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모토 토모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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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출신 야구인. 포지션은 외야수로 커리어 내내 주로 좌익수를 보았다. 등번호는 10번(히로시마) - 6번(한신).
한신 팬들로부터는 아니키(兄貴,형님)이라 불리며 존경받던 선수였다.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동,서의 번장(番長)으로 불린다.[2]
재일교포 3세이며, 고등학생 시절이던 1986년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소속으로 봉황대기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한 적이 있다. 방한했을 때 한국 선수들을 상대로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렸다. 2001년에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지금은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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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의 달리는 4번타자 시절.
히로시마 고료 고교[3] -도호쿠 복지대학[4] 을 졸업하고 1992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해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창기에는 타격도 수비도[5] 못 미더운 모습이었지만, 강훈련 끝에 기량이 상승해 노무라 켄지로, 오가타 고이치, 마에다 토모노리, 에토 아키라 등과 함께 1990년대 중후반 카프 '붉은 악마 타선'의 한 축을 이루었다.[6]
2003년 호시노 센이치의 강력한 권유로 FA를 통해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였고[7] , 이적한 뒤에는 2003, 2005년의 리그 우승에 공헌하는 등 2000년대 중반의 한신 상승세의 일등공신이 되면서 오랜 기간 한신의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특히 만 37세의 나이로 .327/.429/.625 OPS 1.054 40홈런 125타점을 기록하며 센트럴리그 MVP가 된 2005년의 활약이 그 백미였다.
'''통산 2,539안타, 476홈런, 1521탸점''', 사이클링 히트, 18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 등 여러 모로 어마어마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안타, 홈런, 타점은 모두 헤이세이 시대의 일본프로야구 선수로서는[8] 최다. 젊었을 적에는 발도 빨라서 두 자릿수 도루도 여러 번 기록했고,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를 기록한 시즌(2000년)도 있으며, 2001년엔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볼넷 기록 6위[9] 에 해당하는 '''128볼넷'''을 기록하는 등 정말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 한신으로 이적한 이후에는 출루[10] 와 장타 생산에 주력하면서, 도루가 줄기는 했지만 30대 중반~40대에 접어드는 나이에도 20홈런 이상에 3-4-5급 비율스탯을 찍는 세리그 대표 강타자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2009년 4월에는 3연타석 홈런을 2번이나 기록하기도 했고영상, 1002타석 연속 무병살타 기록 등 은근히 희귀한 기록들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기록이라면 '''연속 출장 기록'''인데, 1999년 7월 21일부터 2010년 4월 17일까지 1,492경기, 13,686이닝 동안 기록한 '''전(全) 이닝 연속 무교체 출장 기록'''은 세계 기록이며 이 기록이 중단된 후에도 2011년 4월 15일까지 1,766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달성했다. 대한민국 최장 기록이 돌격대 출신 철인이 기록한 1,014경기[11] 이니 차원이 다른 셈. 게다가 그 돌격대 출신 철인도 막판에는 대타나 대수비 등으로만 나왔으니 전 이닝 연속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이는 일본의 철인 기누가사 사치오에 이은 NPB 역대 2위. 이 기록을 달성하는 와중에 왼손에 골절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그 상태에서도 출장해 오른손만으로 스윙해 2안타를 날렸다든가, 후두부에 데드볼을 맞고 쓰러졌다가 다음 타석에 홈런을 날렸다든가 하는 전적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데드볼을 맞은 다음 타석에는 타율이 6할을 넘었다고 한다.
호시노 센이치 전 감독 왈, '가네모토는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을 때 120%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야말로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는 인간으로 여겨지는 선수였다. 아예 대놓고 '철인'으로 캐릭터화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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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시즌 중 부상을 입어 데이비드 베컴, 웨인 루니가 사용했던 산소캡슐을 친히 이용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곤 다시 무시무시한 활약을 펼쳤다는데…흠좀무
2010년에는 시즌 초기부터 어깨 부상으로 신음하며 제대로 공조차 던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4월 18일 요코하마 원정 경기의 선발 멤버에서 제외됨으로써 1999년 7월 21일부터 계속된 '연속 풀 이닝 출장 기록'은 '''1,492경기'''에서 종지부를 끊게 되었다. 이날 한신의 스타팅 라인업 발표 장면, '''4번 타자'''에 아라이 타카히로가 불릴 때부터 장내에 비명이 들리며 서서히 동요하더니, 사실상 마지막 8번 타자에 '''좌익수''' 카츠라기 이쿠로[12] 가 불리며 카네모토의 선발 미출장이 확정되는 순간 장내의 비명과 동요가 절정에 다다른다.
김기태[13] 가 연속경기 출장을 이어 가는 이유를 묻자 관중석을 가리키며 "난 저 분들을 위해 뛸 의무가 있으며,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뿐이다" 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일단 이 시합부터는 주로 대타로 출장하는 것으로 '연속 출장 기록'은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2010 시즌은 '''규정타석 미달'''. 규정타석 미달로 전 경기 출장한 사례는 NPB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러나, 2011년 시즌이 개막한 지 3경기 만인 4월 15일[14] 에 연속 출장 기록은 중단되고 말았는데, 이날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나고야돔 원정경기 8회초 2사 주자 1루 상황에서 대타로 출장했으나 1루 주자가 도루자를 당하면서 타석이 증발, 이어진 8회말에 수비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빠지면서 기록상 출장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되어 대기록에 마침표를 찍었다. 야구 규칙에서는 대타는 출루 또는 아웃으로 타격행위를 완료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수비수로 투입이 되어야 경기 출장이 인정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칙의 빈틈을 탓하거나 도루하다 죽은 주자를 갈구지 않았고, 기록이 멈춘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인터뷰를 했으니 기록중단에 크게 미련을 가지지는 않는 듯하다. 항간에는 구단 높으신분들과 감독의 상의 하에 대주자에게 몰래 지시를 내려 무리한 도루를 지시해서 점점 활용도도 떨어지고 엔트리 낭비를 초래하는데 연속 출장을 이어가는 카네모토의 기록을 이쯤에서 엎어버리려고 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이로써 달성한 기록이 '''1,766경기 연속 출장'''.
