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무

 


李從茂
1360년 ~ 1425년
1. 개요
2. 생애
3. 기타


1. 개요


조선시대무신. 본관은 장수(長水).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고 그 공적으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들어가 있다.

2. 생애


고려 공민왕 때 태어났고, 기록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한다. 우왕 때 벼슬을 하여, 창왕, 공양왕까지 고려 마지막 네 명의 왕을 경험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도 태조, 정종, 태종, 세종에 걸쳐 조선 초기 4대왕을 모셨다.[1]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이방간의 군사를 전멸시켰다.
1419년 세종대에 태종의 명을 받아 김종서 등과 대마도 정벌에 나서게 되는데, 패전이나 무승부에 가깝다는 견해도 있으나 조선군은 전투력을 거의 완전히 보존하면서 왜구 세력 약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승리라고 볼 수 있다. 1만 7천을 끌고가서 180명 죽은 걸 일시적으로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볼 수는 있어도 패배한 원정이라고 하는데는 비약이 심하다.[2] 100여 명을 죽이고, 민가 2천여 채를 불사르고, 포로로 잡혀있던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구출한다. 남은 왜구들은 모두 섬 깊숙한 곳으로 도주한다. 사실 이때 동원한 병력이 많기는 했다. 공식적으로 200척이 넘는 배에, 1만 7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간 것이다.

이종무 등이 배를 두지포(豆知浦)에 머무르게 하고 날마다 편장(褊將)을 보내어 육지에 내려 수색하여 잡고, 다시 그 가옥 68호와 배 15척을 불사르고, 도적 9급(級)을 베고, 중국인 남녀 15명과 본국인 8명을 얻었다. 적이 밤낮으로 우리 군사 막기를 생각하므로, 26일에 종무가 전진하여, 이로군(尼老郡)에 이르러 3군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육지에 내려, 한 번 싸우고자 좌우 군사들을 독려하여 먼저 하륙케 하니, 좌군 절제사 박실(朴實)이 적과 서로 만났다. 적이 험한 곳에 모여 복병하고 기다렸다가, 실이 군사를 거느리고 높은 곳에 올라 싸우려 할 그 순간에, 졸지에 복병이 일어나 앞으로 돌격해 와서, 우리 군사가 패전하여, 편장 박홍신(朴弘信)·박무양(朴茂陽)·김해(金該)·김희(金熹)들이 전사하였으므로, 실이 군사를 거두어 다시 배에 오르니, 적이 추격하여 왔다. 우리 군사 중에 전사하거나 언덕에서 떨어져 죽은 자가 백 수십 인이나 되었다. 우군 절제사 이순몽(李順蒙)과 병마사 김효성(金孝誠)들이 또한 적을 만나 힘껏 싸워 막으니, 적이 그제야 물러갔고, 중군은 마침내 하륙하지 아니하였다. 도도웅와는 우리 군사가 오래 머물까 두려워서 글을 받들고 군사를 물려 수호(修好)하기를 빌면서 말하기를,
"7월 사이에는 항상 풍파의 변이 있으니, 오래 머무름이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로군의 접전에서 박실이 많은 군사를 잃었으나 마침내 적이 물러나 수호를 빌다

문제는 버티고만 있어도 이기는 국면을 괜히 대마도 깊숙히 들어갔다가 백 수십여 명의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박실의 책임이 되었고, 이종무는 이후에도 대마도 인근 왜구 토벌로 불려 다녔고, 태종의 칭찬도 들었다. 이 일로 이종무는 정승후보군인 찬성 직까지 승진한다.
하지만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썼던 박실을 심문하니, 박실이 이 책임이 모두 이종무 때문이다라고 고발한 것이다.

의금부 제조 변계량 등이 수강궁에 가서 아뢰기를,
"어제 명령을 듣고 박실의 패군한 죄를 국문하오니, 실이 공술하기를, ‘이종무가 처음에는 삼군 삼절제사에게 명령하여, 다 육지에 내려서 싸우라고 하더니, 뒤에 명령을 변경하여, 삼군 절제사 각 한 사람만이 육지에 내리라고 하여서, 실이 제비를 뽑게 되어서 내렸던 바,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여서, 두 번이나 보고하여 구원하기를 청하였으나, 종무가 들어 주지 아니하고, 유습과 박초 등도 역시 내려와 구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패전하게 되었다.’ 하오니, 신들의 생각에는 특별히 박실의 죄뿐이 아니고, (이)종무와 (유)습과 (박)초도 다 유죄하오니, 모두 국문함이 옳은가 합니다."
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박실의 패군한 죄는 모두 다 아는 바이지만, 만약 법대로 논한다면, 유정현이 도통사가 되어서 즉시로 실을 구속하고 벌을 줄 것을 청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은 역시 죄되는 일이므로, 이제 장온을 무고죄로 벌주고, 여러 장수들을 상주었다가, 또 다시 정현과 종무를 옥에 하옥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하물며 동정할 때에는 승리가 많았고 패전은 적지 않았는가. 뒷날의 일도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대거(大擧)할 계획을 한다면, 또한 권도(權道)를 써야 할 것이나, 내 어찌 그런 일로 하여, 끝까지 그 죄를 치죄하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이제 실은 공신의 자식이라 하여, 면죄시키게 하라."
하였다.

