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강총
[image]
臨江塚
1. 개요
중국 지린성 지안시 태왕진에서 압록강 쪽의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의 왕릉급 돌무지무덤(적석총, 積石塚). 압록강의 북변에 위치하고 있어 임강총이라고 불리고 있다. 통구 고분군 우산하 묘구 43호(JYM 0043)으로 편호되어 있다.
2. 무덤의 구조
압록강 북변의 절벽 위, 약간 높은 미고지에 입지하고 있어 임강총에서 바라보면 태왕릉과 장군총이 잘 보이며 도성인 국내성에서도 임강총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입지도 단독입지로써 보다 빨리 만들어진 왕릉급 내지 대형 적석총들에 비해서 왕권의 신장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기도 하다. 부속시설로는 제례행위를 한 것으로 추정 -되는 제대(祭臺)라 불리는 시설과 배수시설이 있다.
동서 길이가 71m, 남북 길이가 76m, 높이가 10m로 초기에 만들어진 고구려 적석총 가운데서는 가장 크며, 전체 적석총을 통틀어서도 태왕릉과 천추총을 제외하면 임강총보다 큰 무덤은 없다. -
평면형태는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사각형이라는 뜻으로 말각방형(抹角方形)이라고 분류되고 있다. 이 말각방형이라는 것이 유의미한 속성이 될 수 있는 것은 후대의 적석총들이 비교적 완전한 사각형의 평면을 만드는 것으로 발전한다고 보는 현 시점에서 비교적 통구 고분군에서도 빨리 축조되는 무덤의 특징을 보이는 하나의 근거로 거론되기 때문이다.
임강총은 분구의 형태에 따라 계장식[6] 적석총에서 계단식 적석총으로의 변화 과정 중에 있는 무덤으로 보고 있다. 임강총의 경우에도 분구에 트렌치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때의 제토 과정은 정확한 무덤의 규모와 형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지 분구를 절개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완전한 고분 발굴조사까지는 아니었기 때문에 계장식인지 계단식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7]
다만 분구의 외형이 계장식 적석총 단계에서 보이는 비교적 간단하게 돌을 깨서 만든 석재를 무덤에 사용하고 있으며 계단의 수도 계장식과 마찬가지로 수십 단(段)에 달하는 등[8] 이른 시기의 적석총들인 마선구 626호, 마선구 2378호, 산성하 전창 36호, 145호, 칠성산 871호의 특징을 일부 공유하고 있어 계단식 적석총으로의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진 왕릉인 서대총과 우산하 992호분보다는 먼저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른 시기의 적석총의 공통적인 특징은 분구의 정상에 도굴갱처럼 거대한 구덩이가 파져있는데 이것이 도굴갱인지 아니면 석곽(石槨, 돌널), 광실(壙室)의 자연붕괴의 현상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잠정적으로 이른 시기의 적석총의 공통적인 특징, 매장주체부의 석곽(돌널)에서 석실(돌방)으로의 삼국시대의 일반적인 발전과정 상에서 석곽(내지는 광실)을 매장주체부로 채용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게 보편적이다. 다만 전통적 속성과 새로운 속성이 모두 나타나고 있어 분류 명칭은 다소 혼잡함이 있다. -
3. 무덤의 주인
임강총은 출토 유물은 기와류가 2000여점에 달한다. 다만 막새가 아닌 기와 자체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편이라 단순히 중국측 보고서 및 연구에서는 “한대(漢代)의 품격이 보인다.”라는 식의 표현을 쓰며 대체로 통구 고분군 중에서 빨리 축조된 무덤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9]
그나마 임강총에서 채집된 철제 재갈을 통해 동아시아 광역 편년에 따라 3세기 후반경 내지는 4세기 전반으로 특정할 수 있다. 말고도 마차에 쓰이는 장식품으로 추정되는 청동제 인물형 수레굴대(차할, 車轄)이 나온 바 있다. 이 수레굴대와 똑같은 유물이 우산하 2110호분(JYM 2110)이라는 또 다른 왕릉급 적석총에서도 나왔는데 거의 임강총과 동일한 형태여서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임강총과 우산하 2110호분을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것이라 보는 데에 이견이 없다. 따라서 임강총/우산하 2110호분-서대총/우산하 992호분-천추총의 순서가 보편적인 변화 순서.