사실 가네모토의 몸 상태는 2009년 이후부터 엉망이었던 데다 2010년부터는 송구 자체가 안 될 정도로 어깨 상태가 심각했다. 한때는 30도루를 기록했던 발도 엄청나게 느려져서 수비 범위도 극히 좁아졌고, 어떻게 플라이를 잡거나 레프트 앞에 떨어진 공을 잡아도 백홈은 커녕 고작 3루까지도 공을 던질 수 없어 유격수[15] 가 중계 플레이(…)를 해야 했을 정도(참고)... 60%도 안되는 몸 상태로 계속 연속출장을 시키는 것에 대해서 물론 대다수 팬들이야 "연속출장 끊기면 안돼!" 를 외쳤지만, 객관적으로 보는 소수의 팬들은 "이쯤에서 연속 출장을 중단하고 수술한 뒤 확실히 재활해서 오래오래 선수생활 하는 방향으로 가자"는 말도 있었다. 물론 가네모토의 연속출장이 상징하는 그것이 너무 강했기에 적극적으로 표명 안 했을 뿐이지...
지명타자가 있는 퍼시픽 리그였으면 그냥 붙박이 지명타자 시키면 끝났을 문제였지만, 한신의 소속 리그는 지명타자가 없는 센트럴 리그. 게다가 지명타자로 출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 게 가네모토의 경우 연속'''경기'''출장이 아니라 연속'''이닝'''출장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지명타자로 돌리면 연속 이닝출장 기록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실제로 한신 구단 측이 지명타자제도를 쓸 수 있는 교류전 기간 중에 가네모토의 몸상태를 고려해서 지명타자로 출전시키는 방법을 고려하고 리그 사무국 측에 지명타자로 출전하는 경우 연속이닝출장 기록이 인정되는지 문의했으나 사무국 측으로부터 "인정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듣고 할 수 없이 교류전에서도 좌익수 선발로 출전을 시켰다. 결국 꾸역꾸역 좌익수로 선발 출전하며 전 이닝 연속 출장기록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수비부담이 적은 1루수로 돌리는 방법도 있었으나 가네모토 본인이 선수생활 내내 외야수였고 아무리 1루 수비가 부담이 덜하다고 해도 결코 현대 야구의 1루수가 결코 내야수의 송구만 받는 단순한 포지션이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처럼 뚝딱 수비위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선수생활 늘그막에 갑자기 1루수로 전환한다고 결코 수비부담이 주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면 1루에 커다란 구멍을 만드는 결과만 초래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1루에는 '''FA로 이적해 온 같은 팀 출신의 후배 아라이 타카히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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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을 이어 가던 도중 결국 2012년 9월,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드디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초 한신 타이거스에서 가네모토의 크고 아름다운 커리어와 2000년대 타이거스의 중흥기를 이끈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등번호인 6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로 했으나, 가네모토 본인이 고사하면서 일단은 준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참고로 한신의 6번은 나름 의미있는 번호인데, 한신의 역사를 빛낸 교타자인 후지타 타이라와 한신 감독이었던 와다 유타카가 썼던 번호이기도 하다. 한신 팬들의 심경은 철인의 은퇴가 아쉬우면서도 현재의 전력강화를 생각하면서 '드디어 사라졌구나'하는 안도감, 다른 팀의 팬들은 대선수의 은퇴를 축하하면서도 '한신의 구멍 No.1이 없어졌다'는 아쉬움이 교차했던 기묘한 은퇴.
2009년 이후부터 송구조차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던 오른쪽 어깨는 2013년 돼서야 수술을 했다고 한다.(...)
은퇴 후에는 야구 지도자 활동을 하지 않고 방송 해설가나 게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나 2015년 구단 창설 80주년 기념으로 우승을 목표로 내건 한신 타이거스가 9월까지 아슬아슬하게 1위를 지키다가 9월 부터 추락하면서 DTD를 시전. 최소한 리그 우승이 재계약의 필요조건이라는 와다 유타카 감독의 경질이 확실한 가운데 유력한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선수 은퇴 후에 그동안 벌어놓은 연봉의 상당액을 선수생활 동안 친하게 지내던 지인을 믿고 사업자금으로 빌려줬다가 파산하는 바람에 한푼도 못받고 다 날려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FA 등으로 상당한 액수를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경제적으로 조금 힘드신 상태라고...이 때문에 법정에 출석해서 증언도 해야만 했다. TV 쇼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하는 이유가 그래서라고 한다. 선수시절 몸 혹사해 가면서 열심히 벌어서 늘그막에 좀 편하게 사시나 했더니...안습(...). 감독 취임 후 전지훈련 일정 전에도 TV에 자주 나오고 있다.
그런데 2016년부터 와다 유타카 감독의 후임으로 차기 감독을 맡는다는 보도가 떴고, 스포츠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됐다. 특히 닛칸스포츠, 스포니치뿐만 아니라 '''한신의 당기관지''' 로 불리는 데일리스포츠에서도 이 소식이 1면으로 뜬 것으로 보아 차기 감독이 기정사실화된 듯.[16]
그리고 10월 17일, 한신의 차기 감독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떴다. 등번호는 선수 시절과 같은 6번.
우선, 한신 모기업 쪽에서는 3년 계약 기간 중에 2년은 꼴찌를 해도 좋으니 우승을 시켜 달라고 말을 하는 등, 가네모토에게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 큰 상황이다. 우승은 일본 구단 통틀어 1번 밖에 하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제대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듯 보이고, 그것이 카네모토와에 계약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일단 시즌 전의 기대치는 굉장히 높다. 선수 시절 혹독한 자기관리로 유명했던 만큼 와다 감독 시절의 뭔가 미적지근한 분위기를 화끈하게 일신할 것이라고 기대를 많이 하는 모양. 드래프트 때도 1순위로 지명한 다카야마 슌에게 "훈련은 꽤 힘들거니까 각오는 해두도록"이라는 메시지를 날리는 등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기대치를 반영하듯 한신은 연일 기자들을 몰고 다니며 스프링캠프의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매너리즘 기미가 보였던 팀 분위기를 화끈하게 일신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 리빌딩을 추진한다는 의미에서 "초변혁"을 시즌 캐치프레이즈로 정했다. 3월 25일 교세라돔에서 벌어진 개막전에는 2-5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패배하면서 첫 단추를 잘 꿰메지는 못했으나, 신인선수 (와카토라,若虎)인 다카야마나 3년차 요코타 신타로를 테이블세터에 기용한 과감한 전략이 어느 정도 먹히고, 작전 역시 신인감독 치고는 잘 먹혀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개막 3연전을 2승 1패의 위닝시리즈로 마무리하는데 성공했다. 한신 팬들은 이제야 초변혁이 시작되는구나 하면서 기대를 하고 있는 중.
