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고려)
[clearfix]
1. 개요
고려의 제14대 임금. 시호는 처음 숙종대에는 회상대왕(懷殤大王), 예종대에 묘호를 헌종(獻宗)이라 하고 시호를 공상대왕(恭殤大王)으로 고쳤다. 이후 고종대에 정비(定比)를 추가해 존호는 헌종 정비공상대왕(獻宗 定比恭殤大王).[3] 휘는 욱(昱).[4]
2. 생애
위에 나온 고려사 헌종 총서에 따르자면 그는 무척 영특했지만 어린 소년에 병약한 것이 흠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지독한 소갈이라는 병[5] 에 걸린 상태였기 때문에 병석 생활이 잦았다. 때문에 그가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라 기대하는 신하나 종친들은 별로 없었다. 또 고려에서 형제 상속은 일반적인 일이었기에 신하들이나 종친들이나 모두 선종이 병약하고 어린 그의 아들 욱 대신에 동생들 중 특히 그의 바로 아래 동생이면서 왕재로서 두각을 나타낸 계림공 희를 후계자로 지명할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性聰慧 九歲好書畫 凡所見聞 未嘗遺忘。
성품이 총명해 아홉 살 때부터 글과 그림을 좋아했으며 한번 보고 들은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 《고려사》헌종 총서
2.1. 잘못 끼워진 단추
하지만 선종은 병약한 아들인 욱을 후계자로 삼았고 결국 그가 11세의 나이에 즉위한다. 명군 소리를 듣는 선종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알 수 없다.[6] 어쨌든 보위를 이은 헌종은 나이가 너무 어렸던데다가 몸까지 병약한 탓에 모후인 사숙태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사숙태후는 중화전 전각을 받고 영녕부 부서를 배치받았고 군국정사는 모두 중화전에서 처리되었다.
하지만 헌종의 병세는 좋아지기는커녕 날로 악화되어만 갔고 명색이 한 나라의 군주라는 사람의 몸 상태가 이 지경이니 나라가 조용할 리가 없었다.
2.2. 쿠데타와 양위
이러한 상황에서 중신이자 외삼촌인 이자의가 자신의 누이동생이자 선종의 후궁인 원신궁주의 아들로 헌종의 이복 동생이 되는 한산후 왕윤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자의는 사숙태후의 사촌으로 당시 인주 이씨 가문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었고 중추원사에 황숙이라는 지위로 왕도 어쩌지 못할 권력을 가졌으며 스스로 사병을 양성할 정도로 모아둔 재력도 상당했다. 그는 왕이 병환으로 시름하고 있는 틈을 타서 모반이 일어날 수 있으니 옥새는 왕윤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나중에 숙종이 되는 선종의 아우이면서 헌종에게는 숙부가 되는 계림공 왕희의 야심을 지목한 것이었다.[7]
결국 조정의 흐름은 종친 대표인 계림공과 외척 대표인 이자의의 대립 구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병석에 누운 11살짜리 왕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1095년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계림공이 그를 죽이고 일파를 제거했다.[8] 조정은 계림공 일파가 장악하게 되었고 섭정하던 사숙왕후와 헌종은 아무 실권도 가지지 못했다.[9] 결국 3개월 후 두려움에 떨던 헌종은 자신이 앓고 있던 병을 명분으로 계림공에게 양위하였고 계림공은 고려 제15대 임금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숙종이었다. 그 후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이 된 헌종은 부왕 선종이 왕자 시절에 거처했던 흥성궁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의 양위 조서가 참 눈물겹다.
이렇게 조서를 고치지도 않고 그냥 양위식에서 쓴 걸 보면 헌종은 정말로 껍데기 왕이었나 보다.朕承 先考遺業 謬卽大位.
年當幼冲 體亦病羸,
不能 撫邦國之權 塞士民之望.
陰謀橫議 交起於權門,
逆賊亂臣 屢干于內寢.
斯皆凉德所致 常念爲君之難.
竊見大叔鷄林公 曆數在躬 神人假手.
咨! 爾有衆 奉纂丕圖.
朕當 退居後宮, 獲全殘命.
짐은 선고(先考) 유업(遺業)을 받들어 외람되게도 대위(大位)에 올랐다.
나이가 어리고 몸도 허약하니 방국(邦國)의 권한(權)을 옳게 통솔하지 못하였고 사민(士民)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음모와 책동이 권문(權門)에서 걷잡을 수 없게 일어나며 역적난신(逆賊亂臣)들이 대궐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는 다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나의 숙부 계림공에게로 대세가 기울어져서 신인들이 모두 그를 돕고 있는 듯하다.'''
'''아! 너희들은 그를 받들어 국가의 위업을 맡게 하라. 짐은 뒷궁궐에 물러앉아 남은 생명이나 유지하겠다.'''
2.3. 최후
그는 상왕으로 물러난지 2년 후인 1097년 11월 6일에 14세의 어린 나이로 붕어했다. 소갈증으로 인한 소아당뇨 합병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붕어하기 직전까지도 병석에 누워 있었다.肅宗 二年 閏二月 甲辰 薨于興盛宮 壽十四 在位一年。
숙종 2년 윤2월 갑진일에 흥성궁(興盛宮)에서 죽으니 향년 14세이고 1년 동안 재위했다.
