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관

 

2. 부산광역시 등지에 있었던 조선시대 일본인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


1. 경상북도 칠곡군의 지명 왜관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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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현재 칠곡군청 소재지며, 지천면, 석적읍,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과 접한다.
2에서 나온 지명으로, 본래 왜관이 약목면 관호리에 설치됐는데 1904년에 경부선 철도가 설치되고 왜관역이 건설되면서 점점 이 일대를 왜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914년에 파미면과 노곡면을 합쳐 왜관면으로 개편하였고, 칠곡군청을 기존 칠곡면에서 군의 중심이자 교통의 요지인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1949년에 왜관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는 석적면 아곡리를 편입했다.
조선시대 왜관은 지금의 왜관읍 맞은편인 약목면 관호리에 있었다고 한다.
왜관공단이 위치해 있어 외노자를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주한미군 부대인 미 육군 제3보병사단 예하 부대가 주둔한 캠프 캐롤이 위치해 있어 미군들도 아주 흔하게 돌아다닌다. 캠프 캐롤 근처에는 미군들을 위한 상점들이 모여있는 상가가 있는데 레스토랑 같은 경우 가볼만한 곳이 몇 군데 있다. 그러나 주변에 갈데가 많은게 아니기 때문에 카투사 장병들이 여기에 자대배치를 받으면 귀양 가는 꼴이다.
왜관읍은 6.25 전쟁 중 왜관읍에 있는 당시의 왜관 철교를 폭파시켜 낙동강 전선 유지에 많은 역할을 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당시 왜관에서 진행된 전투에 참여한 군인은 한미 연합군 1만 명, 북한군 1만 7500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왜관의 방어 라인이 무너지게 되면 당시 진행 중이던 인천상륙작전에도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었다. 한미연합군 측에서는 북한군이 강을 넘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존재하던 유일한 다리인 왜관철교를 폭파함으로써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고 그런 이유 때문에 왜관철교는 "호국의 다리"로도 불린다. 종전 이후 왜관이라는 명칭의 의미 때문에 지명을 변경하는 노력이 몇 번 있었지만 이런 역사적 상징성 때문에 현재까지도 왜관읍의 명칭은 유지되어 오고 있다.
매년마다 낙동강 전투 전승기념행사를 개최한다. B-29 폭격기는 프롭기인 대한민국 공군 CN-235 수송기가 대역을 맡고, 폭격 장면은 수송기가 조명탄을 뿌리는 것으로 대체한다.