의금부에서 박실의 패군 원인이 이종무 등에게도 있음을 아뢰니 무난히 처리케 하다

문제는 대마도에 상륙한 병력을 '제비뽑기로 선출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공격에 나가게 된 것이 박실. 이 때문에 '''운 나빠서''' 상륙대가 된 병사들의 사기가 좋을 리가 없어서 180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잃었다. 더구나 그동안 나머지 병력들은 박실이 2번이나 구원 요청을 했음에도 모두 무시하고 그대로 배안에서 대기하다가, 패전이 확인된 뒤에 그대로 귀국했던 것이다. 이 한심한 제비뽑기 사건 등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완전히 반전된다.
하지만 이종무를 대마도 정벌 패전 책임으로 처벌할 수는 없었다. 대마도 정벌은 세종대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병권을 쥐고 있었던 태종의 명령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태종은 대마도 정벌의 성공을 대대적으로 홍보한 뒤였다. 이 때문에 다른 핑계를 찾아낸다. 김훈이라는 인물이 죄를 지었다 풀려났는데 이 사람을 허락도 받지 않고 대마도 정벌에 종군시킨 것이 잘못이라는 궁색한 논리였다. 이것이 왜 궁색하냐면 조선왕조실록에도 있는 이 장계에 상왕이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종무는 작전 미스가 아니라 인사책임으로 귀양을 간다.
이후 이종무를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그대로 넘어갔고, 뒤에 관직에 복귀하게 된다.
그런데 복귀한 이후에 명나라 사신을 따라갔는데, 그때 사신에 포함되어 있던 도총제 권희달이 사고를 친다. 이 때문에 다시 삭탈관직되었다가, 다시 복귀 . 그리고 이듬해 죽었다.

장천 부원군(長川府院君) 이종무(李從茂)가 졸하였다. 종무는 전라도 장수현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활을 잘쏘고 말을 잘 달렸다. 신유년에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서 바다의 도적을 토벌하여 공이 있으므로, 돌아와 정용 호군(精勇護軍)에 임명되고, 정축년에 옹진 만호(甕津萬戶)가 되었는데, 마침 왜구(倭寇)가 갑자기 들어와서 성을 포위하므로, 종무가 막아 싸웠으며,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승진되었다가 들어와서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경진년에 익대 좌명 공신(翊戴佐命功臣)의 호를 받고 통원군(通原君)에 책봉되었고, 의주(義州) 등지의 병마 절제사로 승진되었다. 영락(永樂) 병술년에 장천군(長川君)을 봉하고 우군 총제를 겸하였으며, 신묘년에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갔었고, 정유년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으로 판우군 도총제 부사가 되었고, 기해년에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종무(從茂)로 삼군 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를 삼아 주사(舟師)를 거느리고 가서 토죄(討罪)하고 돌아오니, 의정부 찬성사를 제수하였다. 얼마 후에 상원(祥原)으로 좌천되었다가, 경자년에 불리어 돌아와서 장천군(長川君)이 되었고, 이듬해에 부원군으로 승진되었고, 계묘년 가을에 사은사(謝恩使)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와서 과천으로 좌천되고, 을사년에 다시 장천 부원군이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향년 66세이다. 부고가 올라가니 내관을 시켜 조상하고, 또 부의를 하사하고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다. 시호를 양후(襄厚)라 하였으니, 갑주(甲胄)로 공로가 있음이 양(襄)이요, 생각함이 어둡지 아니함이 후(厚)이다. 성질이 순박하고 진실하였으며, 아들은 이승평(李昇平)·이덕평(李德平)·이사평(李士平) 셋이 있다.

장천 부원군 이종무의 졸기


3. 기타


대마도 정벌은 사실 명나라일본 침공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실제로도 정벌 당시에는 일본과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다만 대마도 원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세번째 원정이었다.
1995년 5월 18일, 그의 이름을 딴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잠수함거제도에서 진수되었다.
사극에서는 대마도 정벌을 다룰 때 정도만 등장하는 편. 용의 눈물에서는 민욱이, 대왕 세종에서는 박상조[3]가,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도기석[4]이 연기한다.
[1] 일생 동안 총 8명의 왕을 거친 셈이다. 다만 창왕공양왕 시기는 여말선초의 혼란 속에 초고속으로 지나갔고, 정종 재위기간도 고작 2년이라는 점은 감안.[2] 쓰시마 섬 문서도 참조.[3] 태조 왕건은부 역으로 유명한 배우. 이 작품이 박상조의 마지막 TV 연기 활동이었다. 이후에는 개인 활동에 치중하여 연기를 사실상 접은 상태.[4] 야인시대김천호로 유명한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