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를러깅 처이발상
1. 개요
몽골어 : ᠬᠣᠷᠯᠤᠠ ᠶᠢᠨ ᠴᠣᠶᠢᠪᠠᠯᠰᠠᠩ[1] / Хорлоогийн Чойбалсан[2] (Khorloogiin Choibalsan)[3]
1895년 02월 08일 - 1952년 01월 26일
몽골 인민 공화국의 독재자 겸 학살자. 1929년 1월 24일부터 1930년 4월 27일까지 몽골 최고회의의 주석을 지냈고, 이어서 1939년 3월 24일부터 1952년 1월 26일 죽을 때까지 몽골의 총리를 지냈다.
처이발상은 20세기 담딘 수흐바타르 등과 함께 몽골 독립을 쟁취하고, 이후 공산화를 주도하면서 근대화를 이룬 지도자라는 평가와 집권 기간 전무후무한 티베트 불교 말살 정책과 대량 숙청, 학살을 주도한 독재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덕분에 '''몽골의 스탈린'''이라고도 불렸다. 실제 둘은 말년을 제외하면 관계가 돈독했었다.
2. 생애
2.1. 권력을 쥐기까지
처이발상은 1895년 동몽골 지역에서 미혼모 어머니(이름은 허를러)의 네 아이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때 이름은 ‘두가르(Dugar)’였으나 13세 때 티베트 불교 수도승으로 출가하면서 ‘처이발상’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즉 ‘허를러깅 처이발상’이란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에 법명이 붙여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5년 뒤에 사원에서 도망쳐(이유는 불명) 수도 후레, 현재는 울란바토르라고 불리는 곳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그러다 그를 가엽게 여긴 부랴트인 러시아어 선생님의 도움으로 이르쿠츠크에서 1914년부터-1918년까지 러시아어 전문학교에서 통역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1914년 러시아로 유학했을 때 러시아 혁명가들과 접촉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경도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19년 쉬수정이 외몽골 출병을 단행해 몽골의 독립을 취소하자 귀국 후 중국에 대항하여 독립투쟁을 하는 몽골인민당 초기 멤버로 참여하였다. 1921년 몽골 내에 주둔하던 중국군과 러시아 반혁명 잔당인 운게른 남작의 군대를 수도에서 모두 몰아내고 복드 칸을 복위, 독립 선언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게 처이발상은 혁명가 담딘 수흐바타르의 동료로 몽골의 독립 운동에 참여해 몽골 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권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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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독립영웅 담딘 수흐바타르(左)와 처이발상(右).
처이발상은 소련의 지원을 얻어내고 독립군을 지휘한 2살 위인 수흐바타르 장군을 스승처럼 따랐다. 그래서인지 수흐바타르도 처이발상을 아꼈고, 1922년 혁명정부의 급격한 풍습 개혁 정책에 반대하는 군중반란이 일어나 국방부 차관이었던 처이발상이 처형을 당할 처지였는데 수흐바타르가 그를 보호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수흐바타르는 만 30살의 나이인 1923년에 결핵으로 사망하고, 이후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복드 칸 역시 1924년 사망한다.
2.2. 독재의 시작
복드 칸 사망 이후 1924년 공화국이 된 몽골을 보며[4] , 1929년 소련 정부는 토지몰수와 불교사원의 박해 등을 포함하는 공산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할 지도자로 처이발상을 선택하게 되고, 실제 처이발상은 이후 몽골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때문인지 처이발상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추종자로 유명했으며, 정치 행보도 비슷해 "몽골의 스탈린"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가 통치하던 중 몽골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37~1939년 행해진 대규모 숙청과 티베트 불교 말살을 들 수 있다.
1936년, 당시까지 몽골의 국교와 같았던 티베트 불교 사원을 없애라는 스탈린의 지시를 거부한 펠치딘 겐덴(Пэлжидийн Гэндэн) 총리 일파를 기습 체포하고, 모스크바로 압송시키면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1937년 9월 10일을 기점으로 65명의 고위직을 전격 체포한 이후 18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렇게 1936년부터 39년까지 대숙청(Их Хэлмэгдүүлэлт)을 벌여 겐덴 전 총리와 아난딘 아므르(Анандын Амар) 전 총리 등 정치인과 불교 신자 및 승려들을 처형했다. 혁명 원로까지 무자비하게 잡아들인 이 대숙청에서 당과 정부의 수뇌부 인사 중 25명이 처형되었으며, 군 지휘부 중 187명이, 중앙위원회 위원 51명 중 36명이 처형되었다. 거기에다가 굴라크까지 건설하여 사람을 잡아넣었다. 그야말로 동시대 '''소련 대숙청의 마이너 카피판'''.
