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토
1. 개요
一騎討
옛날 전쟁에서 자군의 사기를 높이거나 불필요한 병력손실을 막기 위해, 혹은 명예를 위해 전장에서 장수끼리 일대일 기마전으로 치르는 결투를 일컫는 일본식 표현.
2. 어형 및 유래
일본어 '잇키우치(
한국에서는 보통 삼국지 게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네티즌들이 주로 전쟁물 관련해서 쓰는 용어이나, 일본에서는 광범위하게 쓰이는 숙어적 표현으로[3] 축구에서 공격수와 골키퍼의 1대1 상황에서도 이 말이 쓰인다. '一騎'''打'''ち'라고 쓰기도 한다.
일본 고유어인 '우치(うち)'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쓰인 '토(討)' 자까지 한국식으로 음독한데다가 어순도 다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일종의 한본어이다. '토(討: 치다, 싸우다)' 한자만해도 우리말에서 '토벌(討伐)' 말고는 물리적 의미로는 거의 쓰이지 않고, "연구하다" 또는 "말다툼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토론(討論)이나 토의(討議), 검토(檢討)가 대표적 예.
이 단어가 한국에서 처음 쓰이기 시작한 것은 MSX판 삼국지 2가 국내에 보급되었을 때일 확률이 높다.[4] 이 때에는 영문판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어판의 한자를 그대로 읽은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었으며 게임잡지에서도 사용된 흔적이 있다. 이후 코에이 삼국지 3 공식 한글판이 발매되면서 대중에 이 표현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미 MSX시절 정착한 용어라고 생각했는지 '일기토'라는 표현을 그대로 공식 번역판에 사용했기 때문. 이후 다음 시리즈에서도 계속 '일기토'로 번역된다. 예외가 있다면 삼국지3 번역판 정발 이전에 만들어진 유저한글화 버전에서 사용한 '기마일전', 뒤늦게 나온 삼국지 2편 공식 한글판에서 사용한 '일대일 대결', 삼국지 DS 2에서 사용한 '일대일 승부' 정도. 이 때문에 삼국지 팬들은 물론이고 삼국지가 무엇인지 정도만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일기토라는 단어를 그냥 사용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워낙 유명해진 말이라 현대 한국어에서나 유행한 외래어인데도 주몽, 군도: 민란의 시대 등 한국사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써지는 황당한 경우도 생겨났다.
코에이와 넥슨이 2016년 공동제작한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한국어 표기인 단기접전이라고 표기했다. 일기토라는 단어가 한국에 퍼뜨려진 계기 자체가 코에이였던 만큼 개선의 의지를 보인 셈이다. 다만 아직 개선이 많이 필요한데, 게임 안의 표기에서조차 단기접전과 일기토가 혼용되어 있을 정도로 엉망진창이기 때문. 대표적인 예로 연의편의 인장 목표에는 "몇 번 이상의 일기토"라고 표기되어있다. 제작진도 일기토라고 넣어놓은 단어를 단기접전으로 바꾸는 업데이트를 하고는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저들도 여전히 일기토라는 단어를 더 익숙하게 여기고 있다.
2010년대 후반 이후로는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일기토" 라는 단어가 점점 밀려나는 추세인데,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의 사례도 있고, 삼국지 14는 여러모로 욕을 먹고 있지만 '일기토'대신 '단기접전' 이라는 용어를 택했다. 그리고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에서 개발한 삼국지 게임 토탈 워: 삼국의 전투 시스템에도 장수와 장수가 1:1로 전투하는 '일기토' 개념에 부합하는 기능이 존재하는데 이 요소를 "결투"라고 이름 붙였다.
한편 국립국어원에서는 본 단어의 순화어가 없다고 밝혀 빈축을 샀다. 정말로 외래어이거나 순화의 필요성이 있는지 확실히 증명되지 않은 애매한 일부 단어들은 굳이 순화어를 내놓고도, 이정도로 확실한 케이스는 외면해버린 것이다.
3. 어떻게 성립할 수 있었나
냉병기 전쟁 시절에는 용맹한 1인의 무력으로 수많은 일반인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이 시절의 전쟁에서 1인이 어느 정도의 무력을 보일 수 있는지를 보자.
위 원전은 1358년에 영국에서 발생한 대규모 농민 반란인 '와트 타일러의 난'에 대한 기록이다. 반란군이 수비대장인 로버트 샐 경을 협상하자고 단신으로 불러놓고는 일방적으로 애워싸고 전향하라고 협박하다가 일이 틀어진 것. 해당 문서는 사건을 그대로 서술하는 기사이고, 로버트 섈 경은 역사상의 중요 인물도 아니다. 4만 명에게 둘러싸였다는게 말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완전히 에워싸인 상태에서 무기를 든 성인남성들을 상대로 십여명을 죽인 것이다. 즉 일기토의 사례는 아니지만,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농민병과 기사의 격차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로버트 경은 말에서 손을 떼고 멋진 보르도 검을 뽑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훌륭한 솜씨로 폭도들을 주변에서 물리쳤다. 그에게 달려든 자들이 많았지만 칼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목이나 팔, 발, 다리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아무리 용감한 자도 그에게 가까이 오기를 두려워했다. '''4만'''이나 되는 폭도에 둘러싸인 기사는 '''열두 명을 죽이고''' 많은 자들에게 부상을 입혔지만 결국은 폭도들의 돌팔매질에 쓰러지고 말았다.
'''존 프루아사르 경(Sir John Froissart),<Chronicles of England, France and Spain, tr. Lord Berners, 1523-5>, 존 캐리, <역사의 원전>
냉병기 시대에는 창검이나 활 석궁으로 중갑의 병사를 죽이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이런 질 좋은 갑옷들은 보급하기 어려워 소수의 실력자들과 중요 인물들 위주로 배급되었다. 그래서 '프로'들이 전쟁터를 휩쓰는 것이 가능했다. 오늘날 사극에서 주연들이 적을 몇 명씩 베고 다니는 것에 대한 반감으로 '에이, 드라마니까 그렇지 실제론 제대로 싸우겠어?' 라는 인식을 가진 경우가 많은데, 고대전은 분명 후술될 괴수 수준의 무장들까진 아니라고 해도 기술이나 장비면에서 우월했던 베테랑들이 신병에 비해 큰 힘을 발휘했다. 여기에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적을 죽여야한다는 것에 전혀 의문을 품지않는 마음가짐이 특히 중요했다. 또한 전근대의 대규모 전투에 동원된 병사들은 제대로 훈련되지 않은 농민병, 신병, 강제로 끌려온 징집병의 비율이 높았고, 이런 오합지졸들은 무기 하나 쥐어준 것을 빼면 일반인과 다를바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시대에 정식으로 무예를 연마하고, 최고의 무기와 갑주를 갖추고 말까지 탄 장수가 잡병 수십, 수백명을 쓸고 지나가는 것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5]
위 사례에서 보듯 항우, 리처드 1세, 관우, 장비, 방덕, 사묘아리, 한세충, 척준경 등 같이 아예 단기, 혹은 소수의 병력으로만 적진으로 돌파해 무쌍난무를 찍는 괴수들도 있고 장수들끼리 단독으로 투장을 청하거나 도주하는 상대 지휘관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투장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한 마디로,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지휘관이 직접 무기를 들고 전쟁터로 나간 경우가 드물지 않았으며 이들 중 몇몇은 기본적으로 무력이 뛰어난 무장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었던 장수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을 남겼고 관장지용, 역발산기개세, 사자심왕, 진 만인적, 백마장군같은 이명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병기의 시대에선 중무장한 사람을 죽이려면 고도의 기술과 용맹함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과거의 장수들은 전선에 가까운 위치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위치에 설 경우가 현대의 장군들보다 훨씬 많았다. 오늘날의 시점으로 보면 고위 지휘관인데 전선으로 직접 뛰어드는건 무모해보이지만 오히려 지휘관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나서 용맹을 떨침으로서 아군의 사기가 증강되는 경우도 분명 있었고 이는 과거의 괴물같은 용장들인 이들의 사례에서도 증명된다. 이는 중국만의 일이 아니다. 한국사의 이름난 명장 이성계조차 총사령관으로서 기병을 이끌고 손수 괴력무쌍으로 난전을 벌이다가 미처 자신을 공격하는 적을 보지 못하고 의형제 이지란의 도움으로 살아난 적도 있다. 슬슬 화약이 전쟁터에 퍼질 시대인데도!
거기에 역사에 이름을 크게 날리지 못한 장수들도 1:1로 투장을 하거나 혹은 그걸 원하는 모습도 이렇게 꽤나 보이고 있다.
- 항우는 5천의 기마병에게 28기로 세번 돌격해 적장을 죽이고 깃발을 꺾고 2명의 사상자만 내었고, 자살하기 직전에는 말 없이 혼자서 적 기마병 수백을 죽였다.
- 리처드 1세는 야파 전투에서 58기의 기사와 200여명의 보병과 함께 1만의 살라딘군을 몰아냈다.
- 척준경은 혼자서 성문을 기어올라가 성문을 점거하고, 추격하는 적군에게 단기필마로 뛰어들어가 적장을 베어 추격을 막았다.
- 관우는 말을 채찍질 해 단숨에 수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상대 지휘관 안량을 찔려 죽이고 수급까지 챙긴 후 거기 있던 다른 원소군 장수들을 모두 압도하여 백마의 포위를 풀었다.
- 방덕은 난전중에 적의 지휘관 곽원을 죽이고 관우와의 싸움에선 손수 활을 쏘고 단병접전을 벌이며 병사들과 함께 싸웠다.
- 한세충은 첫 전투에서 성벽을 부수고 적장을 죽였고 서하황제의 사위를 급습해 죽였으며 단 50기의 기병으로 2천명의 요나라 추격대를 격파하고 단기필마로 아군이 무너진 상태에서 금나라군이 우글거리는 사이를 빠져 나왔다.
- 사묘아리는 고려의 전투에서 직접 창으로 고려군 장수를 찔러죽였다. 요나라와의 전투 도중엔 화살에 맞아 죽을 고비를 2번이나 맞기도 했지만 결국 소주, 복주, 현주, 영산현을 모조리 복속시키고 야율여도(耶律余覩)가 이끄는 요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냉병기 시절의 전쟁 양상은 현대전보다 훨씬 더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변수가 많다. 특히 사기나 보급, 군장, 기세 같은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병력의 숫자와 상관 없이 어마어마한 대군도 사기가 바닥나면 도주하다가 소수 병력의 추격에 엄청난 사상자를 낸다. 단순히 전투력, 숫자 가지고만 비교하면 비수대전이나 고구려-수 전쟁 같은 결과는 안 나오는 게 정상이다.
19세기부터 등장한 현대전이 아닌 대다수의 인류 역사에서의 전장터는 혼란의 연속이라 말을 타고 고속으로 움직이는 적장을 멀리서 일일이 포착하기도 힘들고, 적장을 봤다고 궁수에게 일일이 명령하는 것도 상황이 허락하지 않는 한 쉬운 일이 아니다. 게임처럼 실시간으로 궁수들에게 좌표 어디어디로 쏘라고 할 수가 없다. 거기다 궁병은 기본적으로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한 병종이라 숙련도가 떨어지는 궁수들을 운용한다면 더더욱 그렇게 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전설적인 명궁인 것은 전장에서 이렇게 날뛰는 적 장수의 투구를 핀포인트로 벗겨낼 정도로 엄청난 정밀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에서 잠시 언급한, 전장을 설정하여 당대의 연노나 화살로 원하는 좌표를 병사들로 하여금 정확히 조준하게 하여 위기상황을 잘 아는 노련한 명장들을 원거리에서 일제사격으로 죽여버린 제갈량이나 손빈 같은 인물들도 무서운 인간들인 것이다.
어쨌거나 당시 상황상 이런 초월적인 무위는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전쟁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평범한 병사들이 쉽게 상대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만약 적장이 항우, 리처드, 관우, 한세충, 척준경 같은 만인지적 급의 한 번에 수십에서 수백 명을 베어죽이는 괴물이고 당신이 평범한 병사라고 가정하자. 저들은 마상에서 수십 명 정도 상대가능한, 다른 장수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최강인 무술과 상대적으로 최고의 용맹이 있다는 자들이다. 당신이 전장에 갔다고 생각하고 손에 든 냉병기로 저런 괴물이 앞에 있으면 100% 죽음인데 다가갈 용기가 있겠는가? 주변에서 달아나면 그 순간 다 같이 튀고 전열의 붕괴는 전체의 패주로 이어진다. 결국 이런 인물들의 무용이 가능한 이유는 장비, 신장의 차이, 그리고 무엇보다 사기의 차이 때문이다. 당대 최강이라 불리는 인간병기에 위압당하고, 위축당하고, 겁 먹기 때문인 것이다.
