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추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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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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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영어
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중국어
高句丽王城、王陵及贵族墓葬
프랑스어
Capitales et tombes
de l’ancien royaume de Koguryo
국가·위치
중국 지린성 지안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04년
등재기준
(i)[1], (ii)[2], (iii)[3], (iv)[4], (v)[5]
지정번호
1135
千秋塚
1. 개요
2. 무덤의 구조
3. 무덤의 주인
4. 여담
5. 같이보기


1. 개요


중국 지린성 지안시 마선향에 있으며, 압록강변 쪽에 자리하고 있다. 무덤에서 '천추만세영고(千秋萬歲永固)'[6]라는 명문이 찍힌 벽돌이 확인되어 천추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통구 고분군[7] 중에서도 임강총, 태왕릉과 더불어 평면규모가 큰 초대형의 돌무지무덤(積石塚)으로써 고구려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선구 1000호(JMM 1000)[8]에 편호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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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덤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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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구 고분군의 마선구 고분군 권역 내에서 가장 큰 돌무지 무덤이다.
각 변의 길이는 대체로 63m 내외이며 높이는 10m 가량이다. 후대에 토사채취의 이유로 무덤이 만들어진 언덕이 훼손되었으며 무덤에 사용된 석재들도 일부 채취되는 바람에 무덤이 조금 내려앉아버렸다. 무덤은 현재 일부 무너진 상태로 남아 있으며 무덤 북쪽 부분의 폭이 71m로 늘어나(!) 버렸지만 원래 크기는 63m 가량의 정사각형의 평면형태로 추정하고 있다.[9]
구조는 태왕릉과 거의 똑같은 형태로 축조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차이점이라면 태왕릉은 널방(玄室)부터 그 외부까지 온전하게 남아있는 반면 천추총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그것이다. 천추총의 무덤의 정상부에서 태왕릉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집모양 돌널(家形石槨)[10][11]을 구성했던 조각들이 확인되었고 태왕릉에서 확인된 사례로 추정하면 돌방(石室) 안에 집모양 돌널을 안치해둔 형태로 매장주체부를 만든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천추총은 태왕릉과 마찬가지로 계단식석실적석총으로 분류되고 있다.
태왕릉처럼 천추총도 계단부를 다 구축한 다음 무덤의 꼭대기쯤에 매장주체부를 만든 형태로 남은 평탄한 공간에는 기와와 막새로 장식한 건축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길상구가 쓰여진 벽돌도 천추총의 평탄면에서 확인되었고 이는 역시 태왕릉도 마찬가지다.
계단부 또한 태왕릉과 대동소이하다. 자갈과 황토층으로 기저부로 삼아 석재로 기단을 한 단(段) 마련한 뒤 기단에 활용된 석재만큼 큰 돌로써 1단 계단을 만들고 그 위로의 계단은 비교적 작은 돌로써 구성하였다. 거대한 호분석(護墳石)을 둔 것 또한 태왕릉과 동일하다. 약간의 차이라면 태왕릉에 비해서 이 무덤에 사용된 석재들이 가공도가 약간 조악한 양상을 보이는 점이라고 하겠다.

