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여진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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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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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3]
고려 숙종 때부터 준비해 예종 때 시행한 대외 원정이다. 교과서에 동북 9성과 관련된 내용으로 짤막하게 배우는 부분으로 척준경의 미친듯한 활약으로도 유명하다. 고려가 여진이 점거하고 있던 갈라전(曷懶甸) 일대(동북 9성이 위치한 지역을 일컫는 말)를 선제 공격하여 점령하고, 이에 완안부 오아속(烏雅束)을 중심으로 모여 여진족들이 여러 차례 고려를 공격한다. 고려는 지속적으로 9성을 유지하려 했으나 결정적 패배를 겪은 데다가, 때마침 여진이 화친을 요청하자 윤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9성을 포기하고 여진에게 돌려주며 상황이 종료되었다. 이후 여진족은 9성을 발판으로 성장하여 나라를 세우게 된다.
이 전쟁에서 고려는 막대한 군대와 물자를 동원하고도 영토 확장 및 군사적 부분은 실패했으나, 강성해지는 여진을 견제한다는 목적은 달성해 고려로 쳐들어온 여요전쟁 같은 사태를 막는 정치 외교 부분에서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다. 먼 훗날 세종의 4군 6진 개척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진행 과정 참조)
2. 여진의 성장
고려의 동북쪽,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는 여진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발해 전성기에 간접 지배를 받다가 9세기 말에 '흑수국', '보로국'으로 자립해 신라와 교섭하기도 했고, 후삼국시대에는 호족 윤선을 따른 '흑수번중'을 거쳐서 이후 여진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동해 해안을 따라 경상도 및 우산국, 일본까지 해적질을 하러 갈 정도로 왕성히 활동했고 고려의 변방을 어지럽히는 골칫덩이였다.
귀주대첩을 끝으로 고려는 거란과 군신 관계를 맺으며 기나긴 전쟁을 종식 시킨다. 이후 정종 시대를 시작으로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통해 고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다 11세기 말 완안부의 추장인 오고내(烏古迺)와 그의 아들 영가(盈歌)[4] 가 완안부를 급속도로 성장시키기 시작하며 여진족 내부의 갈등이 촉발된다.
여진은 다양한 부족들의 연합체였는데 이 중 완안부 여진의 편에 서는 부족들과, 고려와 긴밀한 관계를 맺던 부족들과의 대립이 발생한 것이다.
3. 제1차 여진 정벌(숙종 시기)
이들간의 갈등은 애꿎은 고려에게로 불똥이 튀는데, 숙종 9년(1104년) 1월에 동여진 사람 1753명이 귀부해왔고 이와 동시에 완안부 추장 오아속(烏雅束)이 여진의 또다른 부족장인 부내로(夫乃老)과의 갈등으로 인해 부내로를 쫒아 기병을 이끌고 정주성까지 진격해 진을 치는 일이 벌어졌다. 고려는 변방의 장수 이일숙(李日肅)이 여진 추장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불러 잔치를 벌이며 물어본 결과 완안부의 진짜 목적은 고려 침공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급히 허정과 나불을 감금하고 이 소식을 개경에 알렸다.
여진이 침공할 것이라는 급보를 전해들은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였던 임간(林幹)에게 부월을 하사하며 판동북면행영병마사(判東北面行營兵馬使)로 임명하고 정주성으로 보내 대비토록 함과 동시에 여진족이 오고가는 마천령 일대에서 차차 점령해 남하해오는 여진을 토벌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임간은 공에 눈이 먼 나머지 오아속의 여진군을 자기 마음대로 선제 공격했고, 오히려 여진의 석적환에게 크게 패하며[5] 조정에서 그들의 패전을 물어 파직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고려사절요》 권 7, 숙종 9년 2월.}}}임간이 공을 세우려고 교련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급히 나가 싸워 패전하여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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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간의 참패에 고려는 급히 추밀원사 윤관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으로 임명하며 정주성에 위치한 여진족을 치게 했다. 벽등수(闢登水)에서 마주친 고려군과 여진군은 소규모 결전을 치뤘으나 고려의 패배로 끝났고[6] 승리를 거둔 여진은 일대를 약탈한후 유유히 돌아가버린다.
결국 여진이 1104년 6월에 형식상으로 사절단 68명을 보내 고려에 화친을 청하고, 고려는 이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고려에 귀화했던 (친고려파) 6명의 추장을 포함한 14명을 돌려보내주면서 당장의 갈등은 어찌어찌 봉합하였다.