항우의 예를 들자. 누번이란 인물이 한군 진영에서 초나라 장수를 활로 저격해 죽였는데, 항우가 혼자 말타고 나가 나랑 붙자고 한다. 누번이 항우 역시 쏘려고 했는데 항우가 쏘아보며 꾸짖자 겁먹고 활 쏘지도 못한 채로 진지 내로 도망친다. 자기 진지에서 활 쏘니 겁먹을 거 없는데도 저런다. 해하 전투 이후 추격전 때 적천후란 장수가 기병을 지휘해 항우를 죽이기 위해 추격하는데, 고작 28기밖에 남지 않은 항우가 호통을 치니까 말과 기병들이 놀라 패주해 달아난다. 이렇게 위세에서부터 짓눌리고 겁을 먹는데 수적 우위가 발휘되기를 바라는 것, 혹은 그 수적 우위를 물리쳤단 말을 들고 100배의 적을 패주시키다니 거짓말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현대인이 겪는 전장이 과거의 전장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장판파의 장비의 예와 비슷하다. 장비가 아무리 좁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고 해도 상대는 몇십 배는 더 많았을 정예 기병대인데 장비의 노호성에 모두 질려서 감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이미 장비의 위명과 용맹, 무위를 알고 있기에 기세에서부터 밀렸단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보자, 관우는 정사에 마취도 없이 살을 가르고 뼈를 깎는 수술 도중 웃으며 부하들과 담소를 나누었고 머리에 화살을 맞았는데도 죽지 않았다고 기록된 인간이다. 거짓말 같지만 현대에서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질러 소신공양하며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비명은커녕 앉은 채로 죽을때까지 움직이지도 않는 정신력을 가진 스님도 있고 지금도 가끔 자신들의 뜻을 알리기 위해 분신시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장 지장의 대명사라는 충무공 이순신만 해도 하급 군관 시절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 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 이상의 조선인 포로를 구출한 인간흉기이자 맹장'''이었으며 나이가 들어서 조총탄에 맞을 때도 고통을 참으며 전쟁을 지휘하고[7] 휘하 장수들과 작전을 논하기도 했다. 당장 인간흉기 문서를 봐도, 혼자, 혹은 소수가 전장을 뒤흔든 괴수들의 열전이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인간들은 전장터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통 사람이라면 바로 자지러졌을 부상을 입거나, 창칼 한두 번 찔렸다고, 화살 한두 대 맞는다고[8] , 적군의 수가 많다고 꿈쩍하지 않을 정도의 무모할 정도의 용맹과 무용을 보이며, 반대로 이런 용맹에 겁을 먹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병사들을 향해 돌격하는 것이다. 관우가 안량을 죽였을 때도 수많은 창칼이 그의 몸에 들이대졌을 것인데 원소의 장수들이 그를 상대하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사묘아리가 요나라와의 전투 도중 화살에 맞아 죽을 고비를 2번이나 맞기도 했지만 결국 소주, 복주, 현주, 영산현을 모조리 복속시키고 야율여도(耶律余覩)가 이끄는 요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가? 또 이순신이 부득이하게[9] 대장선 한 척으로 수백 대의 배를, 그것도 역류를 맞은 상태에서 단독으로 상대했을 때 일본 수군이 죽일 수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 거기에 이런 장수들은 전장터에서 살아 돌아올 때마다 그만큼의 실전 경험이 전장터에서 죽기 십상인 일반 병사들에 비해 더 축적될 수밖에 없으니 전장터의 위명은 나날이 더했을 것이다.
지금도 잘 훈련된 종합격투기 선수들은 맨손으로 시비 거는 다수의 일반인들을 맘만 작정하고 먹으면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고 정말로 이들이 이렇게 나오면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겁을 먹고 감히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게 뉴스에 가끔씩 나오는 세상이다. 다만 법과 사회 질서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그나마도 현대의 격투기는 기본적으로 스포츠지 사람을 완전히 살상하기 위해서 훈련받는 게 아닌데도 이러한데, 엄연히 사람 죽이기만을 위해 만들어진 날카로운 냉병기들이 기본적인 무술로서 장착된 시절에 담담할 일반인은 없다.
거기에 용맹은 전장터의 혼란 요소 중 딱 하나일 뿐이다. 중요하긴 하지만 그 외 다른 여러 요소들도 이런 압도적 전력열세를 극복하는데 기여한다. 이번엔 리처드의 예를 보자. 살라딘이 300여 명의 부하와 함께 1만의 살라딘군이 공격하는 야파 요새에 뛰어들었을 때 살라딘군은 기습에 놀라 리처드의 병력을 대군으로, 그리고 리처드의 300병력을 대군의 선봉으로 착각한다. 지휘관의 오판, 지형, 기후, 보급문제, 지휘자들 단결 문제, 소통 문제 등 변수는 끝도 없이 많은 변수가 있고 과거의 용장, 맹장들은 이런 상황을 이용할 줄 알고 맹렬하게 공격할 줄 아는 자들인 것이다.
추가적으로 용맹으로 이름난 최고위급 지휘관이라면 그 휘하 호위병들도 엄청난 용맹과 무위를 가진 자들인 경우가 많다. 항우가 이끈 최후의 28기 기병대는 수십배의 추격군을 상대로 돌격해 단 두 명밖에 죽지 않았고 야파 전투에서 리처드가 이끈 15명의 기사들은 리처드와 함께 용맹하게 돌격해 리처드의 전군 중에선 겨우 두 명밖에 죽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괴물들 상대로 평범하게 일반 병사들을 상대할 것을 가정하고 훈련받은 일반 병사이나 군관들이 그 위용을 견디기 어렵다. 만약 그 위용을 이기는 자라면 그 자 역시 후일 용장이라는 이름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항우나 리처드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다들 이름없는 무명시절부터 밑에서 올라온 자들이다. 이성계 또한 괴물같은 활약의 배경에는 그가 눈먼 칼이나 눈먼 화살에 당하지 않게 불을 키고 지키려고 했던 의형제 이지란과 사병인 가별초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런 1:1 일기토의 사례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당태종의 일기토 머신 진경의 예를 들었는데 당태종은 적진에서 돌아다니며 용맹을 과시하고 사기를 증진시키는 용맹한 장수들을 진경을 보내 투장으로 죽여버렸다. 이는 즉 용맹을 과시하는 적군의 사기를 꺾고 아군의 장수들의 용맹을 보여줌으로써 아군의 사기를 증진시키기 위한 행위인 것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투장을 신청하는 자들은 보통 아군에서 용맹으로 이름난 돌격대장 정도의 위치인 자들이 있고 자신의 용맹을 믿고 적의 지휘관을 상대로 도발하여 적의 지휘관이 이런 도발에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자라는 식으로 깎아내릴 수 있다. 그래서 아군 측에서도 용맹을 자랑하는 장수를 내보내게 되는 것이고 이러면 바로 투장, 우리가 아는 일기토가 되는 것이다. 그외 도망가는 적 지휘관의 목을 얻어 출세하려고 혼자 덤비는 사례들도 있고 말이다. 마치 삼국지연의 같은 얘기지만 몇몇 전투 사례에선 정말로 그런 일들도 실제 있었다는 얘기다. 안 그런 경우가 더 많았기에 특이 사례로 남은 것이긴 하지만, 고대부터 수많은 전투가 있었고 그런 전투들 중에선 이런 사례들도 있었으며 무조건 비현실적으로 보기만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또 전근대 시기에는 일선 지휘관은 병사들과 몸을 맞추어 적과 냉병기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고 지휘관의 무용이 부대를 단결시키는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지휘관도 모두가 사령관급인 것은 아니고, 결국 누군가는 일선에서 병사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이런 일선 지휘관 중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경우는 기병대 대장인 경우가 많은데 고대에 기병이란, 다루기도 어렵고 모집하기도 어렵고 그걸 지휘할 줄 아는 사람들은 더 찾기 어렵다. 부대에 통신병이 하나씩 딸려 있던 시대도 아니고, 전장에서 가장 빠르고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 기병대가 정작 본군의 지시를 받기 어려운 병종인 것이다. 따라서 기병대 지휘관은 자신이 이끄는 기병대에 직접 포함되어 자신의 판단으로 싸워야 했고 백병전이나, 최소한 돌격 상황에 대처할 개인적 무용 실력을 가져야 했으며 이런 '실력'은 일반 보병에 비해 높은 신분이기 마련인 기병대 지휘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기병대 지휘관은 흔히 말하는 '선봉'의 이미지와 역사상 실재가 일치하는 드문 경우였다. 이런 기병대 지휘관이 선봉에서 서서 일선 적군과 칼을 맞대다 보면 상대 지휘관과 칼을 맞대는 일도 생기는 것이다.
이런 용기가 무력으로 환산되지 못하는 건 '''총의 명중률이 발달해서 아무리 세계 최고의 용기를 가진 사람도 다수의 총 일제사격으로 침묵시킬 수 있게 된 이후의 즉, 오늘날 같은 현대전이 완성된 이후의 이야기'''이다. 많게는 총기가 본격적으로 전장의 주력으로 등장하는 시기, 적게는 명중률이 올라간 강선 라이플과 기관총이 등장한 19세기 중반 이후부터이다. 총이 등장하면서부터 '아이들이나 아녀자들도 가장 용맹한 자를 손쉽게 죽일 수 있게 되었다'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나마도 초기 총기가 활약하던 시절에도 윙드 후사르 같은 괴물기병이나 조아킴 뮈라 같이 선두에 서서 절정의 무위를 자랑하는 자들이 있었다. 더욱 강력한 강선 라이플, 기관단총, 기관총, 돌격소총, 샷건 같은 무자비한 개인화기 화력이 등장한 19세기 중반 이후의 전투에서 이런 사례는 거의 사라져버리고[10] 20세기에 더더욱 발전한 야포, 전차나 항공기, 미사일 등이 등장한 이후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시절의 전술교리만 믿고 용맹하게 돌격시켰다가 수많은 인명을 갈아버린 극치가 러일전쟁이나 제 1차 세계대전 같은 사례들이고. 이젠 한 사람의 명장보단 체계적인 지휘시스템이 전장을 지배하는 시절이다. 이러니 '''더 이상 개인의 무력이 전장을 뒤엎을 시대가 아님을 알기에''' 현대인은 감히 한 사람의 용맹이 전장을 뒤엎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용맹한 소수'에 맞서기 위해서는 상대편에도 용맹한 사람이 있어야지만 사기를 유지하고 전선을 지킬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용맹한 장수 둘이서 싸워서 졌다 = 맞붙어도 질 가능성이 높다'가 성립할 수 있었다.
상주 교체 시기 목야대전의 경우 실질적인 유물이나 전황을 기록한 서술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춘추 시절에는 귀족계층의 전차전 위주로 전쟁이 진행되었으므로 사실상 전차-전차간의 일기토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단, 이러한 일기당천이 가능은 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소수의 힘으로 전장을 뒤흔든 사례가 늘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사에 등장하는 모든 장수, 병사들이 이런 괴물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창작물을 통해 과장된 면이 있다. 한편, 그런 정도의 무력이 없는 장수라 하더라도 1:1 승부로 장수끼리 맞붙는 케이스는 가끔 보인다. 밑에서도 설명하겠지만 그 '''악비'''도 정사 악비전에 다른 장수와 일기토를 붙어서 이긴 일화가 있다. 단, 그렇다고 진짜 지휘관들끼리 마구잡이로 한 경우보다 그보단 한급 아래의 효장(사납고 날랜 장수)들끼리 붙은 것이나 지휘관끼리 우연히 만나거나 추격 중에 싸운 것이 많으니 주의.
4. 창작물에서
삼국지의 일기토(일대일 대결)는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많이 알려져 있으며, 용장 간의 일대일 대결이라는 점 때문에 때문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연의에 등장하는 일기토는 대부분 허구이다. 정사 삼국지에서 일기토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싸움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여포, 관우, 손책, 태사자, 방덕 등의 기록이 전부다.