2016년 5월 31일 현재, 25승 25패 3무로 정확히 승률 0.500를 찍고 있으며 선두 히로시마를 3게임차로 뒤쫓았다. 그러나 6월에 접어들면서부터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모드를 보여주면서 5위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초변혁 운운 하면서 도리타니 다카시 등 노장들은 떨어진 성적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등 구단의 푸시를 받는 베테랑들의 성역은 건드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세대교체도 지지부진한 중이다. 참을성 없기로 유명한 팬덤 측에서는 슬슬 뭐가 초변혁이냐면서 비아냥도 나오는 중.
그래놓고 경기를 지면 경기 경험이 부족한 유망주들에게만 "패기가 없다", "근성이 부족하다", "한 타석 한 타석의 소중함을 모른다", "정신상태가 나약하다" 등 정신론만 강조하면서 갈구는 중이다. 성적이 안 나오니까 애꿎은 유망주들에게만 책임을 묻고 1, 2군을 왕복시키면서 리빌딩도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평가. 하는 거라고는 끌려가는 경기 중후반 덕아웃 앞에 선수들을 모아놓고 분발을 촉구하는 것 정도 밖에 없다.
그나마 야쿠르트가 떡실신급으로 나가떨어진 덕에 최하위는 면하고 있고 전반기 종료 기준 2위와의 승차를 10게임으로 벌린 히로시마를 제외하고 나머지 팀들이 다 고만고만해서 충분히 반등의 가능성이 있어 보였으나 7월 3일, 7월의 첫 시리즈였던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대결을 루징 시리즈로 마감하며 '''최하위로 추락했다.''' 이어 벌어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도 접전 끝에 연패하면서 최하위가 점점 굳어지고 있다. 그나마 7월 7일 게임은 무실점으로 이겼지만 그러고도 5위 야쿠르트와는 반 게임 차이로 꼴찌. 급기야 7월 8일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는 후지나미 신타로가 초반부터 대량 실점한 데에 분노하여 8이닝 동안 무려 161구를 던지게 하는 '''징벌성 투구'''까지 시전했다. 후지나미는 8실점(6자책) 패전하면서 동시에 '''자력으론 리그 우승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그보다 앞서 5월 17일 도리타니의 낙구로 경기를 망치자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관중들과 TV카메라가 지켜보고 있는데 괜히 옆에 있는 의자를 걷어차면서 화풀이를 하는 추태를 보이는 등 이제 겨우 감독생활 반년 정도 밖에 안 한 감독이 30년 전 수준의 사고방식을 가진 구닥다리 감독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슬슬 주주총회에서 지금 한신의 끔찍한 상황에 대한 성토가 당연히(??) 나올 듯 하다.[17]
결국 감독첫해 리그4위를 기록. 꼴지는 면했지만 처음 부임인데다가 프랜차이즈급 스타[18] 였으니까 수뇌부가 많이 이해해주고 기회를 더 주려는 모습이다. 다음 시즌 이후 명예회복이 절실하다.
부임 2년차인 2017년은 시즌전 오릭스의 주장이자 정신적 지주를 FA로 영입하며 공격 및 수비력를 보강하였다. 하지만 제 아무리 운동신경이 좋고 빠른발을 가졌다 하더라도 30대 중반이라는 적지않은 나이때문에 예전같지 않을수도있어 우려를 낳고있다.
3월 31일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친정 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원정 개막전에서는 양 팀 모두 난타전을 벌인끝에 승리하였으나, 그 후 3연패에 빠져 올시즌도 험난한 시즌이 예상된다.
4월 4일 야쿠르트와의 홈개막전에서는 후지나미 신타로가 던진 공이 하타케야마 가즈히로의 머리를 강타해 벤치 클리어링이 났는데 이 과정에서 블라디미르 발렌틴과 야노 아키히로 배터리코치간에 몸싸움을 목격해 발렌틴에게 달려들자 주위의 제지로 또하나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4월 내내 요미우리와 더불어 호시탐탐 선두자리를 위협하며 부단한 노력을 한끝에 5월 5일부터 시작된 히로시마와의 홈3연전을 스윕하며 선두로 올라섰다! 그러나 5월 중순들어 연패를 하고 히로시마가 다시 상승 분위기를 타자 선두자리를 빼앗겼다. 그 이후로도 히로시마가 사기유닛급 성적을 내는지라 올해도 리그 우승은 어려울 듯 하다. 한신답게(...) 1위 탈환은 커녕 3위로 내려앉지 않을까 의심스러운 순간도 적잖이 있었으나, 그래도 3위권의 DeNA 및 요미우리와 4~5게임 정도의 차이를 두고 2위 자리를 지켰다.
결국 히로시마와의 큰 승차를 좁히지 못하고 홈에서 히로시마의 2연패를 지켜보게 되었으나, 9월 28일 DeNA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2년만에 클라이막스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고, 30일에 요미우리를 꺾으며 2위를 확정지었다. 정규시즌 우승은 실패했으나 이 정도면 그나마 작년의 오명을 씻는 정도는 되었다 할 수 있겠지만...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 3위 DeNA 상대로 1승 2패를 거두며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에 실패했다. 다음 시즌 이후의 성적이 관건이라 하겠다.