그러나 선제 공격을 하고도, 이전까지 자신들의 제후국 혹은 야인 정도로만 여기던 여진 무리 따위에게 어이없이 깨진 충격은 컸다. 숙종은 이때의 패배에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천지신명이시여. 만약 저새퀴들을 조지게 되면 그 땅에다 신을 받드는 사원을 짓겠습니다!"라고 할 정도였고 당시 수도 천도의 실패[7] 이후 자신의 분노를 여진정벌에 쏟아 부었다고 할 정도로 전쟁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던 제후국만으로 생각했던 여진의 국방력이 강성한 것을 알게된 고려는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윤관은 이 패배를 바탕으로 "고려는 기병을 상대로 불리한, 수성 중심의 보병 편제로 이루어져있는 것이 문제다."라며 이전까지는 없었던 '''국민의 직위에 상관없이 차출하며, 능력 위주의 부대를 만들자'''는 건의를 하게되고 숙종이 승인을 내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별무반이다.임금이 분노하여 천지신명에 고하니, 음덕을 빌려 적경을 소탕해 그 땅에 절을 짓겠다고 하였다.
王發憤告天地神明, 願借陰扶 掃蕩賊境 仍許其地創佛宇.
고려사 열전 윤관조.}}}"신이 적세를 보니 아주 강해 측정하기 힘드니, 쉬면서 생도와 병사를 길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신이 보기에 패인은 적은 기병인데 우린 보병이니, 상대가 되기 어렵습니다."
“臣觀賊勢 倔强難測, 宜休徒養士, 以待後日. 且臣之所以敗者, 賊騎我步, 不可敵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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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무반은 매우 강력한 군기와 군법을 적용했고 이들의 수는 무려 17만 8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숙종은 여진 정벌을 보지 못하고 서경 순시 도중 장락궁에서 사망하게 되고, 예종이 즉위하면서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게 된다. 별무반은 그대로 유지하고, 1105년 11월에 동북면 방향에 지형 정찰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나 정벌이 숙원 사업이었던 숙종과는 달리 예종은 내치와 왕권 강화에 힘을 쏟게 된다. 또한 1106년 3월에는 동여진 추장이 화친을 청하며 조공을 바치겠다고 하자, 예종은 그곳에 파견했던 동계가발병마사(東界加發兵馬使) 김덕진(金德珍)과 부사(副使) 임신행(任申幸)를 개경으로 복귀시킨다.
4. 제2차 여진 정벌(예종 시기)
이렇게 평화가 이어지는 듯 했으나 불과 1년 후인 예종 2년(1107년) 국경 지역 여진족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전방의 소식을 들은 예종은 고민 끝에 1107년 12월, 숙종의 유지를 받들어[8] 윤관(尹瓘)을 원수(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한 후 17만명의 별무반을 갈라전(曷懶甸)으로 출정시키며 여진 정벌을 단행하게 된다.
윤관. 오연총의 걱정에 답하며}}}"신이 성고(聖考)[9]
의 밀지를 받았고 이제 또 엄명을 받드니 감히 3군을 통솔하여 적의 진을 파하고 우리 강토를 넓혀 나라의 수치를 씻을 것이오."{{{#!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의 단순히 길목만 막고 대치하자던 1차 정벌 때와는 달리, 2차 정벌 당시 1단계로 기만 전술을, 2단계로 기습 공격을 감행해 속전속결로 여진이 차지하고 있는 부락을 파괴, 성을 접수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를 바탕으로 전투를 진행한다. 속전속결로 한 이유는 2가지인데 하나는 '''완안부에서 원군이 오기 전에 모든 성을 점령하자'''라는 군사적 이유와 함께 '''장기전으로 가면 국력이 휘청거릴수 있다.'''는 행정적 이유 때문이었다.
4.1. 17만 명의 별무반[10]
좌군 병마사 문관, 중군 병마사 김한충, 우군 병마사 김덕진이 육군을 담당했으며, 병선 별감 양유송과 원흥도부서사 정숭융이 수군을 담당했다. 고려군은 출전 이후 우리 20만이나 되는 대군이 나간다!라는 소문을 퍼트림과 동시에, 최홍정, 황군상을 장주와 정평으로 보낸 후 여진족에게 "우리가 예전에 사로잡았던 허정과 나불을 돌려보내 줄게. 이 참에 환송식이나 거하게 해줄 테니 다들 오세요."라는 말을 전한다. 여진은 이 말을 듣고 400여 명의 추장들[11] 이 달려왔고 장춘역에서 윤관은 이들을 환대했다.
