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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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연(前燕)의 제1대 군주. 휘는 황(皝), 자는 원진(元眞), 시호는 문명(文明)이다.
모용외의 3남으로, 굳세고 지략이 있으며 경학을 좋아했다고 한다. 모용외 사후 모용선비족이 분열함에 따라 모용황의 이복형 모용한은 단부로 망명하고 동복 동생 모용인은 요동에서 자립하기에 이르렀으나, 모용황은 모용인을 격파하고 모용 선비의 분열을 잘 수습한 뒤 337년에 연왕으로 즉위하여 전연을 건국했다. 이후 후조를 끌어들여 단부를 무너뜨리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이 와중에 후조를 배신하고 돌아서서 이후 전연은 후조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위협 상태에서 전격적으로 고구려 침공을 감행해 수도 국내성을 함락시키는 등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 뒤, 후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재차 부여를 침공하여 현왕을 사로잡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348년에 사냥 도중 낙마 사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2. 생애
모용황은 297년에 모용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321년에 세자로 책봉되고 333년에 모용외가 사망하면서 모용부의 대인이 되었다. 그러나 배다른 형인 모용한과 동생 모용인, 모용소와 대립하여 모용부는 내분을 겪게 된다. 모용인은 모용소와 반란을 꾸몄으나 발각되어 모용소가 살해당하자 평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 요동 일대를 장악했다. 모용한은 단부로 망명하였다가 단부의 군대를 이용해 모용황을 공격하였다. 한때 모용황은 멸망 직전까지 몰렸으나 모용한이 모용부가 멸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철군하면서 살아남았다. 336년, 모용황은 모용인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다시 모용부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337년, 모용황은 진나라(동진)에 대한 종속적 관계를 단절하고, 연왕을 자칭하며 연나라(전연)를 건국하였다. 모용황은 단부와 대립했기 때문에 조나라(후조)와 동맹을 맺고 338년에 단부를 협공하였다. 모용황이 혼란에 빠진 단부를 약탈하고 튀자 조나라의 석호는 전연에게 분노하여 단부를 멸망시킨 조나라가 연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였다. 조나라의 침입으로 한때 수도인 극성이 포위되기도 하였으나 모용황은 농성 끝에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역관광하여 영토를 일부 확장하였다. 이후 조나라의 유주를 계속 공격하며 약탈전을 벌였다. 340년에는 다시 조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연나라를 위협하였으나 모용황은 조나라의 전선을 우회하여 유주의 계를 습격, 대승하였다. 342년에 용성으로 천도했으며, 고구려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344년에는 우문부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모용황은 한족의 유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한화 정책을 취하였으며 농경을 장려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하다가 348년에 수렵 도중에 낙마 사고로 인해 머리를 크게 다쳐 결국 사망하였다.
아들 대에 태조 문명제로 추존되었다.
3. 기타
북제에서 편찬된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에서는 모용황의 이름이 공종 탁발황의 휘와 비슷했기 때문에 이를 피휘하여 모용원진이라고 기록하였다.
대나라 국왕 탁발십익건의 장인어른이다. 딸을 정략결혼으로 시집보내고 황후/왕후가 되고 탁발십익건과 딸의 친손자가 북위의 탁발규다. 어찌보면 탁발규는 나중에 자기의 친할머니의 친남동생인 모용수와 싸운것이 된다.
3.1. 한국에서의 모용황
한국 고대사에서 아버지 모용외에 이어 부여를 사실상 작살내고 덤으로 고구려의 고국원왕까지 관광태워버린 사람으로 유명하다. 대중적으로는 '드라마 근초고왕'에 등장하면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생겨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