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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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20대 국왕이자 건길지.
백제의 제11대 국왕 비류왕과는 다른 인물이다. 살았던 시대도 다르고 각각 한자 표기도 다르다.
2. 생애
출생에 대해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이신왕의 아들 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고려시대 당시 있었던 자료에도 두 가지 전승이 모두 있었다고 한다. 구이신왕이 15세에 비유왕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즉위 당시 비유왕은 9세에 불과하므로 구이신왕이 20세에 비유왕을 낳았다면 비유왕은 4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령 관계를 생각한다면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기보다는 형제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중시된다고 한다.[6] 물론 어리다는 서술이 어리석다는 의미로 쓰였을 수도 있어서 구이신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무조건 틀리다고 보기는 어렵다.
《송서(宋書)》에 따르면 이름은 비(毗). 용모가 아름답고 언변이 좋았다고 하며 능력을 잘 살렸는지 외교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남북조시대의 유송에게 조공을 자주 바쳐 425년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칭호를 받았고 이후 매년 사신의 파견이 있었다. 이후 원가 7년(430년)에 “여비(余毗, 비유왕)에게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의 계승을 허락했다.”라고 하여 정식으로 백제왕이 되었다. 더불어 고구려에 대한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한때 적이었던 신라를 회유해 나제동맹을 성립시켰다.
신라의 눌지 마립간은 과거에 백제 동맹군의 공격을 고구려의 군사 지원으로 막아낸 적이 있었지만 그 대가로 고구려군은 내정 간섭을 일삼던 중이었고 여기서 벗어나 자주 노선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당시 신라의 국력으로는 홀로 고구려에 대항하기는 어려웠다. 백제 역시 진사왕 때부터 줄곧 고구려에 밀리던 상황에서 왜국이나 가야 이외에도 동맹국이 더 필요했다. 백제와 신라 양국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는 것을 비유왕은 간파하고 먼저 433년 7월, 434년 2월과 9월 신라에 사신과 선물을 보내며 화친을 청했다. 신라 역시 434년 10월에 화답해 왔다.
여기서 발생한 문제는 왜가 백제와는 친하다지만 신라와는 대대로 원수지간이라는 점이었고 431년 왜는 신라를 침공하기도 했다. 신라와의 화친 시도 때문인지 몰라도 당시 백제와 왜국 사이에 관계가 어긋났는지 438년 왜왕 진은 유송에 조공하면서 백제가 왜의 속국인 것처럼 언플을 하기도 했다.[7] 그래도 백제와 왜의 관계가 완전히 악화되지는 않고 본질적으로는 계속 우호 관계가 유지되었다.
승하 당시의 기사가 의미심장한데 기록에 따르면 한강에 흑룡이 나타났다가 날아가자 승하했다고 한다. 이 기록을 백제 내부의 정쟁에 휘말려 시해당했다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고 검은색이 북방을 뜻함에 따라 백제의 북쪽에 위치한 고구려에서 암살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8] 비유왕의 유해가 빈 들판에 가매장되었다는 도림의 언급으로 보아 매장조차 제대로 되지 못했던 듯. 아무래도 비유왕의 승하시에 정치적으로 큰 혼란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승하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자연스러운 죽음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秋九月 黑龍見漢江 須臾雲霧晦冥飛去 王薨
고구려에서 암살했을 수 있다는 설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는 게 비유왕 승하 직후 곧바로 고구려의 백제 침공이 이어졌다는 것. 백제 왕이 승하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쳐들어왔을 수도 있지만 먼저 자객을 보내 왕을 암살한 후 백제의 혼란을 야기하는 사전 모략을 벌이고 쳐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검은색은 북방을 상징하고 용이 나타났다는 위치도 고구려와 국경이 맞닿은 한강이었다는 점에 착안해서 백제의 북쪽에 있던 고구려에서 비유왕을 죽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는 것. 둘 다 수용한다면 당시 백제 내부에 정쟁이 있었고 고구려 역시 이 점을 이용해서 비유왕 반대 세력과 모종의 결탁을 해서 비유왕을 암살하여 백제 내부를 더욱 흔들어 놓았다는 해석도 가능한 부분이다.
나제 동맹을 맺었던 신라는 약속대로 원병을 보내와서 반고구려 노선을 확실히 했으니 적어도 외교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신라는 이전부터 백제보다는 친고구려에 가까웠고 400년 광개토대왕의 남정 이후 고구려군이 신라를 지켜준 대가로 고구려군을 주둔시켜 예속국 상태였다. 신라가 고구려 종속을 떨쳐내고 나제 동맹을 맺도록 비유왕이 신라를 끌어들인 것만 해도 상당한 업적. 물론 먼 훗날 결과적으로는 나제 동맹이 깨지게 되지만 그건 100여 년이나 뒤의 일이고, 거기까지 가기도 전에 이후 50여 년간의 역사를 보면 나제 동맹이 없었으면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에 위례성과 한강 유역이 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개로왕 시해 이후 문주왕이 웅진성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부터가 문주왕이 데려온 신라 지원군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 나중에 성왕이 전성기 시절 신라의 힘을 빌려 중흥을 맞이한 것도 나제 동맹 덕분이었다.