그리고 즐겁게 술을 마시며 풍류를 즐기던 틈에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金富弼)[12] 과 녹사(錄事) 척준경(拓俊京)이 이끄는 고려군이 이들 추장을 기습해 모두 암살하고, 막사에 들어오지 않았던 여진족들도 최홍정이 기병을 이끌고 달려가 몰살 시켜버린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러한 기습 몰살 작전이 실제로는 되려 이후 '''전쟁을 어렵게 하는 요소'''가 되어, 동북 9성을 취하는데 결정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특히 유목민족이 접대의 관습을 얼마나 중요히 여기는지 알면.. 허정과 나불은 친고려파 여진족[13] 인데 이들을 데리러 온 자들이라면 친고려파거나, 최소한 완안부 여진과 친밀한 사이는 아니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그곳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자, 아군으로 만들수도 있는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것인데, 이후 여진족들이 결집하여 소모전 양상이 되어버린 전쟁에서 이러한 작전은 아군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14] 까지 적으로 만들어 종족적 결집을 일으켜버리는 엄청난 실책이었다.
여진족의 추장들을 모조리 제거한 고려군은 총 4갈래로 나누며 동시 타격을 시도한다. 이때의 위용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고려사》에는 군대가 지나갈 때마다 거대한 먼지 구름을 만들어 냈고 이를 보고 도망간 여진의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전투는 본군이 마주했던 문내니촌에 있던 동음성이었고 병마령할(兵馬鈴轄) 임언(林彦)과 최홍정의 활약으로 함락한 윤관의 본군은 석성 (石城)으로 곧바로 이동한다. 석성 아래에서 진을 치고 있던 여진족에게 항복을 권했으나 우리는 항복하지 않겠다는 여진의 답을 들은 고려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게 된다. 그러나 예상 외로 고전하게 되자 윤관은 척준경을 부르게 된다. 척준경은 "과거 저의 과오를 용서해주셨으니, 오늘이야말로 그 도움에 보답할 것입니다."라는 간지 폭풍인 발언과 함께 '''칼 한자루와 방패 하나를 둘러매고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적병 수명을 죽였고''' 이에 고려군의 사기가 올라 석성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한다.
《고려사》 열전 윤관}}}윤관이 척준경더러 “해는 저물고 전황이 위급하니 그대가 장군 이관진(李冠珍)과 함께 적을 공격하라.” 하고 지시하자, 그는,
“제가 일찍이 장주(長州)[15]
에서 공의 부하로 일하면서 실수로 죄를 범하였는데 공께서는 저를 장사라고 말씀하시면서 조정에 죄를 용서해주도록 청하셨으니 오늘이야말로 제가 몸을 던져 은혜를 갚을 때입니다.” 하고 다짐한 후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 차림에 방패를 잡고 적진 속으로 돌입해 추장 여러 명을 쳐서 죽였다. 이틈을 타 윤관의 휘하 군사와 좌군이 합세해 결사적으로 싸워 적을 대파하니 적은 절벽에서 투신해 자결하기도 했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섬멸되었다.{{{#!wiki style="text-align: right"
석성 전투가 종료된 후 최홍정·김부필·녹사(錄事) 이준양(李俊陽)에게 병력을 주어 이위동(伊位洞)을 공격하게 해 대승을 거두며 여진 정벌은 마무리 되었다. 여기까지 본군, 중군, 좌군, 우군이 사살한 여진족만 4,940명이며 파괴한 부락은 135개, 여진족 포로는 1,030명이었다. 그 후 수 천명의 포로를 추가 포획한다.
별무반의 뛰어난 전투 능력과, 고려 지휘부의 적절한 판단력, 그리고 척준경을 비롯한 무장들의 초인적인 활약으로 '''고려는 단 한 달 만에 예상했던 목표를 완료'''하고 영주, 웅주, 길주, 복주에 성을 쌓게 된다.
4.2. 동북 9성의 위치?
현재 정확한 위치는 미정이다. 통일이 되어서 발굴 조사를 통해 힌트가 나오지 않는 이상은 해결되지 않을 문제이다. (자세한 내용은 동북 9성 문서 참조) 다만 함주와 길주는 각각 오늘날의 함흥과 길주군으로 보는 건 대부분 견해가 일치하는 편이다.
- 1107년 12월에 축성
- 영주성(英州成) - 둘레 1,729m. 가장 먼저 축조된 성으로 사실상 본영이었다.
- 웅주성(雄州成) - 둘레 1,805m.
- 복주성(福州成)
- 길주성(吉州成) - 둘레 1,219m. 점령 이후 가장 많은 전투가 펼쳐진 격전지로 여진의 대군이 1년새 5번이나 침공한다. 그럼에도 고려가 철수하기 전까지 빼앗기지 않았던 것은 길주성을 방어하던 고려 무관 이관진(李冠珍)의 역할이 컸다.