삼국지연의에서 일기토 장면이 적극적으로 활용된 것은 송나라 이후 삼국지가 백성 사이에서 인기를 얻어 자주 공연되면서부터이다. 송대에는 재담가 또는 변설가라고 할 수 있는 '설화인'들이 이야기를 통해서 먹고 살았는데 이때 인기를 끈 주제가 바로 군담이었다. 송대까지는 주로 만담이나 판소리처럼 소수가 간단하게 짤막한 대목을 이야기하거나 노래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이 독자성을 위해서는 독창적인 묘사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소식이 삼국지에 대해서 평하면서 조조가 이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화를 내고 유비가 이겼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좋아하더라 라는 식으로 표현한 것이 이런 설화인들과 관객에 대한 것이다.
이 재담의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일대일 대결장면이 많이 추가된다. 그리고 원대에는 연극에 해당하는 연극이 발달하는데, 이때가 바로 재담이 희곡을 거쳐서 소설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연극이 되면서 전쟁 장면이 나올 때 여러 명의 군대를 동원하는 데 더 무리가 생겼고, 그 장면들을 죄다 전부터 기존의 재담가들이 써먹어 왔던 일기토로 대신한 것. 그리고 설화인들과 연극의 단계에서 완성된 것이 대본이라고 할 수 있는 진상삼국지평화(=삼국지평화)이고, 이 진상삼국지평화를 보다 소설 체계로 다듬은 것이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다.
대규모 부대의 전투를 개인과 개인의 대결의 형식으로 치환하는 것은 전쟁을 주제로 하는 역사소설에서 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주제로 하는 군담소설 임진록에서도 대부분의 전투를 일기토 형식으로 해결한다. 애초에 삼국지연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작품이다.
이러한 영향은 현대의 서브컬쳐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우주를 다룬 '''기사활극'''에 가까운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서 파일럿들간의 대결은 이러한 일기토의 연장선상에 가깝다. 은하영웅전설에서도 전함간 일기토를 신청하는 귀족이 나온다.
삼국지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 같은 영상물에서는 빠지지 않는 필수요소.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일군을 통솔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지휘관끼리 직접 대결을 벌인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은 여전하다. 하라는 지휘는 안하고 일기토만 벌이는 광경은 예삿일이고, 아예 말을 탄 채로 멈춰선 상태에서 서로 마주보고 칼을 주고 받거나, 적장이 타고 있는 말은 절대 공격하지 않는 신사적인 룰도 존재하는 듯하다. [11] 물론 어디까지나 창작물일 뿐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특히 드라마 삼국의 일기토 장면이 과장을 넘어 무협지 수준을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말을 탄 상태에서 뛰어올라 360도 회전을 하면서 공격을 피하거나 아예 달리는 중인 말의 안장 위에 서서 공격을 하는 등 진지한 대결 장면에서 웃음을 유발할 만한 요소가 들어있다.
삼국지나 수호지와 같은 군웅소설 등에서 일기토를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합(合)'''이라는 단어는 창칼을 서로 맞부딪치는 회수가 절대로 아니다. 애당초 말이 멈춘 상태에서 두 장수가 마주보고 창칼을 휘두르는 흥미진진한 상황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만화 같은 가공물에서나 가능하지 실전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말이라는 생물은 본래 겁이 많아 말 탄 장수가 몸위에서 끊임없이 격렬하게 몸을 움직여대고 쇠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 장소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서로가 마주보며 말을 타고 질주하는 상태에서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 말을 멈춰세우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령 급히 멈춘다고 해도 말의 움직임 때문에 말 탄 장수 역시도 동작이 크게 흐트러지면서 전신을 노출하거나 최악의 경우 낙마할 수도 있다. 그래서 말을 타고 벌이는 일기토는 서양의 마상시합과 마찬가지로 서로가 서로를 향해 달려오면서 '''멈추지 않고 교차'''하는 순간 무기를 휘둘렀다가 다시 떨어지고를 반복하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며 이렇게 한번 교차해서 떨어지는 것을 1합이라고 한다. 즉 장비와 여포가 서로 50여합을 겨뤘다는 말은, 서로 대치해서 창칼을 50번 휘둘렀다는 말이 아니라 서로 마주보고 달리며 교차하기를 50번이나 했다는 말이다. 그 사이에 창칼을 100번을 휘둘렀든 1000번을 휘둘렀든 상관없이.
4.1. 삼국지 시리즈, 진삼국무쌍 시리즈
일기토라는 단어의 원조답게 매번 빠지지않고 일기토가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각 시리즈의 시리즈 목록 항목 참조.
위의 이미지는 삼국지 4와 삼국지 5의 일기토 장면으로 장수들의 이름 때문에 짤방으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4.2. 천지를 먹다
[image]
스테이지 보스를 잡으면 보스의 목을 따는 비주얼이 멋드러지게 나온다. '''적장 XX, 해치웠다!!'''(敵將~討ちとったり/I've killed general (이름))의 대사가 나온다.
4.3. 대항해시대 시리즈
대항해시대 시리즈에도 일기토가 있다.
대항해시대 2는 아군 기함을 상대편 기함에 바짝 갖다 붙인 뒤 전투 메뉴에서 돌격을 선택하면 "적 제독에 일기토를 신청하겠습니까?"라는 메시지가 뜨는데, 이때 "Yes"를 선택하면 일기토가 진행된다.[12] 일기토는 배와 배 사이에 널빤지를 걸고 그 위에서 제독끼리 결투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일단 일기토가 개시되면 컴퓨터에 의해 랜덤으로 진행되는 삼국지 시리즈의 일기토와 달리, 여기에서는 플레이어가 일일이 공격 기술(찌르기, 베기, 강타)과 방어 기술(걷어내기, 맞받기, 피하기)을 선택하여 조종해야 한다. 별급 특수 아이템(성기사의 검, 성기사의 갑옷 등)을 갖추지 않고 일기토를 할 경우, 차라리 포격전으로 적 기함을 때려 부수는 것이 더 쉽게 느껴질만큼 이기기가 상당히 까다롭다.[13] 10턴간 승부를 내지 못했을 경우 무승부가 되지만, 이후 다시 일기토를 재개할 경우엔 둘 다 10턴종료후 체력이 유지된채로 싸우게 된다.
대항해시대 3에서는 육상전에서 패할 위기에 처한 적이 걸어오거나 프로포즈할 때 훼방꾼이 자신이 먼저 여급에게 고백했다고 난입할 때, 기타 이벤트[14] 에 엮였을 때 하게 된다. 상-중-하단공격과 그 필살기 등의 공격기와 여기에 대응하여 웅크리기-피하기-뛰기의 회피기를 조합해 가면서 싸우게 된다. 이벤트 중에는 신전을 탐사하다 미노타우르스가 출현했을 때 일기토를 하는 선택지가 출현하는게 있는데, 실제로 할 수는 없고 만류하는 부관을 뿌리치고 박박 우겨 시작하면 일기토가 발생하는게 아니라 '''즉사'''처리된다.
대항해시대 4에서는 2와 비슷하게 갑판전 도중 넘어가나 조작은 불가능하다. 일반적으로 해병대기실을 함내에 설치해 두었으면 돌격대장으로 넣어둔 항해사가 적 제독과 일기토를 벌인다. 해병대기실이 없어 돌격대장이 존재하지 않거나 돌격대장을 배치하지 않았을때, 이미 존재하던 돌격대장이 일기토에서 패하거나 해서 빈사상태일때는 갑판요원이 다음으로 우선권을 가지며, 갑판요원도 없다면 부관, 부관이 없다면 제독(=주인공)이 직접 일기토를 하게 된다. 파워업키트판의 경우 1:1 전투가 연속해서 벌어지는 갑판전의 경우 아군이 승리했을때 랜덤하게 승리한 항해사중 1명이 일반 해적으로 위장한 적 제독과 일기토를 할 수도 있는데 이 갑판전이라는게 아군의 선원수, 선박능력, 기세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일기토쪽으로 잉여가 적 제독과 붙게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 또한 도시 광장에서 빠르게 걸어가는 사람을 클릭하면 랜덤으로 해적이나 불량배로 변하는데, 이 때 돌격대장과 일기토를 통해 돈을 뺏거나 뺏길 수 있다.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직접 함선들을 부딪혀서 백병전을 치룰 때가 있는데, 이때 갑판전이라는 이름으로 캐릭터 간의 일기토를 할 수 있다.
4.4. Warhammer 40,000
챌린지(Challenge)라고 부른다. 근접전투 중인 각 진영에 최소 하나의 캐릭터가 각각 있으면 신청할 수 있다. 이때 신청은 "커미사르야, 덤벼라~"가 아닌, "나 어스파이어링 챔피언에게 덤빌 놈은 없는가" 같은 형식이기 때문에, 상대방은 아무 캐릭터나 챌린지에 응할수 있다. 만약 거부할 경우, 챌린지를 신청한 플레이어가 거부한 플레이어의 캐릭터 하나를 지정해서 근접전에 관련된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약하면서도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15] 하지만 근접전 불이익에 "특수규칙도 적용불가"라는 규정은 없어서 그냥 거부하고 일반 모델로 버티는 경우도 많다.
6판에서는 상대 유닛이 챌린지중인 캐릭터 밖에 없으면 다른 모델들은 응원밖에 못하는 처지였지만, 이 룰이 상당히 욕을 많이 먹어서 결국 7판에서는 챌린지중인 캐릭터 밖에 안 남았으면 다른 모델들도 그 캐릭터를 공격할수 있게 룰이 바뀌었다. 역으로 오버킬이라는 개념도 생겨서 챌린지 상대가 죽으면 나머지 운드(세이브 판정을 아직 하지않은 운드)는 그 상대의 소속 유닛에게 배분된다. 8판에서는 챌린지가 아예 사라졌다.
4.5. 삼국장군전
박수영 작의 만화 삼국장군전 에서는 만화에서 다루기 좋은 캐릭터 간의 배틀을 삼국지 세력 간의 전쟁에 접목시켰고, 이것을 특수한 능력을 지닌 장수끼리 직접 맞붙는 ''''장군전'''' 이라는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해 표현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액션만화에 흔하디 흔한 맞짱 구도인데, 이것을 세계관과 결합시킴으로써 신선한 재미를 이끌어 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5. 일기토 목록
사실 삼국시대만 해도 이 100여년간의 시간대에서도 무려 일곱번의 일기토가 있었고 그 중에서 4번이 1:1 일기토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역사 전체의 레벨'''로 가면 정말로 장수끼리 1:1로 맞짱을 뜨는 경우를 좀 모을 수 있다. 당장 관장지용 문서에서도 일기토를 뜨는 무장 가지고 관우, 장비에 비하는 문구를 꽤 발견할 수 있다.
5.1. 실제 중국역사상의 일기토들
조익은 양쪽의 진이 세워지고 나서, 각각 그 장수가 나와 싸우니, 이를 도전(挑戰) 이라 일렀다고 기록하고 있고 왕안정의 경우 이를 투장(鬪將)이라 부르며 옛날부터 진실로 투장의 일이 있었으며, 모두 패관(稗官) 문학, 그러니까 삼국지연의 같은 망령된 이야기 아니라고 이르기까지 한다.
5.1.1. 초한전쟁기
항우가 유방에게 1:1로 붙을것을 제의하나 유방이 당연히 거부. 이에 항우가 장사에게 나가 도전하게 하니, 한의 장수 누번(樓煩)이 번번이 이를 사살했다.
