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 송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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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6대 국왕 단종의 왕비. 단종보다 1살 많았으며, 본관은 여산. 시호는 의덕단량제경정순왕후(懿德端良齊敬定順王后)이다.
여산부원군 송현수와 여흥부부인 여흥 민씨[1] 의 딸이며, 비교적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다. (단, 할아버지 송복원은 판중추였다.) 원래 태어난 곳 자체가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현 칠보면)으로 상경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대왕의 8남 영응대군의 부인(계부인) 대방군부인 송씨는 그녀의 고모였다.[2] 영응대군의 본부인은 영양위 정종의 누이. 계유정난이후 문종의 국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도 수양대군의 강권으로 단종과 혼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등등 자신의 지지세력들이 숙청당하자 남편이 숙부에게 양위하면서 정순왕후도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존봉되었다. 하지만 단종 복위 운동이 계속되자 남편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되고 그녀 또한 서인으로 전락했다.
2. 생애
민담에 따르면 정순왕후 송씨는 단종이 유배된 후에 결국 출가했으며[3] , 단종이 죽은 후엔 무척이나 슬퍼해 매양 앞 산에 올라가 영월을 바라보며 통곡했다고 한다.[4][5] 청계천의 영도교가 그녀와 단종이 헤어진 다리라고 하며, 이를 소재로 김별아가 <영영이별 영이별>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사실 신숙주가 폐서인된 정순왕후를 첩으로 삼았다거나 노비로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건 사실이 아니다. 사육신 사건과 같은 반정이 터지면 관련 부녀자들은 노비가 되는데 이중 직접 관련 인물들은 관노도 아니고 대신들에게 사노비로 하사한 사례가 특히 조선 초기에는 많았다. 때문에 사육신 사건 이후에도 그 부녀들이 대신들에게 하사되었는데, 그 목록이 모두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신숙주에게 내려진 것은 최면의 누이 선비와 조완규의 아내 소사와 딸 요문 뿐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 저런 청을 했다면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에 그야말로 미친듯이 까였을 것이다. 안그래도 숙주나물 소리를 들으며 인간 말종 취급받는 판국에.
조선 말 3대 문장가로 꼽히는 김택영이 쓴 역사서 '한사경'[6] 에 "좌의정 신숙주가 노산군의 부인(정순왕후)을 노비로 삼고자 주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세조가 조카를 죽이고 여러 아우들을 살해하여 임금의 지위를 훔친 것도 사악한데 (신숙주가) 단종의 부인을 노비로 삼겠다고 청한 것은 매우 간사하고 악한 짓"이라고 평했다. 물론 김택영의 저 기록은 전혀 문헌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무시당한다. 신숙주의 평가가 얼마나 떨어지고, 이후 신숙주를 비판하는 문학작품들이 나오는 계기중 하나로 평가 받을 뿐이다.
기록 상으로는 세조실록 9권, 세조 3년 10월 24일 갑인 3번째 기사에 따르면 한편 '''세종대왕의 부마로 정현옹주의 남편인 윤사로는 공신이 되자 송현수의 딸을 상으로 받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세조 8년 3월 16일 기사를 보면 '''자녀들'''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10월 24일 기사에도 "송현수(宋玹壽)의 아내는, 노산군(魯山君)의 아내를 위하여 그 죄를 용서하고, '''그 밖의 딸들'''은 역시 당연히 공신(功臣)에게 주어야 하는데" 라는 표현이 나온다. 앞선 기사에서 송현수는 관노가 되었고 그 일가도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 가족들을 공신들이 나눠먹고 싶다고 욕심 부리는 내용이지만 그 와중에도 노산군비의 모친이라는 이유로 송현수의 아내는 풀어주라는 청원이다. 이걸 노산군 비를 달라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는 없다. 송현수의 다른 자손들에 대한 정보가 없어서.[7]
또한 야사에 의하면 정순왕후를 가엾게 여긴 인근의 여인네들이 정순왕후의 집에 끼니거리를 가져다 주었는데,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그 일을 금지해 버렸다. 그러자 여인들은 꾀를 내어 정순왕후의 집 근처에 남자들이 들어올 수 없는 여자만의 작은 채소 시장을 열어 채소를 파는 척 하면서 먹을 것들을 모아 정순왕후에게 몰래 가져다 주었다는 훈훈한 이야기도 전한다.
