포지션에 역시 역대급 선수가 존재했기 때문에 어찌보면 불운의 선수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네처와 오베라트는 커리어 전체를 두고 대표팀 승선을 두고 자존심을 건 경쟁을 펼쳤으나 실제로 이 둘의 개인적인 관계는 좋았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귄터 네처가 주축이된 1972 유로에서 그는 엄청난 활약으로 자국을 우승시켰고, 오베라트 또한 그가 주축이 된 1974 월드컵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쳐 자국을 우승시켰다. 두 선수 다 대표팀 주축이었을 때 역대급 활약을 펼쳤다.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와 불화설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근거 없는 낭설인 것으로 보인다. 불화설의 근거는 당시 서독을 몹시 견제하던 영국의 한 황색 언론의 기사인데, 서독 국가대표팀에서 프리킥을 누가 찰 지를 두고 베켄바우어와 네처가 다퉜다는 설을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이 기사에 보도된 내용들은 경기 날짜 등에 있어서 사실과 달랐다. 구글에 쳐보면 베켄바워와 네처가 웃으면서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진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 이들의 관계는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베켄바워는 아이스 버킷 챌린지를 하지 않고 기부로 대체하면서 펠레와 귄터 네처를 지목했다.
[1]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분데스리가 출범 후 2연패에 성공한 최초의 클럽이 되었다.[2] 결승전에서 케빈 키건이 이끄는 리버풀 FC에게 패했다.[3] 레알 마드리드에서 뛴 첫번째 독일인이 되었다.[4] 네처는 유로 1972에서의 활약상을 인정받아 1972년 발롱도르 2위를 차지했다.[5] 활동량이 적은 네처보다 왕성한 활동력과 기동력을 지닌 오베라트가 헬무트 쇤의 전술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6] 실제로 서독 대표팀은 볼프강 오베라트를 주전으로 쓰며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등의 활약 속에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를 꺾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