- 1108년 2월에 축성
- 함주성(咸州城)
- 공험진성(公嶮鎭城) - 동북 9성 위치의 키포인트. 9성 중 최북단 지역에 위치한 성으로, 공험진에 있는 선춘령(先春嶺)이라는 고개에 척경비를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1108년 3월에 축성
- 의주성(宜州城)
- 통태진성(通泰鎭城)
- 평융진성(平戎鎭城)
4.3. 고려의 대규모 사민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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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군의 진격로. 다만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특히 갈라수 전투는 길주로 구원을 가던 오연총이 공험진에서 여진과 맞닥뜨려 패한 전투인데 공험진이 저렇게까지 북쪽 끄트머리에 있으면 고려군의 기동이 설명이 안 된다. 오연총이 당시 북방에 있던 게 아니라 개경에서 예종에게 지휘권을 받고 길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험진은 어쨌든 동북 9성 중 가장 북단에 있는 성인건 사실이라 왜 그런 기동을 했는지는 현재로는 알 수 없다.)
척준경, 오연총 등 여러 장수들과 고려군의 활약으로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9성을 짓고 일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윤관은 1108년 4월 9일 지휘부와 별무반과 함께 개경으로 귀환한다.
《고려사》 권 7, 예종 3년 3월}}}윤관(尹瓘)이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백여 두를 바쳤다. 윤관이 또 의주(宜州)·통태(通泰)·평융(平戎)의 세 성을 쌓고 남계(南界)의 백성들을 새로 수축한 9성으로 이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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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려에서는 무려 7만 5천호가 넘는 주민들을 사민정책에 동원한다.
그러나 사민 정책이 다 그렇듯 당시 고려군 지휘부에서도 반발이 있었는데, 당시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인 김한충 열전에 의하면 당시 윤관은 각 부대에 9성 지역의 내성의 재목과 기와를 거두어 9성을 축조하고 이 지역에 남쪽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 계획을 들고 나왔다. 당시 9성 지역은 민간인이 많이 거주하지 않아서 부대가 주둔할 만한 요새는 있어도 마을 전체를 보호할 만한 외성이 없었기 때문에 윤관은 사민 정책과 함께 마을을 보호할 만한 외성을 먼저 축조하려고 내성을 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성이라는 시설의 특성상 마을 전체를 넓게 둘러야 하다 보니 건설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김한충은 이 계획에 대해 "만약 외성 다 쌓기도 전에 무슨 일이 터지면, 내성이 없으니 백성들을 어떻게 지키려고 저러시나? 아무리 원수의 명령이지만 이건 따를 수 없다"라고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한충이 반발하면서 나타낸 우려는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
《고려사》 열전, 김한충}}}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 김한충은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힘껏 싸워 전공을 세웠다.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가 되었을 때 윤관 등이 모든 부대에 명령을 내려 내성(內城)의 목재와 기와를 거둬서 9성을 쌓고 남쪽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성민의 수를 채우도록 하였다. 그러자 김한충은, “'''만약 외성(外城)이 아직 완공되지 않은 채로 갑자기 위급한 일이 생기면, 안에는 완전한 성이 없으니 백성들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원수께서 명령했지만 나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고 굳이 반대했는데, 과연 그 말처럼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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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여진의 맹공, 척준경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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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 정벌 기록화》 (안재후 作. 1975년)
고려군이 9성을 개척하자 삶의 터전을 통째로 상실하게된 여진족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완안부의 추장 오아속(烏雅束)은 사냥 도중에 17만 고려군이 자신의 동포들을 몰아내고(병사들이 곧 백성이던 유목민이었기에 이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16] 9개의 성을 축성한다는 소식에 깜짝 놀라 급히 지도자들을 소집해 대처를 논의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힘으로 짖누르던 강경한 국가인 요나라로 성장한 거란군을 격파했던 고려인데다 이번에 정벌로 동원된 17만 명 병력의 수준은 전부 최정예였기 때문에 전력을 다해도 승승장구하던 완안부 여진도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던 상황이었고 요나라가 고려 편에 서서 자신들의 뒷통수를 갈긴다면 망할 수가 있어서 그 때문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이때 오아속의 동생 아구타가 "겁에 질려 있다면 다른 부족들도 우리를 겁쟁이 취급 할테고 그렇다면 우리 부족의 생존은 장담하지 못한다. 차라리 맞서 싸우는 편이 낫다!"라고 주장했고 별다른 수가 없었던 완안부 여진은 갈라전 탈환을 목표로 삼게 된다.