3. 기타
- 어째서인지 《일본서기》에서는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전왕인 구이신왕이 《일본서기》에서만 언급되고 중국 측 사서에서 없는 사람 취급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즉위년도는 429년으로 구이신왕이 사망한 428년의 이듬해이기 때문에 《일본서기》 기준으로는 비유왕이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된 셈이다. 대표적인 이주갑인상의 희생자이다. 전지왕의 누이라고 나오는 신제도원(新齊都媛)에 대한 기사는 일본서기 기준으로 308년이지만 이주갑인상을 고려하면 428년으로 비유왕의 치세기이다. 그리고 30년 후인 《일본서기》 기준으로 458년[9] 기사를 보면 유랴쿠 덴노에게 후궁으로 보내진 지진원(池津媛)[10] 가 이시카와노 타테(石河 楯)라는 남자와 밀통하여 처형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사를 포함한 이 기사 직후부터는 이주갑인상이 사라지고 연도가 다시 정상대로 돌아와 개로왕의 치세기가 된다. 지진원이 죽자 놀란 개로왕은 자신의 동생인 부여곤지를 일본으로 파견한다. 즉, 연대 조작으로 일컬어지는 이주갑인상이 끝나는 지점과 묘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비유왕의 치세기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한 비유왕의 치세기에는 장수왕의 남하에 맞서 신라와 연합 전선을 꾸리고 친선을 도모했는데 이에 왜국 측에서는 반발했기 때문에 비유왕을 《일본서기》에서 일부러 누락시켰다는 해석도 있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비유왕 본기'''
一年冬十二月 비유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二月 왕이 4부를 순행하고 백성들을 위무하다
二年 왜국에서 사절이 도착하다
三年 송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二年冬十月 해수를 상좌평에 임명하다
二年冬十一月 지진이 일어나고 큰 바람이 일어나다
二年冬十二月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三年夏四月 송의 문황제가 선왕의 작호를 책봉하다
七年 봄과 여름에 비가 오지 않다
七年秋七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다
八年春二月 신라에 사절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선사하다
八年秋九月 신라에 흰 매를 보내다
八年冬十月 신라에서 좋은 금과 구슬을 보내 오다
十四年夏四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四年冬十月 송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十一年夏五月 대궐 남쪽 연못에서 불길이 일어나다
二十一年秋七月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신라로 달아난 사람들이 발생하다
二十八年 별이 비처럼 떨어지고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八年秋八月 누리 떼가 발생하여 곡식에 해를 끼쳐 흉년이 들다
二十九年春三月 한산에서 사냥하다
二十九年秋九月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나고 비유왕이 죽다
[1] 《송서》.[2] 신찬성씨록.[3]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돼있으나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첫째 동생으로 기록돼있다.[4] 삼국사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돼있으나 일본서기에서는 개로왕의 둘째 동생으로 기록돼있다.[5] 삼국사기에서는 일단 구이신왕의 아들로 기록했으나 일설에 의하면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한다고 적어놨다. "구이신왕이 15세에 비유왕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즉위 당시 비유왕은 9세에 불과함으로 구이신왕이 20세에 비유왕을 낳았다면 비유왕은 4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령관계를 생각한다면 비유왕이 구이신왕의 아들이라기보다는 형제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중시된다."(이도학, 1995; 이기백, 1996) 송서에서도 “여비(余毗, 비유왕)에게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를 계승하도록 허락했다.”고 명확하게 써져 있어 둘이 조손 관계가 아닌 부자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다.[6] (이도학, 1995; 이기백, 1996)[7] 왜왕 진은 남조 유송에 使持節(사지절)都督(도독)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六國諸軍事(육국제군사)安東大將軍(안동대장군)倭國王(왜국왕)을 자칭하고 이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백제 또한 유송과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왜의 속국이 아닌 건 유송도 알고 있어서 거절당하고 안동대장군과 왜왕의 직위만 수여되었다.[8] 반론도 있는데 용 자체가 물의 수호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당시 기준으로는 용=물=흑색이라는 통념이 있었다. 당장 용의 순우리말인 '미르'가 물에서 파생된 단어다.[9] 458년은 이주갑인상에 의해 보정된 년도가 아니다. 즉 이주갑인상이 종료된 직후의 기사이다. 애초에 현전해지는 교차검증 할수 있는 사료들이 없는 탓에 어느 시점부터 이주갑인상이 종료 되었는지는 확언 할수 없지만, 그 직전의 기사 453년 혹은 이 해당 기사 이후부터는 이주갑인상은 소멸된다[10] 백제 귀인의 딸이며 적계여랑(適稽女郞)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고 기록되었는데 이는 상대편(適)에게 보내는(稽) 여성(女郞)이라는 뜻이다. 고대 일본어로 챠쿠케이에하시라는 훈이 달렸는데 챠쿠케이는 적계를 그냥 음독한 것이지만 에하시는 현대의 '아가씨'와 관련된 고대 한국어로 추정된다. 이케츠히메가 시세츠히메와 동일인물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하나의 가설일 뿐이고 확증된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