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수레깅 조릭 암살 사건
1. 개요
1998년 10월 2일에 몽골의 민주운동가 산자수레깅 조릭(1962. 4. 20~1998. 10. 2)이 의문의 암살을 당한 사건이다. 처음엔 이 사건의 범인으로 그의 아내가 지목되었으나 혐의가 없어서 풀려났다. 이후 3인조 암살범이 2016년에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이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범행을 저질렀는지 또 왜 산자수레깅 조릭을 암살했는지 밝혀지지 않은 사건이다. 범인은 잡혔으나 배후 세력과 동기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다는 점에서 1949년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백범 김구 암살사건과 유사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당시 야당이었던 몽골인민당의 소행이란 것이나 이 역시 확고부동의 물증이 없는 상태이다.
2. 산자수레깅 조릭은 누구인가?
산자수레깅 조릭은 1962년 4월 20일에 태어난 인물로 몽골의 민주운동가이자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러시아인이었는데 지리학자이자 민족지학자였던 A.D 시무코프(A. D. Simukov)였다. 시무코프는 표트르 코즐로프(Pyotr Kozlov)가 지휘하는 몽골 탐험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몽골에 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몽골의 독재자 허를러깅 처이발상이 주도한 대숙청의 희생양이 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아내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조릭의 어머니 도르지팔람(Dorjpalam)이었다. 즉, 조릭의 어머니는 유복녀였던 셈이다.
도르지팔람은 몽골의 유명한 여배우가 되었고 이 때 조릭의 아버지이자 몽골국립대학교 교수 산자수렌(Sanjaasüren)과 결혼하였다. 산자수렌은 부리야트족 출신이었다. 두 사람은 3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조릭은 이 중 둘째였다. 1970년부터 조릭은 울란바토르에 위치한 시립 러시아어 학교에 입학해 러시아어를 배웠고 1980~1985년까지 소련으로 유학해 모스크바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소련 유학을 끝낸 뒤엔 다시 몽골로 돌아와 울란바토르에서 몽골혁명청년단 강사로서 1년 동안 일했으며 1986년에 몽골 국립대학교의 체계적인 공산주의 교수가 되었다. 또 그는 체스에도 일가견이 있어 뛰어난 체스 기사가 되었고 이후 몽골 체스 연맹 회장으로도 취임했다.
그가 활동하던 시절 몽골은 허를러깅 처이발상 - 욤자깅 체뎅발 - 잠빈 바트뭉흐로 이어지는 공산주의 독재정권 치하에 있었고 동구권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물결은 몽골에까지 흘러들어왔고 1990년 몽골 민주 혁명으로 이어졌다. 산자수레깅 조릭 역시 이 혁명에 동참해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후에 국회의원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3. 암살
이 사건은 1998년 10월 2일에 발생했다. 그 날 2명의 괴한이 산자수레깅 조릭이 사는 아파트에 침입하여 애인이었던 불간(Bulgan)을 결박한 다음 산자수레깅 조릭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조릭이 집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점프하여 덮친 다음 칼로 무려 16번을 찔러 살해했다. 그 중 심장에 찔린 3개의 자창이 치명상이 되어 결국 산자수레깅 조릭은 36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상하게 이 2인조 암살범들은 조릭의 집에 있던 냉장고에서 식초 1병과 간장 1병을 훔쳐서 달아났다고 한다. 다른 귀중품들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오직 냉장고 안에 있던 식초와 간장만 훔쳐갔다는 것이다.
산자수레깅 조릭이 살해당하고 나흘이 지나서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에 그의 빈소가 차려졌고 많은 문상객들이 촛불을 들고 조문을 왔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정부청사로 옮겨져 안치되었으며 10월 7일에 매장되었다. 산자수레깅 조릭의 암살은 당시 몽골 정부에 크나큰 혼란을 주었다고 한다. 울란바토르 시장이었던 잔라빈 나란차츠랄트(Janlavyn Narantsatsralt)가 1998년 12월에 신임 총리로 취임하기 전까지 2달 동안 몽골 정부의 위기가 지속되었다.
산자수레깅 조릭을 암살한 2인조 암살범의 정체는 18년이 지난 2016년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산자수레깅 조릭이 차기 총리로 취임할 것이 임박해오고 있다는 내부 사정을 알고 있던 자가 그를 저지하기 위해 벌인 짓거리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또 조릭의 아내 불간이 용의자로 지목되어 경찰에 잠시 구금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4. 재판
2016년 12월에 지방 법원은 1998년 10월 2일에 발생했던 산자수레깅 조릭 암살 사건에 대해 Ts.암갈란바타르(Ts.Amgalanbaatar), D.소드놈다르자(D.Sodnomdarjaa), T.침기(T.Chimgee) 등 3인을 유죄 판결했다. 재판부는 6주 이상의 공판을 거친 후 유죄 평결을 내렸다. 피고인들은 각각 24~2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2017년 3월에 울란바토르의 형사 재판소는 3명의 피고인의 항소를 기각했는데 재소자 D.소드놈다르자와 Ts.암갈란바타르에 의해 사건과 사실에 관한 조사 기간 동안에 입수된 증거와 거기에 더해 소드놈다르자의 필적 증거가 목격자들의 증언들과 일치하는 점, 사건 현장에 있는 물증들, 범죄 현장 조사 동안에 남겨진 기록들, 게다가 산자수레깅 조릭의 시신에 남겨진 상처 흔적에 관한 전문가들의 의견 등을 볼 때에 이들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재판이 비공개로 치러졌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당시 몽골 부총리 첸딘 냐마도르지(Tsendiin Nyamdorj)를 비롯해 몇몇 다른 정치인들과 산자수레깅 조릭의 가족들이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2017년 12월에 몽골의 내각은 14,926페이지로 구성된 이 살인사건 파일의 대부분을 기밀 해제했으나 74페이지 분량의 자료만은 기밀을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기밀 해제된 문서는 몽골의 정보 대행기관에서 몽골 대법원 형사 사건 자료실로 이송되었다.
이렇게 범인은 잡혀서 현재 복역 중이지만 이들이 무엇 때문에 산자수레깅 조릭을 암살한 것인지 그 동기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으며 또 이들의 배후 세력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거기다 재판까지 비공개로 진행되었기에 이 사건을 서둘러 불문에 부치려는 듯한 인상을 보여주었다. 범인은 잡혔으나 그 동기와 배후 세력이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백범 김구 암살사건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