따라서 3세기 후반에서 4세기 초반으로 대체로 연대가 고정되므로 이 시기에 사망한 고구려 왕을 살펴보면 산상왕, 동천왕으로 비정되는 경향이 크다. 산상왕이 거론될 수 있는 것은 3세기 후반의 상한의 기준이 근거가 살짝 미약하여 논자에 따라서 3세기 중엽까지도 더 올려보거나 막연히 3세기 언저리로 정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산상왕도 후보로 거론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장지형 왕호를 고려해보면 약간 높은 지대에 입지하고 있어 山上이라는 말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 한편 압록강 내지 지금의 우산 아래쪽을 흐르는 구 하천을 고려하면 또 東川이라는 말과도 상통하고 있어 임강총의 묘주는 동천왕이 유력하지만 잘라말하긴 어렵다. 한편 서천왕과 봉상왕이 시간적으로는 가능하긴 하지만 西川이라는 말 때문에 문제[10] 가 다소 있고 봉상왕의 경우에는 쫒겨난 왕으로 이렇게 큰 무덤을 쓰기 어려웠으리라 보는 경향이 있다. -
4. 여담
임강총의 무덤의 주인에 대해서는 보통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연구에서 주로 거론되는 반면, 천추총-태왕릉-장군총의 경우에는 동아시아 역연대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고구려 전공자 외에도 삼국시대 역사학, 고고학의 타 주제 연구에서도 곧잘 거론된다. 따라서 임강총은 상술한 3개 왕릉과는 시간적인 차이가 좀 있는 편이라 묘주의 문제는 집중적인 관심사가 아닌 편이다. 물론 앞시기 적석총의 양상이 유물의 빈약함과 발굴 자체의 문제[11] 등으로 다소 미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구려 왕릉을 모두 비정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인 것도 있다. -
임강총 또한 태왕릉과 장군총과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이곳 또한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 전문가나 역덕이 아닌 이상 대중적인 인지도가 떨어진다.
5. 같이보기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6] 계장식(階墻式) 적석총, 계단식 적석총이 아래쪽 계단을 만들고 위로 점차 올려가면서 만드는 형태라면 계장식 적석총은 안쪽부터 바깥쪽으로 쌓는 방식이다.[7] 2004년에 나온 ‘중국 집안 고구려왕릉’ 조사 보고서 -의 내용으로는 분명 계단식 적석총이라고 되어 있기는 하지만 조사방법을 보면 봉분까지 파가면서 확인한 것은 분명 아니다. 절개조사에서 다른 양상이 나올지도 모를 일.[8] 그 외의 공통점으로 계단의 각 단들이 장군총처럼 대칭을 이루지 않고 비교적 난잡하게 쌓는 것이 있다.[9] 기와를 소성하기 전 모양을 정리할 때의 흔적이자(동시에 장식인) 승석문(繩蓆文) 타날(打捺)의 흔적이 하나의 근거가 되는 경우도 있다. 승석문 문양의 깊이가 깊은 것이 빠른 것, 얕은 것이 늦는 것이라 보는 견해도 있다. 중국측의 한대의 품격이라는 표현 자체가 식상할 뿐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10] 일제강점기 및 미군정기 집안시 일대의 구 지형도를 보면 큰 하천인 압록강과 통구하, 마선하를 제외하고도 소하천이 분명 많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하천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고 또 그 고구려가 집안을 수도로 쓰던 시절의 하천이 어땠을지도 또 모를 일이다. 물론 서천왕이 되기엔 장지명이 좀 많이 걸리긴 하지만.[11] 중국이 못해서가 아니라 적석총 자체 발굴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