시즌종료 후에는, 당초 3년 계약으로 알려졌던 계약이 2년 계약이었고, 2020년까지 새로 3년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감독 지휘봉을 잡은지 3년째이건만,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 작년에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유망주들은 퇴보해서 도로 벤치만 채우고 있고 중심 타선은 40이 넘은 후쿠도메와 36인 이토이가 차지하고 있다. 더 절망적인 건 30대 후반의 두 베테랑과 나머지 타자들의 격차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는 점. 결국 12개구단 최악의 타선으로 히로시마를 제외한 나머지 센트럴리그 4팀과 함께 승률 5할 밑에서 서로 치고 받는 이전투구를 하면서 순위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이미 6월달에 열린 주총에서 주주들의 시선은 싸늘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시즌 끝나고 과연 이 성적으로 유임이 가능할지 아닐지가 관건이라 하겠다. 아마도 그래도 간신히 A클래스라도 들으면 본인은 간신히 유임이 될 수 있지만 본인의 요청으로 수석 겸 타격코치를 맡은 카타오카 아츠시[19] 가 대신 책임을 뒤집어 쓰고 경질 될 가능성이 있고, 만약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도 실패하면 아마도 사이좋게 짐을 싸게 될 듯 하다.
결국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 한신 프랜차이즈가 팀을 맡으면 성적이 망한다는 속설만을 증명하며 후반기 들어 실속을 거듭한 끝에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고, 그것도 모자라 '''17년만의 리그 최하위'''라는 끔찍한 결과를 기록하고 말았다. 아직 계약기간이 2년 남았다지만 이런 결과로는 시즌 후 해임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후 후속 기사들에서 나온 바로는 한신 구단 측에서 가네모토를 교체할 의사가 없다고 한다. 심지어 한신 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는 코칭 스탭 역시 한명의 교체도 없이 그대로 간다는 방침이라고. 당연히 한신 팬들의 반응은 안좋은 의미로 난리가 났다.
그러나 10월 11일에 한신이 가네모토의 사임을 발표했고(#), 주니치와의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20] 후임은 야노 아키히로 2군 감독.
자기 몸관리에 철저하고 연속 출장 등의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만, 술과 담배에 환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덕아웃에서 담배 피우다가 카메라에 제대로 잡히질 않나, '올해 담배를 끊어 줬으면 하는 사람 No.1'으로 꼽히질 않나. 자기 라커룸에 소주를 놓고 산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눈에 낯익다는 걸 보면 진로 소주다. 박동희 기자의 리포트 어째 쿠도 키미야스와 비슷하다고 할까?
2013년 8월에 취임 전 마이니치 방송의 <마법의 레스토랑 R>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하기 쉬운 건 히로시마 감독이지만 하는 보람이 있는 건 한신 감독이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16년 1월 18일 그 프로그램에서는 한신 감독이 된 카네모토를 응원하는 특집을 편성했는데, 이 날 방송은 그의 식성에 대해 조명하는 특집이었다(...). 방송에 나온 집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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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출신 야구인. 포지션은 외야수로 커리어 내내 주로 좌익수를 보았다. 등번호는 10번(히로시마) - 6번(한신).
한신 팬들로부터는 아니키(兄貴,형님)이라 불리며 존경받던 선수였다.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함께 동,서의 번장(番長)으로 불린다.[2]
재일교포 3세이며, 고등학생 시절이던 1986년 재일교포 학생야구단 소속으로 봉황대기 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한 적이 있다. 방한했을 때 한국 선수들을 상대로 영혼까지 탈탈 털어버렸다. 2001년에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여 지금은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
2.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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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의 달리는 4번타자 시절.
히로시마 고료 고교[3] -도호쿠 복지대학[4] 을 졸업하고 1992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해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창기에는 타격도 수비도[5] 못 미더운 모습이었지만, 강훈련 끝에 기량이 상승해 노무라 켄지로, 오가타 고이치, 마에다 토모노리, 에토 아키라 등과 함께 1990년대 중후반 카프 '붉은 악마 타선'의 한 축을 이루었다.[6]
2003년 호시노 센이치의 강력한 권유로 FA를 통해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하였고[7] , 이적한 뒤에는 2003, 2005년의 리그 우승에 공헌하는 등 2000년대 중반의 한신 상승세의 일등공신이 되면서 오랜 기간 한신의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특히 만 37세의 나이로 .327/.429/.625 OPS 1.054 40홈런 125타점을 기록하며 센트럴리그 MVP가 된 2005년의 활약이 그 백미였다.
'''통산 2,539안타, 476홈런, 1521탸점''', 사이클링 히트, 18년 연속 두자릿수 홈런 등 여러 모로 어마어마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안타, 홈런, 타점은 모두 헤이세이 시대의 일본프로야구 선수로서는[8] 최다. 젊었을 적에는 발도 빨라서 두 자릿수 도루도 여러 번 기록했고, '''트리플 쓰리(3할-30홈런-30도루)'''를 기록한 시즌(2000년)도 있으며, 2001년엔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볼넷 기록 6위[9] 에 해당하는 '''128볼넷'''을 기록하는 등 정말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다. 한신으로 이적한 이후에는 출루[10] 와 장타 생산에 주력하면서, 도루가 줄기는 했지만 30대 중반~40대에 접어드는 나이에도 20홈런 이상에 3-4-5급 비율스탯을 찍는 세리그 대표 강타자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2009년 4월에는 3연타석 홈런을 2번이나 기록하기도 했고영상, 1002타석 연속 무병살타 기록 등 은근히 희귀한 기록들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2.1. 연속 출장 기록, 그 빛과 그림자
그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기록이라면 '''연속 출장 기록'''인데, 1999년 7월 21일부터 2010년 4월 17일까지 1,492경기, 13,686이닝 동안 기록한 '''전(全) 이닝 연속 무교체 출장 기록'''은 세계 기록이며 이 기록이 중단된 후에도 2011년 4월 15일까지 1,766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달성했다. 대한민국 최장 기록이 돌격대 출신 철인이 기록한 1,014경기[11] 이니 차원이 다른 셈. 게다가 그 돌격대 출신 철인도 막판에는 대타나 대수비 등으로만 나왔으니 전 이닝 연속이랑은 거리가 멀었다. 어쨌든 이는 일본의 철인 기누가사 사치오에 이은 NPB 역대 2위. 이 기록을 달성하는 와중에 왼손에 골절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그 상태에서도 출장해 오른손만으로 스윙해 2안타를 날렸다든가, 후두부에 데드볼을 맞고 쓰러졌다가 다음 타석에 홈런을 날렸다든가 하는 전적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데드볼을 맞은 다음 타석에는 타율이 6할을 넘었다고 한다.