다만 정순왕후는 출가하지 않았고 지금의 동대문 밖에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경혜공주의 아들로 그녀에게는 시조카가 되는 정미수가 수양아들로 들어오면서 정미수의 집에 거주하였고 그곳에서 세상을 떴다고 한다. 무척 장수해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중종 16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남편과는 대조적으로,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역대 왕비 중 두 번째로 장수한 왕비'''다.[8][9] 즉,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가 요절하고 뒤이어 세조, 예종, 성종의 치세를 거쳐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이 한명회를 부관참시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행각을 벌이다가 폐위된 것, 세조의 또 다른 증손자인 중종이 즉위해 첫 번째 아내 단경왕후 신씨를 내쫓고 2번째 아내 장경왕후와 사별한 뒤 3번째 아내 문정왕후와 혼인하는 것까지 모두 보고 죽은 것이다. 죽을 당시 세자였던 인종은 그의 먼 증손자뻘이 된다.
정순왕후 송씨는 여막에서 동냥을 하고 염색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10][11] 낙산에 정순왕후가 천을 염색할 때 사용했다는 자주동천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정순왕후가 물에 천을 넣자 천이 저절로 자주색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세조의 도움은 끝까지 거부했다. 세조는 그녀를 노비로 전락시켜 버렸지만 노역은 시키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녀에게는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죽기 얼마 전, 중종이 노산군의 묘지를 찾아 봉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라는 명이 내려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편 단종과 함께 묻히지는 못했다. 그녀의 장례는 나라에서 대군 부인의 예로 치렀는데, 정작 단종이 대군의 지위로나마 복위된 것은 그보다 160년 지난 1681년 숙종 때이다. 그녀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사릉(思陵)이다.[12] 평생 남편을 생각하고 그리워(思)한 그녀의 일생에 걸맞는 능호. 경춘선의 사릉역은 그녀의 이 능호에서 유래한다. 다만 사릉에는 사릉역보다 그 다음역인 금곡역이 더 가깝다. 왕릉으로 격상되기 전에는 시자부(媤姉夫) 격인 정종의 집안인 해주 정씨 가문에서 그녀의 무덤을 관리해 주었다. 현대에도 사릉 인근에는 해주 정씨 집안의 개인묘들이 들어서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단종과 정순왕후를 합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한때 제기되기도 했지만 흐지부지. 사릉에 심어진 소나무들[13] 은 하나같이 가지를 동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이는 왕후가 남편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기 때문이라 하여 1999년 4월 9일 사릉에 심어져 있던 소나무 하나를 장릉에 옮겨 심고 '정령송(精靈松)'이라 명명했다. 사후 478년만이다.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가 성종 즉위 후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순왕후에게 의식을 공급해주도록 명했고,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과 세종대왕의 후궁 혜빈 양씨[14] 의 자손들을 복권시켜 줬다. 아마도 선왕의 비인 자신이 살아있을 때 어느 정도 물꼬를 터놔야만 나중 임금들이 "후속 조치"를 수월히 취할 수 있으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조선/역대 왕비 중 처음으로 국왕과 혼인한 왕비이기도 하다. 태조부터 세종까지는 잠저 시절에 혼인했으며, 문종의 비 현덕왕후는 아직 세자빈이었을 때 사망하여 남편이 즉위한 이후 왕비로 추증되었다.
