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빈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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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문종의 간택 후궁.
2. 생애
2.1. 세종대왕 시절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한성부윤 홍심(洪深)과 이조참의 윤규(尹珪)[1] 의 딸인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종 대 좌의정을 지낸 응(應)[2] 의 누이이기도 하다. 왕세자 이향의 세자빈 휘빈 김씨가 미신 사건으로 쫓겨난 후 들인 순빈 봉씨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권씨, 정씨[3] 와 함께 세자의 후궁인 승휘로 간택되어 입궁했다. 그 중 권씨와 홍씨가 총애를 얻었고, 그 중 권씨는 딸 2명[4] 을 낳았다.
이후 순빈 봉씨마저 폐출되면서 권씨와 홍씨가 새 세자빈의 후보에 올랐을 때, 문종은 홍씨를 조금 더 낫게 여겼으나 당시 권씨가 홍씨보다 연상에 품계도 권씨가 더 높았고 이미 딸을 낳았기에 의리상 세자빈에 적합하다는 세종대왕의 판단으로 새 세자빈은 권씨가 되었다[5] . 이후 홍씨도 딸을 낳았으나 그 딸은 4살에 일찍 사망했다. 이후 권씨가 단종을 낳고 사망하자 새 세자빈을 뽑자는 논의가 잠시 이루어졌으나 유야무야되었고, 세자궁은 홍씨가 맡아 다스렸다.
2.2. 문종 시절
문종이 즉위하자 종1품 귀인에 책봉되었다. 비록 후궁이지만 왕비의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내명부는 홍씨가 다스렸다. 후궁이라고는 하나 다른 간택 후궁들과는 다르게 혼자 귀인[6] 으로 책봉된 점, 내궁(內宮)이라는 별호를 따로 받고 명나라 사신이 예궐하여 그녀에게 선물을 바친 점을 볼 때 실질적으로는 왕비의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7] .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의혹이 있는데, 문종 대에 실질적인 왕비 역할을 한 인물로 공빈 최씨가 영조실록에 등장한다. 현덕왕후 권씨를 관련 문헌에 "원비"라고 적었는데, 보통 원비라 함은 뒤에 계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적합한 문헌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의문으로 끝났다. 그리고 명사(역사책)에는 "조선 국왕과 왕비 '''최씨'''에게 고명과 면복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빈 최씨 묘비에는 예종의 후궁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공빈 최씨의 아버지인 최도일[8] 의 묘비에는 공빈 최씨가 문종의 왕후라고 표기되어 있다. 세조실록에는 "최도일의 딸을 세자의 후궁인 소훈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는 '''공빈 최씨는 문종의 계비가 아니고 명사가 틀렸다'''는 결론을 내었다.영조실록 정조 15년에 다시 이 문제가 재차 상소에 올라와 다시 조사한 결과 역시 공빈 최씨는 문종의 계비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와, 정조는 이 결론을 조보에 반포하여 뒷말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한다.정조실록 하지만 이 문제는 고종 24년(1887년)까지 끈질기게 상소에 올라오고 있다.고종실록
2.3. 단종 시절
이후 홍씨는 단종 즉위년 정1품 빈의 품계를 받아 숙빈(肅嬪)이 되었다. 단종이 즉위한 뒤에 그의 유모였던 세종대왕의 후궁 혜빈 양씨의 궁궐 내 영향력이 커졌는데, 이를 경계한 수양대군이 양씨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9] 귀인이었던 홍씨를 빈으로 높였다는 해석이 우세하다[10] . 다만 홍씨가 양씨와 갈등했다는 기록은 딱히 찾아볼 수 없고, 단종비(정순왕후 송씨)의 간택에도 같이 참여한 것을 보면, 양씨와 사이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홍씨가 수양대군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자세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본인은 물론이고 아들들까지 죽임을 당한 혜빈 양씨에 비해 말년까지 비교적 평온한 삶을 살았던 것을 보면 적어도 중립을 지키며 방관한 것은 확실해 보인다.
3. 여담
문종의 정실이나 후궁들 중 문종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실록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기록에는 항상 '총애를 받았다'나 '믿고 중히 여기었다' 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평소 과묵하고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던 문종이 남들이 다 알 정도로 총애를 드러냈을 정도니 정말 각별히 사랑했던 듯.[11]
남편인 문종과는 외조부 윤규를 통해 이중, 삼중으로 인척을 형성하고 있다.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는 홍씨의 종이모이고, 문종의 후궁인 소용 윤씨는 윤규의 아들 윤희의 딸로 홍씨와는 외사촌관계이다. 또 다른 문종의 후궁인 숙의 문씨는 홍씨의 5촌 조카다[12] . 애초에 홍씨가 세자의 후궁에 간택될 수 있었던 것도 태종의 과거시험 동지였던 윤규의 손녀딸이라는 점이 한 몫 한듯 싶다[13] .
[1] 조선 초의 문신으로 태종의 과거급제동기이기도 해서 많은 후대를 받았다. 형조좌참의로 있을 당시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죄를 엄히 다스리라는 소를 올리기도 했다. 정희왕후의 아버지인 파평부원군 윤번은 그의 남동생이다.[2] 성종의 누이인 명숙공주의 시아버지이며, 성종의 문묘에 배향되었다.[3] 정갑손의 딸이자 정창손의 조카. 훗날의 소용 정씨[4] 큰딸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고, 작은딸이 훗날의 경혜공주다.[5] 당시 권씨의 품계는 정3품 양원이었고 홍씨는 여전히 승휘였다.[6] 홍씨 외의 다른 간택 후궁들은 모두 정3품 소용의 품계를 받았다. 그 중 소용 정씨는 홍씨와 같은 시기에 입궁했고, 당시 문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상태였다.[7] 당시 명나라 사신은 왕과, 세자, 홍씨에게만 선물을 바쳤다. 게다가 당시의 상황을 실은 기사를 보면 왕과 홍씨, 세자의 순으로 기록되어있는데 보통 실록에서 인명을 기록할 때 신분이나 지위 순으로 기록하는 것을 따져보면 이는 굉장히 이례적인 경우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왕비의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에서 홍씨가 문종의 실질적인 아내 대우를 받았고, 명나라 측에서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8] 구성군의 아버지 임영대군의 처남이다.[9] 단종에게 홍씨의 품계를 높이자고 청한 강맹경은 수양대군의 측근이었다.[10] 세종대왕의 많은 후궁들 중 하나였던 승은후궁 양씨와, 문종의 실질적인 아내 역할을 수행하고 명나라의 공인도 받았던 간택 후궁 홍씨의 정통성을 비교해 보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11] 홍씨가 승휘 시절에 낳은 딸은 작위를 받기 전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다른 말이 없이 홍씨의 딸이 죽은 사실만 실록에 따로 기록되어 있다. 이 또한 작위도 받지 못한 세자의 서녀치고는 대단히 이례적인 경우이다.[12] 문씨의 어머니는 홍씨의 이종사촌자매이다.[13] 남양 홍씨는 명문가 중 하나지만, 홍씨가 후궁에 간택되는 시점에서 증조부 홍유룡은 여러 번 사고를 쳐서 파직을 당하는 등 인품이나 처세에 대한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조부 홍덕보는 아예 과거시험에도 합격하지 못했다. 아버지인 홍심도 딸이 세자의 후궁이 되기 전까지는 그다지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