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곤지
1. 개요
백제 왕조의 좌현왕. 제 21 ~ 22대 개로왕, 문주왕 시대의 왕족이다.
성씨는 부여, 이름은 곤지. 중국사서엔 성과 이름을 줄인 여곤(餘昆)으로 기록됐다. 태어난 해는 미상이나 형인 문주왕과 함께 457년 송나라에 보낸 관직요청 기록에 등장한 걸 보면 최소 437년 이후로 태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2. 개로왕의 아들? 동생?
삼국사기는 곤지가 개로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했지만 일본서기는 곤지가 개로왕의 둘째 동생이라 했다.
최근 학계에서는 곤지를 개로왕의 동생으로 보고 있다. 문주왕의 동생 또는 삼촌이기도 하다. 문주왕도 개로왕의 아들(삼국사기), 동생(일본서기)으로 설이 오락가락하는데 이쪽도 대체로 동생으로 본다.
이름은 '''큰'''을 음차한 것으로 본다. '''맏'''을 음차한 것으로 보이는 문주왕이 신찬성씨록에서 주군#s-4과의 연관성이 강조되고, 반대로 부여곤지는 신찬성씨록에서 비유왕의 아들임이 강조되면서 같은 가문이 추앙하는 걸 보면 비유왕의 아들 중 개로왕과 문주왕이 모두 다른 왕족의 양자로 입적되어 사실상 부여곤지가 비유왕의 장남 역할이었던 모양.
3. 생애
3.1. 제후왕에 봉해지다
송서에서는 개로왕이 먼저 하사한 작위를 인정해 달라고 부탁하는 기록에서 나오는데 그리하여 송나라로부터 정로장군(+좌현왕)[6] 의 작위를 유송에서까지 인정 받았다. 이 시기에는 왕족이나 지방호족의 관직을 중국 황제에게 요구하는 경우도 흔했는데, 왕 자신의 직위보다 낮은 직위를 주어 자신의 발아래에 두고 왕권을 공고히 하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비슷한 예가 왜5왕이 자신들과 연합한 지방호족등의 작위를 황제에게 요구한 경우를 들 수 있다.[7] 역설적으로 이러한 요구는 당대 백제 왕권과 왜5왕의 왕권이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음을 보여준다.
좌현왕이 흉노에서 태자의 칭호로 쓰인 것을 보면 개로왕의 태자 신분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좌현왕은 병권을 총괄하는 직책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개로왕은 해씨가 장악한 병권을 빼앗아 동생인 곤지에게 넘겨준 것으로 보인다.
동복 형인 문주왕 역시 개로왕 대에 상좌평을 지냈다고 하니 개로왕은 치세 동안 친족 - 왕족 중심의 정치 체제를 꾸려 이를 바탕을 통치를 해나간 것으로 추측된다.[8] 이후 461년,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백제가 국가적인 위기 때 태자나 왕족을 일본에 보내 외교관계를 강화하는 전례로 볼 때 곤지가 파견된 것은 그가 백제의 태자였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3.2. 대왜 외교의 선봉
정사의 기록은 없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곤지는 아스카베 일대를 경영하면서 기반을 닦았다는 전승이 전해져 온다. 이 기반은 후에 아들인 동성왕, 무령왕의 즉위에 어느정도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어서 정확히는 불분명하다. 현대의 학자들은 대체로 곤지의 아들로 비정하고 있다.
동성왕과 무령왕의 즉위는 웅진-사비 지역 귀족들의 추대로 보기도 한다. 그외에 카와치 지역의 도래계 씨족들의 성장에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여진다.
<일본서기> 유랴쿠(雄略) 5년(461년)조에 따르면, 개로왕은 아우인 곤지를 왜(倭)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곤지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부인[9] 을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이자 곤지의 새 아내가 산기를 느껴 지금의 후쿠오카 북쪽에 있는 섬인 가카라시마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출산했다. 무령왕의 다른 이름 '사마왕(斯麻王)'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3.3. 최고 관등에 봉해지다
그런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으로 쳐들어와 개로왕을 잡아 처형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문주왕이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하자 귀국하여 477년 4월 내신좌평이 되었다.