'''《한서》'''
의외로 역발산기개세로 유명한 항우의 일기토 기록이 이 정도인데 그럴수밖에 없다. 본문만 봐도 알겠지만 '''당대에 이 인간 상대로 설령 이름있는 장수라도 1:1 일기토를 자청하겠다고 감히 나설만한 인간이 없다.''' 위에서 나온 누번도 항우가 1:1로 붙자고 할때 그 살기에 놀라서 바로 도주했다. 여기서 항우가 적장을 물리친 것도 그냥 항우가 달려가서 고함 한 번 지르니 한나라 병사들이 모두 엎드려 덜덜 떨며 쫄아붙은 상태에서 그냥 도망도 못 가던 이름없는 한나라 장수들을 죽인건데 이건 말이 장수를 죽여서 일기토인 거지... 애시당초 이 인간에게 굳이 이런 사소한 일기토 기록이 필요하긴 할까. 진짜 항우가 상대편 장수 죽인다고 작정하고 나서면 사람이고 말이고 다 덜덜 떨고, 그냥 눈만 한번 부릅떴다고 그 패기에 지려서 그냥 명색이 제후급 장수라는 사람이 몇 리 밖으로 도망갈 지경인데 일기토라는게 제대로 성립할리가, 마지막에 그가 죽을때도 병사고 장수들이고 누구도 혼자인 항우한테 접근할 생각을 못했고 결국 항우 스스로 자결해서 죽었다.이어 기병을 넷으로 나누어 사방을 향하게 했다. 한군이 몇 겹으로 포위하자 항왕은 기병에게 "내가 공을 위해 저 장수를 베마"하고는 기병들에게 사방으로 말을 달려 내려가서 산의 동쪽 세 지점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어 항왕은 크게 고함을 지르며 아래로 치고 내려가니 한군은 모두 엎어지고 쓰러졌다. 이어 마침내 장수 하나를 베었다. 이때 기병의 장수 적천후(赤泉侯)가 항왕을 추격했는데 항왕이 눈을 부릅뜨고 꾸짖자 적천후의 사람과 말들이 모두 놀라 몇 리 밖으로 도망쳤다. 항왕은 세 지점에서 기병들과 다시 만났다. 한군은 항왕의 소재를 모르게 되자 군을 셋으로 나누어 다시 포위하게 했다. 항왕이 치고 나와 도위 하나를 베고 백 수십 명을 죽인 다음 다시 그 기병들과 합류하니 기병 둘만 사망했을 뿐이었다.
'''《사기》''' 항우본기.
위 일화에 비하면 상당히 인간적인 레벨의 일기토다. 근데 유방은 나중에 천하를 통일하고 정공을 배반자의 본보기라면서 이런 자 때문에 항우가 천하를 잃었으니 본 받으면 안된다고 죽여 버렸다.계포의 외삼촌 정공(丁公)은 초나라 장수였다. 정공은 항우를 위해 팽성(彭城) 서쪽에서 고조를 추적하여 짧은 병기로 접전을 벌였다. 고조는 다급해져 정공을 보고는 "우리 둘 다 좋은 사람들인데 어찌 서로 해치려 하는가"라고 했고, 정공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고조는 몸을 피해 도망쳤다.
'''《사기》''' 계포난포열전.
5.1.2. 삼국시대
사실 이 목록 중에서도 일부를 제외하면 서로 상대했다기보다는 난전 중에 한 쪽이 상대방을 직접 죽인 것이 대부분이며, 난전 중이 아닌 서로 일대일로 싸운 경우에는 굵은 글씨로 표시.
아래는 주석으로 인용한 부분. 흔히 위략 등의 기록에 신빙성을 제기하지만 적어도 이것들은 배송지가 감수한 부분이고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채 실었기 때문에 신빙성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영웅기 등 정사 삼국지보다 먼저 작성된 것도 있다.
정사를 보면 '누가 누구를 죽였다' '목을 베었다' 등의 기술이 여러 차례 나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일기토라고는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정군산에서의 하후연과 황충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참(斬)이라고 하는 글자는 말 그대로 '무기를 가지고 손수 적을 벤다'의 의미도 있지만 전투의 결과로 전사, 사로잡은 적의 처형, 형벌의 집행 등의 의미도 포함된다. 연진에서 문추가 전사했을 때의 기록도 "(조조가) 병사를 풀어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했다.(遂縱兵擊, 大破之, 斬醜)"라고 되어 있으나 누구도 조조가 문추를 직접 베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忠推鋒必進,勸率士卒,金鼓振天,歡聲動谷,一戰斬淵,淵軍大敗
황충이 앞장서서 나아가 사졸들을 독려했다. 징과 북소리가 하늘을 가득 채우고 환호성이 계곡을 흔들었다. 한 번의 싸움으로 하후연을 참하니 하후연의 군대는 대패했다.
반대로 관우전을 살펴보면 안량과의 싸움에 대한 자세한 서술이 나온다.
여기서는 策馬, 刺 등 특정한 행위에 대해 묘사했다.策馬刺良於萬衆之中, 斬其首還
(관우가)말에 채찍질을 해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목을 베어 돌아왔다.
'''정사 삼국지 관우전'''
태사자전에서는 좀더 자세한 서술이 되어있음을 알수가 있다.慈便前斗,正與策對
태사자가 앞으로 나아가 정면으로 손책과 대적했다.
(중략)
策刺慈馬,而攬得慈項上手戟,慈亦得策兜鍪
손책이 태사자의 말을 찌르고 목덜미를 끌어당겨 수극을 빼앗았다. 태사자도 손책의 투구를 빼앗았다.
'''정사 삼국지 태사자전'''
방덕전에서는 '親'이라는 문자를 사용해서 직접 베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更親斬郭援首級
(방덕이) 곽원을 직접 참했다.
'''정사 삼국지 방덕전'''
여기서도 확실하게 마초가 죽을뻔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가 위략이라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적어도 배송지가 주석에서 인용했으니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고 마초가 약했다는 것은 아니며, 정사에도 그가 용맹스러웠다는 서술이 있다. 다만 염행보다 약했을 뿐. 무엇보다 이 때의 마초는 '''20살'''로, 젊은 수준을 넘어 사실상 청소년이었다.行嘗刺超,矛折,因以折矛撾超項,幾殺之
행(염행)이 초(마초)를 찔렀는데, 모가 부러지자, 부러진 모로 마초의 목을 쳐서 거의 죽임에 이르렀다.
'''위략'''
5.1.3. 오호십육국, 남북조 시기
유요 평선(平先)에게 진안(陳安)을 추격하게 했는데, 진안은 왼쪽 손에는 대도(大刀)를 쥐고, 오른손에는 장팔사모(丈八蛇矛)를 쥐며, 가까우면 도와 모를 함께 펼쳤고, 멀면 말을 타고 활을 쐈으나, 평선이 진안과 싸워, 세 번 엇갈리더니 그의 모를 탈취해서 돌아왔다.
'''《진서》'''
지휘관들끼리 군대를 버리고 지들끼리 치고박고 일기토하다가 결국 하나가 죽은 케이스이다(...)형양내사(衡陽内史) 왕응지(王應之)가 하혜문(何慧文)과 더불어 '''군을 내버려두고 직접 싸워'''(...), 하혜문을 8곳 찍었고, 하혜문은 왕응지를 찍어 다리를 잘라, 그를 죽였다.
'''《송서》'''
설안도의 일화는 관장지용의 일화 중 하나다.노상(魯爽)이 반역해, 설안도(薛安都)가 그를 토벌했는데, 노상은 일세의 건장하고 날랜 장수였으나, 설안도가 바로 나아가 그를 찌르니, 즉시 쓰러졌다.
'''《남사》'''
초도(焦度)가 위(魏)의 표피공(豹皮公)과 조우해, 창을 교차하며 싸우니, 표피공이 땅에 떨어졌다.
'''《남사》'''
명색이 최고지휘관의 아들이 일기토를 원하는 적의 장수와 바로 1:1 일기토를 떠서 적을 죽였는데 위나라 군은 지휘관이 죽자 바로 흩어져 도망갔다.진경지가 현호성(懸瓠城)에 있을 때, 위의 효장(驍將) 요웅(堯雄)의 자식 요보악(堯寳樂)이 가장 용맹해, 단기로 교전하길 구하나, 진경지의 자식 진흔(陳昕)이 말을 채찍질해 뛰어들어서 바로 요보악을 취하니, 위의 군이 흩어져 달아났다.
'''《남사》'''
후경은 후경의 난 일으킨 그 사람 맞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1:1로 싸우다가 다른 장수의 난입으로 일기토가 중단된 것이다.유중례(柳仲禮)가 청당(靑塘)에서 후경과 싸울 때, 창이 장차 후경에게 미치려는데, 지백인(支伯仁)에게 어깨를 베여, 마침내 달아났다.
'''《양서》'''
역시 관장지용 일화에서도 나온 1:1 일기토 사례북제의 군이 여량(呂梁)에 이르렀을 때, 서역호(西域胡)가 궁술이 훌륭했는데, 오명철(吳明徹)이 소마가(蕭摩訶)에게 이르길 "만약 이 호를 죽이면, 저들의 군은 기세를 잃을 것이오." 소마하가 이에 말을 타고 달려가 제의 군에 충돌하니, 호가 앞장서 진 앞으로 10여 보 나왔는데, 소마하가 선현(銑鋧)을 던져, 그의 이마에 정확히 적중시켜, 즉시 쓰러뜨렸다.
'''《진서》'''
이제는 1:1 일기토를 떠서 적장을 죽이고 그 배를 빼앗아서 돌아간다.여사휘(徐嗣徽)의 효장 포팽(鮑砰)이 작은 군함으로 전후(殿後)가 됐는데, 주문육(周文育)이 포팽의 배에 뛰어 들어가 포팽을 참살하고, 이에 그의 배를 이끌고 돌아갔다.
'''《진서》'''
명색히 '''황족이라는 사람이 직접 1:1 일기토를 뜨고 있다.'''위(북위)의 종실 탁발가실릉(拓跋可悉陵)이 양주(凉州)를 정벌하는데 종군했는데, 저거무건(沮渠茂虔)이 효장 한 명에게 탁발가실릉과 싸우게 해, 양쪽의 창이 모두 부러져, 탁발가실릉은 화살을 뽑아 그를 쏴서 낙마시키나, 그들의 구원이 이를까 두려워, 검을 뽑을 겨를도 없이, 칼날로 그의 목을 어그러지게 해서 잘랐다.
'''《북사》'''
이 경우에는 적이 무너져 흩어지고 지휘관만 남은 상태에서 좋다고 생포한답시고 달려들다가 화살에 맞고 죽은 사례, 참고로 삼국시대 때 어떤 남자도 저런식으로 이마에 화살을 맞았었는데 안 죽었다(...)후주가 북제와 싸울 때, 주의 장수 왕웅(王雄)이 곡률광(斛律光)을 추격하니, 곡률광의 좌우는 모두 흩어져, 오직 노복 한 명과 화살 하나만 남았다. 왕웅이 살피기론 창이 곡률광에게 1장 남짓 미치지 못해서, 곡률광에게 이르길 : "너를 죽이지 않고, 응당 생포해 천자께 보이리라." 곡률광이 활을 쏴 왕웅의 이마에 적중시켜, 왕웅은 물러나 달아났으나, 영에 이르러 죽었다.
'''《북사》'''
역시 활로 쏘아 적장을 죽인 케이스.채우(蔡祐)는 하교(河橋)의 전투에서, 동위(東魏)가 두터운 갑옷에 장도를 든 자에게 바로 채우를 취하게 했으나, 채우는 그가 이름을 기다렸다가 10 보 떨어진 곳에 이르니 곧 활을 쏴서, 그의 얼굴에 정확히 적중시키고, 곧 창으로 찔러 죽였다.
'''《북사》'''
이민족과 싸울때도 일기토를 뜬다.돌궐이 진양(晉陽)을 핍박할 때, 진중의 한 기장(騎將)이 대오를 벗어나 와서 싸워, 기연맹은 앞장서 홀로 나와, 그와 상대하다, 적을 찔러 낙마시키고서, 바로 그를 참살했다.
'''《북제서》'''
이 경우엔 적이 방심한건지 후막진승이 날렵했는지 어쩐건지 대열을 이루는 동안 후막진승이 단독으로 적의 지휘관을 사로잡아서 적진이 바보가 된 사례(...)후막진숭(侯莫陳崇)이 만사추노(万俟醜奴)를 토벌할 때, 적이 아직 대열을 이루지 못해, 후막진숭이 단기로 적 안으로 들어가, 말 위에서 만사추노를 사로잡으니, 무리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주서》'''
5.1.4. 수, 당 시대
전형적으로 서로의 진형에서 1:1로 무예가 뛰어난 자들을 가려뽑아 일기토를 시킨 사례다. 병사들이 무슨죄냐며 '일기토로 승부 봅시다!' 하는 지휘관은 덤.(...)두영정(竇榮定)이 돌궐의 아파가한(阿波可汗)을 정벌할 때, 사람을 파견해 돌궐에게 이르길 "사졸이 무슨 죄가 있겠소? 다만 응당 각자 장사 한 명을 파견해 승부를 결정해야 될 뿐이오." 돌궐이 이에 기병 한 명을 파견해 도전했다. 두영정이 사만세(史萬歲)를 파견해 나와 이에 응하게 하니, 사만세가 그의 목을 참하고 돌아왔다.