이때 고려군은 큰 오판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고려군은 점령전 계획을 세울때 갈라전 일대 지리를 숙달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해당 지역이 병목 지역이란 첩보를 가지고 9성을 쌓아 순차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실제론 우회로가 너무 많아 9성이 동시다발적으로 공략당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전방과 후방을 구분해 세워 놓은 기지들이 전부 전방이 되어버린 상황이었기에 1년간 버틴 게 용할 정도였다.
《고려사》 윤관 열전}}}처음에 조정에서는 병목 지역을 취해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했는데, 막상 공격하여 빼앗고 보니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근거지를 잃게 된 여진은 보복을 다짐하는 한편, 땅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면서 추장들이 해마다 와서 분쟁을 벌였다. 온갖 속임수를 쓰고 갖은 무기를 동원해 공격해 왔는데, 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수비하는 전투에서 아군이 많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며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서, 적들이 자주 복병을 두어 왕래하는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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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 권 7, 예종 3년 5월}}}이전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여진의 궁한리(길주로 추정) 밖은 산이 잇달아 벽처럼 서 있는데 오직 작은 길 하나가 겨우 통하므로 관성을 설치하여 그 길을 막는다면 여진에 대한 근심은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것을 빼앗은 뒤 보니 수륙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듣던 바와 매우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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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 이후의 역사는 고려와 여진의 끊임없는 전투로 점철된다.[17]
- 1108년 1월에는 윤관이 오연총과 함께 정예 병력 8천을 이끌고 여진족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가한촌(加漢村) 병목의 작은 길로 지나가던 중 매복한 여진의 공격에 지휘부까지 궤멸되어 윤관 주위에 단 10여 명만이 남아 전멸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척준경이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해 10여 명의 목을 베었고 최홍정, 이관진이 병력을 수습해 여진을 겨우 격퇴한 사건도 있었다.
같은 해 4월 또다시 대군을 이끌고 웅주성에 도달한 여진은 웅주성 일대를 목책으로 둘러싸 겹겹이 포위하기에 이른다. 임언과 최홍정이 이끄는 웅주성의 고려군은 치열하게 싸웠으나 서서히 힘이 부치기 시작했고, 4월 23일에 웅주성이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 오연총에게 1만의 병력을 주며 급히 지원을 보내게 된다. 여진은 이 소식에 오음지령(烏音志嶺)과 사오령(沙烏嶺)에 병력을 배치해 고려군을 막으려 했으나 고려군은 두차례 접전 끝에 482명의 적병을 참살하고 웅주성 일대를 둘러싼 여진의 목책 뒤에 진지를 구축, 앞뒤로 공격당할 위기에 빠진 여진은 웅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게 된다.
같은 해 7월에는 행영병마판관어사(行營兵馬判官御史) 신현(申顯)이 고려 수군을 이끌고 영인진(寧仁鎭)[18] 에서 적을 공격해 20명의 목을 베는 승전보를 보내온다.
척준경의 엄청난 활약상에 완안부 여진은 전략을 바꾸어 전면전이 아닌, 소수 병력으로 지속적인 소모전을 펼치는 방식을 선택했고, 고려는 이에 맞서기 위해 척준경과 왕자지를 별동대 역을 맡겨 여진의 기습 공격을 방비토록 했다.
《고려사》 권 7, 예종 3년 8월}}}무자일. 병마판관(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함주(咸州)·영주(英州)에서 여진과 싸워 33명의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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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 7, 예종 3년 9월}}}행영병마판관(行營兵馬判官) 왕자지(王字之)와 척준경(拓俊京)이 사지령(沙至嶺)에서 여진을 공격해 27명의 목을 베고 세 명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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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런 지속적인 공격에 농사를 제대로 지을수 없으니 농민들의 신음은 깊어 갔고 자급자족이 되지 못하니 물자들도 머나먼 고려의 영토에서 끌고 와야 했다. 그러나 상인들 마저 도적이 들끓고 여진의 공격이 언제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선듯 나설리 만무했고 결국 고려는 동북 9성의 유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고려사절요》 권 7 예종 4년}}}나라에서 여러 방면으로 군사를 징발하니 기근, 유행병까지 겹쳐 백성의 원망이 드디어 일어났다. (중략) 적이 (동북 9성을 잇는 도로마다) 매복하여 왕래하는 사람을 노략질함이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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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갈라수 전투, 9성 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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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여진족이 길주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자 당시 부원수였던 오연총은 병력을 소집해서 길주성 구원에 나섰다. 오연총이 이끄던 고려군은 공험진에서 여진족을 맞아 한바탕 전투를 펼친다. 자세한 내용은 갈라수 전투 문서 참조. 그 후 고려 조정은 다시 윤관 휘하 군단을 편성한 후 재파병을 하려 했으나 출정 직후 여진이 누적된 엄청난 피해와 자신의 국력의 한계로 인해 내부 붕괴의 조짐이 보이자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어 스스로 고려 밑으로 굽히고 들어와 화친을 요청했다. 마찬가지로 여진만큼은 아니지만 지속된 전쟁으로 어느정도 피로를 느끼고 있던 고려도 이에 응하여 전쟁이 종결나며 파병도 중단된다.