3. 창작물에서
파천무에서 가녀리고 약한 정순왕후를 연기했던 신은경은 훗날 황후의 품격에서 황실을 말아먹는 희대의 싸이코 태후 강씨로 열연한다. 그래서 수양대군에게 남편과 가문을 잃고 한을 품고 죽은 정순왕후가 환생해서 수양대군의 후손들을 철저하게 파멸시켜 복수했다는 섬뜩한 배우개그가 있다. ㅎ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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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은 민대생의 동생이다. 민대생은 한명회의 장인. 즉, 한명회의 처와 송현수의 처는 사촌간이다.[2] 이 외손자가 나중에 연산군의 유일한 핏줄인 휘신공주와 이어진다. 폐비 신씨 참고.[3] 청룡사라는 절에서 지냈다고 한다. 현재 종로구 창신동에 있다.[4] 현재 낙산 줄기의 종로구 숭인동 동망산 동망봉(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이 그곳이며, 2008년부터 정순왕후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또한 이 근처를 정순왕후 유적지로 지정해 놓았다. 대중교통으로는 서울 지하철 6호선 창신역이 가깝다.[5] 달동네를 재개발 하면서 지은 보문자이파크뷰 시공사에서, 정순왕후와 산신령을 모시던 산신각도 재건축 했는데 규모는 전보다 화려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남향으로 짓는 만행을 저질렀다. 본래 단종의 귀양지인 영월을 바라봐야 의미가 있건만. 또한 강신목인 은행나무도 복원되지 않았다.[6] 김택영이 중국에 망명 간 이후에 쓴 책으로, 조선 역사에서 저자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에 대해서 비판해서 논란이 되었다. 워낙에 자의성이 강해서 김택영 본인도 이걸 역사책이라고 단언하지 못하고 '경'을 추가로 붙인 것. 단적으로 이 책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을 '''고려에 대한 찬탈로 기록'''해서, 김택영은 사적(史賊)으로 낙인 찍혔다. 당연히 세조의 집권도 비판 대상이었기 때문에 쓰여진 것이 본문 내용이다.[7] 송현수의 자녀로 기록에 남은 것은 본 인물과, 성종대에 과거를 치를 수 있게 허락 받은 송거 뿐이다. 딸이라고 하면 한명뿐이라고 착각해서 적히는 내용이다.[8] 참고로 첫번째로 장수한 왕비는 '조 대비'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신정왕후 조씨. 조 대비는 실제로는 세자빈에서 바로 대비로 격상된 상황이라 정순왕후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왕비 노릇은 거의 하지 못했다. 화려해 보이는 왕후의 삶이 한편으로는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하고 고생스러운 것인지 엿볼 수 있는 부분.[9] 하지만 아래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정순왕후는 동냥에 염색업 등 갖가지 고된 일로 생계를 이어 나갔던 터라, 정순왕후의 장수를 왕후의 삶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떻게든 살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같은 느낌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위에 언급된 소설 <영영이별 영이별>에서도 '살아남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복수였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10]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염색업은 '''정말로 힘든 막노동'''이다. 왕비였던 양반가 여성이 동냥과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야했다는 것은 세조의 탄압이 보통이 아니었다는 의미. 후에 도와준다고는 했지만 말년의 변덕이란 느낌도 없잖아 있는지라...[11] 다만 세조 사후엔 하지 않았을듯하다. 성종 즉위 이후 대비가 된 정희왕후가 의식을 공급해줄 것을 명했기 때문.[12] 정순왕후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세조도 죽은 후 오늘날 남양주시에 묻혔는데, 세조와 정희왕후 내외가 묻힌 광릉은 남양주 진접읍에 있다.[13] 문화재청 관할 하에 있는 사릉 내 양묘사업소에서 궁궐과 능원에 필요한 소나무를 기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 사적지에서 자라는 어린 소나무들은 대부분 사릉 출신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나무의 생장을 위해 사릉은 일반인에게는 비공개로 유지되고 있다.[14] 단종의 유모이기도 해서 단종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 세력을 숙청하려는 세조에게 희생당한다.[15] 1997년 EBS 드라마 '감성세대'에 악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16] 용의 눈물에서도 단종 역을 맡았던 정태우와 부부로 연기한다. 거기서는 무안대군과 그 부인.[17] 대장금의 아역으로 홍시 드립을 쳤던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