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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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大塚
1. 개요
중국 지린성 지안시 건강촌 북측 산기슭 사면에 위치한 고구려의 돌무지무덤(적석총, 積石塚). 통구 고분군 마선구 묘구 500호(JMM 0500)에 편호되어 있다.
통구 고분군은 서쪽의 마선구, 칠성산 고분군과 북쪽의 산성하 고분군, 동쪽의 우산하, 하해방 고분군으로 구분된다. 여기서 서대총은 서쪽구역의 큰 무덤이라는 뜻에서 서대총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대묘, 서대총으로도 둘 다 불리고 있으나 한국고고학사전에 서대총으로 불리고 있어 이를 따른다.
2. 무덤의 구조
서대총은 분구의 형태에 따라 계단식 적석총, 방단계제적석총으로 구별되며 통구 고분군 내에서 초대형으로 분류될 만큼 크다. 평면형태는 사다리꼴로 동측과 북측이 약 53m, 서측 56m, 남측이 62m 가량이며 높이는 11m이다.
무덤은 황토층을 정지(整地)하여 기반으로 삼아 축조되었으며 화강암, 사암, 석회암을 가공하여 계단을 쌓아 올려나갔다. 배타적인 경관을 확보하기 위해서 평지보다 약간 높은 비탈진 경사면에 입지한 것으로 보이며, 무덤을 구축할 평면을 만들기 위해서 계단 가장 아래 기단부의 앞쪽엔 거대한 석재를 층층이 쌓아 수평을 맞추었다. 계단의 층수는 가장 잘 남아있는 쪽이 11단이며 무덤 자체가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어 각 변마다 계단의 층수가 다를 수 있으며 더군다나 계단을 구성하였던 석재들이 이탈하여 정확한 층수를 알 수 없다.
극심한 도굴의 피해를 입어 현재까지도 무덤의 정상부엔 거대한 도굴갱과 같은 흔적이 남아 있다. 모종의 피해로 말미암아 매장주체부는 알아 볼 수 없는 형태이다. 다만 도굴갱의 깊이를 볼 때 석곽(돌덧널무덤), 석실(굴식돌방무덤), 그리고 양자를 합친 개념인 광실(壙室)[6] 로 구분된다. 역시 명확한 형태로 추정되는 것은 없다.
서대총의 남쪽 아래에는 이른바 묘설(墓舌)이라고 불리는 위에서 보면 말그대로 혓바닥처럼 튀어나온 돌무지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에 대해서는 견해가 두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앞에 말한 묘설이라는 것이 서대총 이전에 상대적으로 허접한 적석총[7] 을 쌓을 때의 전통이 유지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반면에 도굴(또는 모종의 파괴행위)을 하다가 나온 돌들을 이쪽으로 버리면서 쌓인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다만 서대총은 무덤을 어느 정도 해체하면서 진행하는 발굴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견해가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은 없다.
서대총에는 위의 추정 묘설 외에도 작고 얇은 판석(版石)을 북측의 일부 계단에 기대어 놓았는데, 이러한 작은 판석을 기대어 놓는 행위(또는 장식(?))도 앞선 시기의 적석총[8] 의 축조 방식을 따라서 변화하는 것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그 밖에 제대(祭臺)라고 불리는 추정 제단 시설이 동쪽에 1기, 무덤의 공간을 표시하면서 경계 지었던 담장[陵墻]이 북쪽에서 확인되었다. 그 밖에는 기단부를 구성하는 석재에 大吉이라는 글씨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3. 무덤의 주인
서대총은 도굴의 피해로 인해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언제 만들어졌는지 추측할 수 있는 자료들이 일부 확인되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제 장식을 비롯하여 철제 꺽쇠와 못, 괭이, 재갈, 많은 수의 기와와 막새 등이 확인되었다. 말갖춤새를 중심으로 동북아시아 전체를 아우른 연구에 적용할 때 서대총에서 출토된 철제 재갈은 3세기 후엽에서 4세기 전반 사이에 활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국형 운주의 형태나 금동제 장식의 우산하 992호분[9] 과의 형태적 유사성으로 4세기 전반경으로 보는 것이 주를 이룬다. 또한 출토된 고구려 막새로 편년을 한 연구에서는 권운문(圈雲紋) 막새를 먼저 주로 사용하다가 연화문(蓮花紋) 막새로 점차 유행이 변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는데 서대총에서는 권운문 막새만이 확인되고 있으며 일부 막새에서 기축년◯◯간리작(己丑年◯◯刊利作)이라는 명문이 확인되어 329년 경인 것으로 보는 것이 대세론적이다.
