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묘아리
斜卯阿里
생몰연대 미상[1][2]
1. 개요
사묘아리는 스스로 머리를 묶고 종군하였는데,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전투를 치렀으며, 더욱 수군에 관한 것을 익혀 강주와 회주에서 군사를 부렸으며, 그 어떤 부역에도 따르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 당시 사람들이 수성(水星)이라 일컬었다. 질리부 절도사로 삼았으며, 순의와 태녕군을 다스리다 귀덕윤과 제남윤에 임명되었다.
'''『금사』''' 사묘아리전
斜卯阿里、突合速、烏延蒲盧渾、赤盞暉、大㚖、阿离補等六人,皆收國以來所謂熊羆之士、不二心之臣也,其功有可錄者焉。
사묘아리, 돌합속, 오연포로혼, 적잔휘, 대고, 아리보 등 6인은 모두 태조가 건국한 이래로 소위 곰과 같은 장수들로 두 마음이 없는 신하였으니 그 공을 기록하는 것이 옳도다!
'''『금사』''' 사묘아리전
여진족의 장수로 고려, 남송, 거란을 상대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은 명장이자 고려의 척준경, 송나라의 한세충과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전투를 보면 알겠지만 육지와 해상 모두에서 패배한 적이 없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장수로서, 외려 후반부 행적은 수군 장수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사묘아리의 성정(性)이 충직하였고, 지략이 많았다.형제가 서로 우애하였고, 집이 재물이 넉넉한 연고(故)로, 자기의 맹안(猛安)과 더불어 재물을 동생 애발리(愛拔里)에게 모두 주었다.애발리가 받길 수긍하지 않아, 세여)로 도피(逃避)하였는데, 사묘아리가 마침내 주었다.
'''『금사』''' 사묘아리전
한 블로거가 금사 사묘아리전을 번역한 포스팅이 있으니, 상세히 알고 싶다면 참조하자. 금사 사묘아리전(1), 금사 사묘아리전(2).
2. 생애
출생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금사에 따르면 아버지 혼탄(渾坦)을 따라 귀순한 인물이라고 나온다. 그 전부터 수차례 전공을 세우며 이름을 알렸다고 하니 유년기 부터 전쟁터를 누빈 인물로 보인다. 17세가 되었을 때 그의 백부인 호마곡(胡麻谷)을 따라서 사도를 공격해 사도의 동생이었던 사리지를 포로로 잡는 전공을 세운다.
2.1. 고려의 여진 정벌을 막아낸 선봉장
고려가 윤관을 앞세워 17만의 대군과 함께 여진족 정벌을 시도하자 이를 막아내기 위해 아버지 혼탄와 함께 참전, 목리문전(木里門甸)이라는 장소에서 고려군과의 교전이 벌어졌을 때 고려군 측 장수를 창으로 찔러 죽였고 이에 여진의 사기가 올라 고려군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석적환(石適歡)의 병력과 합류하게 되고 사묘아리는 선봉에 서서 고려군을 박살내버리며 2개 성을 빼앗는데 성공한다. 이후 이를 탈환하기 위해 5만의 고려군이 공격했으나 사묘아리의 방비에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퇴각하게 된다.
이때 사묘아리는 퇴각하는 고려군의 후미를 따라가 갈라수(曷懶水)에서 7만의 고려군과 조우해 하루동안 3차례의 대규모 회전을 치르며 고려군을 상대로 승리한다. 관련 포스팅. 참고로 당시 고려군 최종 병기였던 척준경은 이곳에 있었는지, 개성에 있었는지 기록에 나타나지 않아 알 수 없다.
갈라수에서의 큰 승리를 거둔 이후 사묘아리는 타길성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하며 고려의 여진 정벌계획을 무너트리는 데 일조하게 된다.