한편 구원군이 끊긴 길주성은 독자적으로 항전을 지속해 나가는데 여진족은 눈엣가시 같았던 길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고려와 화친 협상을 하는 동안 수만 대군을 동원해 총공격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수비 병력이 2,000밖에 되지 않는 길주성은 성이 무너져 함락 직전까지 갔으나 날이 저물어 여진족은 물러났고, 성을 지키던 허재와 이관진은 밤 사이 내성을 새로 쌓았다. 다음날 새롭게 만들어진 성벽을 본 여진족은 단체로 공격 의지가 빠져 길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때까지 길주성이 버틴 게 '''무려 130일.'''[20]
이 전투로 어떻게든 동북 9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고려 조정의 여론은 180도 달라져서 여진정벌을 주도했던 윤관과 오연총을 탄핵하는 여론이 빗발치게 된다. 때 마침 무수한 피해를 입은 여진이 직접 화친 요청[21] 을 보내왔고 이를 받은 고려 역시 화친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동북 9성을 반환하였다.
1109년, 윤관이 화친하자는 여진 장수 오사에게 전한 말이다.講和, 非兵馬使所得專, 宜遣公兄等, 入奏天庭.
강화는 병마의 관리가 논할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공형(公兄)[22]
등을 천정(天庭)[23] 으로 들어와 아뢰게 하라.
고려사, 열전, 윤관, 예종이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다. 中
5. 정벌의 평가, 영향
기후와 토양, 교통, 방어 등 여러가지 문제로 1년만에 고려의 여진 정벌은 갈라수 전투를 기점으로, 땅을 점령하고 유지하는 군사적인 부분, 당장의 물리적인 이득을 취하는 부분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암만 문종 이래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고려라고 해도 약 20만 대군을 동원하는건 장난이 아닌 무리라서, 당시 기록으로도 농사가 망치고 민심이 흉흉해졌다는 식의 기록들이 있다. 하지만 '''정치 외교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막대한 영향을 주어 '여진을 막기 위한 예방 전쟁' 이라는 측면에선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할 수 있다. 이후 여진족은 거란족이나 몽골족과는 다르게 큰 규모로 쳐들어온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5.1. 점령의 실패
군사적인 부분을 보자면, 앞서 고려사절요에서 언급된 내용대로 동북 9성은 애당초 고려의 전략 목표인 여진족의 위협 완화를 달성하기에 적합한 지형 자체가 아니었다. 병목을 틀어막겠다는 윤관의 전략 자체가 지형 파악 미비에서 비롯된 잘못된 전략이었던 것. 다시 말해 처음부터 '''실패는 예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친 고려파 여진족을 무참히 학살하면서 여러 이득을 고려 자신이 발로 찬 것도 더러 있었다.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지속적, 산발적인 공격을 허용했으며 여진족들을 모두 적으로 돌려 점령지가 안정적이지 못하니 사민 정책 또한 실패로 돌아가게 되며 백성들이 살려 하지 않으니 정벌의 의미가 없어진 것이다.
다만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은 윤관이 기껏 얻은 땅을 매우 무능한 문관들이 돌려줘버렸다 정도에 가까운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이해다.''' 당시 '''고려는 사회 시스템상 여진과의 장기전을 벌이는 것이 무리였다.''' 한 시대의 뒤인 조선만큼의 지방 행정망을 갖추지 못했고 국력의 완전한 동원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 고려의 사회 구조는 봉건제에 가까워 위에서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 일일이 지방 토호들과 합의를 봐야 했다. 그런 조건 하에서는 뽑아 낼 수 있는 저력이 한정되어 있는데 이미 그 짓을 4년이나 했다. 하물며 이건 방어전도 아니고 훨씬 국력의 소모가 큰 원정이었으며, 불과 한 세대 전에는 거란족들이 쳐들어 와서 나라 안을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갔다. 즉, 문관들이 여진과의 화친을 주장 했던것은 단순히 국가의 대계를 보질 못했던 어리석은 수구 꼴통이거나 이상만 외치는 멍청이라서 그런게 아니라 실제로 전쟁치르다 나라가 망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려 조정은 1107년과 1108년 초반까지는 어떤 피해를 감수하고 서라도 동북 9성을 유지하는 것에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여진 정벌을 망설이던 예종에게 숙종이 남긴 유언장을 보여주며 설득한 것이 바로 고려 조정의 문관들이었다.'''[24] 그랬던 문관들조차도 막대한 피해들이 누적이 되며 나라가 휘청거리고, 마침 여진이 고개를 숙이고 화친을 해오자 이를 찬성한 것이다.
