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런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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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미국의 前 농구선수. KBL 역사상 두번째로 높은 순위로 NBA드래프트에 지명된 선수[1] (94년 전체6위, 필라델피아 76ers)이자, 97년 교통사고로 비운의 은퇴를 맞았다가 극적으로 코트에 돌아온 선수이다.
2. 아마추어 시절
조지아 주의 사우스웨스트 고교를 다니면서 맥도널드 올스타에 출전, 일찌감치 유망주로 평가되었던 라이트는 美NCAA 디비전I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컨퍼런스 중 하나인 ACC의 클렘슨 대학 출신이다. ACC는 노스캐롤라이나, 듀크, 웨이크포레스트, 버지니아 등 명문 대학이 즐비한 곳으로, 그곳에서 라이트는 3년 동안 대학 최고의 슛 블로커이자 골밑 재원(14.2득점, 9.8리바운드)으로서 기대주의 길을 걸어왔다.
93년에는 에드 오배넌(UCLA), 데이먼 스타더마이어(애리조나), 에릭 파잇카우스키(네브라스카), 마이클 핀리(위스콘신) 등 전국에서 내로라 하는 대학스타들이자, NBA유망주들과 함께 유니버시아드 대학에 출전해 7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10.7득점, 4.6리바운드, 2블록을 기록, 당시 한국도 출전했는데 22개국 중 13위를 차지했다)
3. 선수 시절
94년 드래프트 전체 6순위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지명된 그는 숀 브래들리와 함께 리빌딩 중이던 팀의 기대주였다. 시즌 첫 해 그의 성적은 11.4득점, 6.0리바운드. 49경기에 주전으로 출장했으며, 특히 데뷔 후 두 번째 경기였던 올랜도 매직전에서는 샤킬 오닐과 호레이스 그랜트를 상대로 23득점, 15리바운드를 뽑아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며 올-루키 세컨드 팀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신생팀 토론토 랩터스에 트레이드 되었을 때만해도 라이트는 계속해서 기대를 모으던 상황이었지만 1997년 7월, 라이트에게 돌이키지 못할 불운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당시 자신이 주최하던 어린이 농구캠프에 참석하던 길이었던 라이트는 코너를 돌다가 밑으로 추락하고 말았고, 이 사고로 왼쪽 어깨와 왼쪽 손이 으스러지는 부상을 입으며 재활 기간만 19개월이 걸렸고 다시 농구공을 잡긴 했지만, 이미 NBA선수로서의 재능은 잃은 뒤였고 1999년 1월 26일에 은퇴를 선언했다. 우리 나이로 겨우 27살. 한참 기량을 꽃피울 때였기에 주위의 안타까움은 더했다.
그러나 라이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NBA 섬머리그와 트레이닝 캠프를 통해 재기의지를 밝힌 것이다. 2000-01시즌에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프리시즌 로스터에까지 이름을 올렸는데 당시 조 스미스를 부정계약으로 잃은 상황이어서 한 명의 빅맨이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라이트의 기량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라이트는 중국에서부터 다시 차근차근 밟아갔다. 2003-04시즌, 폴란드 리그(EBL)에서 9.4득점, 6.6리바운드를 기록하고, FIBA 유로컵에서 12.3득점, 8.1리바운드를 올렸다. 덕분에 팀은 리그 2위에 올랐고, FIBA 유로리그 올스타에 초청되기도 했다.[2]
적어도 유럽무대에서는 통함을 증명한 그는 2004-05시즌, 스페인 ACB의 포럼 필라텔리코에서 드미트리우스 알렉산더(LG 세이커스)와 손발을 맞추면서 9.0득점(야투 53.0%), 6.6리바운드, 1.5블록(리그2위)으로 분전했다. (그 활약상은 ACB 공식 홈페이지內 동영상 코너에서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전주 KCC 이지스에서 엄청난 몸집과 NBA에서의 오랜 경력으로 기대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그는 시즌 내내 시원스럽고 파워풀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시즌 중 아써 롱으로 교체됐다.
그간 허재 감독이 KCC에 맞추려고 했던 스타일의 센터는 아니었다. 즉, 처럼 슛 거리가 멀고 패스를 할 줄 아는 센터는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 시절부터 그는 패스 능력이 부족했고 가드를 살리는 능력이 부족한 선수로 지적되어 왔다. 그간 센터를 밖으로 빼고, 안쪽에서 찰스 민렌드나 이상민, 추승균 등의 1대1 능력을 활용하던 스타일은 허재의 부임으로, 그리고 라이트의 합류로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그러나 어느 리그에서나 몸싸움이 좋고, 포인트가드와의 협력 플레이가 좋은 선수로 평가된 만큼, 이상민과의 조화도 기대되었다.
라이트의 경우는 운동능력이 관건이었다. 비록 그가 제로드 워드처럼 무릎이나 발목을 다쳐 더 큰 선수로의 성장에 실패한 것은 아니지만, 사고 후 어느 정도 기량이 남아있는 지 지켜봐야만 했다. 물론 스페인 리그까지 진출한 점은 그 능력이 살아있음을 증명하곤 있지만 말이다. 또한 60%를 넘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저조한 자유투 성공률은 KCC에게 있어 큰 난관이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외곽슛보다 골밑에서 우직한 플레이를 했던 선수로 골밑 장악력이 좋고 우람한 체격을 활용한 몸싸움이 장점이었으며 당시에 또다른 거구인 나이젤 딕슨을 1대 1로 몸싸움에서 맞설수 있던 소수의 거구 외국인 선수였다. 단 뚱뚱한 몸집으로 백코트가 느리고 빠른 공격에 수비가 약한것이 단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