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향

 


'''고려의 문하시중'''
채인규

'''안향'''

유청신
'''한국 성리학의 시조
안향
'''
'''시호'''
'''문성공(文成公)'''
'''본관'''
순흥 안씨[1]
'''이름'''
유(裕) → 향(珦)
''''''
사온(士蘊)
''''''
회헌(晦軒)
'''출생'''
1243년
경상도 흥주 상평리
(현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상평동)
'''사망'''
1306년 9월 12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사상


1. 개요


고려학자 · 정치가. 동국 18현의 한 사람이자 한반도성리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대학자로 본관은 흥녕(興寧)이며 시호는 문성공(文成公)이다. 아명은 유(裕),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이다. 안향의 본관인 흥녕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으로 흥녕 안씨는 바로 지금의 순흥 안씨(順興安氏)이다.
주자(朱子)가 집대성한 성리학을 고려에 도입함으로써 유학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대부를 등장하게 한 계기를 만들었으며 안향 자신도 흥주(흥녕의 다른 이름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과 풍기읍 일대) 의 중소 지주층 출신의 사대부였다.
안향을 시작으로 한 신진사대부의 정계 등장은 질서가 무너져가던 고려를 엎고 조선을 건국하는 주요 동력이 되었으며 성리학의 이념을 중심 이념으로 삼은 조선이 들어서자 도학의 시조로 받들어지고 문묘에 제향되었다. 안향의 후손들은 조선 시대에도 흥성했으며 지금의 순흥 안씨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유학의 일가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2]

2. 생애


1243년(고종 30년) 경상도 흥주(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서 흥주의 향족이었던 안부(安孚 / 1220 - ?)와 강주 우씨(剛州禹氏)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유의 아버지 안부는 흥녕 안씨의 시조인 보승별장 안자미(安子美)의 손자로 흥녕 안씨 일족은 흥주의 토착 향족 출신 가문이었다. 안부 또한 흥주의 향리로 있다가 개경으로 상경해 의업(醫業)으로 출세하여 이후 정3품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판도판서(判圖判書)에 이르러 치사(관직에서 은퇴하는 것)하였다. 어머니 우씨는 예빈승(禮賓丞)을 지낸 우성윤(禹成允)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학문에 밝았던 안유는 1260년(원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18세의 나이에 교서랑(校書郞)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 이름을 향(珦)으로 고쳤다. 직후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자리를 옮겨 10년 가까이 재임했다. 1270년(원종 11년) 삼별초의 난강도(江都 : 지금의 강화도)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으며 1272년(원종 13년)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강도 탈출의 일로 원종의 신임을 얻어 이름을 알리게 된다.
1275년(충렬왕 1년)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부임했다. 미신으로 백성들을 수탈하며 재산을 축적하고 사람들을 함부로 부리는 등 상주에서는 무당들의 행패가 심했다. 이에 안향은 미신을 타파하고 풍속을 쇄신시키기 위해 무당들을 잡아다 엄히 다스렸으며 다시는 사특한 농간으로 백성들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하면서 상주의 풍속이 바로잡혔다.
이후 판도사좌랑(版圖司左郎)·감찰시어사(監察侍御史)를 거쳐 국자사업(國子司業)에 올랐다. 1288년(충렬왕 14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기고 다시 좌승지(左承旨)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었다.

1289년(충렬왕 15년) 2월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원외랑(員外郎)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이 되었고 고려유학제거(高麗儒學提擧)가 되었다.
1289년 11월 충렬왕제국대장공주 부부를 호종하여 직접 원나라에 가서 주자의 저작들을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畵像)을 그려 가지고 1290년(충렬왕 16년)에 고려로 돌아왔다. 1290년 3월에 종2품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올랐다.

