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숙태후

 

'''고려의 역대 왕후'''
순종
정의왕후
선희왕후

'''선종비'''
정신현비
'''사숙태후'''

숙종
명의태후
'''시호'''
'''광숙정화사숙태후
(匡肅貞和思肅太后)'''
'''존호'''
연화궁비(延和宮妃)
왕태후(王太后)
'''작위'''
국원공비(國原公妃) / 국원공빈(國原公賓)
'''관저'''
공부(公府)[1]
연화궁(延和宮)
중화전(中和殿) 영녕부(永寧府)
연화궁(延和宮)(?)
'''본관'''
인주 이씨
'''아들'''
헌종 공상대왕
''''''
수안택주(遂安宅主)
'''생몰연도'''
? ~ ?
1. 개요
2. 가족관계
3. 비운의 태후


1. 개요


선종의 2비로 헌종 공상대왕의 어머니. 시호는 선종 思효대왕과 思 자 돌림이다.

2. 가족관계


사숙태후는 인주 이씨(인천 이씨) 출신으로 문종 인효왕 대의 명신 경원군 개국공 이자연의 친손녀이며 이석의 딸, 족보상 조선국공 이자겸의 사촌이다.
아들론 헌종 공상왕 왕욱, 딸론 수안택주를 두었다. 선종과 사숙태후에겐 슬프게도 수안택주는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이었고, 시집조차 가지 못했다. 그나마 직계 왕족이기에 남들보다 훨씬 나은 복지를 받은 게 다행일 것이다.

3. 비운의 태후


남편 선종이 공작일 때 결혼했으며 국원공비 혹 국원공빈이라 불렸다. 고려사 열전엔 공비와 공빈 작위가 같이 적혀있어서 공비(妃)라 불렸는지 공빈(賓)이라 불렸는지는 모른다.
남편이 즉위하자 연화궁비(延和宮妃)라는 존호를 받았다. 인예태후의 사례를 보면 연화궁비 존호는 아마 '연화궁주 - 왕비' 존호의 약칭일 것이다.
남편 선종이 승하한 뒤, 자신의 후계자로 모두가 예상한 동생 계림공이 아닌 어린 태자 왕욱을 왕위에 올렸고, 친어머니였던 연화궁비는 왕태후 존호를 받았다. 또한 본궐 내에 관저 중화전(中和殿)을 받고 산하기관 영녕부(永寧府)를 받았다.
왕태후는 너무 어렸던 아들 헌종을 대신해 3년 동안 수렴청정하였다. 하지만 민심이나 왕실 내의 의견도 모두 헌종보단 계림공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계림공이 움직이며 태후와 헌종은 수세에 몰린다. 결국 이 같은 상황에서 사촌오빠 이자의가 계림공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목숨을 잃게 되면서 끝내 헌종은 숙부 숙종에게 양위했고, 1년 뒤 아들 헌종이 어린 나이로 승하하자 숙종은 태후의 관저를 폐쇄해 태후의 권력을 일절 끊어버렸다. 이에 태후는 자신이 살던 옛 궁궐[2]로 돌아가 그곳에서 거처했으며 조용히 살다 승하했다. 예종은 태후를 선종의 태묘 묘실에 합쳐 제사를 지내 주었다.
남편과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지만 남편이 승하하고 몇년 뒤에는 병약했던 아들 헌종까지 권력 다툼에 휘말린 뒤 쓸쓸히 승하한 것은 물론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 수안택주조차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이었으니 걱정이 컸을 것이다. 여러모로 왕실 권력 다툼의 패배자로서 피해를 크게 입은 셈.

[1] 남편 선종이 공작이었던 시절 같이 살던 관저.[2] 아마도 연화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