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릉양왕
[clearfix]
1. 개요
금나라의 제4대 황제. 폐위되어서 묘호는 없고, 시호는 양(煬).[4] '''양(煬)'''은 '방탕하고 악랄하며 여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했으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백성을 착취했다'는 뜻이다. 자세한 내용은 시법 참조, 보통 즉위 전의 왕호인 해릉왕(海陵王)이라 부른다.[5] 금사(金史)에서는 폐제(廢帝) 해릉서인(海陵庶人)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는 원공(元功), 휘는 완안적고내(完顔迪古乃), 중국식은 완안량(完顔亮).贊曰:海陵智足以拒諫,言足以飾非。'''欲爲君則弑其君,欲伐國則弑其母,欲奪人之妻則使之殺其夫.'''
찬하여 말한다. 해릉의 지혜는 거간에 족했고, 언변은 시비에 족했다.[2]
'''군주가 되고자 할 때는 그 군주를 죽이고, 나라를 정벌하고자 할 때는 그 모친을 죽였으며,[3]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할 때는 아내를 시켜 남편을 죽였다.'''
― 금사의 해릉 본기 논찬
아버지는 금 태조 완안아골타의 서장자인 요왕 완안종간(遼王 完顔宗幹)[6] , 어머니는 대씨(大氏).[7] 황후는 여진 귀족의 도단사야(徒單斜也)의 딸 도단황후(徒單皇后).
금나라는 물론, 중국 역사상으로도 최악의 막장 황제 중 하나이다. 후술하는 것처럼 폭정이 말로 다 못할 지경이었다.[8]
중국의 수많은 폭군 중에서도 3대 폭군에 들어가는 막장 황제.[9]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황제 취급도 못 받아서 해릉양'''왕'''이다. 그리고 금사는 아예 해릉서인이라고 칭했다. 당시 금사 편찬자들은 해릉양왕을 황제는 물론이고 왕으로도 취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칭기즈칸의 증조부 암바가이칸을 목마에 못박아 죽인 자이기도 했다. 금사를 편찬한 몽골제국 입장에서도 이자는 철천지 원수였다.
2. 생애
2.1. 제위에 오르다
'''즉위 과정 자체부터가 가관이자 막장'''인데 해릉양왕이 번왕이었을 때 당시 금나라 황제 희종(해릉양왕의 사촌 형)은 해릉양왕의 착실한 성품을 높게 사서 그를 자주 불러 같이 대화를 나눴으며, 금태조가 나라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희종이 말할 때 해릉양왕이 눈물을 흘리자 희종은 그를 더욱 신뢰하였다.
희종은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국정에 임하면서 꽤 준수한 통치력을 보여주었지만 재위 10년이 넘어가면서 차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며 술주정을 부리고, 대신들을 때리거나 욕을 했으며, 무고한 대신을 함부로 죽이는 등 폭정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런 그에게 실망한 신하들은 해릉양왕과 함께 역모를 꾀하기에 이른다.
당시 해릉양왕은 좌승상인 당괄변(唐括辯)과 우승상인 병덕(秉德)과 함께 금 희종을 폐위시키기로 공모했는데 "그러면 지금의 폭군을 폐위시킨 후 누가 황제가 될 것인가?"를 놓고 당괄변이 여러 이름을 제시했지만, 해릉양왕이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안된다고 하였다. 나중에는 더 이상 황제로 만들 만한 사람이 없자, 당괄변은 해릉양왕의 뜻을 눈치채고 그에게 "혹시 그대가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해릉양왕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역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릉양왕을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은 금희종의 호위 군관을 매수한 후, 일부 귀족 대신들과 짜고 황제의 침실에 뛰어들어 희종을 암살하고 해릉양왕을 제위에 올렸다. 1149년 쿠데타가 일어나자 희종은 황급히 동생을 찾았지만 손에 칼을 들고 들어온 해릉양왕이 나타나 결국 희종은 그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2.2. 성공한 쿠데타
쿠데타 성공 이후, 제위에 오른 해릉양왕이 희종의 일족[10] 을 모두 죽였기에 희종은 후사가 끊겼다. 해릉왕은 제위에 오르고 나서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고대의 현명한 군주들을 본받고 싶고, 경들의 직언을 듣고 싶다. 조정이 잘못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간언해 주길 바란다." 또한 병영을 순시하였는데 병사가 흙이 섞인 밥을 먹자 자신이 그걸 빼앗아 먹고 그 병사에게 더 좋은 밥을 주도록 하였다.