2.2. 요나라를 무너트리다
고려와의 전쟁이 끝나고 사묘아리는 1115년, 완안아골타은 요나라(거란족) 침공 당시 신주, 빈주를 모두 공격해 함락시키는 데 성공하며 홀사리를 공격해온 수만의 요나라 병력을 단 100여기의 기병만으로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금사에 따르면 옷가지를 찢어 군기(軍旗)로 사용해 군대 수를 뻥튀기했고 이를 본 요나라 군이 놀라 도망갔다고 한다. 이때 점령시킨 소주와 복주가 1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켰고 인근 여진 마을을 포위해 먹을 식량마저 부족하게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묘아리는 급히 구원을 나섰고, 10여차례의 전투 끝에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는데, 반란군의 시체가 어찌나 많았던지 강물을 막아 물이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요나라와의 전투 도중 화살에 맞아 죽을 고비를 2번이나 맞기도 했지만 결국 소주, 복주, 현주, 영산현을 모조리 복속시키고 야율여도(耶律余覩)가 이끄는 요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또한 수만의 요나라군이 호리특을 공격하자, 급히 구원에 나섰는데 구원을 가던 중 마주친 요나라군 진영에 있는 비단 옷을 입은 20명의 사람을 보고 "저자들이 적의 추장이다!"라며 그들을 공격해 죽이는데 성공, 우왕좌왕한 요나라 병력은 뿔뿔이 흩어졌고 호리특을 포위하던 요나라 군들도 이 소식에 포위를 풀고 퇴각해버린다.
2.3. 송나라 정벌에서의 활약상
1126년, 1127년에 이뤄진 송나라 침공에 참전해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 개봉 침공에 수천의 병력으로 적들을 격파하는데 성공하며 공을 세웠고 회군 도중 조주를 공격해 함락시킨다.
1129년에 앙곡현과 신현을 함락시키고 남송군 8만을 격퇴하며 해주의 성문을 열어젖히는데 성공한 사묘아리는 이후 양산박에서 남송의 해군 1만척을 물리친다. 또한 남송의 장수 강민이 400여척의 배[3] 를 대자 400기의 기병을 이끌고 공격해 수천의 목을 베는 공을 세운다.
이후 광덕군을 항복시키고 항주로 가던 중 마주친 남송군 2,000명과의 격전 끝에 격파, 남송군을 모두 물에 빠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동관, 고교진에서 남송군을 격파하며 남송의 황제 고종을 사로 잡기 위해 추격했지만 고종을 끝내 잡진 못했다.
1134년에는 남송의 수군과 조우해 격파했고 남송의 장수였던 소통을 사로잡았고 이어 연수성과 석주성을 함락시켜낸다. 이후 도적들을 소탕하는 소소한 공을 세운 사묘아리는 금나라의 4대 황제인 해릉양왕 재임 초에 나이가 들어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자 군선 건조를 담당하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시호는 지민(智敏, 지혜롭고 민첩함)이었다.
3. 사묘아리의 전적
- 완안부 9대 추장 영가 때 아버지 혼탄이 완안부에 귀부 17세 사도 토벌전에서 사도의 동생 사리지를 잡음
- 대 고려전 : 목리문전에서 고려군과 오랫동안 싸움, 목리문전에서 고려군에 난입하여 장수를 죽이니 고려군이 궤멸, 도문수에서 선봉장으로 고려군을 격파하고 2성을 함락. 고려가 공격해 오자 요해처를 수비하다 고려가 철군하자 갈라수까지 추격하여 고려군을 격파함, 고려군 5만과 조우하여 격파, 같은 날 고려군 7만과 또 조우하여 격파, 고려의 타길성 공성전에서 성벽을 뚫어 성을 함락함
- 대 거란전 : 태조를 따라 거란의 영강주를 함락하고 맹안(병력 1천)을 수여받음, 거란 신주, 빈주 함락, 홀사리성을 공격하는 요군 수만 명을 겨우 100기로 계략을 부려 철군시킴, 항복했다가 다시 배신한 소주와 복주의 10만 반란군과 10여 차례 싸워 격파하여 강물을 시체로 막히게 함. 거란과 해족이 1000척의 배로 바다로 도주하자 27척을 이끌고 추격함, 화살에 2번 맞아 생사가 위태로웠으나 힘껏 싸워 도주한 거란족과 해족을 격파하고 배를 모두 획득함. 소주, 복주, 파속로 평정. 현주, 영산현, 양어무 함락. 야율여도의 거란군 격파, 거란 소고아 + 구근의 병력 수만을 8모극 800명으로 격파함. 장각 토벌전에서 누봉구의 잔당 처리, 평주 함락.