승려의 경우 세 부류로 나뉘어 지식인층은 총살, 비지식인층은 시베리아 수용소, 젊은이들은 재교화 후 귀가시켰는데, 다수를 차지하는 비지식인층의 경우 당장의 교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여 시베리아 수용소 10~20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혹독한 수용소 환경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이로 인해 총 10만에 달하는 승려들이 입적했다. 또한 대부분의 사원들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예술적 가치가 있는 불상과 조형물은 녹여서 소련의 무기 공장으로 보내졌다. 다만 일부 사원은 군사용으로 쓰여서 파괴되지는 않았다. 처이발상은 한 때 불교 신자였으며 그의 이름은 불교에서 내려준 법명이니 참 웃지못할 일이었다. 스탈린도 신학생 출신으로 정교회 때려잡는데 열심이었으니 이 점도 비슷하다. 췌언하자면 스탈린은 사람들 감시하고 가두고 벌 주는걸 신학교에서 당하면서 배웠다. 차이점이라면 스탈린은 나중에 정교회 탄압을 멈추고 형식적이나마 정교회에 우호적인 정책으로 돌아섰지만 처이발상은 티베트 불교와의 악연을 죽을 때까지 이어나갔다는 것.
그렇게 18,000명의 지식인층 승려가 처형당했으며, 몽골 각지에 있던 746개 사원이 파괴되고 그곳의 모든 승려들이 쫓겨났다. 몽골 티베트 불교의 본산격인 간단 사원도 1938년부터 1944년까지 폐쇄되었다고 한다. 또 수천 명의 반혁명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다수의 부랴트족, 카자흐족들 또한 ’혁명의 원수’라는 이름으로 처형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죽은 사람의 수는 3만~3만 5천 명[5] 정도로 추산되는데, 당시 몽골의 인구가 80~90만여 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 인구의 4%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몽골인과 튀르크인의 전통 머리모양인 알타이식 변발이 외몽골 내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도 처이발상 정권 때의 일이다. 물론 복드 칸국 시절에도 중화민국, 러시아 제국, 소련으로부터 서구화된 문화가 들어옴으로써 외몽골인들이 변발을 자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변발이 자취를 감춘 것은 처이발상의 몽골 문화 탄압에 의한 것이었다. 변발을 계속 유지하려 한 외몽골인들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붙잡혀 강제로 변발이 잘렸으며, 상술한 부랴트족과 카자흐족 또한 외몽골의 주류 민족인 할하족으로 위장하여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변발을 자르기도 했다. 외몽골 내 어웡키족의 퉁구스식 변발 또한 이러한 변발 문화 탄압의 예외가 되지 못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2.3. 근대화
몽골은 그의 치하에서 상당히 근대화되어 포장도로가 국토 곳곳에 깔리고 통신선이 개통되었고, 광공업이 발전했으며, 의무 교육 도입으로 문맹률도 낮아졌다. 몽골 동부에 위치한 인구 4만여 명 규모의 몽골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바인 투멘(Баян Түмэн)은 그의 이름을 따서 처이발상이라고 개칭되었고 지금도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몽골 민족주의자였고, 몽골 인민 공화국이 소련에 흡수되는 것을 경계하였다.[6] 또한 내몽골과의 통일도 꿈꿨다.[7] 그런데 몽골 민족주의자임에도 근대화 과정에서 몽골 문자를 버리고 라틴 문자를 채택했다가 이후 러시아어에서 사용하는 키릴 문자로 갈아치웠다. 중국, 라오스, 북한 등 여타 공산주의 국가에서 공산화 이후에 문자 개혁을 한 예는 있어도 자신의 전통 문자를 폐지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더 특이한 사항.[8] 이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는데, 우선 몽골 민족주의자나 어학자 입장에선 천하의 개쌍놈 소리를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옹호론자들은 몽골 전통 문자가 세로쓰기인 데다가 좌서로 읽고,[9] 아랍 문자처럼 어두형, 어중형, 어미형, 단독형으로 나뉘고 정서법도 옛날 그대로라 이걸 현대에 적용하기가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즉 문맹률 증가의 한 원인이라 아예 갈아치웠다는 주장을 한다. 설사 가로쓰기로 바꾼다 해도 전산화가 문제. 그래서인지 현재도 몽골은 키릴 문자를 쓰고 있다.[10][11]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엔 일본 제국의 정복 전쟁에도 굴하지 않고, 게오르기 주코프와 함께 할힌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일본에게 선전포고한 뒤에 몽골군에게 만리장성 부분까지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몽골 민족주의자인 그는 몽골이 2차대전에서 소련을 지원해준 대가로 내몽골을 기대하였고 내몽골에서의 부추킴을 통해 내몽골에서도 일시적으로 몽골 인민 공화국과의 통합론이 우세해졌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그것을 지지해주지 않자 그는 스탈린에게 점점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는 점점 악화되어 나중엔 스탈린의 생일 축하행사에도 참가하지 않았다.