문신이었지만 무재(武才)도 있었던 듯하다. 1294년(충렬왕 20년) 동남도병마사(東南道兵馬使)를 제수받아 합포(合浦)[3]에 출진하기도 했다. 같은 해에 지공거(知貢擧)로 옮겼다가 1294년 12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使)로 보직되었고 1295년(충렬왕 21년)에는 밀직사사(密直司使)로 승진하였다. 1296년(충렬왕 22년)에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전직했고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를 호종하여 다시 원나라 원행을 다녀왔다. 1297년(충렬왕 23년)에는 첨의참리세자이보(僉議參理世子貳保)가 되었다. 그 해 12월 집 뒤에 작은 서실을 짓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모셨다.

1298년(충렬왕 24년/충선왕 원년) 원나라의 간섭으로 충렬왕이 물러나고 세자인 장(璋)이 충선왕으로 즉위하면서 시행된 관제 개혁에 따라 집현전태학사 겸 참지기무 동경유수 계림부윤(集賢殿太學士 兼 參知機務東京留守鷄林府尹)이 되고 다시 첨의참리 수문전태학사 감수국사(僉議參理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가 되었다. 1298년 8월 충선왕을 따라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그의 3번째 원나라 여정이었으며 생애 마지막 국외 활동이 된다. 1299년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되자 1300년(충렬왕 복위 1년)에 수국사(修國史)가 되었으며 이어서 광정대부 찬성사(匡靖大夫贊成事)에 올랐고 얼마 뒤 최고 관위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되었다.

1303년(충렬왕 복위 4년) 밀국학학정(國學學正) 김문정(金文鼎)을 중국 강남(江南 : 현재의 난징(南京).)에 보내어 공자와 72현의 화상, 문묘에서 사용할 제기(祭器)·악기(樂器) 및 육경(六經)· 제자(諸子)· 사서(史書)· 주자의 저서 등을 구해오게 하였다. 충렬왕에게 청하여 문무백관으로 하여금 6품 이상은 은 1근, 7품 이하는 포(布)를 내게 하여 이것을 양현고(養賢庫)에 귀속시키고 그 이자로 인재 양성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이때 무신인 고세(高世)가 자신은 무관인데 어찌하여 문관을 양성하는 양현고에 재산을 내야 하는가하며 거부하자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만세의 규범이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어버이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을 공경하는 것은 누구의 가르침인가? 무인인 내가 무엇하러 돈을 내어 문인 생도들을 가르치는데 보태느냐한다면 이는 공자를 무시하는 것이니 가당한 일인가?"라는 말로 힐책하여 고세도 양현고에 재산을 내게 하였다.
1303년(충렬왕 복위 4년) 12월 첨의시랑 찬성사 판판도사사 감찰사사(僉議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監察司事)가 되었다.

1304년(충렬왕 복위 5년) 5월 섬학전(贍學錢)을 마련하고 박사(博士) 관직을 설치하여 출납을 관장하게 했는데 국자감 운영의 재정적 원활을 가져왔다. 오늘날의 장학재단 같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1304년 6월 대성전(大成殿)이 완성되자 중국에서 구해온 공자를 비롯한 성인들의 화상을 모시고 이산(李㦃)·이진(李瑱)을 천거하여 경사교수 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임명하게 하였다. 이 해에 판밀직사사 도첨의중찬(判密直司事都僉議中贊)으로 관직 생활을 마쳤다. 도첨의중찬은 재상의 관직에 해당한다.
관직에서 물러난지 2년이 지난 1306년(충렬왕 복위 7년) 9월 12일에 64세를 일기로 개경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향이 세상을 떠나자 국자감과 사학 12공도의 생도들이 모두 소복을 입고 안향의 가는 길을 마중했다고 한다.

