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노 아키히로
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코치. 데뷔는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하였지만, 한신 타이거스 이적 후에 전성기를 맞이하여 주전 포수로 한신의 암흑기 탈출과 2차례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공헌하였다. 은퇴 후 한신에서 코치직을 맡다가 2019년부터 한신 타이거스의 지휘봉을 잡았다.
2. 데뷔 이전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는데, 본래 포지션은 유격수였지만 같은 팀의 주전 포수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포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된다. 이후 중학교 때는 학교에 야구부가 없어서 농구부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고등학교에서 다시 야구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야구부 감독이었던 이토 요시히로에 의해 1학년 때부터 주전 포수를 맡게 된다. 하지만 코시엔 출장은 단 1번도 이루지 못하였고, 본인을 고등학교 야구부의 주전 포수로 발탁한 이토 요시히로가 감독을 맡고 있던 토호쿠 복지 대학[2] 진학을 선택한다. 대학에서도 일미대학 야구선수권 대회 멤버로 뽑히는 등 나름 활약하였다.
대학 졸업 후, 1990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니치 드래곤즈의 2위 지명을 받았고, 양 구단의 경합 끝에 주니치가 교섭권을 얻으면서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 프로에 데뷔한다.
3. 현역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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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게 된 야노였지만, 이미 주니치에는 나카무라 타케시가 주전 포수로 확고히 자리잡았기에 나카무라에 비해 뚜렷한 장점이 보이지 않던 야노는 백업 포수, 대타 이하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출장기회를 늘리기 위해 외야수도 겸업했지만 여전히 출장기회를 많이 얻지는 못했고, 이 와중에 후배 아라키 마사히로에게 입단 당시 등번호였던 2번을 넘겨줘야 하기도 했다.
이렇게 주전 자리는 차지하지 못한 채 백업 포수나 외야수로 뛰다가, 1997년 시즌 종료 후 거포 1루수 타이호 야스아키와 함께 당시 한신의 주전 포수, 센터 외야수였던 세키카와 코이치와 주전 유격수였던 쿠지 테루요시와의 2:2 트레이드로 고향팀인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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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 타이거스 시절.[3]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면서부터 야노에게 전성기가 찾아오는데, 당시 쓸만한 주전 포수들의 부족으로 고생하던 한신에서 요시다 요시오 감독에게 포수 리드를 호평받아 이적하자마자 단번에 주전 포수 자리를 얻게 되었다. 노무라 카츠야가 후임 감독으로 부임하고부터는 완벽히 주전 포수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적 2년차였던 1999년엔 처음으로 규정타석에 도달하면서 3할 타율도 달성하였다.
이후 주니치 시절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가 한신 감독에 부임한 후로도 계속 주전포수 자리를 맡았고[4] 2003년부턴 신체 단련과 같은 맹훈련으로 장타력을 늘리는 등 공수에서 크나큰 성장을 이루며 이해 한신 타선의 하위타선(주로 7번타자)의 주축을 맡아 '''탸율 .328/14홈런 79타점'''의 포수로써는 매우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한신의 18년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공헌하였고 데뷔 이래 처음으로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 수상은 당시 첫 수상으로썬 최연장인 35세에 달성한 것이었다.
이후 2004년엔 전경기 출장을 달성하기도 하는 등 꾸준히 공수 양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주전포수로 활약하였고, 2005년에도 개인 최다인 19홈런을 차지하며 또다시 한신의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끌고 2번째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후 일본시리즈에선 당시 개막장스럽게 부진했던 투타 양면으로 인해 4전 전패와 최소 득점, 무홈런, 방어율 8점대라는 치욕적인 기록에 '''3경기 10실점, 총스코어 33-4'''[5] 라는 온갖 거대한 흑역사를 창조해낸 한신 선수단 가운데 유일하게 3할 이상의 타율이었던 .417을 기록. 감투선수상(일본시리즈 패전팀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선수에게 주는 상)을 수상했다.