순행길에 마차가 넘어져 깔린 사람을 보자 자신의 친위대에게 마차를 들어올려 사람을 구해 주도록 시켰으며 자주 낡고 찢긴 옷을 입었고, 주변 신하들에게 이러한 것을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자신이 아주 근검 절약한다는 황제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멀쩡한 옷에다가 구멍을 만들고, 구멍난 곳을 꿰매게 하고는 황제의 의식주행을 기록하는 관리에게 이를 기록하라고 하곤 했다.
2.3. 희대의 폭군
2.3.1. 악행
쿠데타에 성공해서 황제에 오른 해릉왕은 취임사를 발표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국가의 대사는 모두 짐이 지배한다.
- 군사를 이끌고 남송을 공격해서 토벌하고 남송 황제를 붙잡아 죄를 묻는다.
- 천하 절색의 미녀를 손에 넣어 모두 부인으로 삼는다.
해릉왕이 재위 당시에 벌인 일은 가히 패륜광의 소행이라 할만한 것으로, 여성편력은커녕 호색이나 엽색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것만 해도 다음과 같다.
- 자신의 숙모·처제·조카딸을 강간했고 게다가 그것을 위해 그들의 남편을 협박하거나 살해했다.
- 거란족 출신인 한 유부녀와 전 남편 사이의 딸 둘 다 후궁으로 삼았다.
- 자신의 처제를 강간하고 신하의 아내와 그 여동생을 범했다.
- 그 외 유부녀: 더 볼 것도 없다.
그 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기 일쑤였고''' 강간하러 신하들을 협박하거나 거부하면 신하들을 죽여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더 큰 쾌락을 즐기러''' 검열삭제할 때 반드시 강간 대상의 남편이 아내의 강간 광경을 지켜보게 했다.
게다가 성질이 더러워서 '''본인의 성미가 뒤틀리면 검열삭제 도중에도 갑자기 칼을 빼들어 검열삭제 중이던 여자의 목을 잘라버렸다.''' 신하 오대의 부인으로 하여금 남편을 버리고 자신에게 올 것을 명령하고 협박하여 오대의 부인은 결국 남편을 독살하고 황후로 책봉되었으나 곧 해릉양왕의 총애를 잃어, 다른 남자와 간통하다가 걸려 역시 참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숙모와 처제도 강간하려 들었으며''', 처제는 강간을 당하기 직전에 자결했는데, 이 여자가 바로 해릉양왕을 폐위시킨 뒤 그를 죽이고 제위에 오르는 금세종, 당시 요양부 유수였던 완안옹의 부인이었다. 황제가 이 꼴이니 나라는 개판이었다.
2.3.2. 이외의 패악질들
- 해릉양왕은 특히 거위 고기를 좋아했는데, 순행 나가서도 산해진미를 물리라면서 '짐에게는 거위 고기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놈이 이건 좀 평범하다 싶지만 시도 때도 없이 거위 고기를 찾아서 문제였다. 나중에는 이놈이 거위를 하도 찾다보니 거위 가격이 크게 올라 신하들이 황제에게 바칠 거위를 구하러 고작 거위 1마리를 사는데 수만 전을 들였으며, 또는 소 1마리를 끌고 가서 거위 1마리와 바꿔 오는 일까지 났다. 물론 못 가져오면 사형.