《고려사》 헌종 세가
실권도 없었거니와 밀려난 왕이라 그런지 묘호도 없었으며 숙종은 회상대왕이란 시호만 올렸을 뿐이다. 이후 예종이 즉위하며 원년(1105) 11월에 헌종(獻宗)이라는 묘호를 올려 태묘에 제사지냈다.
묘호인 '헌(獻)'은 시법상으로는 '聰明叡哲 通知之聰 知質有聖 有所通而無蔽'라 하여 총명하며 성인의 자질이 있어 통하는 바가 있고 폐단이 없었던 왕이라는 뜻이지만 글자가 "바치다"라는 뜻을 지닌 데다가 이 시호나 묘호를 받은 사람들이 대개 후한 헌제나 서하 헌종[10] 처럼 재위의 끝이 좋지 않은 이들 뿐이라 대부분 안습하게 취급해서 시호로는 많이 쓰이지도 않는 글자다.
동문선 29권에는 헌종 공상대왕[11] 에게 먼 후손인 고종이 시호 정비(定比)를 추가하면서 올린 책문이 남아있다. 근데 여기서는 마치 헌종이 원해서 양위한 것처럼 썼다.
3. 평가
이제현은 이를 평하기를
논평을 한 이제현은 고려말 고려가 원나라 부마국 시대일 때 당대 고려 제일의 유학자로 손꼽히던 사람이다. 당시 중국의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교(성리학)를 숭상하는 분위기가 강해지는데, [12] 본문을 보더라도 고려 중기에는 유교가 그리 절대시 되지 않았는지, 당시에는 부자상속이더라도 어린 임금의 제위 등극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대 중국의 하우씨가 왕위를 아들에게 전한 것은 후세의 찬역을 염려한 조치였던 바 그 후 유복자를 임금으로 세워 곤룡포를 입혀놓아도 세상이 동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명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현종의 세 아들은 형제끼리 서로 왕위를 전해서 순종에게까지 미쳤으나, 순종이 거상 중에 너무 슬퍼하다가 일찍 죽고 아들이 없어서 선종에게 선위했으며, 선종이 죽은 다음 태자가 그 뒤를 이었는데 이가 헌종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여러 왕대에 저 형제끼리 왕위를 주고받은 데 익숙해져 있어서 선종은 아우가 다섯이나 있는데 어린 아들을 세운다고 하면서 이것만을 잘못으로 여기니 어찌 그렇게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 《익재집》
그러나 고려 말은 유교를 더 숭상하는 분위기여선지 이제현은 이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숙종의 (사실상) 찬탈에 대한 반발이 크게 없던 반면, 조선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반발이 적지 않았음은 고려와 조선의 차이를 보여준다 할 수 있다.[13]
주공은 하도 오래전 인물이라 그가 진짜 '사기'의 기록대로 섭정하고 순순히 정말 물러났는지도 확실치 않으며, 또 당시는 봉건제라 주공은 섭정에서 물러나도 자기 영지에서 따로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이는 유교에서 '주공', '주공'을 그리 외쳤건만 정작 지킨 이들이 적은 이유다.[14]문제가 되는 것은 근친 중에 주공과 같은 이가 없고 신하들 가운데 곽광과 같은 사람이 없어서 나랏일을 맡아 정치를 보좌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운이 위태롭고 정치가 어지럽게 되는 것은 볼을 보듯 뻔한 일이 아떤가. 후세에 만일 불행한 일이 있어서 강보에 싸인 유아에게 중대하고 어려운 사업을 맡기게 될 래에는 이것으로써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4. 유사사례
헌종의 선배로 신라 제40대 국왕 애장왕이 있다. 그래도 헌종은 애장왕보다는 나은데 애장왕은 쿠데타를 일으킨 숙부 김언승에게 왕궁에서 대놓고 시해당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애장왕은 단종(15세 - 폐위 기준)이나 헌종(12세 - 폐위 기준)과는 달리 성년(22세)까지 왕위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조선 단종에게는 선배가 된다. 살면서 겪은 사건도 단종과 80% 이상 같다. 사실상 고려 시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사람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운의 국왕이다. 신하들 중에서 헌종 편에 선 인물은 아무도 없었던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친 신하라도 있었던 단종보다도 몇 배는 더 불쌍한 왕이었다. 차이점은 알아서 죽어줬기 때문에 숙종의 입장에선 나중의 단종의 사례처럼 직접 조카의 목숨을 거두는 수고를 덜 수 있었던 셈이었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이 이미 숙종은 정통성과 지지 기반을 확보했고 헌종 지지세력도 없기 때문에 굳이 헌종을 죽이는 무리수를 둘 필요도 없었다. 물론 일부에선 숙종이 몰래 헌종을 사사했을 것이란 주장도 하지만 일단 공식적인 사인은 병사였다.
5. 가족 관계
아버지는 선종 사효대왕, 어머니는 사숙태후이다.
형제자매론 남동생 한산후 왕윤과 이름이 실전된 두 명이 있었다.[15] 누나론 경화왕후와 이름이 실전된 누나 한 명과 수안택주가 있었다.[16]
병약하고 어려서 붕어했기 때문에 혼인하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진주 소씨의 족보에 따르면 소계령(蘇繼笭)의 딸인 회순왕후 소씨(懷純王后 蘇氏)와 혼인했다고 하는데, 이건 소씨 족보를 제외한 어떤 사서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조선 시대의 다른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가문의 끗발을 높여볼 목적으로 소씨 문중이 족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조작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은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