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빈 양씨

 


'''조선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 | 惠嬪 楊氏
'''
'''시호'''
문혜(文惠)[1] 민정(愍貞)[2]
'''빈호'''
혜빈(惠嬪)
'''출생'''
미상
'''사망'''
1455년(단종 3년) 11월 9일[3]
'''재위'''
? ~ 14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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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청주(淸州)
'''부모'''
부친 남평현감 양경[6]
모친 이씨
'''부군'''
조선 세종
'''자녀'''
3남
(1남) 한남군
(2남) 수춘군
(3남) 영풍군

1. 개요
2. 생애
2.1. 세종대왕 시절
2.2. 단종 시절
2.3. 죽음
3.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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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세종대왕후궁. 세종의 손자인 단종을 돌보아준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세종대왕 시절


현감 양경과 부인 이씨의 외동딸로 태어나 궁녀가 되어 지병으로 병약한 세자 이향를 보살피던 중 세종대왕의 후궁이 되었고, 귀인으로 책봉되어 그녀의 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다.
이후 정1품의 빈에 오른 후 혜빈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았다. 자식으로는 세 아들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을 두었다.
그녀가 그녀 자신의 막내아들 영풍군을 키우고 있을 당시, 세자빈 권씨가 단종을 낳은 후 3일 만에 갑자기 죽게 되자, 세종은 문종에게 알려서 문종의 유일한 적자녀인 경혜공주단종 남매를 그녀에게 키우도록 명했고 그녀는 기뻐하며 자청했다.
특히 그녀는 직접 업어키운 단종에게 각별한 애정을 느꼈고, 단종 역시 늘 그녀의 품에서 잠들길 원할 정도였다. 단종은 왕이 되어서도 그녀의 처소에서 지내길 희망했으나 수양대군이 모사를 걱정해서 그걸 막았다.

2.2. 단종 시절


세종이 죽자 관례에 따라 세종의 또 다른 후궁인 신빈 김씨와 함께 비구니가 되어 궐을 나가 산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 후 왕위에 오른 문종이 재위 2년여 만에 죽고 12살의 단종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때 산에 있던 그녀가 다시 궁으로 들어와 단종을 보필하였다.
그러나 그녀가 궁중을 장악할 것을 염려한 수양대군이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의 작위를 숙빈으로 높여 그녀를 대신하게 하자, 그녀는 더 이상 단종을 보필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숙빈 홍씨는 간택 후궁 출신이자 문종의 후궁 중 유일하게 귀인 품계일 정도로 가장 총애 받았고, 왕비가 없는 문종 시절 내전을 다스렸기에 내명부의 역할을 하기는 숙빈이 더 명분이 있었던 데다, 숙빈 홍씨에게는 자녀가 없었기에 수양대군에게 더 유리했다. 그녀는 이 일로 수양대군을 원망한 듯 하다.
이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로 단종이 선위하고 수양대군이 보위에 오르자, 혜빈 양씨는 금성대군 등과 결탁하여 전횡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탄핵당하고 가산이 적몰된 뒤 청풍으로 유배를 갔다.

2.3. 죽음


이후 신하들이 그녀를 죽이기를 청하자, 세조(수양대군)는 상왕 단종이 죽이지 말라고 청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결국 같은 해인 1455년 교수형[4]에 처할 것을 명했다. 그녀의 세 아들들도 유배지에서 병사했다.

3. 드라마


원래 단종의 유모였던 만큼 단종의 지지세력 중 핵심 일원이었는데다가 박팽년과 사돈관계였던지라 그만큼 수양대군과 대립하다 죽은 인물이지만 몇몇 정통 사극을 제외하고는 계유정난 사극에서 잘 등장하지 않는다.
본격 세조를 미화하는 사극인만큼 상당히 권력욕이 강한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정실 왕비도 아닌 후궁. 그것도 궁녀 출신 후궁임에도 불구하고 궁궐 안에 왕실 어른이 없다 보니 “내가 주상의 할미니라!”라고 외쳐대면서 대왕대비인 마냥 행세하고 단종한테도 윽박도 많이 질러대는, 감히 간택 후궁도 하지 못할 행동을 한다. 게다가 수양대군을 자신의 처소로 불러들여 어미 행세를 하기도 한다. [5] 하지만 수양대군계유정난 이후 정권을 잡고 나서 중전을 궁궐로 들인 이후, 내명부에 안주인이 생겼다는 이유로 궁궐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 후 역사대로 단종 복위에 가담했다가 교형당해서 사망한다.

[1] 1713년(숙종39) 4월 2일, 숙종이 내린 시호다. # [2] 1791년(정조15) 5월 27일, 정조가 내린 시호다. # [3] 세조에 의해 교수형을 당해 사망했다. [4] 조선 왕조에서 사형을 당한 후궁들은 더러 있었으나, 대부분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심지어 양씨는 세조에게는 자신의 아버지를 모신, 즉 어머니뻘 되는 후궁이다. 그런 사람을 교수형으로 죽인 것이다.[5] 혜빈의 생년이 전해지지 않는 만큼 정확한 나이는 알기 어렵지만, 아들 영풍군이 1434년생이고, 영풍군의 장인 박팽년세조와 동갑내기인걸 봐서 수양대군과 비슷한 나잇대로 유추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첩인 서모도 엄연히 어머니로 대접해야 했던 조선 시대 예법 상 수양대군은 혜빈을 어머니로 대접해야하는 건 맞긴 하다. 다만 수양대군이 서자도 아니고 정실부인이자 혜빈보다 신분이 까마득히 높던 윗사람인 중전의 아들이기 때문에 과거 승은을 입기 전인 궁녀 신분으로 했다간 삼족이 멸할 행동인것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