호시노 센이치 전 감독 왈, '가네모토는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을 때 120%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야말로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는 인간으로 여겨지는 선수였다. 아예 대놓고 '철인'으로 캐릭터화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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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시즌 중 부상을 입어 데이비드 베컴, 웨인 루니가 사용했던 산소캡슐을 친히 이용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곤 다시 무시무시한 활약을 펼쳤다는데…흠좀무
2010년에는 시즌 초기부터 어깨 부상으로 신음하며 제대로 공조차 던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4월 18일 요코하마 원정 경기의 선발 멤버에서 제외됨으로써 1999년 7월 21일부터 계속된 '연속 풀 이닝 출장 기록'은 '''1,492경기'''에서 종지부를 끊게 되었다. 이날 한신의 스타팅 라인업 발표 장면, '''4번 타자'''에 아라이 타카히로가 불릴 때부터 장내에 비명이 들리며 서서히 동요하더니, 사실상 마지막 8번 타자에 '''좌익수''' 카츠라기 이쿠로[12] 가 불리며 카네모토의 선발 미출장이 확정되는 순간 장내의 비명과 동요가 절정에 다다른다.
김기태[13] 가 연속경기 출장을 이어 가는 이유를 묻자 관중석을 가리키며 "난 저 분들을 위해 뛸 의무가 있으며,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뿐이다" 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일단 이 시합부터는 주로 대타로 출장하는 것으로 '연속 출장 기록'은 계속 이어갔다. 하지만 2010 시즌은 '''규정타석 미달'''. 규정타석 미달로 전 경기 출장한 사례는 NPB 역사상 처음이었다. 그러나, 2011년 시즌이 개막한 지 3경기 만인 4월 15일[14] 에 연속 출장 기록은 중단되고 말았는데, 이날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나고야돔 원정경기 8회초 2사 주자 1루 상황에서 대타로 출장했으나 1루 주자가 도루자를 당하면서 타석이 증발, 이어진 8회말에 수비에 들어가지 않고 그냥 빠지면서 기록상 출장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되어 대기록에 마침표를 찍었다. 야구 규칙에서는 대타는 출루 또는 아웃으로 타격행위를 완료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수비수로 투입이 되어야 경기 출장이 인정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규칙의 빈틈을 탓하거나 도루하다 죽은 주자를 갈구지 않았고, 기록이 멈춘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인터뷰를 했으니 기록중단에 크게 미련을 가지지는 않는 듯하다. 항간에는 구단 높으신분들과 감독의 상의 하에 대주자에게 몰래 지시를 내려 무리한 도루를 지시해서 점점 활용도도 떨어지고 엔트리 낭비를 초래하는데 연속 출장을 이어가는 카네모토의 기록을 이쯤에서 엎어버리려고 했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이로써 달성한 기록이 '''1,766경기 연속 출장'''.
사실 가네모토의 몸 상태는 2009년 이후부터 엉망이었던 데다 2010년부터는 송구 자체가 안 될 정도로 어깨 상태가 심각했다. 한때는 30도루를 기록했던 발도 엄청나게 느려져서 수비 범위도 극히 좁아졌고, 어떻게 플라이를 잡거나 레프트 앞에 떨어진 공을 잡아도 백홈은 커녕 고작 3루까지도 공을 던질 수 없어 유격수[15] 가 중계 플레이(…)를 해야 했을 정도(참고)... 60%도 안되는 몸 상태로 계속 연속출장을 시키는 것에 대해서 물론 대다수 팬들이야 "연속출장 끊기면 안돼!" 를 외쳤지만, 객관적으로 보는 소수의 팬들은 "이쯤에서 연속 출장을 중단하고 수술한 뒤 확실히 재활해서 오래오래 선수생활 하는 방향으로 가자"는 말도 있었다. 물론 가네모토의 연속출장이 상징하는 그것이 너무 강했기에 적극적으로 표명 안 했을 뿐이지...
지명타자가 있는 퍼시픽 리그였으면 그냥 붙박이 지명타자 시키면 끝났을 문제였지만, 한신의 소속 리그는 지명타자가 없는 센트럴 리그. 게다가 지명타자로 출전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 게 가네모토의 경우 연속'''경기'''출장이 아니라 연속'''이닝'''출장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지명타자로 돌리면 연속 이닝출장 기록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실제로 한신 구단 측이 지명타자제도를 쓸 수 있는 교류전 기간 중에 가네모토의 몸상태를 고려해서 지명타자로 출전시키는 방법을 고려하고 리그 사무국 측에 지명타자로 출전하는 경우 연속이닝출장 기록이 인정되는지 문의했으나 사무국 측으로부터 "인정되지 않는다"는 답변을 듣고 할 수 없이 교류전에서도 좌익수 선발로 출전을 시켰다. 결국 꾸역꾸역 좌익수로 선발 출전하며 전 이닝 연속 출장기록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수비부담이 적은 1루수로 돌리는 방법도 있었으나 가네모토 본인이 선수생활 내내 외야수였고 아무리 1루 수비가 부담이 덜하다고 해도 결코 현대 야구의 1루수가 결코 내야수의 송구만 받는 단순한 포지션이 아니라서 그렇게 생각처럼 뚝딱 수비위치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선수생활 늘그막에 갑자기 1루수로 전환한다고 결코 수비부담이 주는 것도 아니고, 잘못하면 1루에 커다란 구멍을 만드는 결과만 초래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1루에는 '''FA로 이적해 온 같은 팀 출신의 후배 아라이 타카히로가 있었다.'''
