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예태후
1. 개요
문종의 2비. 시호는 문종 仁효대왕과 仁 자 돌림이다. 대각국사문집에선 인예국모(仁睿國母)란 칭호가 등장한다.
2. 가족관계
인예태후는 인주 이씨(인천 이씨) 출신으로 아버지는 경원군 개국공(慶源郡 開國公) 이자연(고려), 어머니는 낙랑국대부인(樂浪國大夫人) 김씨[1] 이다.
형제로는 경원백(慶源伯) 이호, 이전, 이의, 이정이 있고 자매로는 인경현비, 인절현비가 있으며 자매 중 첫째이다.
인예태후의 유명한 조카로는 경원백 이호의 아들 조선국공(朝鮮國公) 이자겸이 있다.
문종과 결혼하고 금슬이 좋았는지 자식을 14명이나 두었다. 아들로는
- 순종 선혜대왕
- 선종 사효대왕
- 숙종 명효대왕
- 대각국사
- 상안공(常安公) 왕규[2]
- 보응승통(普應僧統) 왕탱
- 금관후(金官侯) 왕비[3]
- 변한후(卞韓侯) 왕음[4]
- 낙랑후(樂浪侯) 왕침[5]
- 총혜수좌(聰慧首座) 왕경
- 적경궁주(積慶宮主)
- 보령궁주(保寧宮主)
3. 생애
인예태후는 당대의 명신이자 총애받던 신하였던 이자연의 장녀로 태어났다. 문종은 이자연의 장녀와 결혼하고 명성 높은 궁궐인 연덕궁을 하사해 인예태후는 연덕궁의 주인이 된다.
1052년 2월, 문종은 인예태후를 연덕궁주(延德宮主) - 왕비(王妃)로 봉해 정식 왕후로 임명한다. 인예태후는 약칭으로 '연덕궁비(延德宮妃)'로 불리게 되었으며[6] 그녀의 맏아들은 왕태자로 봉해진다.
문종 사후, 연덕궁비는 태후의 위치에 오른다. 태후급 지위에 이르고 자수전(慈壽殿)을 새로운 관저로 가지게 되었으나 장남 순종이 이른 죽음을 맞이하여 정식으로 태후 존호를 가지지 못했다.
차남 선종이 등극하고 재위 2년 1월, 어머니에게 왕태후궁(王太后宮)을 바치고 2월에 책문을 올려 공식적으로 왕태후(王太后)에 올려진다.
고려사에선 이 왕태후궁은 정확히 어떤 궁인지 명시하지 않았기에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연덕궁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자수전은 연덕궁의 전각일 수 있다.
여하간 인예태후가 왕태후가 됐을 때, 전국에서 하례품을 보내오고 표문(表文)을 바쳤다. 탐라도 표문을 바치며 조공품을 보내왔다고 한다. 이렇게 받은 선물 중, 비단만 10만 필이 넘었다고 하니, 당시 고려의 국력을 엿볼 수 있다.
선종 재위 9년인 1092년 8월, 왕태후는 차남과 함께 서경으로 행차한다. 여러 지역을 둘러보던 중 서경에서 훙(薨)하니, 재궁을 개경으로 모셔와 대릉에 장사지냈다.
아들 선종은 인예태후란 시호를 올리고 태후가 지은 국청사(國淸寺)에 반혼전(返魂殿)을 짓고 초상화를 봉안해 진전(眞殿)도 설치했다.
인예태후는 은(銀)물로 불경을 베끼길 원했고 이는 삼남 숙종이 완성시켜준다.
4. 기타
4.1. 성공한 자식농사
인예태후는 정말 많은 자식을 낳았다. 게다가 다수의 아이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장남 순종은 태자에서 국왕이 됐고, 차남 선종도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인예태후 사후에는 손자 헌종과 삼남 숙종도 모두 국왕이 되었다.
대각국사는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합쳐 천태종을 만들어 불교계의 거물 중 거물이 되었다. 자식들이 명성을 펼칠수록 인예태후의 권위도 수직 상승했다.
현종의 많은 부인 중 원혜태후가 직계를 잇는데 성공했는데, 인예태후의 삼남 숙종이 왕실을 이어가는데 성공하면서 문종 이후 모든 국왕이 인예태후의 피를 잇게 되었다.
4.2. 점점 강해지는 인주 이씨
현종의 왕후인 원성태후, 원혜태후, 원평왕후는 모두 외가가 인주 이씨(인천 이씨)다. 이미 이 때부터 인천 이씨가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진정한 외척으로 등장하는 건 이자연과 그의 딸 인예태후 대부터이다.
이자연은 과거를 일등으로 통과할 정도로 똑똑했으며 딸 셋을 모두 문종에게 시집보내며 명실상부한 외척이 되었다. 인예태후는 왕의 어머니로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순종, 선종, 숙종 삼대가 모두 우대해주었다.
예종도 인주 이씨인 순덕왕후와 결혼했고, 예종과 순덕왕후의 아들 인종 공효대왕은 외척에 크게 시달리게 된다.
4.3. 국청사
국청사는 고려 개경 개성부 황성 근처에 위치했던 사찰로 인예태후가 창건한 절이다.
선종 사효왕 재위 6년(1089년) 10월 때부터 짓기 시작해 숙종 명효왕 재위 2년(1097년) 완공해 숙종이 직접 찾아와 낙성식을 열고 도량을 열었다.
인예태후가 직접 지은 절인 만큼 아들 숙종은 큰 관심을 쏟았고, 절에 13층 황금탑과 은물 불경까지 안치해 국청사는 문종의 흥왕사와 견줄 정도의 화려함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인예태후의 혼전, 진전도 설치해 태후의 원찰 역할도 겸하게 했다.
사찰명은 중국 천태산에 있는 국청사[7] 를 가져온 것이다. 천태산 국청사는 천태종을 일으킨 장소인데, 인예태후는 이 국청사를 그대로 가져와 아들 의천의 교선 통합을 지원했다.
실제로 고려 천태종의 시조 의천은 흥왕사, 현화사 등 절의 주지를 맡다가 국청사에서 대대적으로 천태종 설파에 노력을 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