-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집권한 탓인지 자기한테 조금만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하거나 이상한 낌새만 있으면 그냥 죽였다. 해릉왕은 정치 제도를 개혁하고 한족과 거란족 사람들을 관리로 등용했다. 한편으로는 한족 문화를 힘써 배우면서 사서오경, 시, 사(詞), 가곡, 부(賦) 등을 읽었다. 그는 여진 귀족들의 회의 제도를 폐기하고 중앙 정부에 상서성과 추밀원만 두었다.
- 1150년 금 태종의 모든 자손을 멸했으며, 이 외에도 여러 황족들의 자손들을 때만 되면 멸해서 금나라 황족들의 남은 수는 거의 없다.
- 1153년 수도를 중국과 가까운 중도 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로 옮겼는데, 나무 재료 하나를 운송하는데 비용이 2천만 전에 달하였으며, 궁전을 전부 황금으로 장식해서 금가루가 바람에 날아다니면 마치 눈이 온 듯 했다고 한다. 골 때리게도 이런 궁전을 짓는데만 억만금을 썼지만 충분히 화려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자기가 좋아하던 중국식 건물을 지으려고 원래 수도에 있던 건물을 모두 부쉈다. 그 다음에는 원래 수도인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 지금의 하얼빈) 가까이 있던 자신의 조상들[13] 과 금태조, 금태종 등 황제들의 능을 모두 중도 대흥부로 이장했다.[14] 자신도 나중에 죽으면 이곳에 당연히 묻히기 위해 성대하게 묘역을 단장했으나...
2.3.3. 무리한 남송 침공, 그리고 처참한 말로
취임사를 실천하려고 무리하게 남송 침략을 시도했다. 그런데 사실 남송을 정벌하려는 목적도 남쪽에 미녀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라니...[15] 이 때 신하들에게는 '''하늘에서 사자가 와서 송나라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당시 금과 남송은 화평 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남송은 이전에 북방 민족들에게 당한 정강의 변이라는 매우 아픈 역사가 있어[16] 강남으로 후퇴한 뒤에도 늘 전선을 만들고 성곽을 고치는 등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금나라의 신하들도 이것을 알았기에 여러 신하들이 남송 침공을 반대했지만 해릉왕은 그들의 목을 모두 베며 여론을 탄압했다.
1160년 남송 침공을 반대하는 대신들을 대거 처형했으며, 심지어 이 과정에서 '''태후'''가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간언하자 그 태후까지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17] 게다가 죽였으면 그냥 조용히 묻어주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이놈은 어머니의 시신을 불태운 뒤에 뼈를 물에다가 뿌려버렸다.
기재(祁宰)라는 대신이 있었는데, 해릉양왕이 무슨 일이 있으면 직언해도 된다는 그의 말을 믿고는 남송을 공격하는 일에 반대 의견을 냈다가 그 즉시 목이 잘렸으니 안습. 그리고 천하에 군주가 넷인데 남에는 남송, 동에는 고려, 서에는 서하가 있으니 이를 통일해야 진정 넓은 나라가 된다며 남송 정복이 끝나면 '''고려와 서하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해릉양왕은 본인이 제위에 오를 때부터 밝혔던 남송 정복을 위해서 '''무려 50여만 명의 장정'''을 강제로 징병하거나 배를 건조하는 일에 동원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금사>에 따르면 금나라의 국고는 이미 파탄이 났고, 가족이 서로 떨어지거나 뿔뿔이 흩어졌으며 전쟁에 나가 죽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 이를 원망하는 울음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남송 침략을 개시했지만 정작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당시 금나라의 선박 기술은 남송에 뒤떨어졌고 병사들은 수전에서 번번히 물을 코로 먹기 일쑤였다. 총관 아린이 채석기에서 도강을 시도했지만 남송의 명장 우윤문이 이를 저지해서[18] 장강 도하를 못하여 양주로 이동해야 했다.