3. 사후


안향이 세상을 떠난 뒤, 충렬왕은 직접 장단(長湍 : 경기도 장단군)의 대덕산(大德山)에 장지를 마련해 주었으며 그의 장례가 끝나자 문성(文成)이란 시호를 내렸다. 안향은 이후의 사대부들에게 도학의 시조로 추앙받으며 성인으로 떠받들어졌고,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성균관 유생들이 제사를 모실 정도로 학자들에게 숭앙받았다.
안향이 세상을 떠난 지 12년이 지난 1318년(충숙왕 5년)에는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원나라 화공을 불러 그의 초상을 그리게 하는데, 이 초상은 이후 안향의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조선 명종 때 다시 복제하였고, 이 복제본이 1962년 12월 20일 국보 111호로 지정된 회헌영정(晦軒影幀)이다. 이 초상화가 그려진 다음해인 1319년에는 문묘에 안향의 신주를 모시게 되었고, 조선시대에 문묘가 다시 지어진 뒤에도 안향의 신위는 제향신위로서의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안향의 생가가 있던 내죽리(內竹里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그의 사당을 세우고 이듬해에는 풍기군의 학사를 안향의 사당으로 옮겼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549년(명종 4년)에는 풍기군수로 재임중이던 퇴계 이황(李滉)이 조정에 상소를 올려 백운동서원에 명종의 친필로 쓰여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이것이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시작으로, 300년 후에 흥선대원군이 전국에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도 이곳은 철폐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소수서원은 지금도 순흥의 유적지로 남아있으며, 앞서 언급한 국보 111호 회헌영정도 이곳에서 봉안하고 있다. 또한 지금은 그 인근인 순흥면 청구리에 안향과 주세붕, 주자 등의 인물들의 유적을 소개하는 소수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1643년(인조 21년)에는 안향의 묘소 근처인 봉잠산(鳳岑山) 기슭에 장단군의 유생들이 임강서원(臨江書院)을 세워 안향을 모셨으며, 이 외에도 전라남도 곡성군에도 안향의 영정을 모신 회헌영당(晦軒影堂)이 세워졌다.
1931년, 안향의 후손 안순환은 중원대전 중 공묘가 파손되는 일이 발생하자 조선 유림계를 대표하는 사절단을 구성하여 공자의 77대 종손 쿵더청을 만나 위로하였다.
참고로 안향은 조선 문종 이후로는 안유(安裕)라는 초명이나 안향(安向)이라는 표기로 불리게 되는데, 이것은 문종의 이름이 안향과 같은 '옥이름 향(珦)'이었으므로 피휘를 위해 초명으로 부른 데에서 기인한다.

4. 사상


안향은 '''일상생활에서 유학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유학이야말로 인간이 따라야 할 사실상 유일하게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성리학의 가르침을 원나라에서 접하고, 직접 그것을 연구하며 고려로 가져와서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로 하여금 배우게 하여 사실상 한국 성리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제자로 유명한 인물이 이진[4], 권보[5], 우탁, 백이정[6], 이조년[7], 신천.
또한 성리학의 개조인 주자를 존경하고, 그의 호인 회암(晦菴)에서 회(晦)를 따와서 스스로의 호를 회헌(晦軒)이라고 할 정도로 주자성리학을 깊이 따랐다. 그러나 태극이나 기를 논하는 차원이 아닌, 배움에 몸을 담은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올바른 도리를 배우기 위해 성리학을 권장했고, 성리학이 뿌리를 내린 조선시대로 가면서 안향의 원론적인 성리학 이념은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남명 조식, 화담 서경덕등에 의해 태극과 기, 우주를 논하는 심오한 체계를 굳혔다.
그리하여 성리학은 조선의 골자로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불교 국가였던 고려의 유학자인 안향이 생각했던 올바른 유학의 모습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이 성리학을 교조화마며 틀어지게 되었다.

[1] 순흥은 현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을 가리킨다.[2] 안향이 노비들을 성균관을 위해 일하라고 보내어 그 후손들이 대대로 반촌에 살았는데 안향의 후손이 성균관에 들어오면 옛 주인의 후손이 오셨다며 극진히 대했다. 결정적으로 안향의 먼 후손이 바로 안중근이다.[3]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4] 이제현의 아버지.[5] 이제현의 장인[6] 이제현의 스승[7] 고려말 권신 이인임의 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