'''《수서》'''
후세의 어느 소설가가 보고 본인작품에 분명히 반영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어디서 많이 본 시츄에이션, 거기장군이나 되는 양반이 일기토를 뜨는 것도 황당하지만 더 웃기는 건 소설과 달리 술을 받은 사람이 멋지게 이길수 있을거처럼 나갔는데 '''죽었다.'''한왕(漢王) 양량(楊諒)이 반역해, 교종규(喬鍾葵)를 파견해 대주(代州)를 포위했다. 교종규에게는 장수 왕발(王拔)이 날래고 용맹하며 전투에 능하여, 양의신은 이를 근심해, 왕발을 당해낼 수 있는 자를 모집했다. 거기장군 왕사은(王思恩)이 그를 감당하길 청하여, 양의신(楊義臣)이 이르길 "장사로다!" 적은 양의 술을 줬다. 왕사은이 왕발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곧 땅에 잔을 던지고, 말을 채찍질해 그에게로 달려가나, 재차 이기지 못하고, 왕발에게 살해당했다.
'''《수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당태종 이세민이 한참 원정할때 일화로 이세민을 보고 단기로 나갔다가 울지경덕한테 당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이 때 죽지는 않았다.선웅신(單雄信)이 바로 진왕(秦王, 이세민)에게 달려가나, 울지경덕이 말에 채찍질해 달려들며 큰소리로 부르고, 선웅신을 찔러 낙마시키고, 곧 왕을 호위해 나왔다.
'''《당서》'''
명색이 최고사령관 아들이 괜히 멋지게 차려입고 자랑하고 싶어서 군대앞에서 설치다가 이세민측 장수 세명이 갑툭튀해서 사로잡았다.왕세충의 자식 왕완(王琬)이 두건덕의 군중에 있으며, 수제(隋帝)의 말을 탔는데, 개갑(鎧甲)이 화려하고 정연해 무리에게 자랑했다. 울지경덕과 고증생(高甑生), 양건방(梁建方) 세 기사가 나와, 왕완을 사로잡고 돌아갔다.
'''《당서》'''
이 경우에는 위기에 처한 사령관을 휘하 장수가 구출한 케이스이다. 이것 역시 전형적인 1:1 일기토 사례진왕이 유흑달(劉黑闥)을 토벌할 때, 유흑달의 장수 고아현(高雅賢)이 단기로 이세적을 추격하니, 이세적의 장수 반모(潘毛)가 그를 찔러 낙마시켰다.
'''《당서》'''
그렇다. '''사실 진경은 당태종 전용의 일기토 머신이었던 것이다.'''매번 적 중에 효장이 과시함이 있으면, 진왕이 번번이 진숙보에게 명해 이를 취하게 하니, 많은 무리 안에서 찔러 죽이며, 뜻한 바와 같지 않음이 없었다.
'''《당서》 진숙보전'''
토번이고 실위고 간에 일기토 앞에선 얄쨜없다.토번의 찬보(贊普) 자식 낭지도(郞支都)가 용맹을 믿고, 명마를 타고는 도전하니, 왕난득이 달려 나와, 바로 그의 목을 참했다. 실위의 우두머리 단보락(段普洛)이 변방을 어지럽혀, 유객노(劉客奴)가 단기로 그를 습격하여, 참수하고 돌아왔다.
'''《당서》 왕난득전'''
이 경우도 전형적인 도망치다가 1:1로 살기 위해서 맞붙은것. 정말 지휘관의 위기였는데 산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장백의가 이희열(李希烈)의 장수와 싸우다 패해, 적이 추급(追及)했는데, 장백의가 도를 휘둘러 이를 막으니, 양쪽의 칼날이 서로 향하며 낮아질 수 없었는데, 때마침 구원병이 이르러 이에 면하였다.
'''《당서》 장백의전'''
5.1.5. 오대십국시대
상황을 설명하면 우연히 적 장수를 만나서 '아싸 내가 너 잡는다!'라고 신나서 일기토를 했는데 오히려 본인히 패해서 사로잡혔다(...)유수광(劉守光)의 장수 단정규(單廷珪)가 주덕위와 용두강(龍頭岡)에서 조우해 이르길 "오늘 반드시 주양오(周陽五)를 사로잡으리라!” 단기로 그를 추격해, 창이 주덕위의 등에 미쳤는데, 주덕위가 측면으로 몸을 비틀어 이를 피하고, 과를 휘둘러 반격해, 단정규는 낙마하여, 마침내 그를 사로잡았다.
'''《오대사》 '''
보면 1:1 일기토 하다 피곤해서 물러나는 장수를 단체로 다구리해서 때려잡는 상황이다.(...)진종권(秦宗權)이 장질(張晊)에게 변(汴)을 포위하게 해, 적강(赤岡)에 주둔했는데, 변의 장수 장귀후(張歸厚)가 장질과 진 앞에서 홀로 싸우다, 장질이 피곤하여 물러나니, 여러 장수가 이를 틈타, 장질은 마침내 패하였다. 장귀후가 다시 시부(時溥)를 공격하는데 종군했는데, 양(梁)의 장수 진번(陳璠)이 배반해 시부가 있는 곳에 있음을 보고, 두 눈을 부릅뜨고 말을 타고 달려가, 바로 가서 그를 취했다.
'''《오대사》 '''
진(晉)의 이존효(李存孝)가 이한지(李罕之)를 택주(澤州)에서 구할 때, 양의 장수 등계균(鄧季筠)이 출전해, 이존효는 창을 마음대로 다뤄 그를 사로잡았다.
'''《오대사》 '''
일기토에는 어떤 무기도 상관없다 몽둥이도 충분한 일기토 도구!초왕(楚王) 마은(馬殷)이 자식 마희범(馬希範)에게 고계흥(高季興)을 토벌하게 했는데, 고계흥의 종자(從子)는 이름이 종사(從嗣)로, 단기로 초의 군루에 이르러, 마희범과 결전하길 청하니, 초의 장수 요광제(廖匡齊)가 나와 싸워, 몽둥이로 쳐죽였다.
'''《오대사》 '''
하로기(夏魯奇)는 유주(幽州)를 공격하는데 종군하였는데, 유수광에겐 장수 단정규, 원행흠(元行欽) 이 있어, 모두 날래고 용맹했다. 하로기가 두 장수와 싸우며, 번번이 저절로 그칠 수가 없어서, '''양군은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이를 구경했다.'''
'''《오대사》 '''
5.1.6. 송나라
이상하게 이민족들 중에서 족장이나 되는 양반이 친히 일기토 뜨다가 죽는 경우가 있는듯하다.왕군만이 땅을 빼앗을 때, 홀연히 기병 하나가 뛰쳐나와, 모가 장차 미치려는데, 왕군만은 측면으로 몸을 비틀어 이를 피하고, 반격해 그 목을 참하니, 바로 강(羌)의 우두머리 약시포(藥厮逋)였다.
'''《송사》 왕군만전'''
2:1 일기토에서 승리한 케이스후익이 처음에 당장종(唐莊宗)을 따라 양과 싸울 때, 양의 장수 이립(李立), 이건(李建)이 날래고 용맹하다고 알려졌는데, 후익은 앞장서 나와 싸워, 두 장수를 사로잡고 돌아왔다.
'''《송사》 후익전'''
후연광이 홀로 적장 유악(劉渥)과 큰 나무 아래에서 싸워, 그의 오른쪽 팔을 잘랐다.
'''《송사》 후연광전'''
청간채(靑澗砦)를 쌓았는데, 하(夏, 서하)의 군이 와서 다퉈, 철기(鐵騎) 중 도전하는 자가 있었다. 장옥은 철간(鐵簡)을 쥐고 나와 싸워, 그의 목과 말을 취하고 돌아왔다.
'''《송사》 장옥전'''
필적하는 장수 말고 그냥 더 쎈 장수를 데려왔으면 좋았을것 그랬지?(...)하의 군이 와서 침략해, 진에서 효장[17]
을 내보내고 곽준에 필적한다고 소리 높여 말하나, 곽준이 철저(鐵杵)를 휘둘러 그의 머리를 박살냈다.
'''《송사》 곽준전'''
이상하게 서하군이 한세충도 그렇고 송군 상대로 일기토에서 지는 기록이 좀 있는데 '서하사'가 있었으면 서하 장수들이 송 장수들 상대로 일기토 승리한 기록이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징기즈칸 때문에...(...)하의 군에서 효장이 백기를 쥐고 창을 세우고는 꾸짖길 "누가 감히 나와 대적하겠느냐!" 창이 바로 왕규의 오른쪽 팔을 상처 입혔으나, 왕규가 왼손으로 철저를 가지고 그의 머리를 부쉈다. 또한 한 장수가 창을 가지고 다가와, 왕규는 그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 저(杵)로 공격해 죽였다.
'''《송사》 왕규전'''
악비가 태행산(太行山)에서 싸워, 단기로 장팔철창(丈八鐵槍)을 쥐고는, 흑풍대왕(黒風大王)을 찔러 죽였다.
'''《송사》 악비전'''
1:1 일기토에서 '''기마 쌍도술'''로 적장을 베고 있다.올술(兀术)이 초주(楚州)를 공격해, 조립은 6기를 데리고 외치길 : “내가 진무(鎭撫)사니, 와서 결전해도 된다!” 두 기병이 돌출했는데, 조립은 모를 휘둘러 그들을 찌르니, 모두 떨어져, 그들의 말을 탈취하고 돌아갔다. - 송사 조립전, 저기서 나오는 올술은 금나라 황족 완안올술인듯하다.
영벽(靈壁)의 전투에서, 금의 장수 중 쌍철간(雙鐵簡)을 쥐고 말을 채찍질 해 달려 나오는 이가 있었는데, 필재우가 좌도(左刀)로 그의 간(簡)을 막고, 우도(右刀)로 그의 머리를 베니, 금의 장수는 낙마해 죽었다.
'''《송사》 필재우전'''
5.1.7. 금나라
아직 금나라가 안습한 시절이라서 그런지 건국군주가 친히 상대편 장수잡으려고 1:1로 추격하고 있다(...)태조(太祖, 완안아골타)가 단기로 마산(麻産)을 추격하니, 마산이 말을 버리고 갈대 안으로 들어갔다. 활랍호(活蠟胡)가 와서 태조에게 묻길 : “이는 누구입니까?” 태조가 이르길 "마산이오." 활랍호가 마침내 나아가, 그를 사로잡고 나왔다.
'''《금사》'''
2:1 일기토 승리 사례다.모자렴이 험조(險阻) 안에 들어가, 노언륜(盧彦倫)에게 포위당했는데, 두 기병이 돌출해 바로 공격해, 모자렴은 활을 쏴 그 중 한 명을 적중시켰고, 그 중 다른 사람이 창을 겨누어 들어, 모자렴의 겨드랑이를 거의 적중시킬 뻔했다. 모자렴이 그의 창을 피하고는, 더불어 싸워, 그를 생포했으니, 바로 노언륜의 건장(健將) 손연수(孫延壽)였다.
'''《금사》 모자렴전'''
금나라 최고의 먼치킨 사묘아리의 대 고려전 당시 일기토 모습이다. 적과 아군의 혼전 양상때 고려군의 진중으로 달려가 독려하던 장수를 죽인것. 고려 입장에 더 안습인것이 이 기록 바로 다음에 한국사 최악의 패전 중 하나인 갈라수 전투에서 사묘아리등 여진 장수들에게 고려군이 개털려 버린다는 것이다.목리문전(木里門甸)에서 적(고려)과 만나, 오랫동안 힘껏 싸웠고,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창을 겨누어 들어 고려의 진중(陣中)에서 그 장수를 질주하여 찌르자, 적이 드디어 궤멸하였다.
5.1.8. 원나라
양자교(楊子橋)의 전투에서, 강재姜才의 군중에서 한 기병이 뛰쳐나와, 바로 장홍범(張弘範)에게 달려갔는데, 장홍범이 말머리를 돌려 도리어 맞이해 그를 찌르니, 즉시 죽었다.