거기다 1161년 거란족이 북서쪽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19]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에 있던 사촌 동생 완안옹도 반란을 일으켜 중도 대흥부에 입성했다. 그런데 괴상하게도 해릉양왕은 난을 진압하기는커녕 아직도 남송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남정에만 더욱 골몰하는 삽질로 시간을 보냈다. 양주로 이동한 해릉왕은 거기서도 도강에 실패하면 장수들을 죄다 죽이겠다고 했는데 호북의 남송 수군이 장강 중류에서 양주가 위치한 하류로 내려오는 중이었고, 남송군의 저항이 격렬해 도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강을 건너자니 남송 수군에게 죽을 지경이고, 강을 못 건너면 해릉왕에게 목이 잘릴 판이었기에 장수들은 결국 해릉왕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던 1161년, 어느 날 양주(揚州)에 있는 황제의 막사로 화살이 날아들었는데 해릉양왕이 깜짝 놀라 화살을 봤더니 그건 송나라 군사의 화살이 아니고 금나라 군사가 쓰는 화살이었다. 즉 진중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게 부장이 일으킨 반란에 해릉왕은 도주하려다 붙잡혀 부장에게 목숨을 잃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2.4. 사후
해릉왕을 암살한 부장들의 주도로 완안옹은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금 최고의 먼치킨 황제인 금세종이었다'''.[20] <금사>에 따르면 이 때 해릉왕을 죽인 부장이 ''''새로운 황제께서 중도 대흥부에 입성하셨다!''''고 알리자 해릉왕은 웃으면서 '''"옹이 황제가 되다니! 그 녀석을 먼저 처리했어야 하는데!"'''라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죽었다.
그는 사후에 진정한 굴욕을 맛봤는데, 금 세종은 해릉왕의 태자 완안광영을 포함하여 그의 자손들의 목숨을 남김없이 모두 빼앗은 뒤 해릉왕을 서인으로 격하시켰다. 무엇보다 해릉왕의 시체를 중도 대흥부에 성대히 세운 황제 묘역에 묻지도 않았다. 사실 원래는 왕으로 대접해서 왕들의 묘역에 묻었지만, 대정 20년에 신하들이 "이놈은 팔왕의 난 당시의 사마륜[21] 보다도 죄가 큰 데 왕으로 대접해서도 안 된다."고 간언을 올렸고, 이 간언에 따라 최종적으로 폐서인시켜버린 것. 이미 실컷 황제 자격이 없는 짓을 했고 서인으로 떨어졌으니 예를 갖추지 않았으며 중도 대흥부에서 멀리 떨어진 모래밭에 그냥 파묻어버렸다. 따라서 해릉양왕의 무덤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정의구현
3. 여담
198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폭군 해릉왕》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이 나온 바 있는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3S정책에 제대로 편승한 일종의 야설이다. 해릉왕의 엽색 행각에 따라 인처&로리물에 적나라한 성적 묘사가 일품인데, 당연히 절판되어서 구하기 좀 어렵다. 다만 국립중앙도서관과 몇몇 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대체역사소설 왕조의 아침에서도 등장. 주인공을 죽이려는 외국 최고 지도자로 유일하게 등장한다. 뭐, 주인공 측이 다음 군주인 금세종과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오히려 역공을 가해, 해릉양왕은 죽음을 당한다.
- 해릉양왕의 아들들. 이들 중 완안광영만 빼고 다 아기 때 죽었고, 완안광영은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후 완안옹에게 피살되었다.
- 장남 : 숭왕 완안원수(崇王 完顔元壽) - 원비 대씨 소생.
- 차남 : 폐태자 완안광영(廢太子 完顔光英) - 폐황후 도선씨 소생.
- 3남 : 숙왕 완안신사아보(宿王 完顔矧思阿補) - 유비 야율씨 소생.
- 4남 : 등왕 완안광양(滕王 完顔廣陽) - 재인 남씨 소생.