2.4. 사망
1952년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는데, 스탈린은 그가 죽자 크렘린 의사 음모 사건을 일으켜 처이발상을 치료한 주치의들을 대상으로 암살 혐의를 씌우고 고문한 후 처형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이런 처이발상의 병사는 의심많은 스탈린이 자신의 주치의들에게도 의심을 가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그들 역시 숙청된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인지 얼마 안가 1953년 스탈린도 사망한다.
악행을 많이 저지른 인물이지만 의외라면 의외로 현대 몽골인들 사이에선 호불호가 갈린다.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사람 많이 죽였는데 괜찮냐고 물어보면 "칭기즈 칸도 사람 많이 죽였어요."라고 한다고... 독재자가 되기 전엔 러시아 백군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나 중국 군벌을 쫓아낸 건 사실이라 지금의 몽골을 유지시켰다고 보는 사람도 있는듯. 의외로 흔한 독재자가 된 영웅 루트를 탄 사람인 셈. 물론 진짜 몽골 독립의 주역은 수흐바타르지만 그 역시 함께 한 동지인 것은 사실이다.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들은 위에서 거론한 대로 몽골의 종교 문화 파괴와 자국민 학살을 들어 비판한다. 특히 샤머니즘이나 티베트 불교를 독실하게 믿는 몽골인들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이들은 한 가지 음모론을 굳게 믿고 있는데 그 음모론이란 바로 처이발상이 몽골 독립 영웅 담딘 수흐바타르를 독살했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몽골인들 중 처이발상이 담딘 수흐바타르를 독살했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다만 처이발상이 진짜로 담딘 수흐바타르를 살해했는지는 불명확하며, 수흐바타르의 공식적인 사인은 결핵으로 인한 병사다.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을 떠나서, 처이발상에 대한 동정적인 시각도 어느 정도 존재한다. 처이발상이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도 스탈린의 숙청을 피할 수 있었겠느냐라는 시각이다. 실제로 처이발상이 권력을 잡기 전 스탈린에게 미움을 사거나 해서 몽소 관계를 망친다는 이유로 숙청당한 초기 몽골 인민 공화국의 정치인은 한 둘이 아니다.
칭기즈 칸을 무시하고, 몽골 문자를 버렸다는 이유로 몽골 민족주의자에게 욕을 먹지만, 정작 자신은 몽골의 소련 편입 반대, 외몽골 통일 시도 등 죽을때까지 몽골 민족주의자였던 것은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당시 국제정세상 몽골은 중국과 러시아라는 두 나라에 치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몽골의 국체를 어떻게든 보존에 성공했고 그 결과 지금의 민주화된 독립국가 몽골이 있는 셈이니 일방적으로 까이는 위치는 아니다.
이 사람이 죽고 나서 욤자깅 체뎅발이 그의 뒤를 이어 몽골의 지도자가 되어 공산당 독재정치를 펼쳤다. 이 사람도 억압적인 독재자이긴 했지만, 처이발상처럼 극단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3. 허를러깅이 성씨를 말소시켰다?
몽골 인들이 성씨를 쓰다가 처이발상 혹은 소련이 전통문화 파괴를 목적으로 폐지 및 금지시켜서 현재 몽골 인들이 성씨를 쓰지 않는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12] 몽골에는 부족을 뜻하는 오복(Obog)이라는 것이 있으며(성씨로 알려진 보르지긴이 사실 오복의 하나다) 이것의 사용을 막긴 했지만 그 시기는 허를러깅 집권 이전인 1925년이었다. 물론 공산정권이 계급사회의 잔재라는 이유로 사용을 막은 것은 맞다.
오복은 분명히 성(姓)과는 유사한 점이 있으나 공공연히 쓰지도 않았다. 청나라 시절부터 몽골인들 이름에는 오복을 찾아볼 수 없었다.[13] 즉, '''애초에 폐지할 성씨 같은 게 없었다'''. 당연히 근친혼을 못 막아 막장이 되었다는 소리도 헛소문.