이후 2008년까지[6] 계속해서 꾸준히 주전 포수로 뛰며 베스트나인을 1번 더 획득했지만 부상과 기량 저하로 2009년부터 출장기회가 급감하였다. 2010년 시즌에 이름부분을 輝弘에서 燿大로 한자만 바꾼 개명[7] 하였고 결국 2010년 시즌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통산성적은 '''1669시합 출장, 4921타수 1347안타, 112홈런 570타점 16도루, 103희생타 29희생플라이, 464사사구 1089삼진, 타율 .274/출루율 .335/장타율 .395/OPS .730'''이다.
4. 은퇴 이후
은퇴 후 해설위원을 하다가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배터리코치를 2015년 역임했고, 한신 타이거스에서 2016~2017년 작전/배터리코치, 2018년 2군 감독을 맡은 후 2019년부터 감독을 맡게 되었다. # 한신 타이거스 팬들조차 이 팀은 OB가 감독하면 망하는 저주가 있으며[8] 타이거스 OB는 해설이나 하라는 자조섞인 말을 하는데 야노는 그런 징크스를 벗느냐가 관건... 단 초창기엔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보내긴 했다.[9]
5. 한신 타이거스 1군 감독
5.1. 2019년
전임 감독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선호하고 있다. 스프링캠프만 봐도 스파르타식 강훈련을 중시하던 가네모토와는 달리 자율적인 훈련 방식을 도입한 걸 보면... 그리고 피드백 질문에 대한 답변도 차이가 명확한데 가네모토는 선수들에게 책임을 묻는 스타일이었던 반면에 야노의 경우 본인이 책임을 짊어지는 스타일이다. 국내 야구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SK 와이번스의 두 전임 감독인 김성근과 이만수 정도의 스타일 차이로 보면 될 듯하다.
그리고 야노 감독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라, 경기 내내 표정변화기 매우 극심하다는 것. 누가보면 조울증이 의심될정도.
어찌됐건 자율성을 중시한 스프링캠프의 부작용(?)으로 시범경기를 뒤에서 2등인 11위로 마감하고 말았다. 여러 의문점과 불안감을 가지고 1군 감독으로서의 첫 시즌을 맞이했다. 시즌 초반에는 아니나 다를까 투타의 부조화 속에 센트럴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며 허덕였지만, 점차 시즌이 지나갈수록 엇박자였던 팀 전력이 조화를 이루기 시작해 교류전 개막 전까지는 리그 2위 자리를 넘볼 정도로 그 상승세가 대단했다. 기껏해봐야 B클래스권을 맴돌것이라는 시즌 전 전망을 보기좋게 뒤엎은 선전이었다.
하지만 교류전을 망치면서[10] 3위 자리도 간당간당한 위치로 다시 추락했다. 결국 7월 3일 기준으로 B클래스인 4위까지 떨어져버렸다. 아직 요코하마와의 시리즈를 치르는 중이기에 순위가 바뀔 수 있지만 팀이 급격하게 하향세를 타고 있는지라 부진이 장기화 될 수도 있다.
