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하쿠 연락선
1. 개요
홋카이도 왓카나이와 가라후토[1] 오도마리를 이었던 일본의 철도연락선. 이름은 왓카나이(稚内)의 '稚'와 오도마리(大泊)의 '泊'를 따서 지었다.
2. 역사
러일전쟁 승리의 대가로 일본은 1905년 사할린 섬 남부 절반을 차지했다. 이 섬은 러시아 제국에게 있어서는 땅끝 변방의 섬에 불과했지만 일본에 있어서는 일본 열도의 연장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일본 제국 정부는 개척을 위해 대대적으로 일본인을 이주시키고 일본 제국은 곧바로 철도 건설에 착수해 1906년에 개통시켰다. 제국의 수도 도쿄의 도쿄역에서 시작하는 도호쿠 본선~세이칸 연락선~하코다테 본선~소야 본선에서 치하쿠 연락선을 통해 가라후토토선으로 토요하라역까지 이어지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치하쿠 연락선은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대기중인 열차에 탑승하는 등 급행열차 시간표와 그대로 연계되어 운행, 운영도 일본국유철도의 전신인 철도성에서 직접 운영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 사할린을 소련군이 장악하면서 1945년 8월 23일 밤에 마지막으로 출항한 이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현재 일본 최북단 철도역이 된 왓카나이역에 치하쿠 항로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냉전이 끝난 후 1995년부터 왓카나이~코르사코프 간 카페리가 운항(겨울에는 휴항)하기 시작하였으나, 운항사인 하트랜드 페리에서는 채산성 악화를 이유로 2015년에 취항을 종료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사할린 측의 상선사 SASCO에서 2016년 8월부터 여름철 주 2회 코르사코프~왓카나이 간 페리를 운항하기로 하였다. 요금은 편도 18,000엔. 왓카나이 시의 정기선 안내 2018년부터 일본인도 러시아 극동지방으로 관광 등의 목적으로 출입국 시에는 8일간 유효한 전자비자를 사전 신청할 수 있어서, 여행이 간편해졌다. 러시아 외무성 안내(일본어)
자매품으로 시모노세키역과 모지코역을 이었던 칸몬 연락선, 하코다테역과 아오모리역을 이었던 세이칸 연락선, 시모노세키역과 부산역[2] 을 이었던 부관연락선, 우노역과 타카마츠역을 잇는 우코 연락선 이 있었다. 부관연락선은 태평양 전쟁 패전으로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하면서 폐지, 칸몬 연락선은 칸몬 터널로 대체, 세이칸 연락선은 현재 세이칸 터널로 대체, 우코 연락선은 세토 대교로 대체되었다. 2016년 현재 위 노선에는 모두 정기 여객선이 다니고 있지만 철도연락선이 아니라 철도와 직접 연계되지 않는 일반 카페리(칸몬 기선은 일반여객선)이다.
3. 운항 선박
[1] 지금의 러시아 사할린 섬.[2] 정확히는 지금은 없어진 부산잔교역.[3] 최초 취항 선박. 1923년에 치하쿠 항로에 전속되었다가 한파에 의해 노후화된 선체가 손상되어 1931년에 운항중지, 1932년에 오사카 상선(大阪商船)에 매각된다. 이후 류큐 항로, 치토(稚斗) 항로, 세이칸 항로를 돌아다니다가 1951년에 무로란에서 해체되었다.[4] 1905년부터 부관연락선에서 운항하던 선박으로, 1923년에 치하쿠 항로에 전속. 1925년 12월 17일 눈보라로 인한 시계악화가 원인이 된 좌초 사고로 침몰(사상자는 없음)[5] 1908년부터 세이칸 연락선에서 운항하던 선박으로, 1926년에 치하쿠 항로에 전속. 1929년에 오사카 상선(大阪商船)에 매각되었으며 1933년에 해체됨.[6] 1913년부터 부관연락선에서 운항하던 선박으로, 1931년에 치하쿠 항로에 전속. 1933년에 북일본기선에 매각되어 만슈마루(満州丸)로 운행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와중에 일본제국 해군에 징집된다. 1944년 9월 9일 필리핀 해역에서 미 해군 잠수함 USS Queenfish의 어뢰를 맞고 격침되어 승선하고 있던 1600명 중 869명이 사망했다.[7] 처음부터 치하쿠 연락선에서 운항하기 위해 건조되었다. 1945년 7월에 미군 공습으로 세이칸 연락선이 괴멸적인 피해를 입어 도와주러 갔다가 1945년 8월 10일에 미군기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었다.[8] 처음부터 치하쿠 연락선에서 운항하기 위해 건조되었다. 패전 후 세이칸 연락선에서 배속되었다가 무로란~히로시마 간 석탄운송선으로 쓰이기도 했다. 1965년 8월 11일에 퇴역하여 이후 스크랩 처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