- 대 송나라전 : 1차 개봉 포위전에서 교각을 확보하고 황하를 건넘. 2차 개봉 포위전에서 보주, 중산, 진정 함락.. 황하를 건너 북송군 400을 죽이고 개봉 포위 참여. 야밤에 북송군 1만이 급습하였으나 이를 격퇴, 회군하면서 조주 항복시킴. 1128년 남송 토벌전에서 양곡현, 신현 함락. 해주 남송군 8만 명 격파. 양산박에서 남송 수군 1만 척 격파. 등양, 동평, 태산 도적떼 항복시킴. 도적떼가 범현을 공격하자 격퇴하고 배 700척 획득.. 수춘을 항복시키고 회수의 상류에서 배 준비, 당해 + 대고와 함께 회남에서 남송군 10만 격파, 배 200척 획득. 광덕군 항복시킴, 항주의 남송 복병 2천 격파. 포로혼과 함께 정병 4천으로 동관, 고교진 함락. 남송 고종이 명주로 달아나자 명주를 공격하였으나 큰 손실을 입음, 남송 고종이 바다로 도주하자 여요로 철군. 당해와 더불어 명주를 함락하고 조백악을 사로잡음. 남송 고종이 있는 창국현으로 갔으나 고종은 온주로 도주 사묘아리가 바닷길로 300리를 추격하였으나 실패. 명주를 무너뜨리고 회군. 종요의 섬서 공략전에 1맹안(1천명)을 이끌고 참여해 위주 함락.
- 말년 : 1134년 수운로 감독 박주, 하로에서 남송 수군 격파, 60리를 추격하여 소통을 사로잡음. 연수 수채의 남송 수군 격파. 1138년 ~ 1140년 사이에 석주의 도적떼 토벌. 종필의 남송 정벌전에는 이미 늙어 참전치 못하고 군선 건조 감독함. 남송이 칭신하고 재물을 바치자 희종은 사묘아리에게 천만전을 하사함.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4. 여담
- 2016년 수학능력시험 대비 EBS 수능특강 세계사의 문제로 출제되었다.
- 당시 척준경이 맹활약한 고려의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의 선봉장 중 한명으로 맹활약 했기에 두 사람의 맞대결을 하면 누가 이겼을까? 하는 VS놀이가 가끔 벌어지기도 한다. 고려군과 여진족 간의 대규모 회전이 벌어진 갈라수 전투에서 당시 척준경의 행방이 묘연하기 때문에 실제로 맞붙었는 지는 알 수가 없다.
- 동시대에 활약한 명장이었던 한세충, 척준경과 달리 말년도 평안하게 보냈다. 비록 말년에 해릉양왕이 재위했지만 재임 초에 해릉양왕은 그 막장을 아직 잘 드러내지 않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천수를 누리다 간 것이다.
[1] 사묘아리가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지만, 그가 사망한 해를 언제인지 기록하지 않아서 생몰연대가 정확하게 알 수 없다.[2] 그나마 추정하자면, 열전에 따르면 금나라 정륭 연간(1156년 ~ 1161년)에 한국공에 봉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1080/90년대 전후로 출생하여 1150년대 후반~6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두 위키에는 생몰년을 1080~1157로 기록했다.[3] 군함은 아니고 장사할때 쓰는 수송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