5.2. 외교적 성패
이 전쟁 이후 친 고려파 여진족은 사실상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 완안부를 비롯해 여진족들이 고려에 공물을 바쳐오면서 형식적 제후국 관계를 이어가고는 있어서 겉보기론 별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내부적으로 이전과 많이 달라졌는데 완안부 여진족과 대립을 하기 전까지만해도 동여진족들은 사실상 고려가 완전히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장악한 상태였고 동여진족의 추장과 부족들 사이에서 고려에 귀순주, 기미주, 고려의 영토로 편입 시켜달라고 요청한 여진족들이 빈번해서 고려 쪽에서 너무 급하다며 그들을 다그치며 미루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이 전쟁에서 친 고려파 여진족 추장들을 살해하고 동여진족이고 완안부 여진이고 할것없이 모든 여진족들을 몰아내버린 상황에서 터전을 빼앗긴 자신을 지원하고 고려의 대군에 결국 승리한 완안부의 모습을 보고는 결국 고려에 등을 돌리게 된 것. 사실 이 전쟁 과정과 결과를 생각한다면 동여진족들 입장에선 믿었던 고려는 자신들을 배신을 했고 자신들을 치고 있던 완안부쪽에서 오히려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며 결국 고려와 화친을 이뤄내면서 9성 전부를 반환받고 부하들을 돌려받는 것을 직접 지켜본 것이다. 힘도 자신들보다 강한 데다가 고려는 배신, 심지어 고려쪽에서 자신들의 관리를 완안부에게 떠넘긴거나 마찬가지인 그 상황에서 완안부를 버리고 고려에게 붙는 것은 실리적으로든 심정적으로든 힘든 선택인 것이다. 괜히 일제시대 학자 때부터 이 동북 9성 반환으로 여진은 더 커졌다라는 말이 나온게 아니다. 이 반환으로 여진족은 크게 성장했다는 것은 영토 그 자체만이 아니라 구심점과 위상, 명분 그리고 민족의식[25] 을 얻어서 커졌다는 의미도 된다. 이후 완안부를 중추로 금나라가 세워지게 된다.
그러나 정치 외교적으로 보자면 동북 9성을 반환하기는 했으나 역설적으로 그 전략적 목적은 달성했다고 자평할 수 있다. 여진의 본격적인 침공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 이 전쟁을 개전한 고려와 삶의 터전을 빼앗긴 여진 두 나라가 치열하면서도 처절히 싸웠다. 특히 여진 입장에서 보면, 일시적이긴 하나 자신들의 살아갈 기반이 송두리채 날아가기도 했었고 이것을 되찾기 위해 말 그대로 처절한 싸움을 해야 했으며 험한 지형에서 정말 생사를 건 악전고투를 몇년 간이나 치러야 했다. 고려가 여진족에게 굴욕을 당했던 만큼 여진 역시 고려를 잘못 건드리면 좋을게 없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9성 반환 협상을 통해 양국 관계가 완전히 평화적으로 정리되었기 때문에 뒷날 건국된 금은 중국의 이민족 왕조들이 후방 정리 차원에서 자행한 한반도 침공을 하지 않고 군신 요구에 그쳤다. 서로간에 친다고 해봐야 고생스럽기만 하는걸[26] 이해하고 있으니, 딱히 예방전쟁 같은 게 필요 없어진 것. 이후에도 두 국가는 서로의 우호 관계에 해가 갈 일이 생기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다. 훗날 여진족의 후손인 만주족의 청나라가 조선을 예방전쟁으로 완전히 제압한 후 조선 위에서 일방적으로 강력한 상국으로 군림한[27] 것과는 대조적이다."고려가 혹시라도 침략해오면 너의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과 싸워라. 하지만 '''함부로 먼저 고려를 침범한 자는 승전을 하더라도 반드시 벌을 내리겠다.'''"
