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다카시
1. 일본의 야구선수
[image]
노모 히데오의 뒤를 잇는 '''프론티어 정신의 화신'''
前 일본프로야구, 메이저리그 투수. 다저스 시절 라커룸에서의 애칭은 새미 ("Sammy")였다.
[image]
사사키 카즈히로, 야노 아키히로, 카네모토 토모아키와 같은 도호쿠 복지대학 출신으로 1992년 요코하마 다이요 훼일즈에서 데뷔했다.
데뷔 이후 네 차례 올스타전에 출장하는 등 요코하마의 대들보 선수로 이름을 날렸고, 90년대 후반 '머신건 타선'을 앞세운 요코하마의 전성기에는 미우라 다이스케와 더불어 선발투수진의 주축으로 활약하였다. 팀을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였던 '대마신' 사사키 카즈히로가 1999년 시즌이 끝난 뒤 시애틀 매리너스로 떠나고 팀에 클로저가 부재한 상황이 닥치자, 2001년 ~ 2002년에는 마무리 투수로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이러한 활약상에 힘입어 2002년 시즌이 끝난 뒤 요코하마와 3년 7억 3천만엔의 계약을 맺고 선발 투수로 복귀하지만, 잦은 부상에 신음하며 3년간 6승밖에 거두지 못하는 미미한 성적을 거둔다. 결국 2005년, 요코하마에서 방출되지만 36살의 적지 않은 나이에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오르고 싶다.'는 오래 된 꿈을 쫓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리고 2006년
[image]
'''사람이 달라져서 돌아왔다.'''
LA 다저스에 초청선수로 스프링캠프에 참가하여 시즌 초에는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 콜업된 후 일본에서 갈고 닦은 제구력과 슬라이더를 활용하여 부상 중이였던 팀의 마무리인 에릭 가니에를 대신해, 예상을 뛰어넘는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다저스가 다시금 리그내 최고수준 철벽계투진을 구성하는 데 일조한다. 특히 39세이브를 기록하며 리그 최정상급 마무리로 활동한 2007년 활약상은 백미.[1] 이에따라 올스타에도 선정되었다. 2008년까지 3년간 다저스에서 뛴 뒤, 2009년에는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 중간계투로 뛰었다. 다저스의 후임 마무리는 조나단 브록스턴.
2010년에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서 뛰었다. 보직은 빌리 와그너의 등판 전 앞을 책임져줄 셋업맨. 생각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의 1등공신이 되었지만 많은 나이는 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결국 포스트시즌에서는 뛰지 못했고, 애틀랜타는 재계약을 포기했다.
2011년에는 밀워키 브루어스에서 뛰게 되었다. 트레버 호프만의 은퇴로 셋업맨 자리를 맞게 될 듯. 밀워키가 올시즌에 승부를 보려는만큼 사이토의 몸 상태가 올시즌 밀워키 불펜 안정화의 핵심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시즌 개막 직후 부상자 명단에 올라서 먹튀가 되는 듯 했으나 7월부터 로스터에 복귀해서 필승조로서 4승 1패 10홀드 방어율 1.90을 찍으면서 왕자님의 FA를 앞두고 2011 시즌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밀워키의 막판 질주에 공헌하였다.
2012년에는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에서 뛴 뒤 고향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 계약, 일본 복귀를 선언하였다. 라쿠텐에서도 셋업맨으로 활약하면서 팀의 첫 우승에 공헌했다. 센트럴, 퍼시픽 양 리그의 초절정 약체의 대표격인 요코하마와 라쿠텐에서 우승반지 하나씩을 건지는 진기한 사례이다.
최고 '''99마일'''의 빠른 구속으로 박찬호, 우에하라와 함께 동양인 투수가 포심 패스트 볼 구위 하나만으로 메이저리그 타자들을 제압한 '''세 명 중 하나.'''[2] 2014년 뉴욕 양키즈에 입단하게 된 다나카 마사히로에게 신인으로서의 자세와 마음가짐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다. 본인은 36세 나이에 스프링 캠프에서 매일 노래 부르고 심부름도 하면서 적응하려고 애썼다고.
2015년 8월 17일 기자회견을 열고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의 이유는 연투를 하면 전날의 피로감이 남아있어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보다는 구단 경영에 대해서 배우고 싶다는 본인의 희망에 의해 2015년 시즌 종료 후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인턴으로 합류하여 프런트 연수 중이다. 아무래도 라이벌 팀인 다저스에서 주축 불펜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다른 지구 팀들보다 익숙한 것도 작용한 듯.
이렇게 주로 미국 야구계에서 활동하다 2020년부터 타카츠 신고가 새로 감독을 맡게 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투수코치로 합류하며 일본 야구계의 현장 지도자로 복귀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활약으로 mlb통산 평균자책점은 2점대 초반이고 아시아 불펜투수 WAR(BWAR+FWAR)도 우에하라를 이어 2위이다.[3] 이러한 커리어로 우에하라 코지와 사사키 가즈히로와 더불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아시아 불펜 삼대장'''으로 꼽힌다.
[image]
여담으로 얼굴은 초절 동안을 자랑한다.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던 무렵이 만 36세였는데 20대 후반 또는 3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용모를 보여줬으며, 4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30대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수준이다.
2. 일본의 자위관
[image]
齋藤 隆 (さいとう たかし). 위의 인물과 한자가 똑같다. 사진에서 키가 작은 인물이다.[4] 1948년생으로 1966년 방위대학교 14기(해군사관학교 24기)로 입학했고 1970년에 해상자위대에 입대했다. 27대 해상막료장[5] 과 2대 통합막료장[6] 을 역임했다. 2009년 퇴역.
아버지는 해군기관학교를 졸업한 일본 해군의 장교였고 뒤에 자위대에도 입대해 방위대학교 학생과장[7] 등을 지냈다. 할아버지는 해군 수병 출신이었다.
[image]
2007년에 방한해 현충원에 분향했다.
[1] 2007시즌 사이토의 K/9은 10.91개, K/BB는 6개로 그가 탈삼진 능력뿐만 아니라 제구까지도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2] 물론 박사장의 슬러브와 사이토의 슬라이더, 우에하라의 스플리터가 이들의 패스트볼을 뒷받침했다. 다만 다른 둘과 달리 우에하라는 구속이 아닌 무빙 패스트볼의 어마어마한 구위로 상대를 제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3] 같은 올스타 출신인 하세가와 시게토시 같이 통산 WAR로는 앞서는 사례도 있지만 선발, 불펜은 오가며 활약하여 불펜으로 뛰었을때만의 WAR은 사이토 밀린다. 참고로 김병현도 이런 케이스다.[4] 키가 큰 사람은 미 합참의장을 지낸 마이크 멀린이다.[5] 전임자는 후루쇼 고이치였고 후임자는 요시카와 에이지였다.[6] 전임자는 맛사키 하지메, 후임자는 오리키 료이치였다.[7] 방위대 학생부 소속으로 대령이 보임되는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