4. 둘러보기
[1] 만주의 금나라 박물관에 있는 흉상으로 후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모습이다. 참고로 복장이 고증오류인데, 금나라 박물관에는 역대 금황제의 흉상을 전시하는데 해릉왕을 포함한 금나라 황제들을 북방 이민족스러운 옷을 입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사서에 요나라와 금나라의 상류층들이 송나라식 단령과 사모를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요나라와 금나라의 복식을 묘사할 때 중국식이 아닌 이민족식 의상으로 복원한다. 전 황제인 희종 때 통천관과 24류 면류관, 강사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냥 이민족스럽게 만들었다.[2] 거간은 간언을 물리친다는 뜻이고, 시비는 말을 교묘하게 얼버무린다는 뜻이다.[3] 생모가 아니라, 적모인 도단씨를 말한다. 죽인 다음 뼈를 불태워 물에 뿌려 버렸다.[4] 수양제와 같은 시호다.[5] 즉위 전에 해릉군왕(海陵郡王)이었다.[6] 해릉양왕이 즉위하고 황제로 추존하였으나, 해릉양왕이 폐위된 이후 묘호와 시호가 삭탈되고 황자로 다시 격하되었다.[7] 발해의 왕손이다. 이 외에도 발해인의 후예가 금 황제의 황후나 비빈인 사례가 꽤 있는데 발해인 출신인 정식 황제의 황후나 비빈은 각각 1명과 12명이었고 추존 황제의 황후나 비빈은 각각 3명과 2명이었다.[8] 그 조조도 인품도 문제가 매우 많지만 통치력은 고평가를 받는 자이다.[9] 나머지 둘은 후폐제(유송), 수양제[10] 자손이 많아 다 합치면 70여명에 이르렀다고.[11] 자신과 함께 금 희종을 시해하는데 동참한 사람들까지 황제를 시해했다는 죄목으로 숙청했다. 명백한 토사구팽.[12] 사실 정설은 국가 기구의 중국화와 황제권의 독재화를 위한 정책으로 본다. 그래서 중국사 관련 개론서를 읽으면 해릉왕 부분에서 늘 중국 천자를 꿈꾸며 한족화를 꾀했다고 나온다.[13] 역대 여진 추장들이었으며 황제로 추존받은 이들이다.[14] 그러나 하필이면 400여 년 뒤 명 말에 천계제가 후금이 강성해지는 것을 주술적인 방법으로 막아 보겠다며 이 황릉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해 버렸다.[15] 참고로 수양제도 강남 총관을 하다가 강남 미녀에 빠져 후량 선제의 딸이었던 소씨를 부인으로 삼았다.[16] 심지어 그 북방 민족은 바로 금나라 본인이었다. 당연히 다른 북방 민족들보다도 심하게 경계할 수밖에 없다.[17]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죽인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적모'(첩의 자식이 아버지의 정실 부인을 부르는 호칭이다)였던 선황제의 정실 부인인 황태후 도단씨를 죽인 것. 자신의 생모인 대씨는 이미 사망했고 황태후였던 도단씨가 '금 왕조를 망칠 셈이냐?!'는 식으로 간언을 하자 죽여버렸다.[18] 금군의 도강을 저지할 때 화약 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19] 당시 거란인들은 강제 징병을 당하여 이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남송 원정군에 속했던 거란인 장군들은 아예 남송에 항복해 길 안내까지 할 정도. 거란의 반란은 후에 금 세종이 즉위하고 건도 화약을 주도했던 복산충의가 진압했다.[20] 금 세종은 해릉왕에게 부인 오림답씨를 뺏긴 적이 있었다. 해릉왕은 오림답씨가 미녀라는 까닭에 강탈했는데, 오림답씨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러 스스로 갔다가 해릉왕의 유혹을 거절하고 자진하면서 절개를 지켰다. 금 세종은 황제에 오른 뒤 오림답씨를 황후로 추존했지만 늘 그리워했다고.[21] 혜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를 자칭했다가 다굴당한 후 주살되고 폐서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