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왕후

 



'''현덕왕후
(顯德王后)'''
'''시호'''
인효순혜현덕왕후
(仁孝順惠顯德王后)
'''출생지'''
홍주(洪州) 합덕현(合德縣) 사저
'''사망지'''
경복궁 자선당
'''본관'''
안동(安東)
'''배우자'''
문종(文宗)
'''아버지'''
화산부원군 권전
'''어머니'''
해령부부인 최씨
'''생몰'''
'''기간'''
음력
1418년 3월 12일 ~ 1441년 7월 24일
양력
1418년 4월 17일 ~ 1441년 8월 10일
'''재위'''
'''기간'''
1436년 ~ 1441년
1. 개요
2. 생애
2.1. 출생
2.2. 후궁 시절
2.3. 세자빈이 되다
2.4. 원손을 낳다
2.5. 죽음 이후
3. 사후의 폐위와 복권
4. 살아 있었다면?


1. 개요


문종의 추존 왕후이자, 단종의 어머니이다.
세종대왕소헌왕후의 큰며느리이다.

2. 생애



2.1. 출생


본관은 안동 권씨. 태종 18년(1418년)에 화산부원군 권전과 해주부부인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2.2. 후궁 시절


세자의 첫 번째 세자빈인 휘빈 김씨가 폐위되고 순빈 봉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는데, 세자과 순빈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후사를 염려한 세종대왕허조의 조언을 듣고 세자에게 권씨, 정씨[1], 홍씨 3명을 승휘(세자의 후궁)로 들여주었다.
승휘 권씨는 두 딸을 낳았는데 첫째 딸은 태어난 지 1년이 되지 않아 요절하였고, 둘째 딸이 경혜공주이다.

2.3. 세자빈이 되다


순빈 봉씨마저 폐위되어 세자빈 자리가 공석이 되자 새로 간택하지 않고, 세 후궁 중 한 명을 승급시키기로 하였다. 양원 권씨가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세자승휘 홍씨를 세자빈으로 삼고 싶어 했지만, 세종은 "이미 딸을 낳았으며 홍씨보다 나이도 많고 품계도 높은[2] 권씨가 합당하다."고 하였다.
세자빈으로서 가례(嘉禮)를 치르지 않고, 세자빈으로 봉한다는 교지만 받았다.[3] 오늘날로 비유하면 혼인신고만 하고 결혼식은 올리지 않았다. 두 명의 세자빈을 폐하고 세 번째 세자빈을 들인 것이기 때문에 절차를 간소하게 하였다.

2.4. 원손을 낳다


세종의 기대대로 권씨는 1441년 7월 23일에 경복궁 자선당에서 원손을 낳았다.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대사면령을 내렸는데 그 자리에서 큰 초가 떨어졌다. 세종은 이를 불길하게 여겨 초를 치우게 했다.
권씨는 단종을 낳은 다음날 산욕열로 사망하였다. 향년 24세. 권씨가 세상을 떠난 후, 세종후궁혜빈 양씨가 권씨의 아이를 돌보았다. 문종은 더 이상 정실부인을 들이지 않았다. 문종 즉위 후 행사에서 왕비 역할이 필요할 때에는 숙빈 홍씨가 대행하였다.

2.5. 죽음 이후


시호는 현덕빈(顯德嬪). 남편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왕후로 추존되었으며 아들 단종이 즉위하자 '인효순혜(仁孝順惠)'라는 존호가 더해졌다. 즉, 정식 시호는 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 안산 소릉에 장사지냈으며 후에 문종과 함께 현릉에 합장되었다.