9월 26일 기준으로 현재 센트럴 리그 4위 (66승 68패)를 기록하고 있는데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를 탈 수 있는 리그 3위 히로시마 도요 카프 (70승 70패)와는 딱 한 경기 차이가 난다. 한신은 3경기, 히로시마는 1경기를 남겨두고 있는데 한신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히로시마가 남은 한 경기를 비기거나 지고 한신이 남은 3경기를 모두 이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런데 히로시마가 진짜로 최종전에서 주니치에게 1-4로 패배하면서 한신이 남은 요코하마와의 한 경기, 주니치와의 두 경기를 모두 승리한다면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진출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정말로 남은 3경기를 모두 잡아내며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극적으로 진출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평균자책점 1위 도전하던 주니치 선발 투수 오노 유다이를 만나 고전하고 있었지만 3.1이닝만을 막고 내려가면서[11] 4회말 바뀐 상대 투수 미츠마 타쿠야에게 점수를 뽑아내면서 리그 막판 6연승을 달성, 히로시마를 가까스로 끌어내리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 합류했다. 한신 감독으로 첫 해에 A클래스로 진입한 사례는 구단 역사상 37년만에 있는 일이라고...[12]
힘들게 진출한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에선 정규 시즌 16승 1무 8패로 압살했던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를 만나게 됐는데 1차전 초반 믿었던 선발 니시 유키가 최악의 투구를 펼치며 이대로 기적의 행진이 종료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상황까지 몰렸다. 하지만 상대 감독 알렉스 라미레스의 연이은 투수 교체 실패와 7회부터 펼쳐진 호죠 후미야의 대활약으로 역전승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결국 2차전을 오토사카 토모의 끝내기홈런 끝에 내줬지만 3차전을 투수전 끝에 2-1로 잡으면서 승리, 시즌 전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까지 성공했다. 한신의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은 2014년 이후 처음.
파이널 스테이지 상대는 2019년 센트럴 리그 우승팀이자 전통의 일전 상대인 하라 다쓰노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두 팀의 전력차가 현재 워낙 큰 데다가 정규 시즌에도 상대 성적 10승 15패로 열세였던 탓에 승리를 기대하기는 좀 어렵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2014년의 기억이 아직 양 팀 팬의 뇌리에 강력하게 남아있어 기대치는 높은 상황이다. 결국 전력 열세와 투수진 피로를 이겨내지 못하고 1승 4패(어드밴티지 1패 포함)으로 탈락, 2014년의 기적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5.2. 2020년
2020년 시즌을 앞두고 반강제적인 로스터 개편이 기다리고 있는데 토리타니 다카시, 랜디 메신저 등 팀 내 베테랑들이 줄줄이 팀을 떠나거나 은퇴하는 상황이 된 것. 2019년 10월 17일 있었던 신인 드래프트에서는 고교 빅4로 분류되는 선수 중 오쿠가와 야스노부를 1차 지명했다가 중복지명으로 독점 교섭권을 야쿠르트에게 내줬지만 대신 니시 준야를 지명하는 데 성공했다.
코로나로 인해 미뤄진 2020년 개막전부터 교진에게 피스윕 등 6월에만 3승 8패를 당해 리그 꼴지로 시작하였다. 극악의 팀타격 부진과 5연 연장시리즈, 15타석 연속 무안타의 보어의 부진이 있었지만 연패에 대한 책임을 지울 수 없었고 시즌 중에는 선수들을 모아 몇시간동안 설교를 했다고 했다. 망가진 팀케미와 극악의 성적으로 간사이권 언론에서는 전 주니치의 오치아이 선임설 등 각종 찌라시들이 난무해 자리또한 위태해졌었다.
7월 4일 마츠다구장 히로시마전 4연승을 필두로 팀 분위기가 살아돌아왔고 보어의 부활과 팀타격의 부활, 투수진의 역투가 지속되면서 7월 21일 기준으로 리그 3위로 올라왔다. 그 이후에도 부진했던 치카모토 코지를 빼고 1번에 이토이 요시오를 넣는 등 적극적으로 타순 변화를 가져갔고, 최종적으로 2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다만 작년만큼의 표정변화를 보여주고 있지 않다
6. 기타
- 은퇴경기 파괴자로 유명한 무라타 슈이치의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2010년 9월 30일 야노의 은퇴 세레머니가 열린 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전에서, 야노는 당시 한신이 우세한 상황일 때 9회 말 2사 상황이 되면 조지마 켄지와 맞바꿔 포수로 나올 예정이었지만, 이 경기에서 무라타 슈이치가 9회 무사 때 역전 3점 홈런을 때리는 바람에 결국 출장이 무산되고 은퇴 세레머니만 하고 말았다 참고로 경기는 결국 무라타의 그 홈런이 결승타가 되어 4 - 3으로 한신이 졌다. 영상을 포함한 자세한 상황은 홈런을 맞은 투수인 후지카와 큐지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 주니치 시절인 1991년 제1회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하기도 했다. 그 때는 아직 입단하고 얼마 안 된 시점으로 팀에서는 나카무라 타케시가 확고하게 주전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아직 1군보다 2군에 있는 시간이 더 긴 때였지만 한일 슈퍼게임의 주최가 주니치 신문이었기 때문에 출전을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장종훈이 장외홈런을 때렸던 기후 나가라가와 구장에서 열렸던 5차전에 선발 포수로 출전했었다.