2. 부산광역시 등지에 있었던 조선시대 일본인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


조선시대에 일본인이 조선에 와서 통상하던 곳을 말하며, 그 곳에 설치된 행정 기관과 일본인 집단 거주 지역을 일컬어 부르는 말이다. 요새로 치면 상공회의소대사관을 합쳐 놓은 개념이다.[1]
고려 말기에 왜구가 날뛰자 정부는 유화책으로 오늘날의 진해[2]울산[3], 부산[4] 근처의 항구를 개항해 일본인들이 왕래하고 무역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또한 왜관을 두어 행정 사무 등을 처리하게 하였다. 삼포왜란 이후에는 진해에만 왜관을 두었고 1541년에 조선의 포졸들과 쓰시마인들이 분란을 일으키자 진해의 일본인을 추방하고 왜관을 부산포로 옮겼다.
임진왜란 이후 국교가 단절되었다가 에도 막부와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왜관은 다시 나타난다. 1601년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절영도에 임시로, 1607년 현재의 부산 동구 수정동 부근 두모포에 1만평 규모의 왜관을 만들었는데 술집과 일본식 주택이 지어졌다. 건설을 추진한 이들은 주로 쓰시마 번주였다. 그러나 당시에 이 부근이 교통이 불편하고, 1만평 규모였던 두모포왜관이 너무 좁다는 불만이 많아 1678년 초량[5]에 10만평 규모로 왜관을 신설했다. 그리고 본래 두모포왜관이 있던 자리는 고관(古館)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초량역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고관입구라는 지명이 있다.
새로운 초량동 왜관은 고관(古館)에 대비해 신왜관(新倭館)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이후 개화기까지 200년 가량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을 전담하는 국제 창구가 되었다. 왜관 주변엔 돌담을 쌓고 거류민들의 주택시장, 창고, 관청 등에 용두산에는 일본인의 종교시설인 신사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국어를 배우려 온 유학생이나 한의학을 배우러 온 일본인도 있었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 서관을 나눴는데 동관에는 왜관에 상주하면서 외교와 무역을 담당하는 쓰시마 사람들이 지냈고 왜관의 우두머리인 관수가 사는 관수가, 무역을 하는 개시대청, 가옥과 각종 상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서관에는 일본 본토에서 온 사절들이 이용하는 시설이 있었다.
조선 초기 왜관의 규모는 부산포왜관이 1494년에 일본인 450명 정도가 살았다고 한다. 진해에 위치한 내이포왜관이 가장 컸는데 1494년에 2,500명 정도가 살았다. 울산에 위치한 염포왜관은 150명 정도 수준. 한양에도 조선을 방문한 다이묘나 상인이 머물 수 있는 시설이 있는데 상설은 아니었고 동평관(東平館)이란 이름이었다. 현재의 충무로에 위치했는데 광해군 때 폐지되어 부산의 왜관이 일본 외교를 전담하게 된다.
왜관에는 허가를 받지 않은 조선인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물론 일본인 역시 허가를 받지 않으면 왜관 바깥으로 나올 수 없었다.
일본에서 조선 도자기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6] 왜관에는 일본 수출용 그릇 공장도 운영되었는데 훗날 부산요(釜山窯)라고 이름지었다. 일종의 OEM 방식. 조선 측이 재료를 무상으로 제공하고 조선 기술자를 차출해주면 왜관에서 기술자에게 연봉을 지급하고 일본에서 좋아할만한 디자인으로 그릇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부산박물관에 당시 대마도에서 부산요로 보냈던 주문서가 전시돼있는데 디자인, 치수, 문양이 세세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조선이 재료 무상 공급을 거부하고 일본 현지의 자기 기술이 발전하면서 1717년에 폐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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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년 쓰시마에 일본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 芳洲)가 한국어를 배우는 기관을 세웠는데, 우수한 학생은 왜관으로 보내 공부시켰다. 위는 아메노모리 호슈의 초상화인데 이 사람은 중화사상에 빠져서 툭하면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중국인으로 태어났어야 했다고 말했다. 옷차림만 봐도 일본인의 복식이 아니다.[7]
조선 말기에 가면 교역량이 감소한다. 양국 모두 차츰 강한 쇄국정책을 쓰게 되기도 했고, 18세기에 들어서 중국 비단을 수입하던 일본이 자체적으로 비단을 만들어내면서 왜관의 교역은 감소한다. 특히 조선 인삼의 일부 종자를 반출해 일본에서 재배가 가능해지면서 인삼 수출도 감소했다. 그 뒤 일본은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다.
초량왜관 지역은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과 함께 초량왜관이 포함된 지역을 근대법적인 일본전관거류지(concession)로 설정하고 그 안에 거류지역소, 영사관, 경찰서, 상업회의소, 금융기관, 병원 등을 설치했다. 개항 이후 일본만 들어온 것은 아니고 한때는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기도 했다.[8] 시대가 바뀌었지만 국제적 창구 역할은 계속됐던 셈이다.

[1] 일본에서는 조선이 일본인들에게 왜관을 제공한 것처럼, 에도 막부 시절 데지마를 설치하였다.[2] 당시에는 내이포라고 불렸다. 제포라고 하기도 한다.[3] 당시에는 염포. 현 울산광역시 북구 염포동.[4] 당시에는 동래 부산포.[5]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지금도 일본국 영사관이 이 동네에 있다.[6]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도공을 많이 납치해가기도 했다.[7] 단, 와카슈도에 있어선 일본인의 시각을 공유하였다. 자세한 건 이 항목 참조. [8] 화교 밀집지역을 거쳐 지금의 부산역차이나타운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