유물의 연대 - 대체로 4세기 전반 경의 양상을 보인다는 점, 적석총 축조 상의 몇 기법들이 오래된 전통을 유지하는 점에 말미암아 축조기술상으로 유물의 연대 상으로나 대체로 늦는 태왕릉과 천추총의 앞에 서대총이 놓이게 된다.[10]
따라서 명문에 따라 329년으로 보게되면 331년에 사망한 미천왕의 무덤으로 서대총이 거론되는 것은 거의 고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유물의 출토위치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무엇보다 기와는 썼던 기와를 다시 재활용할 수 있으므로 시간적 동시성이 무조건 담보되지 않는다. 서대총 막새의 명문을 398년으로 해석하는 연구자의 견해는 고구려 왕릉의 주인을 비정하는 연구에서는 다소 혼란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고해서 반론을 고구려 유적과 유물 자체의 고고학적 연구로 반증하기는 쉽지 않으며 소위 동북아시아 삼국시대 연대론으로까지 넘어가서야 반론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서대총 미천왕 설의 또다른 근거 중의 하나인 고국원왕 12년(342년) 모용황의 침공 때 미천왕의 무덤이 도굴 당하는 기사이다. 이때의 흔적이 바로 지금의 서대총에 남아 있는 도굴갱(!)이라는 것이 바로 그 근거이다.[11] 그러나 다시 1년 뒤에 시신을 돌려받기까지 하는데 굳이 붕괴된 형태로 남겨두었는지 는 근거로서의 신빙성이 떨어지게 한다. 물론 이 반론에의 반론도 있는데 미천왕의 무덤을 서대총에 만들었다가 도굴의 피해를 342년에 입게 되자 343년에 다시 돌려 받으면서 새롭게 무덤을 만들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 새로운 무덤이 바로 같은 마선구 고분군에 소속된 마선구 2100호라는 것이다[12] .皝從之 '''發美川王廟墓 載其尸''' 收其府庫累世之寶 虜男女五萬餘口 燒其宮室 毁丸都城而還
모용황이 한수의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궁궐 창고에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물을 훔쳤으며,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운 뒤에 환도성을 무너뜨리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十八 高句麗本紀 第六)> 고국원왕조 中 (#출처)
각 근거의 장단점이 있지만 적석총의 발전 과정, 출토 유물 및 정황 등이 4세기 전중엽 언저리에 축조된 것이라고 보는 것 자체에는 큰 무리가 없고 그 외에 통구 고분군 내에서 서대총만큼 미천왕으로 비정할만한 근거를 가진 고분이 없기에 미천왕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현 시점에서는 대세라고 할 수 있다. 미천왕의 무덤이라는 점에서 또 한편으로는 안악 3호분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반론이 많다. 미천왕 문서와 안악 3호분 문서를 참고.
4. 같이보기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6] 중국측에서 주로 표현하는 개념으로 다소 모호한 표현인데, 한국측 연구에서 목재로 굴식무덤(木室)을 만들었다는 견해로서 목재로 뚜껑을 만드므로 위에서 관을 내릴 수 있고(壙) 앞으로도 들어갈 수 있다는(室의 개념) 구체적인 의견을 개진한 바 있다. 이는 다음 단계의 천추총, 태왕릉에서 보이는 소위 가형석곽의 조형으로 비정하고 있다. [7] 북한 자강도 자성 송암리 고분군, 초산 운평리 고분군 등이 해당한다.[8] 만보정 242호의 S2호가 대표적인 사례다. 논자에 따라서는 간구자 적석묘까지도 기원을 찾는다[9] 우산하 992호분(JYM 0992)에서도 명문 와당이 확인되어 338년 / 371년, 그리고 일부 연구자는 398년으로 보고 있다. 왕릉 비정의 문제에서는 서대총을 미천왕으로 비정하는 것이 대세론이다. [10] 서대총과 같은 단계로는 위에 언급한 우산하 992호분이 해당한다. 임강총/우산하2110/칠성산 0211 - 서대총/우산하 992 - 마선구 2100(제외되는 경우도 간혹 있다) - 천추총 - 태왕릉 - 장군총의 순서[11] 중국 측의 연구에서 주로 거론된다.[12]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서 제기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