3. 사후의 폐위와 복권


현덕왕후의 어머니 최씨와 남동생 권자신은, 성삼문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1456년 처형되었다.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다. 이 여파로 아버지 권전과 현덕왕후는 각각 서인으로 격하되고, 현덕왕후의 신위는 종묘에서 내쳐졌다. 태종도 하지 않았던 짓을 한 셈.[4] 세조가 괜히 패륜왕이라고 욕먹는게 아니다. 성종 때는, 현덕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받은 교명 등이 불살라지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성종 친정시기보다는 수렴청정기에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성종 때에도 현덕왕후의 신원을 복원해달라는 상소가 있었지만 성종은 불허하고 이 일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조가 형인 문종의 무덤을 파헤쳐서 현덕왕후의 관을 꺼낸 뒤, 시신을 화장해서 뼛가루를 바닷가에 버렸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거짓이다. 실제로 이것과 같은 소리를 실록에 올려놓은 김일손무오사화때 아주 제대로 작살이 났는데다가 진짜 이랬다면 다시 현덕왕후를 문종과 합장할 수 있었을 리 없다.
연려실기술 등 야사에 따르면 단종 사후 세조가 꿈을 꿨는데, 죽은 현덕왕후가 시동생 세조에게 분노하면서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라고 저주를 퍼부었다고 한다. 꿈에서 깬 세조에게 환관이 급히 달려와 아뢰기를, 세조의 아들인 의경세자가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분노한 세조가 안산에 있는 소릉(현덕왕후의 예전 능)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 시신을 망치로 부수고 소각해서 강에다가 던지고 현덕왕후 신위를 종묘에서 내쳤다는 것. 그러나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려운데, 의경세자가 사망한 날은 1457년 9월 2일, 단종이 사망한 날은 1457년 10월 21일로 오히려 단종보다 의경세자가 먼저 사망하였다.
성종 때 남효온이 현덕왕후를 복권할 것을 상소하기도 하였으나 반대 여론이 심해 이뤄지지 못하였다. 중종 때에, 그녀가 살아있을 당시 친정이 역모에 관여되었다 하더라도 왕후가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폐서인하지 않는 법인데, 이미 죽은 뒤의 일로 연좌한 것은 지나치다는 이유와 문종이 혼자 종묘에 모셔져 있으니 신하로서 보기 민망하다는 이유로, 1512년 왕후로 복위되어 1513년 동원이강릉 형태로 현릉에 다시 안장되었다.
처음에는 일부 신하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였으나,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자 비로소 현덕왕후의 복위가 이뤄졌다.
아들의 비극적인 죽음과 이후 벌어진 세조의 참혹한 만행 때문에 관련된 야사가 많다.
야사에 따르면 유순정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앞장서서 반대하였는데, 어느 날 권민수가 숙직을 서다가 꿈을 꾸었다. 현덕왕후의 외손자인 해평부원군 정미수와 유순정이 크게 싸우는데, 유순정이 궁색해하는 꿈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유순정이 병사하니, 사람들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반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다른 야사에는 현덕왕후의 관이 바닷가에 버려졌는데, 한 승려가 바닷가에서 여자의 통곡 소리를 들었다. 놀라 나와 보니, 여자는 없고 빈관만 있었다. 승려는 괴이쩍게 여겨 관을 풀로 덮었는데, 시간이 흐르자 바닷가 언덕 중 하나가 되어 아무도 위치를 알지 못하였다. 중종 대에 현덕왕후가 복위되자 관을 찾기 위해 언덕을 팠는데, 아무리 파도 관을 찾을 수 없었다. 하루는 감역관이 꿈을 꿨는데, 현덕왕후가 시녀들을 대동하고 나타나서 "너희가 고생이 많다"고 위로하였다. 감역관이 꿈에서 깬 뒤 땅을 파자 바로 시신없는 빈관이 나왔다고 한다.

4. 살아 있었다면?


단종 출산 이후까지 살아있었다면 아마 어린 단종 대신 수렴청정을 하였을 것이고, 단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안정적으로 뒷받침 해주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므로 수양대군이 왕이 되려는 시도는 실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단종이 성인이 되었다면 후계자를 보았을 가능성도 크므로, 수양대군은 옥좌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시어머니 소헌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왕권이 불안정할 가능성이 없진 않다. 수양대군 입장에서도 어머니보다는 형수가 만만할테니 말이다. 실제로 조선 이전의 고려왕조 시기 숙종은 형수인 사숙태후가 섭정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카 헌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차지한 전례가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당시의 숙종은 명분도 어느 정도 있었고 종친들과 신료들에게 상당히 신망을 받고 있던 것과는 달리[5] 세조는 고려 숙종보다는 서열이나 명분, 인망 등 모든 부분에서 왕위에 오르기에는 상당히 불리했다. 따라서 고려의 숙종이 무력으로 사숙태후와 헌종을 축출하여 왕위를 찬탈하였듯이 세조가 단종과 현덕왕후를 축출시키며 왕위를 찬탈, 정권을 장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즉 불안하다는 것도 앞서 언급했듯이 어디까지나 소헌왕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 뿐이지 결국 승자는 현덕왕후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 훗날의 소용 정씨. 슬하에 요절한 왕자를 두었다.[2] 이때 권씨는 양원으로 책봉되어 있었다. 첫째 딸의 사망 기사에 승휘 권씨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혜공주를 낳은 후 양원으로 책봉된 듯 하다.[3]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812029_002[4] 태종은 동복형인 회안대군이 자신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어도 죽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태종은 계모 신덕왕후를 엄청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우를 후궁격으로 격하하는 선에서 그쳤다.[5] 게다가 당시 헌종이 워낙 몸이 약했기 때문에 설령 숙종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 해도 헌종의 요절로 자연스럽게 숙종이 왕위를 승계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 사숙태후와 숙종은 비교적 가까운 인척관계로 사숙태후는 인주 이씨인 이석의 딸인데, 이석은 숙종의 생모 인예태후의 오라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