'''《원사》'''
꽤 굴욕적인 에피소드인데 갑자기 적이 나타나서 고삐를 획 잡아끄는 바람에 코에 돌을 얻어맞았다(...) 타이밍 좋게 양쪽이 싸움에 돌입해 돌아올수 있었다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이건 일기토, 투장 사례가 아니라 그냥 재수없이 잡힐뻔한 사례인듯.송의 저주(滁州)를 공격할 때, 송의 효장이 돌출해, 장유의 고삐를 잡고는 끌고 그의 진으로 들어가, 비석(飛石)이 장유의 코에 적중됐는데, 양쪽의 군이 싸워, 장유는 이에 돌아올 수 있었다.
'''《원사》 장유전'''
왕선(王禪)이 상도(上都)에서부터 병사를 일으켜 유하(榆河)에 이르러, 연첩목아가 이를 막았는데, 아자첩목아(阿刺帖木兒)가 과로 연첩목아를 찔러, 장차 미치려는데, 연첩목아가 측면으로 몸을 비틀어 도로 그의 과를 막고, 그를 찍어 팔을 적중시켰다.
'''《원사》 연첩목아전'''
5.1.9. 명나라
웅천서(熊天瑞)가 감(贑)을 점거해, 상우춘이 그를 포위했다. 웅천서의 양자 웅원진이 몰래 나와 군을 엿봤는데, 상우춘 또한 수 기를 이끌고 나와서, 갑작스레 함께 만났으나, 웅원진은 상우춘을 알지 못해, 그를 지나쳤다가 비로소 깨달아, 마침내 단기로 나아가 상우춘을 습격했다. 상우춘이 수종하는 기병을 파견해 도를 휘두르게 하니, 응원진이 철과(鐵撾)를 휘두르며, 싸우면서 달렸다. 상우춘이 이르길 : “장사로다!” 그를 놓아줬다.
'''《명사》'''
이렇게 보면 생각보다 일기토, 투장(鬪將)의 사례가 많은것 같지만 기원전 200년대부터 서기 1300년대까지 1500년간 있었던 일 중에서 불과 '''60여가지''' 사례가 꼽히는 것이다. 보면 진짜 진지하게 싸우는 사례도 많고 난전중에 적과 아군이 뒤엉켜서 우연히 지휘관끼리하는 맞붙는 경우도 많지만, 뭔가 황당무계하거나 대체 왜 그랬어요? 싶은 일화도 꽤 있다.(...) 그러나 진짜 진지하게 장수들끼리 1:1로 싸우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했으며 그 묘사도 생생한 경우가 있다. 다만 중세를 넘어서면 중국에서도 이런 투장의 사례가 꽤 줄어드는걸 확인할 수 있다.부우덕(傅友德)이 서주徐州를 지켰는데, 확곽(擴廓)이 장수를 파견해 와서 공격하게 하나, 부우덕은 단기로 삭(槊)을 휘두르며, 그의 장수 한을(韓乙)을 찔러, 마침내 패하고 떠났다.
'''《명사》'''
5.2. 일본사
각 진영을 대표하는 사무라이가 앞으로 나와 일대일로 겨루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본식 일기토는 헤이안 시대부터 14세기 가마쿠라 시대까지 무려 500년 동안이나 이어지던 일종의 전쟁 관습이었다. 일본에서는 센고쿠 시대 이전까지 기마 무사 중심의 기마전이 주전법을 이뤘는데 적과 마주한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교전에 들어가기 전 각군의 기마 무사들이 앞으로 나와 자신의 성명과 신분, 가문 내력, 전공, 전쟁의 명분 등을 외치는 '나노리(名乗り)'라는 의식을 통해 자신의 명예와 아군의 사기를 높였다. 이때 적을 도발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일기토를 걸기도 하는데, 적으로부터 일기토 도전장을 받은 측에서는 상대와 비슷한 신분과 명성을 가진 장수를 보내어 싸우게 하거나 거절하기도 한다. 만일 신분이 낮거나 한미한 가문의 장수를 보내면 상대를 모욕하는 행위가 되어 오히려 커다란 불명예를 뒤짚어 쓰게 되며, 이렇게 싸운다고 한들 이는 일기토(一騎討ち)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결투 방식은 활을 쏘는 것(騎射)과 근접 무기로 겨루는 두 가지가 있으며 어떤 방식이든 결코 말에서 내려 싸우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무로마치 시대부터 다시 전란이 빈발하면서 아시가루로 대표되는 보병 중심의 집단전으로 주전법이 바뀌게 되자 기마 무사들의 여흥과도 같았던 '나노리'와 '명예로운 일대일 대결' 문화는 급속히 사라지고 만다. 센고쿠 시대에는 갓산토다성전투에서 시나가와 마사카즈(品川将員)의 정식 일기토 도전을 받아들인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幸盛)와 같은 사례도 몇몇 있기는 했지만 거의 대다수의 일기토는 치열한 교전 상황에서 적장끼리 만났을 때 발생했다.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일기토인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의 대결이 바로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 중 혼란한 상황에서 발생했는데 다케다 신겐 측 사료인 《코요군칸(甲陽軍鑑)》에 따르면 다케다군의 본진까지 쳐들어 온 우에스기 겐신이 직접 다케다 신겐에게 칼을 휘둘렀지만 신겐은 이를 군바이(軍配)로 막아냈고, 마침 옆에 있던 가신 하라 토라요시(原虎吉)가 겐신의 말을 창으로 찔러 위기의 순간을 벗어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데 우에스기 겐신 측 사료인 《우에스기케고넨푸(上杉家御年譜)》에 따르면 우에스기군의 공세에 완패해 진영을 버리고 퇴각하던 다케다 신겐은 아라카와 나가자네(荒川長実)라는, 우에스기 군의 말단 무사와 일기토를 치르다가 손을 다쳐 가신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의 순간을 벗어난 것으로 나온다. 한편 당대의 고승이었던 텐카이의 목격담에 따르면 도망치던 다케다 신겐에게 칼을 휘두른 적장은 우에스기 겐신이었다.황록색의 민소매 겉옷(胴肩衣)을 입은 무사, 흰색 수건으로 머리를 감쌌으며 누런색 말에 올라 3척 길이의 칼을 뽑아 들고 접이 의자에 앉아 계신 신겐 공이 있는 곳으로 똑바로 쳐들어와 칼끝으로 세 번을 찔렀으나 신겐 공이 일어나시어 군바이 부채로 막아내셨다. 나중에 신겐 공이 부채를 보니 칼자국이 8개나 나 있었다... (중략) ... 후에 듣기로 그 무사, 테루토라(輝虎)[18]
였다고 한다.
'''《코요군칸(甲陽軍鑑)》'''
또 센고쿠시대의 독특한 전투 문화 중 하나였던 '이치반야리(一番槍)'[19] 는 사무라이로서 개인의 명성을 올리고, 사후 논공행상 때 아주 중요한 가점 요소였기 때문에 각 진영에서 창칼 좀 휘두른다고 자부하는 젊은 사무라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치반야리를 자처했다. 그래서 전투가 시작되면 선봉에 선 각 진영의 이치반야리들 간에 종종 일기토가 벌어졌는데, 이렇게 젊은 시절 이치반야리로 참전해 적의 이치반야리로 나선 적장과 많은 일기토를 벌여 명성을 쌓은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시마즈 요시히로다.[20]
5.3. 한국사
5.3.1. 삼국시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보면 고대 한국에서는 전쟁이 무척 잦았으나, 일기토에 대한 묘사는 거의 전무하다. 그런데 일본서기 19권 흠명기 14년(553년)에 드물게도 한반도에서 고구려군과 백제군의 일기토 기록이 하나 남아있는데, 바로 백합야 전투에서 펼쳐진 일기토이다. 상대방이었던 고구려군 장수의 이름은 남아있지 않지만 여기서 백제군 장수인 부여창은 태자 시절의 위덕왕이다. 부친인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뒤 그 죄책감으로 승려가 되려고도 했고 40여년간 재위했음에도 별다른 업적이 없는 위덕왕이지만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태자 시절엔 전쟁의 선봉을 도맡아 설 정도로 용맹했으나 부친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고 정신적으로 상당히 망가졌을 거라는 추측을 해 볼 수도 있다.겨울 10월 경인 초하루 기유. 백제의 왕자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을 향했는데, 백합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니 여창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비었던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경개를 입은 자 1기, 징을 꼽은 자 2기,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기, 모두 합해 5기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아이들이‘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여창이 “성은 (고려 왕실과) 동성이고 관위는 간솔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제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백제는 고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고려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때 백제군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을 동성산 위에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일본서기》'''
5.3.2. 고려
삼별초의 난 당시, 제주로 온 삼별초의 침공에 고려군이 당황하자, 19살의 소년 장수였던 진자화가 제주도에 상륙한 삼별초와 혈투를 벌이던 중 곽연수의 목을 베어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적이 제주를 공격해 오자 김수와 고여림 등은 역전하다가 전사했지만 '''진자화는 곧장 적중에 들어가 그 장수 곽연수(郭延壽)의 목을 베어 돌아 왔다.'''
'''《고려사》 열전, 김응덕'''
충렬왕 재위 당시 원나라의 반란군이 고려를 침공한, 일명 카다안의 침입이 일어났을때 고려의 장수 한희유가 일기토로 추정되는 장면을 연출했다. 1292년 5월 8일, 카다안의 한 장수가 활을 쏘는 족족 고려병사들을 맞춰잡자 이에 장수였던 한희유가 직접 창을 들고 뛰어들어가 그 장수의 목을 베고 창에다 매달았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얼마 후 적의 정예 기병이 다시 와서 마주 보고 진을 쳤는데, 뒤미처 온 나이만다이대왕이 연기현의 승전에 끼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해 적과 교전하려 했다. 용맹스러운 적군 한 명이 아군에게 활을 쏘았는데, 쏠 때마다 아군이 거꾸러졌다. '''한희유가 창을 꼬나 잡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격해 겁을 낸 적이 퇴각하는 틈을 타 그 자를 끌어내어 목을 벤 후 머리를 창에 꽂아 적에게 보이니''' 적의 기세가 사그라졌다.
'''《고려사》 열전, 한희유'''
조선왕조실록에는 1383년 8월에 이성계가 호발도와 싸워서 이겼다는 묘사가 나온다.태조가 조금 후에 이르러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을 세 겹이나 입고 붉은 털옷을 껴입었으며, 흑색 암말을 타고 진을 가로막아 기다리면서 속으로 태조를 깔보아 그 군사는 남겨두고 칼을 빼어 앞장서서 달려나오니, 태조도 또한 단기로 칼을 빼어 딸려나가서 '''칼을 휘둘러 서로 쳤으나, 두 칼이 모두 번뜩이면서 지나쳐 능히 맞히지 못했다. 호발도가 미처 말을 타기 전에 태조가 급히 말을 돌려 활을 당겨 그의 등을 쏘았으나,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는지라, 곧 또 그의 말을 쏘아 꿰뚫으니,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호발도가 땅에 떨어졌다.''' 태조가 또 그를 쏘려고 하니, 그 휘하의 군사들이 많이 몰려와서 그를 구원하고, 우리 군사들도 또한 이르렀다.
'''《태조실록》'''
5.4. 서양
5.4.1. 고대
이런 장수끼리의 일대일 대결은 전쟁의 한 양식으로서 정복전쟁이 시작된 청동기시대부터 동서양 막론하고 벌어진듯 하다.
BC 12세기 청동기시대에 일어났다고 추정되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는 전쟁에 말이 도입되기 전이라서 일기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대일 대결이 자주 나타난다. 하지만 이건 진짜 트로이 전쟁 시기의 묘사라기 보다는, 호메로스가 살았던 서사시 시대의 묘사에 가깝다는 것이 중평이다. 이 시기의 전투는 모두 귀족에 가까운 호족들간의 소규모 접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병력간의 대결보다는 개인적 결투의 형태에 더 가까웠다고 보고 있다. 이 시기 소국의 양상은 일리아스에서 오디세우스의 나라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일리아스를 보면 그리스 측의 제일 맹장인 아킬레우스는 총사령관 아가멤논에 삐져서 출전을 거부하고, 트로이 측의 헥토르는 그리스측 무장이 나오자마자 족족 일기토로 죽인다. 이들이 벌이는 일기토는 말은 이용하지 않고 처음에 창과 방패로 싸우다가 나중에 칼을 쓰는 형식이다.
그리스 측 장수들은 헥토르의 무용을 두려워해서 제비뽑기를 하여 상대하게 된다. 그러다가 아킬레우스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와 일기토 끝에 죽자 아킬레우스는 드디어 출전하고 헥토르를 일기토에서 죽인다.