2.2.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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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진을 이어 가던 도중 결국 2012년 9월,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드디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당초 한신 타이거스에서 가네모토의 크고 아름다운 커리어와 2000년대 타이거스의 중흥기를 이끈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등번호인 6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로 했으나, 가네모토 본인이 고사하면서 일단은 준 영구결번으로 지정됐다. 참고로 한신의 6번은 나름 의미있는 번호인데, 한신의 역사를 빛낸 교타자인 후지타 타이라와 한신 감독이었던 와다 유타카가 썼던 번호이기도 하다. 한신 팬들의 심경은 철인의 은퇴가 아쉬우면서도 현재의 전력강화를 생각하면서 '드디어 사라졌구나'하는 안도감, 다른 팀의 팬들은 대선수의 은퇴를 축하하면서도 '한신의 구멍 No.1이 없어졌다'는 아쉬움이 교차했던 기묘한 은퇴.
2.3. 연도별 성적
3. 선수 은퇴 이후
2009년 이후부터 송구조차 못할 정도로 엉망이었던 오른쪽 어깨는 2013년 돼서야 수술을 했다고 한다.(...)
은퇴 후에는 야구 지도자 활동을 하지 않고 방송 해설가나 게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나 2015년 구단 창설 80주년 기념으로 우승을 목표로 내건 한신 타이거스가 9월까지 아슬아슬하게 1위를 지키다가 9월 부터 추락하면서 DTD를 시전. 최소한 리그 우승이 재계약의 필요조건이라는 와다 유타카 감독의 경질이 확실한 가운데 유력한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선수 은퇴 후에 그동안 벌어놓은 연봉의 상당액을 선수생활 동안 친하게 지내던 지인을 믿고 사업자금으로 빌려줬다가 파산하는 바람에 한푼도 못받고 다 날려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FA 등으로 상당한 액수를 벌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경제적으로 조금 힘드신 상태라고...이 때문에 법정에 출석해서 증언도 해야만 했다. TV 쇼에 게스트로 자주 출연하는 이유가 그래서라고 한다. 선수시절 몸 혹사해 가면서 열심히 벌어서 늘그막에 좀 편하게 사시나 했더니...안습(...). 감독 취임 후 전지훈련 일정 전에도 TV에 자주 나오고 있다.
그런데 2016년부터 와다 유타카 감독의 후임으로 차기 감독을 맡는다는 보도가 떴고, 스포츠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됐다. 특히 닛칸스포츠, 스포니치뿐만 아니라 '''한신의 당기관지''' 로 불리는 데일리스포츠에서도 이 소식이 1면으로 뜬 것으로 보아 차기 감독이 기정사실화된 듯.[16]
그리고 10월 17일, 한신의 차기 감독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떴다. 등번호는 선수 시절과 같은 6번.
4. 한신 감독 시절
우선, 한신 모기업 쪽에서는 3년 계약 기간 중에 2년은 꼴찌를 해도 좋으니 우승을 시켜 달라고 말을 하는 등, 가네모토에게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 큰 상황이다. 우승은 일본 구단 통틀어 1번 밖에 하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제대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듯 보이고, 그것이 카네모토와에 계약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일단 시즌 전의 기대치는 굉장히 높다. 선수 시절 혹독한 자기관리로 유명했던 만큼 와다 감독 시절의 뭔가 미적지근한 분위기를 화끈하게 일신할 것이라고 기대를 많이 하는 모양. 드래프트 때도 1순위로 지명한 다카야마 슌에게 "훈련은 꽤 힘들거니까 각오는 해두도록"이라는 메시지를 날리는 등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기대치를 반영하듯 한신은 연일 기자들을 몰고 다니며 스프링캠프의 화제의 중심이 되고 있다.
4.1. 2016시즌
매너리즘 기미가 보였던 팀 분위기를 화끈하게 일신하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 리빌딩을 추진한다는 의미에서 "초변혁"을 시즌 캐치프레이즈로 정했다. 3월 25일 교세라돔에서 벌어진 개막전에는 2-5로 주니치 드래곤즈에 패배하면서 첫 단추를 잘 꿰메지는 못했으나, 신인선수 (와카토라,若虎)인 다카야마나 3년차 요코타 신타로를 테이블세터에 기용한 과감한 전략이 어느 정도 먹히고, 작전 역시 신인감독 치고는 잘 먹혀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개막 3연전을 2승 1패의 위닝시리즈로 마무리하는데 성공했다. 한신 팬들은 이제야 초변혁이 시작되는구나 하면서 기대를 하고 있는 중.
2016년 5월 31일 현재, 25승 25패 3무로 정확히 승률 0.500를 찍고 있으며 선두 히로시마를 3게임차로 뒤쫓았다. 그러나 6월에 접어들면서부터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모드를 보여주면서 5위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초변혁 운운 하면서 도리타니 다카시 등 노장들은 떨어진 성적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등 구단의 푸시를 받는 베테랑들의 성역은 건드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세대교체도 지지부진한 중이다. 참을성 없기로 유명한 팬덤 측에서는 슬슬 뭐가 초변혁이냐면서 비아냥도 나오는 중.
그래놓고 경기를 지면 경기 경험이 부족한 유망주들에게만 "패기가 없다", "근성이 부족하다", "한 타석 한 타석의 소중함을 모른다", "정신상태가 나약하다" 등 정신론만 강조하면서 갈구는 중이다. 성적이 안 나오니까 애꿎은 유망주들에게만 책임을 묻고 1, 2군을 왕복시키면서 리빌딩도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평가. 하는 거라고는 끌려가는 경기 중후반 덕아웃 앞에 선수들을 모아놓고 분발을 촉구하는 것 정도 밖에 없다.