《금사》 외국 열전 고려조 천회 2년(1124년)
예를 들어 서경 청도 및 금나라 정벌을 요구한 묘청의 의견을 고려 정부가 내란을 각오하고 묵살한 것이나, 조위총이 무신정권을 혁파한다는 이유로 금나라에 사람을 보내 "서경 이북 40여개의 성을 바칠테니 병사를 빌려달라"고 했으나 금나라에서 깔끔히 씹어버린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거란이 점거하고 있던 보주 지역에 대한 영유권도 훗날 금나라로 성장한 후 고려에게 넘겨주게 된다. 다만 그냥 넘겨준건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금나라 항목의 고려와의 관계 항목 참조)
이 정벌에서 활약한 척준경이 이후 금에 대한 사대를 수용한 것도 이와 연관된다는 해석도 있다. 정벌을 통해 고려의 한계와 여진의 국력을 인식한 척준경이, 금과의 전면전보다는 사대라는 외교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아무런 소득이 없는거 아니냐는 말에)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9성을 돌려주면서 약속을 받아내죠. 동북면 여진이 대대로 조공을 계속 바치겠다는 것은 그 지역의 여진을 책봉함으로써 고려가 얻을 수 있는 황제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또 한가지 기왓장 하나도 던지지 않겠다, 여진이 고려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동북면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여진이 고려가 경험했던 것과 아주 다른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이때 금나라가 건국되는데요. 계속 금은 9성 환부라고 하는 부채를 진정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금이 거란을 멸망시키고 송을 멸망시키면서도 고려에 대해서는 대단히 우호적 정책을 일관합니다.
이익주. 역사저널 그날 - 윤관, 여진 정벌의 칼을 갈다 중
5.3. 균형의 역전
농경지가 고려보다 훨씬 적었던, 한민족의 일부분일 뿐인 초기 고구려나 발해는 말갈족을 통제하는데 성공했지만 삼남 지방이라는 배후지까지 갖춘 한민족의 통일 국가 고려는 실패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는 그만큼 여진족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고구려, 발해 때는 여진족의 전신인 말갈족을 충분히 제어가 가능했으나 발해 멸망 이후로는 그것이 거의 불가능해지고 오히려 여진에게 유린당하게 된 것이다. 특히 회전에서 고려를 손쉽게 유린한 갈라수 전투는 여진족의 역량이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드러내는 한 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말갈족에서 여진족으로의 명칭 변경은 단순한 명칭의 변경이 아니라 말갈 제부족이 여러 유목 민족과의 이합집산을 통해 질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발해와 요나라의 유산을 물려받아 성장한 여진족은 이전의 말갈족보다 훨씬 강력한 존재가 되어버렸고 고려, 조선 시대에는 한민족의 통제에서 거의 완전히 벗어나 오히려 한민족을 마음껏 유린하고 희롱하게 된 것이다.[28]
중원에서도 사정은 비슷해서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로는 대부분의 유목 민족들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날뛰게 된다. 심지어 유목민계 정복왕조였던 요나라와 금나라조차도 각각 여진족과 몽골족을 완벽히 제어하는 데 실패하여 비참하게 멸망당했다.[29][30] 이 시대 이후로 그나마 유목 민족을 제어했던 농경 국가는 거대 제국이었던 명나라 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실패해서 결국 여진족의 후신인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에 먹혀버리고 만다. 청나라는 아예 본인들 자체가 뿌리는 북방 유목민족이었고, 따라서 억지로 중화 제국의 일부로 다스리려고 하지 않고 몽골의 칸위를 겸하는 방식으로 다스리는 등, 기존 한족 제국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제했다.
5.4. 조선시대에 남은 교훈
결과적으로 보면 지금의 함경도 일대 6진 지역을 차지한건 결국 조선 때에요. 윤관의 여진 정벌, 동북 9성 설치를 개척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고토 회복 의지와 가능하다는 단계를 만들어준거에요. 그 상황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치밀하게 6진 지역을 개척했고 이제 반환하지 않고 관리할 수 있는 지혜까지 받았다는 점에서는 윤관의 동북 9성 설치가 지금 한반도 확보에 선구적 개척 작업이었죠. 이 지역이 항일 독립 운동에서 주요한 전진 기지가 되었고요. 이런 점까지 고려한다면 역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편 동북 9성은 고려의 최대 영토로 인정받아 명나라에서도 조선이 공험진 이남까지 확장하는 것을 눈 감아 줬고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에 바탕이 되었다. 세종 대왕 역시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함경산맥을 경계로 쳤다가 낭패를 당한 고려의 선례를 교훈삼아 어설프게 산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강이 훨씬 안정적인 국경선과 방어선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조선은 확고한 국경선의 확보를 위해 압록강-두만강 유역까지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고려의 사민 정책을 참고 삼아 고려보다 훨씬 강화된 조선의 행정망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그 결과 조선의 북진은 성공하여 현대의 한반도의 국경을 이루게 된다.
또한 4군 6진만이 아니라 윤관의 여진정벌과 북진 정책은 조선시대 내내 여진정벌과 북쪽 영토 관련만 되면 자주 언급이 되었는데 심지어는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간도 분쟁때도 재차 언급되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