굳이 몽골의 성씨 문제와 관련하여 몽골 인민 공화국을 비판할 부분이 있다면 오복을 폐지하면서 정작 오복을 대체할 성씨 개념을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하는 게 옳을 것이다. 몽골에서 성씨 폐지 때문에 근친혼을 못 막아 막장이 되었다는 것 자체는 헛소문이지만, 성씨나 그에 준하는 다른 개념[14] 이 없는 사회의 경우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사회에 비해 근친혼 방지가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15]
[1] 몽골 문자 표기.[2] 키릴 문자 표기.[3] 이를 러시아식으로 그대로 읽은 호를로긴 초이발산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4] 물론 이전에도 형식상일 뿐 칸의 실권은 없었다. [5] 일부에서는 사망자를 '''10만 명'''까지 잡기도 한다. 참고로 당대 소련에서는 '''많아도''' 200만 명 정도가 죽은 걸로 추산되는데 당시 소련 인구가 2억이었음을 감안하면 비율적으로는 몽골이 더 엄청난 것.[6] 투바가 소련에 흡수된 후, 투바인들이 몽골에 와서 몽골도 같이 소련에 들어가자는 말을 했다가 처이발상에게 뺨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후임자인 체뎅발도 비슷한 소리를 했다가 처이발상에게 엄청 갈굼 받았다고 한다.[7] 다만 정말로 내몽골과의 통일이 성사되었다면 몽골어의 몽골 문자 표기가 내몽골에서도 명맥이 끊어졌을 것이다.[8] 물론 중앙아시아처럼 소련에 의해 문자를 갈아치운 경우는 존재했지만, 이전에 썼던 아랍 문자도 따지고 보면 외래문자였다. 몰도바는 라틴 문자에서 키릴 문자로 문자를 바꾸었지만 몰도바의 루마니아어는 아주 예전에 키릴 문자를 썼다는 명분이 있었고, 전통 문자를 가졌던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는 스탈린 시절에도 자신들의 문자를 전통 문자라는 이유로 잘 썼고 전통적으로 라틴 문자를 사용했던 발트 3국 역시 소련의 지배 기간에도 라틴 문자를 계속 유지했다. 애초에 소련은 소수민족 문자교육을 장려했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키릴문자를 쓴다는 실용적 이유로 키릴 문자가 밀어낸 것이다.[9] 세로쓰기 문화가 있던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들은 우종서다.[10] 1990년대 민주화 이후 몽골 민족주의자들과 어학자, 역사학자들이 다시 몽골 문자 표기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현실적 어려움 때문인지 호응은 적은 편이다. 그래도 한국에서 한자도 가르치듯이 몽골 초등학교 교육 과정에서는 몽골 전통 문자 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한글처럼 표음문자라서 배우기 어려운 것은 아니고 대부분 몽골인들은 몽골 문자도 읽을 줄 안다. 2024년까지 몽골 문자 재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11] 참고로 중국 영토 내에 있는 내몽골 지역에서는 전통 몽골 문자를 사용하며, 몽골식 키릴 문자는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내몽골과 외몽골의 사이가 안 좋은 것과 별개로 양쪽의 교류 자체는 활발해서 내몽골인들이 일부러 외몽골식 키릴 문자 몽골어를 배우는 경우도 있다. 사실 키릴 알파벳 몇십개는 맘 먹고 외우면 하루이틀에 다 외우고 그 다음은 언어는 같기 때문에 내몽골인도 금방 적응할 수 있다.[12] 이 문서도 그런 서술이 있었다.[13] 오복이 폐지되기 전에 죽은 담딘 수흐바타르도 그냥 이름에 부칭이 전부고 내몽골 출신인 데므치그돈로브도 그 유명한 칭기즈 칸의 직계후손인 황금씨족임에도 앞에 보르지긴을 붙이지 않았다.[14] 아랍식 풀네임에서 본인의 이름 뒤에 아버지, 할어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의 이름 순으로 조상들의 이름들이 붙는 게 대표적이다.[15] 실제로 전근대 동아시아(정확히는 유교가 보편화된 이후)에서 유목민 문화권은 정주민 문화권에 비해 근친혼에 관대한 편이었다. 청나라 말기에 청나라 황실 직계 혈통이 단절된 이유들 중 하나로 청나라 황실에서 일어난 근친혼이 제기될 정도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