나중에 국가체제가 발전하면서 대규모 회전이 일상화되었지만 그래도 종종 장수들간의 일대일 대결이 벌어지긴 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3세 등. 로마의 마르켈루스도 켈트족과의 싸움에서 부족장 비르도마루스와 일대일로 싸워 승리한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서기관이었던 에우메네스는 문관이었지만, 이후 후계자 전쟁에서 군을 지휘하면서 적장과 일대일로 싸우기도 했다. (게다가 이겼다.)
5.4.2.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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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티에 전투 이후. 잉글랜드 기사 두 명이 패주하는 프랑스 기사와 종자에게 대결을 신청하다
한 잉글랜드 기사가 렌티의 우다르 경을 추격해서 이렇게 외쳤다. "돌아오시오, 기사여, 그렇게 도망치다니 수치스러운 일이오."
우다르 경이 돌아서자, 잉글랜드 기사는 창을 겨누어 그를 찌르려 했다. 그러나 우다르 경이 옆으로 피하고는 검을 휘둘러 잉글랜드인의 투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갑작스럽게 공격을 당한 잉글랜드인은 말에서 떨어졌고,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우다르 경은 말에서 내려서 잉글랜드인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항복하시오. 아니면 그대를 죽일 것이오."
잉글랜드인은 항복해서 붙잡혀갔으며 나중에 몸값을 내고 풀려났다.
피카르디 출신의 종자(squire)인 장 드 엘렌은 전장에서 빠져나와 하인이 가져온 말에 갈아타고, 홀로 말을 달려 도망쳤다.
젊은 귀족 기사였던 잉글랜드의 버클리 경이 혼자 그를 추격했다. 1마일쯤 달렸을 때, 장이 말머리를 돌려서 검을 창처럼 겨누고 돌격해왔다.
버클리 경도 검을 들어서 프랑스 종자를 치려고 했으나, 그가 공격을 가하는 순간 장이 몸을 틀어 피하며 그의 팔을 검으로 맹렬하게 가격했다.
버클리 경은 검을 놓쳐버렸고, 말에서 내려서 바닥에 떨어진 검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프랑스 종자가 검으로 강하게 찔러서 그의 허벅지를 꿰뚫어버렸고, 버클리 경은 바닥에 쓰러졌다.
장은 말에서 내려 버클리 경의 검을 집어들었고, 그에게 항복할 것이냐고 물었다.
버클리 경이 이름을 묻자 종자가 대답했다. "저는 엘렌의 장이라는 사람입니다. 경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버클리 경이 대답했다. "나는 웨일즈 변경령 세번 강에 있는 아름다운 버클리 성의 영주 토머스다."
종자가 대답했다. "이제 경은 제 포로가 되었습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기사가 대답했다. "좋다. 네가 기사의 방식으로 나를 이겼으므로, 너의 포로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겠다."
그렇게 버클리 경은 맹세를 했고, 종자는 허벅지에 박힌 검을 뽑아내고 벌어진 상처를 묶어줬다.
오터번 전투 이후. 스코틀랜드 기사와 잉글랜드 기사의 대결
제임스 린지 경이 전투에서 도망치는 매튜 경을 발견했고, 용기와 명예에 대한 열망으로 혼자 그를 추격해 가까이 따라붙었다.
원했다면 그대로 달려들어 창으로 찌를 수도 있었겠지만, 대신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사여, 말머리를 돌리시오. 그렇게 도망치다니 수치스러운 일이오. 내 이름은 린지의 제임스고, 이대로 말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그대의 등짝에 창을 박아줄 것이오."
매튜 경은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더 힘차게 박차를 가했다.
추격은 3마일이 넘게 이어졌고, 결국 말이 지쳐서 비틀거리자 매튜 경은 말에서 내려와 검을 뽑아들어 방어자세를 취했다.
스코틀랜드인이 그의 가슴을 창으로 찌르려 했지만 매튜 경은 갑작스럽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고, 창끝이 바닥에 박혔을 때 검을 휘둘러 창대를 잘라버렸다.
제임스 경은 몽둥이가 된 창대를 던져버린 다음 말에서 내렸고, 스코틀랜드인들이 잘 하는 대로, 작은 전투도끼를 뽑아들어 한손으로 능숙하게 다루며 매튜 경을 공격했다,
매튜 경은 훌륭한 기술로 그 공격을 방어했으며, 두 사람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각자 도끼와 검을 들고 오랫동안 대결을 펼쳤다. 그러나 강력한 타격을 받아내던 매튜 경은 결국 숨이 차서 항복을 선언했다.
1380년 버킹엄 백작의 프랑스 원정 도중 일어난 사건
잉글랜드군이 보스(Beauce) 지방의 투리(Tourey) 성 앞에서 전초전을 벌이는 동안, 한 프랑스인 종자가 혼자 앞으로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숙녀를 경애하는 신사로서 저와 무기를 들고 겨루어볼 분이 계십니까? 본인은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창으로 세 번, 도끼로 세 번, 단검으로 세 번 공격을 가할 준비가 돼 있으니, 당신들 잉글랜드인들 중에 신사다운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봅시다."
이 종자의 이름은 고뱅 미셸이었고, 그의 요청은 잉글랜드인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조아킴 케이터라는 잉글랜드인 종자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내가 그의 도전에 응할 것이니, 그를 성 밖으로 불러주십시오."
지원자가 나타나자 잉글랜드군의 원수인 피츠월터 경이 전선에 나와서 말했다. "우리 사람을 보내겠으니 너네 종자를 내보내라. 그의 안전을 보장할 것을 맹세하겠다."
고뱅 미셸은 그 말에 기뻐하며, 영주들의 도움을 받아서 즉시 갑옷을 입고 말에 탔다. 그리고 창과 도끼와 단검을 든 세 명의 하인을 데리고 성 밖에 나왔다.
이 프랑스 종자는 잉글랜드인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왜냐면 육박전을 걸어오는 프랑스인이 나타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으로 세 번 공격할 것이라는 규칙에 따라 그는 세 개의 검을 준비해서 나왔다.
버킹엄 백작도 시합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그것을 직접 가서 보겠다고 말했다. 스태퍼드 백작과 데번셔 백작도 그와 함께 구경을 나가면서 투리 성에 대한 공격은 중단되었다.
잉글랜드인들이 시합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조아킴 케이터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앞으로 나섰다.
두 종자가 정해진 시합 장소에 나오자 각자에게 창이 지급되었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돌격해갔다. 하지만 말이 날뛰는 바람에 창 공격이 전부 빗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돌격에서는 서로를 제대로 맞췄지만, 둘 다 창을 놓쳐버렸다.
그러자 버킹엄 백작이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여기서 마치고 나머지는 다음에 하세."
성모축일 다음날, 고뱅 미셸과 조아킴 케이터가 갑옷을 입고 말을 탄 채 다시 시합에 나섰다. 그들이 창을 겨누고 서로에게 돌격했을 때, 프랑스 종자는 상대를 정확히 찔러서 버킹엄 백작의 기대를 만족시켰지만, 잉글랜드 종자는 창끝을 너무 내려버렸고, 상대의 허벅지를 가격했다.
버킹엄 백작과 다른 영주들은 크게 화를 냈으며, 조아킴이 수치스러운 행위를 저질렀다고 모두가 입을 모았다.
조아킴은 말이 날뛰어서 조준이 빗나갔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검을 들어 세 번의 검격(또는 찌르기)을 교환했으나, 고뱅 미쎌이 너무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을 본 버킹엄 백작이 충분히 잘 싸웠다며 시합을 중단시켰다.
백작은 고뱅에게 사자를 보내서 100프랑을 수여했고, 용감하게 실력을 발휘했다는 치하와 함께 그를 성의 동료들에게 돌려보냈다.
조아킴과 고뱅의 마상시합이 발단이 돼서 일어난 잉글랜드 기사들과 프랑스 기사들의 도보전투시합
프랑스인들이 시합장의 한쪽 끝에 자리잡았고, 반대쪽에 잉글랜드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첫번째 시합으로 푸잔스 남작과 베르탕 남작이 날카로운 창을 손에 들고 걸어나왔으며, 높은 명성과 대단한 용기를 지닌 두 영주는 두려움 없이 몸을 내던져 서로에게 강력한 타격을 가했다.
베흐탕 남작은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고, 푸잔스 남작은 흉갑이 관통당해서 피를 흘렸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검, 도끼, 단검으로 공격을 주고받았고, 큰 부상 없이 시합을 마친 다음 관객석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다음 시합에서 에노의 장 드 암브리쿠르 경과 포와투의 트리스탐 드 라자일 경이 나와서 용감하게 싸웠고, 부상 없이 대결을 마친 다음 돌아갔다.
그다음에는 에드워드 뷰챔프와 사부아의 사생아 클래랑스가 나와서 싸웠다.
클래랑스는 힘세고 강했고 상대인 잉글랜드인보다 덩치가 훨씬 컸다.
그들은 격렬하게 달려들어 서로의 가슴을 강하게 쳤고, 에드워드가 바닥에 쓰러졌으며, 따라서 잉글랜드인들은 매우 실망했다.
에드워드는 일어서서 두 번째 대결에 나섰지만, 사부아 사람의 공격을 받고 다시 쓰러짐으로써 잉글랜드인들을 더 실망시켰다.
잉글랜드인들은 에드워드 뷰챔프가 프랑스 종자와 맞서 싸우기에는 너무 허약하다며 시합을 중단시켰다.
하지만 클래랑스는 그런 식으로 시합을 끝내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그러면 에드워드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서 대결을 끝까지 진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버킹엄 백작은 그의 용기를 칭찬했고, 잔캥 핀칠리라는 잉글랜드인 종자가 나와서 무릎을 꿇으며, 자기가 클래랑스와 대결하겠다고 말했다.
백작이 허락하자 잔캥은 무장을 갖추고 시합장에 나섰다.
클래랑스와 잔캥이 창을 들고 서로를 찔렀으며, 맹렬한 타격에 창대 끝이 부러져 날아갔다.
두 번째 공격에서도 창이 모두 부러졌고, 세 번째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창 여섯 개가 전부 부러졌으며, 관객들은 이것을 기사도적인 용맹의 증거로 여겼다.
그런 다음 그들은 검을 들고 싸웠으며, 세 번의 대결 끝에 네 개의 검이 부러졌다.
그리고 도끼 싸움을 준비했지만, 버킹엄 백작은 두 사람의 용기와 능력을 충분히 증명했으니 그만두라고 지시했다.
클래랑스와 잔캥이 물러나고, 다음 시합자인 잔캥 클린턴과 장 드 샤텔몽타니가 앞으로 나왔다.
잔캥 클린턴은 버킹엄 백작의 측근이었지만, 덩치가 작고 말랐기 때문에 백작은 그가 장 드 샤텔몽타니 같은 크고 강한 사람을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들은 힘차게 달려들어 공격을 주고받았고, 상대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던 잉글랜드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백작은 그의 종자가 수준에 맞지 않는 상대에게 대적하고 있다고 말했고, 때문에 몇몇 수하들이 잔캥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 “저 프랑스인은 네가 상대하기엔 너무 강해. 영주님도 불평하고 계시니까 그냥 포기하고 나가서 쉬어라.”
잔캥이 기권하자 장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종자가 너무 허약해서 저를 상대할 수 없다면, 부탁이니 더 강한 상대를 보내주십시오. 이런 식으로 끝내는 것은 저에게 있어 치욕스러운 일이므로 반드시 정해진 시합을 끝까지 마쳐야 합니다.”
그러자 사령관이 대답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것이다.”
그리고 기사들과 종자들 중에서 지원자를 찾는데, 윌리엄 패링턴 경이 나서서 말했다. “저자에게 싸움이 끝까지 진행될 것임을 알리십시오. 그리고 내가 무장을 갖추는 동안 앉아서 쉬고 있으라는 말도.”
장 드 샤텔몽타니는 말을 전해듣고 크게 기뻐했다.
잉글랜드 기사가 곧 준비를 끝내서 시합장에 나왔으며, 두 사람은 면갑을 내리고, 투구끈을 단단히 묶고, 상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몸통과 머리가 아닌 다른 부위를 공격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지가 아닌 다른 곳에 창을 내질렀다.
