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방파제 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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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파제돔
北防波堤ドーム
1. 개요
2. 구조
3. 역사
4. 여담


1. 개요


홋카이도 왓카나이에 있는 방파제 돔. 츠치야 미노루가 설계하였으며, 2001년에 선정된 홋카이도 유산목록으로 선정되었다.


2. 구조


방파제 은 높이 14m, 길이 427m 고대 그리스 신전의 모양을 한 기둥이 6m 간격으로 70개가 늘어서 있다.
이 북방파제 돔은 1931년부터 5년간에 걸쳐 완공되었다. 원래 이 방파제돔이 있기 전에 약 5.5m 높이의 방파제가 있었으나, 연중 강한 바람이 부는 왓카나이항에 거대한 파도가 몰아쳐서, 방파제를 지나는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추락하는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자 새로운 건축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거대한 구조물은 방파제의 역할뿐만 아니라 당시 왓카나이항 부두에서 역까지의 환승 통로로 사용되었다. 이 방파제 돔이 만들어진 후 왓카나이역에서 이곳까지 철로를 연장하고 임시역(왓카나이잔교역)을 만들었다. 승객들은 이 돔을 통해 사할린으로 가는 연락선을 탔던 것이다.

3. 역사


왓카나이에 현대적인 항만의 건설이 시작된 것은 1920년이었다. 그때까지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왓카나이에 철도가 개통되고나서 점차 중요한 항구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홋카이도의 다른 항구들이 주로 어항 혹은 석탄의 선적항으로 개발 이용된 반면에 왓카나이는 사할린으로 가는 관문항으로 건설되었다.
이 건축물을 만든 사람은 당시 스물 여섯살의 츠치야 미노루(土谷実)이다. 1928년, 홋카이도제국대학(현재의 홋카이도대학) 토목공학과의 제1기생으로 졸업한다. 그는 히로이 이사미의 최초의 제자중 하나로, 당시 홋카이도 항만 건설을 지도 감독하고 있었던 이토 쵸에몬[1]의 권유로 왓카나이 축항사무소에 부임한다.

츠치야 미노루가 북 방파제 돔 디자인을 설계한 것은 그로부터 3년후인 1931년. 스물여섯의 이 기사에게 설계를 지시한 것은 사무소 소장인 히라오 토시오였다. 츠치야가 설계를 담당한 것은 그가 대학 시절에 연구 개발 단계였던 아치 콘크리트 교량의 디자인을 배웠다는 이유에서였다. 츠치야는 2개월만에 강도 계산에서부터 도면까지 모든 설계를 마쳤다. 지붕으로 만든다는 것은 히라오가 한 것이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낸 것은 츠치야였다. 츠치야가 모티브로 잡은 것은 당시 홋카이도제국대학의 건축과에서 강의하고 있던 은사의 수업 노트에 있던 유럽 건축의 프린트였다. 거기에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전과 극장, 교회 등이 그려져 있었고 이것을 참고한 것이다.

처음 설계 당시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는 수평으로 계획되었지만 아치로 변경되었다. 지붕이 곡선으로 되어 있어 구조물 전체의 균형을 생각한 것이다. 한편, 이 방파제의 기초공사에는 당시에는 드문 콘크리트 말뚝이 사용되었고, 이 공사에는 증기 해머가 사용되었다.
나무 망루에 증기해머를 장착하고 모두 700개의 콘크리트 말뚝을 땅속에 박아 넣은 이런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당시 왓카나이가 처음이었다.
1945년 이전에 당시에는 이 방파제 안에 여객선을 타기 위한 대합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왓카나이잔교역이 만들어진 것은 1938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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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카나이잔교역 개찰구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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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쿠 연락선 연결통로와 역명판 (1943)
이렇게 만들어진 북 방파제 돔은 태평양전쟁이 끝난후, 사할린으로 가는 항로가 폐지되고, 석탄자재 창고로 사용되었다. 그러다보니 1965년대에 들어서면서 노후화가 진행되어 1970년에 부분적으로 보수공사를 했다. 하지만 1975년에는 콘크리트의 표면이 떨어져나가는 현상이 발생하는 등 건축물 곳곳에 위험이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1978년에 건축 초기 모습을 재현한 새로운 돔 건설을 시작했고 3년후에 완성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4. 여담


태평양 전쟁 이전에는 이 항구역을 통해 치하쿠 연락선(稚泊連絡船)을 타고 사할린으로 갔다. 치하쿠 연락선은 홋카이도 왓카나이와 가라후토(사할린) 오토마리를 오갔던 철도 연락선으로 이름은 왓카나이(稚内)의 '稚'와 오도마리(大泊)의 '泊'를 따서 지었다.
러일전쟁 승리의 대가로 일본은 1905년 사할린 섬 남부 절반을 차지했다. 이 섬은 러시아 제국에게 있어서는 땅끝 변방의 섬에 불과했지만 일본에 있어서는 일본 열도의 연장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당시 일본 정부는 개척을 위해 대대적으로 일본인을 이주시키고 곧바로 철도 건설에 착수해 1906년에 개통했다.
당시 도쿄도쿄역에서 시작하는 도호쿠 본선 - 세이칸 연락선 - 하코다테 본선 - 소야 본선을 타고 왓카나이잔교역에 내려 다시 치하쿠 연락선을 통해 가라후토토선으로 도요하라역까지 이어지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치하쿠 연락선은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대기중인 열차에 탑승하는 등 급행열차 시간표와 그대로 연계되어 운행했다. 그래서 운영도 일본국유철도의 전신인 철도성에서 직접 운영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사할린을 소련군이 장악하면서 1945년 8월 23일 밤 운항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출처
[1] 히로이 이사미가 설계한 오타루항 북 방파제에 이어 남 방파제는 이토 쵸에몬(伊藤 長右衛門 1875-1939)이 설계하였는데, 그는 후쿠이현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히로이 이사미의 추천으로 오타루 항 건설 사업에 참여했다. 그는 히로이 이사미의 후임으로 1909년 2기 오타루 방파제 공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방파제를 건설하기 위해 처음으로 케이슨 공법(대형콘크리트 상자)을 채용했고 이 공법으로 1921년에 남 방파제가 완성되었다. 그는 이후 홋카이도루모이, 무로란, 구시로의 항만 공사를 담당했으며 사할린의 항구도 그가 설계 시공했다. 그는 죽기 전인 1935년에 나중에 자신이 죽으면 유골의 일부를 오타루항의 방파제에 넣어달라고 했고 1939년에 그가 사망하자 그의 유골은 방파제 등대 아래에 넣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