3. 무덤의 주인


천추총의 무덤의 주인, 즉 묘주(墓主)에 대해서는 천추총에서 출토된 막새의 형태를 바탕으로 추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대총태왕릉 항목에도 어느 정도 있는 내용이나 고구려의 막새의 사용 추세가 권운문 막새(卷雲紋 瓦當)에서 연화문 막새(蓮花紋 瓦當)으로의 변화하는 것으로 인지되는 바, 연화문 막새가 확인되는 천추총은 연화문 와당이 발견되지 않는 왕릉급 돌무지무덤인 서대총이나 역시 왕릉급 돌무지무덤인 우산하 992호분에 비해서는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밖에 없게 된다. 천추총에서는 연화문 막새보다 권운문 막새가 더 많이 확인되고 있는 점을 통해서 연화문 막새가 확인되는 태왕릉과 장군총에 비해서 빠르다고 보고 있다.
한편 천추총에서 나온 기와에서 '□浪趙將軍···□在永樂(□랑조장군···□재영락)'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것이 확인 된 바 있는데 이 영락의 명문을 통해서 영락 연간인 391년~412년에 정비된 근거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같이 확인된 다른 기와의 명문중 '□未'는 영락 연간인 391년~412년 중에서 395년(을미년) 또는 407년(정미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한다는 견해를 내세운 연구가 있다. 둘 견해 어느 하나가 맞다고는 확언할 수 없지만 최소한 광개토대왕이 연호를 사용한 시점 또는 그 이전에 이 돌무지무덤이 만들어져 있었다는 근거로는 충분하다. 또 서대총우산하 992호분이 보통 4세기 전반에서 중반에 축조된 무덤으로 보는 현 시점에서 천추총은 고구려 왕 계보를 염두에 둘 때 4세기 후반 경이라고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천추총의 다음에 축조된 것이 비교적 확실한 태왕릉, 장군총의 묘주가 누구인지에 의해서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고구려 왕사 참고. 각 태왕릉과 장군총의 무덤의 주인이 광개토대왕-장수왕이라고 보는 견해에서는 천추총은 자연스럽게 고국양왕으로 추정할 수 있게되고, 반대로 고국양왕-광개토대왕이 각 왕릉급 돌무지무덤의 주인이라면 천추총은 당연히 소수림왕이 되게 된다. 어떤 무덤이 왕릉이냐 아니냐의 문제와 결부하여 보는 경우도 있는데 다양한 조건 속에서 논자에 따라 고국원왕으로까지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 - 다만 최근에는 대체로 고국양왕 또는 소수림왕 정도로 견해가 모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고국양왕을 묘주로 보는 경우에 고구려 왕호에 나타나는 國을 하나의 특정한 입지-- 즉 천추총, 태왕릉, 장군총이 평탄지에서 약간 높은 고지에 입지하는 점을 들어 이런 점이 바로 國, 國崗, 國崗上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소수림왕을 묘주로 보는 경우에는 마선구 고분군 쪽에는 國이라는 왕호를 쓴 왕의 무덤은 없게므로[12] 천추총 인근이 소수림이라는 주장을 내세운다.
상술했듯이 태왕릉에서는 유물이 많이 확인되었고 이 자료들은 동아시아의 유물의 편년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자료이다. 특히 출토된 유물이 신라·가야와 관련이 많아서 천추총-태왕릉-장군총을 둘러싼 묘주와 연대 등의 문제는 이미 신라·가야를 주제로 하는 역사·고고학 연구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고고학계에서는 어떠한 특정 연대론을 따르냐에 따라서 천추총의 묘주는 소수림왕 또는 고국양왕이 되게 된다. -

4. 여담


태왕릉은 관광지로 광개토대왕비, 장군총과 세트로 인기가 많은데 천추총은 아무도 찾지 않는다. 똑같이 생겼는데도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돌무지무덤이다. 천추총이 있는 마선향쪽은 그야말로 깡촌...

5. 같이보기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6] '이 무덤이 천만년의 긴 세월 동안 영원히 굳건하길'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길상구(吉祥句).[7] 지안시를 중심으로한 고구려 고분군의 공식적인 총칭, 우산하/마선구/산성하/만보정/칠성산/하해방 고분군을 아우르는 명칭이다.[8] 집안 마선구 묘군(集安 麻线沟 墓群, Jíān Máxiàngōu Mùqún)의 약자[9] 2003년 중국 측의 조사 덕분에 원 상태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의 조사만 하더라도 원형으로 보고되었었다.[10] 목실(木室)이라는 개념이 서대총 항목에서 서술된 바 있는데, 이때 널방(玄室)의 뚜껑이 나무로 만들어진 지붕모양이라고 분석한 연구가 있다. 그래서 석광(石壙)이라는 다소 모호한 개념을 보완한 사례라고 할 수 있지만 역시 물질 근거는 남아있는 것이 부족한 편이다.[11] 태왕릉 항목에 보면 이 가형석곽의 복원도면이 있다.[12] 태왕릉이 고국양왕이 되게 되고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이 된다. 참고로 장수왕릉은 평양의 진파리 9호분이나 한왕묘 등을 거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