- 2006년 이승엽의 한일통산 400호 홈런 달성 때 허용(?)포수였다. 당연히 상대팀 대신 2014년 오승환의 한일통산 300세이브를 요미우리가 조공하면서 정산이 이뤄졌다. 여기에 더해 요미우리는 오승환에게 당해 클라이맥스 시리즈 MVP 까지 조공하고 말았다. 물론 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는 부전승 제외하면 1승도 못 가져가고 4연패 광탈하고 말았다.
[1] 선수시절 등록명은 矢野 輝弘. 발음은 똑같다.[2] 카네모토 토모아키, 사사키 카즈히로, 사이토 타카시, 카도쿠라 켄의 모교다. 사사키와 동기, 카네모토와 사이토는 야노의 1년 후배로(카네모토는 야노, 사사키와 동갑이지만 재수로 입학했기 때문에 야구부는 1년 후배.) 함께 뛰었다.[3] 야노가 한신으로 오기 직전 시즌인 1997년에는 일본야구 역사상 희대의 먹튀 마이크 그린웰이 저 등번호의 주인이었다.[4] 다만 야노 본인은 호시노가 한신 감독에 부임하자 과거 주니치 시절 때의 트레이드 때문에 '''"또 버림받겠지"''' 라고 생각하여 실망하기도 했다고. 실제로 2002년엔 부상 등을 이유로 전년도보다 출장기회가 100타석 이상 감소하기도 했다. [5] 이승엽이 무려 한신 팀득점보다 많은 6타점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 해에 이승엽이 요미우리로 오면서 한신은 홈런자판기가 된다.[6] 이 해에 2008 베이징 올림픽에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멤버로 참가하였고, 4강 한국전에 선발출장했다.[7] 발음은 똑같이 아키히로[8] 한신 타이거스에서 OB 출신이 감독으로써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끈 건 2차 요시다 요시오 체제의 1985년, 오카다 아키노부 체제의 2005년뿐이다. 그마저도 요시다는 팀을 사상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그 뒤 2년만에 역대 최저 시즌 승률을 찍고 최하위로 추락하면서 짤림과 동시에 2002년까지 계속된 암흑기의 막을 열었고, 1차와 3차 체제에서도 끝이 좋지 못했다. 오카다는 2005년 일본시리즈에서 '''33-4'''라는 굴욕적인 대흑역사를 기록했고, 비록 성적은 괜찮았지만 구단의 많은 투자와 기대에 비하면 거기엔 못 미치는 성적을 내왔다. 결국 2008년에 '''13게임차 리그 1위였다가 숙적 교진군에게 뒤집혀서 리그 우승을 내주는''' 참사를 일으키면서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나머지 OB 출신 감독들은 제대로 된 성적을 못 내거나 선수들과 불화를 일으키는 좋지 않은 모습만을 보였다.[9] 이때 각동님의 공을 받아본적이 있다.[10] 6승 2무 10패를 기록하면서 센트럴 및 퍼시픽리그 12개 팀 중 10위에 그쳤다.[11] 3.1이닝을 막아 평균자책점을 2.58까지 내려 1위를 히로시마 크리스 존슨(2.59)으로부터 뺏어 왔다.[12] 한신 타이거스 프랜차이즈를 부활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호시노 센이치 감독도 부임 첫 해였던 2002년에는 리그 4위(B클래스)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