장 드 샤텔몽타니가 먼저 윌리엄 패링턴 경의 투구를 가격하자, 윌리엄 경이 약간 비틀거리며 발을 헛디뎠고, 양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던 창을 그대로 휘둘렀다.
그렇게 아래로 내뻗은 창날이 허벅지를 관통해서 반대쪽으로 튀어나왔지만, 장 드 샤텔몽타니는 휘청거렸을지언정 쓰러지지는 않았다.
잉글랜드인들은 매우 격분하면서, 윌리엄 패링턴이 불명예스러운 반칙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윌리엄 패링턴 경은 자신이 먼저 타격을 받고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조준을 잘못 했으며, 미리 알았으면 멈췄을 것이라 변명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소란이 가라앉자 프랑스인들은 장 드 샤텔몽타니를 데리고 조슬랑 성으로 돌아갔으며, 그는 이날 당한 부상으로 사경을 헤맸다.
그렇게 무술시합이 전부 끝났고, 참가자들과 관객들 모두 각자 자기가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1387년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포르투갈의 주앙 1세와 결혼동맹을 맺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위를 주장한 전쟁을 일으킨다. 잉글랜드군이 엔텐차(Entenza)를 점령하고 그곳에 주둔하는 동안, 카스티야군의 프랑스인 기사 르노 드 루와(Renaud de Roye)가 잉글랜드군의 지휘관 존 홀랜드에게 편지를 보내 마상시합을 제안한다
존 홀랜드 경과 르노 루아 경이 갑옷을 입고 말에 타고, 준비된 시합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두 기사의 무술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왕과 귀부인들, 그리고 잉글랜드의 공작과 영주들을 위한 높은 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창과 도끼와 칼이 준비되었고, 양 선수는 적당히 서로 떨어져서, 관객들의 주목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시합장을 활보했다.
모든 행동이 허용되었지만 상대를 죽이는 것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먼저 뾰족한 창끝을 마주해야 하며, 그다음에는 투구로 막아내기 어려운 날카로운 검, 그리고 잘 단련되어 어떤 것도 그것을 견뎌낼 수 없는 전투도끼와 단검의 타격을 받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기사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감당해야 할 위험이란! 한 번의 불운한 타격으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것이다.
두 기사가 마치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일직선으로 달려가 부딪혔고, 각자 상대의 투구를 창으로 맞췄다. 르노 경의 창이 네 조각으로 부서졌고 파편이 높이 날아올랐다.
홀랜드 경의 창도 르노 경의 투구에 적중했지만, 느슨하게 묶인 투구가 창에 가격당한 순간 머리에서 벗겨졌기 때문에 상대에게 전혀 충격을 주지 못했다.
기사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관객들은 멋진 대결이었다고 환호했다.
르노 경은 다시 투구를 쓰고 새로운 창을 지급받았으며, 존 경은 망가지지 않은 창을 그대로 사용했다.
두 기사는 능숙하게 말을 몰아 서로에게 두 번째 공격을 가했다. 양쪽 모두 투구를 맞췄으며, 창끝이 면갑에 부딪히면서 불꽃이 튀어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르노 경의 투구가 벗겨져 날아갔다.
반면에, 이전과 달리 르노 경의 창이 부러지지 않았기 때문에, 존 경이 받은 타격은 극심했다.
잉글랜드인들이 이렇게 외쳤다. "저 프랑스인은 속임수를 사용해서 부당하게 이득을 누리고 있다. 저놈은 왜 홀랜드 경처럼 투구끈을 단단하게 묶지 않는거지? 상대와 동일한 조건을 갖추라고 가서 주의를 줘야겠어."
그러자 랭커스터 공작이 이렇게 말했다. "진정하시오. 상대가 투구끈을 묶는 방식으로 이점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되면, 존 경도 똑같이 하면 되는 것일 뿐이오. 물론 나라면 시합에 나갈때 투구끈을 단단히 묶겠지만, 열 사람한테 묻는다면 그중 여덟 명은 르노 경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말할 것이오."
그러자 잉글랜드인들은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귀부인들과 처녀들은 훌륭한 창시합이었다고 칭찬했고, 포르투갈의 왕도 똑같이 말했다.
세 번째 공격에서 다시 서로의 투구를 맞췄고, 머리 안에서 눈알이 요동쳤으며, 두 개의 창이 모두 부러졌다. 그리고 르노 경의 투구가 다시 벗겨져 날아갔다.
그렇게 두 기사는 낙마하지 않고 서로 지나쳐갔으며, 관객들은 멋진 시합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인들은 투구끈을 일부러 약하게 묶었다며 르노 경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랭커스터 공작은 프랑스인을 비난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규칙을 어기지 않으면서 합법적으로 이익을 가져간 현명한 작전이었다. 존 경도 잘 싸웠지만 그의 상대가 마상시합에 대해서 더 배울 것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두 기사는 검, 전투도끼, 단검으로 각각 세 번의 타격을 가했다. 시합이 끝났을 때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출처는 프루아사르의 연대기[21][22]1339년 에드워드 3세의 프랑스 원정에서 있었던 작은 전투
잉글랜드의 왕이 몽셍마르탱(Mont St. Martin)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그의 수하들은 바폼므(Bapaume)를 지나 패론느(Peronne)과 셍컹탱(St.Quentin) 근처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그 지방이 오랫동안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았기에 부유하고 풍요롭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플랑드르의 헨리 경(가터 기사단의 창립 멤버인 Henry Eam)은 얼마전 수여받은 기사작위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발켄부르크, 베르그, 랑스의 영주들과 그밖의 500여명의 병력이 집결한 에노의 존 경의 부대에 들어갔다. 그들은 근처에 있던, 엔쿠흐(Hennecourt)라는 소도시 하나를 정찰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의 요새에 의지하고자 옮길 수 있는 재산을 전부 가지고 피난을 와 있었다. 그래서 영주들은 서로 힘을 합쳐 그 도시를 점령하려 했다.
이때 엔쿠르에는 훌륭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수도원장이 있었는데, 그는 마을 밖에 목책을 세우고, 목책의 모든 말뚝의 간격이 반 피트(15cm)를 넘지 않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병력을 소집하고 돌과 생석회를 쌓아놓으며 전투를 대비했다.
곧 잉글랜드의 영주들이 도착하자, 수도원장은 목책 뒤에 병력을 배치했다. 영주들은 말에서 내려서 목책에 접근했고, 용감하게 자리를 지키는 방어군에게 검을 휘두르며 강력한 공세를 가했다.
영주들이 용감하게 목책을 공격하는 동안 방어군은 돌과 통나무와 생석회를 던져댔으며, 수도원장 역시 자신의 안전을 염려하지 않고, 좋은 가죽조끼 하나를 걸치고 적과 싸우며 여러번 강력한 타격을 주고받았다.
한편 선두에서 전투를 이끌고 있던 플랑드르의 헨리 경이 수도원장을 공격하다가 너무 가까이 접근하는 바람에 검을 붙들려버렸고, 상대의 강력한 힘에 끌려가버렸다. 그럼에도 그는 불명예를 피하기 위해 칼자루를 쥔 손을 놓지 않았고, 그의 오른팔이 목책 반대편에 어깨까지 당겨들어갔다.
동료 기사들이 뒤늦게 수도원장을 공격해서 헨리 경을 구출했지만 그는 이미 심한 상처를 입은 뒤였고, 그의 검은 수도원장의 손에 남겨지게 되었다.
내가 예전에 이 마을에 머물렀을 때, 수도사들이 보물로 간직되던 검을 보여주면서 그 전투와 관련된 모든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날의 공격은 저녁까지 계속되었고, 많은 공격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마을을 공격한 플랑드르인, 에노(Hainault)인, 잉글랜드인, 독일인들은 방어군의 용기에 맞서 자신들이 어떤 성과도 얻지 못한 채 패배한 것을 보았으며 부상자들을 수습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일기토가 사라지고 한동안 카이사르나 한니발식 전술에 의한 진형으로 승부가 결판나던 전쟁도 중세에 접어들어 기사 계급이 발생하자 다시 일대일 대결이 나타났다. 하지만 기사들의 시합인 토너먼트(Tournament)를 보면 기사들간의 일대일 대결 자체는 실전에서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토너먼트는 일대일 대결인 주스트와 양측이 모두 붙는 일종의 회전이라고 할 수 있는 밀리(melee)전으로 이루어졌는데, 중세 중기까지는 밀리와 주스트의 구분도 흐릿했으나 일종의 전쟁 시뮬레이션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스트보다는 밀리가 훨씬 중요했다. 역시 일대일 대결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나는 것은 매우 드물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월터 스콧의 역사소설 아이반호를 보면 그 형식이 잘 묘사가 되어 있다.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여러 장면 장수간 대결들도 모두 이런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후대로 가면서 주스트라는 일종의 운동경기의 형태로 남았고, 오늘날에도 다시 복원되어 일종의 익스트림 스포츠가 된다. 그러나 백년전쟁기 프랑스군의 명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도 전장에서 일기토로 적장을 물리친 기록이 있으며 그외 여러 기사들의 일기토 기록도 남아있다. 전쟁의 승패 자체를 가르는 일기토의 비중이 높진 않았지만 기사들끼리 1:1 대결은 생각보다 자주 있었다는 것이다.
1242년에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가 튜튼기사단의 대장과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에서 1:1 대결을 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전투는 벌어졌으나 전술적인 승리였고 전투 당시에 일기토가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가 승리하게 되면서 가톨릭의 동진은 저지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스탈린 시절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당시가 독소전쟁 시기라 러시아인들은 독일인을 이긴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이길 것이라는 일종의 프로파간다로 제작된 것이다.
다만 1211년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1세가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과 일기토를 벌여 그를 전사시켰다는 것은 당대 역사가인 니키타스 코니아티스의 역사서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5.4.3. 근현대
파비아 전투 이후 총의 시대가 열리면서 군대 규모는 이전보다 훨씬 커졌기에 지휘관이 직접적으로 싸우는 경우는 줄었다. 그러나 기병 지휘관의 경우엔 돌격 과정에서 일기토가 벌어지는 경우도 가끔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나폴레옹의 기병대장 조아킴 뮈라가 적진으로 돌격해 적 지휘관 무스타파와 단기접전을 벌인 사례가 있다, 어쨌건 기병의 시대가 지나고 화기가 발전하면서 지휘관들은 점점 개인적인 무용보다는 화력의 집중도와 병력의 이동속도를 계산하는 수학적 연산 능력을 더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저런 몇몇 예외 사례를 제하면 일기토는 의미가 없어졌고 역사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20세기 들어서 일기토의 정의에 가장 근접한 사례라면 1차대전의 공중전들을 들 수 있다. 1차대전의 공중전들은 공군의 전략적 가치가 제대로 조명되기 전이고 기체들도 덜 개발된 시점이어서 '''하늘의 기사들의 결투'''라는 기사도적이고 낭만적인 의미로 받아 들여진 측면이 상당했다. 그래서 '''에이스 파일럿들의 의도적인 1:1 매치'''가 적지 않게 실현되었다. 그나마도 대전 후기로 접어들면서 항공전술이 발달해 웬만하면 편대전이 나오게 되었고, 훨씬 정교화된 항공기와 전술이 쓰이던 2차 대전 때는 아주 우발적인 조우전에서나 1:1 매치가 발생하게 된다.[23]
그 이후에도 조지 S. 패튼이나 잭 처칠 처럼 적장과의 일기토를 꿈꾸는 기인이 있긴 했지만 실제로 이뤄진 적은 없다.
6. 인물
가나다순 배치, 확실치 않은 경우 ※
- 관우
- 구루지마 미치후사
- 다리우스 3세
- 로버트 1세
- 리처드 1세
- 바르다스 포카스
- 방덕
- 베르트랑 뒤 게클랭
- 마누일 1세
-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 메흐메트 2세
- 사묘아리
- 손책
- 테오도로스 1세
-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
- 알렉시오스 1세
- 야마나카 시카노스케[24]
- 왕언장
- 위덕왕 ※
- 윌리엄 마셜
- 우에스기 겐신 ※
- 울지경덕
- 유방
- 이라클리오스
- 이성계
- 조아킴 뮈라
- 진숙보
- 척준경
- 코가와 노부야스[25]
- 태사자
- 테오도로스 2세
- 티무르
-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 한세충
- 항우
- 헤라클리우스
7. 관련 문서
일본어 잔재론
한국어의 외래어/일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