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의
1. 개요
李資義
(? ~ 1095년 7월)
고려 중기의 권신. 고려사 반역 열전에 그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
2. 가계
대표적인 외척 세도 가문 출신인 인천 이씨로 문종 때 문하시중까지 오른 이자연의 손자이자, 시중(侍中)을 지낸 이정(李頲)의 아들이며 동생으로 선종의 후비가 된 원신궁주가 있었다. 인예태후의 조카이고 이자겸과 사숙태후의 사촌이다.
3. 생애
1090년(선종 7년), 호부상서(戶部尙書)로서 사은사(謝恩使)로 송나라에 파견되었고, 1094년(헌종 즉위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거쳐, 이듬해에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올랐다.
헌종이 유약하여 어머니 사숙태후가 국사를 대리하게 됨을 기회로 삼아 이자의는 용사를 모집하여 자신의 누이이자 선종의 후궁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아들 한산후(漢山侯) 왕윤(王昀)[1] 을 즉위시키려고 자신의 작당들과 모의하였다. 헌종은 언제든지 승하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권자인 태후는 자신의 사촌이었으니[2] 조카를 내세워 자신이 권신이 되고자 한 것.
허나 당시 보좌를 두고 경쟁하던 계림공(鷄林公)이 이를 알아채고 평장사(平章事) 소태보(邵台輔)를 시켜 먼저 타격을 입혔다. 소태보가 상장군 왕국모로 하여금 시위하게 하자, 결국 선정문 밖에서 장사(壯士) 고의화(高義和)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그 일파도 죽임을 당하거나 변방에 유배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그런데 이자의가 정말 모반을 꾸미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더러 있다. 이자의의 모의가 발각되기까지의 개연성이 꽤 부족하다는 맹점과 숙종 즉위 후 이자의 일파가 복권된 점으로 미루어, 계림공 일파가 정적 제거를 위해 먼저 손을 쓴 것으로 파악할 여지도 다분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자신의 주 정적이었던 이자의를 제거하고 대권을 차지한 계림공은 헌종에게서 선위를 받아 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3]
이자의는 원신궁주와 한산후의 기세를 빌려 권력을 차지하고자 했다. 이 행보는 자신의 사촌 이자겸과 똑같았지만 계림공이란 강력한 라이벌에게 패배하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