내신좌평은 6좌평의 수장이면서 왕명을 출납하고 백성들에게 법률을 공포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수상과 같은 위치였다고 볼수있다. 문주왕이 곤지를 내신좌평에 임명한 것은 웅진 천도이후 급추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볼 있을듯 하다.
3.4. 훙서
그러나 곤지는 불과 세달 후인 477년 7월에 세상을 떠났다. 일각에서는 문주왕 말기에 병관좌평 해구가 왕권을 위협하며 실권을 부리며 끝내 문주왕까지 시해한 것으로 미루어 그 역시 해구에게 암살당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보면 곤지가 죽기 얼마 전에 '''흑룡'''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곤지의 암살을 은유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현상들 이후엔 인물의 죽음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럴 가능성도 꽤 있어 보인다.
사실상 문주왕에게 급변이 있을 경우에 왕위 계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게 곤지였기 때문이고 개로왕대의 상황부터 감안해본다면 해씨들에게 곤지는 상당히 껄끄러운 인물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3.5. 훙서 이후
곤지의 두 아들이 즉위하는데, 동성왕과 무령왕이다. 나중에 즉위한 무령왕이 형이고 먼저 즉위한 동성왕이 동생.[10]
이렇게 족보가 꼬이게 된 것은 진씨 세력이 정변을 일으켜 삼근왕을 죽인 후 자신들이 조종하기 쉬한 허수아비왕을 앉히려 했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동성왕이 먼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드라마틱한 인물은 아니라 대중문화에서도 다뤄진 경우가 거의 없다. 유일하게 최인호의 소설 '제왕의 문'[11] 에서 비중있는 인물로 다뤄지는데 작품 초반부 악역으로 나온다. 여기에서는 개로왕에게 왕위와 약혼녀를 빼앗기고 웅진으로 유배되었다가 개로왕의 왕비(곤지의 전 약혼녀)를 납치하여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 이후에는 등장이 없지만 개로왕이 흑화하는 명분을 제공하게 된다.
송산리 고분군에 곤지의 무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무령왕릉을 제외하면 모두 도굴되었고 당대 만들었던 무덤이 모두 온전히 남아있는 것도 아니어서 사실은 알 수 없다.
[1] 《송서》.[2] 《일본서기》. 훈은 '코니'.[3] 삼국사기에서는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부여곤지의 손자에 해당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이거나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에 해당한다.[4] 《삼국사기》.[5] 《일본서기》. 다만 일본서기에서 비유왕은 등장하지 않고 정확히 말하자면 개로왕의 동복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확하게 비유왕의 아들로 나오는 문건은 《신찬성씨록》.[6] 송서에서는 좌현왕 작위는 인정하지 않고 정로장군만 인정해 주었다. (제후국으로 취급하는) 백제가 왕작을 하는 게 걸린 듯.[7] 그들에게 선심을 쓰며 으스대면서 충성심을 요구하되, 자신과 신하들의 수직적 주종 관계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을 사가제(私假制)적 질서라고 칭한다.[8] 비유왕 말년의 쿠데타 정황과 이후 왕위에 오른 개로왕의 초기 기록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이 시기에 개로왕과 해씨 세력 등 귀족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고 이에 개로왕이 그들의 권력을 누르고 왕권 중심의 정치를 벌이기 위해 측근 세력 차원에서 친족과 왕족을 요직에 배치하여 국정을 운영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9] 여기서 부인(夫人)은 삼국시대 당시 왕후를 일컫는 호칭이다.[10] 이상 일본서기 기록. 삼국사기엔 동성왕이 무령왕의 아버지로 나온다.[11] 원제는 '왕도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