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리미예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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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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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 전경
Selimiye Mosque'''셰흐자데는 내가 견습생 시절에 만든 작품이고, 쉴레이마니예는 내 최초의 작품이며, 셀리미예는 내 걸작이다'''
- 미마르 시난(Hoca Mimar Sinan)이 죽기 직전에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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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터키 에디르네에 있는 모스크. 1574년에 지어졌다.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2011년에 터키의 10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큰 돔이 특징적이다.
2. 특징
미마르 시난[3] 의 작품. 쉴레이만 대제의 명으로 시난이 세웠던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이후 셀림 2세의 명으로 세워진 것으로, 6세기에 지어진 동로마 최고의 건축물이었던 하기아 소피아와 맞먹으려 했던 이슬람 건축의 또 다른 야심작이다. 하기아 소피아와 크기나 외형적으로 다소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유사한 것도 특징이며, 특히 돔의 직경이 거의 일치한다.(돔 직경 31.22m. 하기아 소피아의 돔이 찌그러져 있는 탓에 어떤 방향(31.87)에서는 미세하게 작으며, 어떤 방향(30.87)에서는 더 크다.) 다만 건축물의 높이 자체는 다소 작다.(43m) 그러나 구조적으로는 차이가 좀 있으며 하기아 소피아에 비해 안정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하기아 소피아보다 명성이나 건축학적 중요성에서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만년 콩라인 건축물 중 하나. 돔 직경도 미세하게 작은 편이다. 그러나 구조적, 외형적인 면에서는 보다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둥근 돔을 네모난 평면의 외벽과 연결시키는 방법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하기아 소피아는 둥근 돔을 네 개의 기둥위에 세워진 네개의 아치로 받치고 아치의 사이를 매꾸는 펜던티브(Pendentive)를 이용하였지만 무게를 견디지 못해 각종 버팀목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셀리미예는 둥근 돔을 여덟개의 기둥과 아치로 받치고 그것을 정사각형 외벽으로 부드럽게 연결시켰다. 이 덕분에 셸리미예는 반원형의 돔에서 네모난 외벽으로 외형이 부드럽게 연결되며, 구조적으로 안정되어있고, 훨씬 많은 창을 통해 밝은 실내를 만들 수 있었다.
타 모스크에 비교하더라도 건물의 규모에 비하면 돔의 비율이 큰 편인데, 이러한 것은 미마르 시난이 의도한 것이다. 그는 다른 모스크들이 적당한 돔을 만들고 남는 공간에 네 면의 작은 반구형 돔과 통로로 공간을 분산시키 것을 거부하고 대형의 돔으로 압도적인 공간감을 보여주는 모스크를 기획한 것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국 계획에서 보여지듯 서구 건축가들이 '중앙 집중형 건축물'에 매료된 것과 유사해 흥미롭다.
셰흐자데 - 쉴레이마니예 - 셀리미예로 이어지는 시난의 건축물들은 고전 오스만 건축 양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건물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고로 시난의 시대 이후에 세워진 이스탄불의 유명 모스크인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블루 모스크)와 비교하면 셀리미예는 면적은 작지만 건물의 높이는 동일하며 돔의 직경은 더 크다. 또한 구조 역시 시난의 초기작인 쉴레이마니예 모스크 인근에 위치한 셰흐자데 모스크의 구조를 응용해서 더 크게 지은 모스크다.
문화사적 의미에서 셀리미예 모스크는 저 먼 중앙아시아의 유목집단들로 출발하여 10~12세기에 걸쳐 아나톨리아로 대거 이주하며 동로마 제국의 문화를 흡수해나간 오우즈 튀르크계 국가들의 역량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건축사적 증거라 할 수 있다.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기 한참 전부터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고 박살낸 것과 별개로 그 문화, 제도, 경제적인 요소들은 꾸준히, 그리고 성실하게 차용했다.
건축 방면에서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들이 1399년에 바예지드 1세의 명으로 지어진 부르사의 대모스크(Ulu Cami)[4] 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파티흐 모스크인데, 이들은 작품성에서는 다소 뒤떨어질지 몰라도 동로마 특유의 돔 양식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 시절만 하더라도 기술적, 경제적 한계로 인하여 하기아 소피아를 축소하여 모방한 느낌이 짙었지만, 점차 동로마 제국의 문화적 내력을 통체로 집어 먹고. 지중해권 전반의 르네상스와 더불어 문화적 기량과 이를 뒷받침할 국력이 끝물에 차면서 마침내 한층 더 발달된 구조적 안정성을 이룩하여 동로마 제국의 건축 기술마저 능가하는 수준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미마르 시난의 작품들이다[5] . 즉 미미르 시난의 업적은 그가 그리스계라는 등의 사소한 이유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가 활약한 시기보다 훨씬 이전인 14~15세기부터 오스만이 동로마의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해온 역사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3. 매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는 투르크의 불가사의로 나온다. 역대 최고의 걸작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대우라 볼 수 있다.
4. 관련 문서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미마르(Mimar)' 는 이름이나 성이 아니라 건축가라는 별명이며, 시난(Sinan)만 이름이다. 오스만 시대에는 고관대작이라고 해도 본래 성이 없는 사람이 다수였으며, 미마르 시난처럼 특기가 별명이 되거나 출신 지역, 경력 등이 별명이 되어 성처럼 쓰였다.[4] 1396년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프랑스와 헝가리의 십자군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로, 1396년에 착공하여 1399년에 완공했다.[5] 마침 미마르 시난은 미켈란젤로에 비견되는 건축가라고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