그나마 야쿠르트가 떡실신급으로 나가떨어진 덕에 최하위는 면하고 있고 전반기 종료 기준 2위와의 승차를 10게임으로 벌린 히로시마를 제외하고 나머지 팀들이 다 고만고만해서 충분히 반등의 가능성이 있어 보였으나 7월 3일, 7월의 첫 시리즈였던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대결을 루징 시리즈로 마감하며 '''최하위로 추락했다.''' 이어 벌어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도 접전 끝에 연패하면서 최하위가 점점 굳어지고 있다. 그나마 7월 7일 게임은 무실점으로 이겼지만 그러고도 5위 야쿠르트와는 반 게임 차이로 꼴찌. 급기야 7월 8일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는 후지나미 신타로가 초반부터 대량 실점한 데에 분노하여 8이닝 동안 무려 161구를 던지게 하는 '''징벌성 투구'''까지 시전했다. 후지나미는 8실점(6자책) 패전하면서 동시에 '''자력으론 리그 우승이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그보다 앞서 5월 17일 도리타니의 낙구로 경기를 망치자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관중들과 TV카메라가 지켜보고 있는데 괜히 옆에 있는 의자를 걷어차면서 화풀이를 하는 추태를 보이는 등 이제 겨우 감독생활 반년 정도 밖에 안 한 감독이 30년 전 수준의 사고방식을 가진 구닥다리 감독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쯤되면 슬슬 주주총회에서 지금 한신의 끔찍한 상황에 대한 성토가 당연히(??) 나올 듯 하다.[17]
결국 감독첫해 리그4위를 기록. 꼴지는 면했지만 처음 부임인데다가 프랜차이즈급 스타[18] 였으니까 수뇌부가 많이 이해해주고 기회를 더 주려는 모습이다. 다음 시즌 이후 명예회복이 절실하다.
4.2. 2017시즌
부임 2년차인 2017년은 시즌전 오릭스의 주장이자 정신적 지주를 FA로 영입하며 공격 및 수비력를 보강하였다. 하지만 제 아무리 운동신경이 좋고 빠른발을 가졌다 하더라도 30대 중반이라는 적지않은 나이때문에 예전같지 않을수도있어 우려를 낳고있다.
3월 31일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친정 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원정 개막전에서는 양 팀 모두 난타전을 벌인끝에 승리하였으나, 그 후 3연패에 빠져 올시즌도 험난한 시즌이 예상된다.
4월 4일 야쿠르트와의 홈개막전에서는 후지나미 신타로가 던진 공이 하타케야마 가즈히로의 머리를 강타해 벤치 클리어링이 났는데 이 과정에서 블라디미르 발렌틴과 야노 아키히로 배터리코치간에 몸싸움을 목격해 발렌틴에게 달려들자 주위의 제지로 또하나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4월 내내 요미우리와 더불어 호시탐탐 선두자리를 위협하며 부단한 노력을 한끝에 5월 5일부터 시작된 히로시마와의 홈3연전을 스윕하며 선두로 올라섰다! 그러나 5월 중순들어 연패를 하고 히로시마가 다시 상승 분위기를 타자 선두자리를 빼앗겼다. 그 이후로도 히로시마가 사기유닛급 성적을 내는지라 올해도 리그 우승은 어려울 듯 하다. 한신답게(...) 1위 탈환은 커녕 3위로 내려앉지 않을까 의심스러운 순간도 적잖이 있었으나, 그래도 3위권의 DeNA 및 요미우리와 4~5게임 정도의 차이를 두고 2위 자리를 지켰다.
결국 히로시마와의 큰 승차를 좁히지 못하고 홈에서 히로시마의 2연패를 지켜보게 되었으나, 9월 28일 DeNA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2년만에 클라이막스 시리즈 진출을 확정지었고, 30일에 요미우리를 꺾으며 2위를 확정지었다. 정규시즌 우승은 실패했으나 이 정도면 그나마 작년의 오명을 씻는 정도는 되었다 할 수 있겠지만...클라이막스 시리즈에서 3위 DeNA 상대로 1승 2패를 거두며 파이널 스테이지 진출에 실패했다. 다음 시즌 이후의 성적이 관건이라 하겠다.
시즌종료 후에는, 당초 3년 계약으로 알려졌던 계약이 2년 계약이었고, 2020년까지 새로 3년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4.3. 2018시즌
감독 지휘봉을 잡은지 3년째이건만,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 아니 오히려 퇴보했다. 작년에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유망주들은 퇴보해서 도로 벤치만 채우고 있고 중심 타선은 40이 넘은 후쿠도메와 36인 이토이가 차지하고 있다. 더 절망적인 건 30대 후반의 두 베테랑과 나머지 타자들의 격차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는 점. 결국 12개구단 최악의 타선으로 히로시마를 제외한 나머지 센트럴리그 4팀과 함께 승률 5할 밑에서 서로 치고 받는 이전투구를 하면서 순위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이미 6월달에 열린 주총에서 주주들의 시선은 싸늘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시즌 끝나고 과연 이 성적으로 유임이 가능할지 아닐지가 관건이라 하겠다. 아마도 그래도 간신히 A클래스라도 들으면 본인은 간신히 유임이 될 수 있지만 본인의 요청으로 수석 겸 타격코치를 맡은 카타오카 아츠시[19] 가 대신 책임을 뒤집어 쓰고 경질 될 가능성이 있고, 만약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도 실패하면 아마도 사이좋게 짐을 싸게 될 듯 하다.
결국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 한신 프랜차이즈가 팀을 맡으면 성적이 망한다는 속설만을 증명하며 후반기 들어 실속을 거듭한 끝에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고, 그것도 모자라 '''17년만의 리그 최하위'''라는 끔찍한 결과를 기록하고 말았다. 아직 계약기간이 2년 남았다지만 이런 결과로는 시즌 후 해임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후 후속 기사들에서 나온 바로는 한신 구단 측에서 가네모토를 교체할 의사가 없다고 한다. 심지어 한신 팬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는 코칭 스탭 역시 한명의 교체도 없이 그대로 간다는 방침이라고. 당연히 한신 팬들의 반응은 안좋은 의미로 난리가 났다.
그러나 10월 11일에 한신이 가네모토의 사임을 발표했고(#), 주니치와의 마지막 경기를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20] 후임은 야노 아키히로 2군 감독.
4.4. 감독 성적
5. 기타
자기 몸관리에 철저하고 연속 출장 등의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만, 술과 담배에 환장한 사람이기도 하다. 덕아웃에서 담배 피우다가 카메라에 제대로 잡히질 않나, '올해 담배를 끊어 줬으면 하는 사람 No.1'으로 꼽히질 않나. 자기 라커룸에 소주를 놓고 산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의 눈에 낯익다는 걸 보면 진로 소주다. 박동희 기자의 리포트 어째 쿠도 키미야스와 비슷하다고 할까?
