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image] '''대한민국의 사적''' '''제55호'''
'''소수서원'''
紹修書院
Sosuse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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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분류'''
유적건조물 / 교육문화 / 교육기관 / 서원
'''면적'''
89\,975㎡
'''지정연도'''
1963년 1월 21일
'''제작시기'''
조선
'''위치'''


'''紹修書院'''
1. 개요
2. 역사
3. 최초의 사액서원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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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서원이다.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영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랜드마크 중 하나다.
1963년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7월 6일에는 한국의 서원 중 하나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되었다.

2. 역사


지금의 소수서원 자리는 원래 신라 때 창건된 사찰 숙수사(宿水寺)가 있었다. 이는 서원 입구에 서 있는 보물 제59호 당간지주[1]와 소수서원 부지에서 신라대의 불상 등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증명이 되었고 현재 소수서원 사료전시관 앞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사찰은 소수서원이 들어서기 전 어느 시점에 이미 폐사된 상태였다고 한다.[2]
이후 고려 후기에 안향이 지금의 소수서원 일대인 순흥 내죽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공부했으며 조선 초기까지 생가가 있었다.
조선 중종대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곳 순흥 출신의 고려시대 유교 성현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1542년 사당을 세웠고, 그 다음해에는 사당 옆에 유생들을 교육하는 서원을 세운 후 이름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지었다. 그리고 1548년에는 후임으로 부임한 이황의 요청에 의해 1550년 명종에게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3. 최초의 사액서원


사액서원이 되면 왕의 친필 현판, 서적, 노비, 면세, 면역 등 그 혜택이 비사액서원과는 격을 달리하기 때문에 소수서원 이후 세워진 전국의 서원들은 경쟁적으로 사액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뛰어난 유학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초기 서원들과 달리 나중에 생겨난 서원들은 이러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사림파의 세력 형성, 확장의 목적이 주가 되었고 이로인해 서원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나중에 서원철폐론이 등장할 무렵에는 무려 1,000여개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정치를 잘했던 숙종은 사액을 남발하면서 130개가 넘는 사액서원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서원이 난립하다보니 조정에서는 아무나 함부로 제향하지 못하게 하였고 특히 한 사람이 여러 곳에서 제향되지 못하게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자신의 연고지에 서원을 세웠고 송시열 같은 경우에는 전국에 수십개의 서원이 존재하기도 했다. 또한 한 서원에서 여러 사람을 제향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며 본래의 목적인 학문적으로 뛰어나 존경받을만한 유학자가 아니라도 온갖 이유를 만들어붙여 그 사람을 위한 서원을 세우기도 했다.
서원의 폐단이 지속되자 결국 1741년 영조는 1714년(숙종 40년) 이후 허가없이 세워진 모든 서원을 철거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계속 이어져 1871년에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게 된다..
다만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은 가치를 인정받은 주요 47개 서원에 포함되어 지금까지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원 내부에는 안향의 위패를 모신 문성공묘(文成公廟)가 보물 제1402호, 강학당(講學堂)이 보물 제1403호에 지정되어 있다. 서원 입구에 있는 숙수사지 당간지주도 보물 제59호 지정되어있다.

4. 관련 문서




[1] 불교 사찰에서 깃발의 일종인 '당간'을 세우기 위한 지지대로 쓰이는, 한 쌍의 돌기둥 같은 구조물.[2] 한국의 몇몇 서원은 조선시대에 명당을 먼저 차지하고 있던 사찰을 강제로 부수고 그 자리에 만드는 경우도 있었는데 소수서원은 만들기 몇백 년 전에 숙수사가 있었다가 폐사된 상태였으므로 그런 케이스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