2013년 8월에 취임 전 마이니치 방송의 <마법의 레스토랑 R>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하기 쉬운 건 히로시마 감독이지만 하는 보람이 있는 건 한신 감독이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16년 1월 18일 그 프로그램에서는 한신 감독이 된 카네모토를 응원하는 특집을 편성했는데, 이 날 방송은 그의 식성에 대해 조명하는 특집이었다(...). 방송에 나온 집 링크
[1] 박동희와 재일한인 야구계의 거목인 한재우 옹과의 인터뷰에서 밝혀진 이름이다. 그 이전에는 '토모아키'의 한자 독음을 그대로 따 김지헌으로 통용됐었다. [2] 여기에 요코하마에는 리젠트 머리를 한 '하마의 반쵸' 미우라 다이스케가 있다.[3] 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고시엔)에 단골로 출전하고 여러 차례 우승도 차지한 히로시마 지역의 야구 명문교. 노무라 유스케, 고바야시 세이지 등 많은 프로 선수를 배출했다.[4] 1년 선배로 사사키 카즈히로, 야노 아키히로, 동기로 사이토 타카시, 후배로 카도쿠라 켄 등이 있는 야구 명문이다. 참고로 사사키와 야노는 카네모토와 동갑이지만 카네모토가 고교 야구부 감독의 착오로(...) 1년 재수를 하는 바람에 선배가 되었다. 사이토는 빠른 생일.[5] 패대기 송구를 자주 해 팀 내에서 별명이 '두더지 잡기'였다고 한다.[6] 여담으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시절에는 선동열 상대로 엄청나게 강했다. 아니, 히로시마 타자들이 선동열에게 무척 강했다. [7] 가네모토는 후배들을 위해 FA 잔류로 히로시마에 남는 길을 선택하려고 했지만, 금전적인 여유가 없는 히로시마는 전통적으로 FA 선언을 한 선수들을 잡지 않는 주의였다. [8] 범위를 해외 리그까지 넓히면 안타 수로는 넘사벽인 스즈키 이치로가 있고 마쓰이 히데키, 마쓰이 가즈오도 미일 통산 안타로는 카네모토를 살짝 앞선다. 홈런은 역시 마쓰이 히데키가 미일통산 500홈런을 넘겼고 카네모토의 바로 뒤에 불과 13년간 NPB에서만 464홈런을 깐 용병 터피 로즈가 있다. 키요하라 카즈히로는 통산 홈런 수가 카네모토보다 많지만 '헤이세이 시대'로만 한정하면 434홈런을 쳤다.[9] 참고로 일본프로야구 단일시즌 볼넷 탑 10 기록 중 9개는 오 사다하루의 것인데, 그 사이에 끼어든 선수는 카네모토의 카프 후배인 마루 요시히로(공동 4위, 130볼넷 - 2017년)와 카네모토 뿐이다.[10] 2003~05 3년 연속 센트럴리그 최다 볼넷을 기록했고, 통산 1308개의 볼넷은 오 사다하루와 오치아이 히로미츠에 이은 일본프로야구 역대 3위의 기록이다.[11] 현역 중에는 황재균의 618경기. 2016 시즌 도중 부상으로 기록이 끊어졌다.[12] 1977년생으로 나름 장타력을 가진 외야수였으나 112안타, 14홈런을 기록한 2001년과 71안타, 9홈런을 기록한 2003년을 제외하면 주전으로 나온 해는 없었다. 원래는 오릭스였고 한신으로 이적한 후에는 주로 대타로 나왔다. 2008년에 땜빵 주전을 먹으면서 100경기 이상 나오기도 했지만 일반적인 포지션은 대타 요원. 2011년까지 뛰고 은퇴해서 닭꼬치집을 열었다.[13] 당시 김기태는 이승엽을 따라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들어와 이승엽의 보조 타격코치를 하다 2010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2군에서 코치를 하고 있었다.[14] 동일본 대지진으로 개막일이 4월 중순으로 밀렸다.[15] 공교롭게도 하술하듯 카네모토가 감독을 맡던 시절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고 기량이 크게 저하했음에도 연속출장 기록 때문에 계속해서 출장하며 팀 전력의 구멍이 되는 수모를 반복했다...가 2020 시즌부터는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적했다.[16] 하지만 이 소식이 나오기 이전 9월 23일에는 한신의 나카무라 카츠히로 GM이 호텔에서 급사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17] 일본기업의 주주총회는 회계연도의 마지막 분기인 1/4분기의 결산이 끝나고 시기적으로 교류전이 끝날 무렵에 행해진다. 일부러 교류전 종료 시점에 맞춰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교류전 종료 시점이 우연찮게 일본 기업들의 주주총회 시즌과 맞물려 들어간 것. 주주총회가 팀 사정이 더 나빠지기 전에 넘어간 덕분에 일단 2016년은 주주들의 성토를 피해갔다. 아직까지는 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스타출신에 겨우 감독생활 1년차인 초보 감독이고 2016년은 팀에서 성적보다는 리빌딩에 집중한다는 식의 분위기를 내비쳤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는 데에 주주들도 '''일단''' 암묵적으로 동의를 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큰 비난 없이 넘어갔지만 만약 다음 해 주주총회 때까지 변화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 그 때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8] 히로시마에서 데뷔, 2003시즌 앞두고 한신으로 이적.[19] 2003년 우승 당시 카네모토와 함께 한신 맹호타선을 이끈 멤버였다. 하지만 지도자로써는 카네모토보다도 욕을 몇배로 처먹는 순페이급 금지어 취급을 받는데 실제로 그가 손을 대는 타자들마다 죽을 쑤고 있고 덩달아 팀 성적도 내리막길이라서 욕이 안 나올수가 없다. 시즌 중반에 카타오카의 코칭 스타일에 대해 기사가 나온적이 있는데 장타력이 있건 없건 타자의 스타일이 어떻건간에 일단 2루수쪽 땅볼을 치게 하는 훈련을 하게 한다고 한다(...) 한신 관련 뉴스/동영상 댓글엔 거의 카타오카욕이 태반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 비난받고 있다.[20] 이 경기 이후 팬 폭언, 폭행 논란도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