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승균

 

'''추승균의 수상 및 감독경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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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전주 KCC 이지스 영구결번'''
No. 4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1998'''
'''1999'''
'''2004'''
'''2009'''
'''2011'''
















'''KBL 수비 5걸상 (7회)
1998-99,1999-2000, 2001-02, 2002-03, 2003-04, 2004-05, 2005-06
'''










'''SPOTV 농구 해설위원'''
'''SPOTV'''
'''전주 KCC 이지스 No.4'''
'''추승균
秋昇均 | Seung-Gyun Choo'''
<colbgcolor=#7f00ff> ''' 출생 '''
1974년 12월 6일 (50세)
[image] 부산광역시
''' 국적 '''
[image] 대한민국
''' 신체 '''
키 190cm|체중 90kg
''' 포지션 '''
스몰 포워드
''' 학력 '''
성동초등학교(졸업)
대연중학교 (졸업)
부산중앙고등학교 (졸업)
한양대학교 (졸업)
''' 종교 '''
불교
''' 프로입단 '''
1997년 대전 현대 다이냇 창단멤버
''' 현역시절 등번호 '''
'''4 (전주 KCC 이지스 / 영구결번)'''
''' 소속 '''
<colbgcolor=#7f00ff> ''' 선수 '''
'''[image] 전주 KCC 이지스 (1997~2012)'''
'''코치'''
[image] 전주 KCC 이지스 (2012~2015)
'''감독'''
[image] 전주 KCC 이지스 (2015~2016 / 감독대행)
[image] 전주 KCC 이지스 (2015~2018)[1]
''' 방송해설 '''
(2021~ )
''' 가족관계 '''
배우자 이윤정
아들 추수형, 추정우
''' SNS '''

1. 개요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2.2. 소리 없이 강한 남자의 전설
2.3. 쇠퇴하지 않는 남자
3. 지도자 경력
3.1. 코치 시절
3.2. 2015-16 시즌
3.3. 2016-17 시즌
3.4. 2017-18 시즌
3.5. 2018-19 시즌
4. 지도자 이후
5. 플레이 스타일
6. 시즌별 성적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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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농구인.
전주 KCC 이지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대전 현대부터 후신 전주 KCC까지 모두 지킨 선수로 별명은 소리없이 강한 남자다.
'''10,000득점 이상을 달성'''하고도 1위가 되지 못한 선수.
한국프로농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스몰 포워드 중 한 명이다. '''선수번호 4번 역시 영구결번'''. 그러나 지도자로써는 코치로써도 감독으로써도 우승에 실패해 선수 시절의 명성에 미치지 못한 상태이다.

2. 선수 생활



2.1. 아마추어 시절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머니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별세하면서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일을 했다. 홀어머니가 장사를 하면서 뒷바라지 해주면서 다행히 농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원래는 가드였지만, 중학교 2학년 때, 키가 12cm가 크면서 포워드 포지션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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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중앙고 시절 활약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원래 그를 스카웃하기로 한 고려대학교가 갑자기 동기인 박훈근박규현을 잡았다는 이유로 그를 포기하면서 붕 뜨게 되었다. 다행히 한양대학교가 그를 잡으면서 대학 진학에는 성공했고, 김용근 감독 밑에서 농구수업을 받았다.
한양대 진학은 결과적으로 추승균에게 도움이 되었는데, 추승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면서 1학년부터 4년간 주전으로 뛰면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고, 수비력에서도 팀 사정상 더 많이 뛰어야 했기 때문에 성장 속도가 빨랐다. 그 결과 졸업 무렵에는 자타공인 포워드 랭킹 1위 선수로 급부상했다. 프로에 온 이후 스몰포워드로 정착해 성공하기는 했지만, 사실 대학 때 주 포지션은 파워포워드였다.인사이드가 상대적으로 약했던 팀 사정으로 인해 센터도 자주 보았을 만큼, 대학까지의 그는 사실상 인사이더였다.
그를 두고 치열한 스카웃전, 특히 신생 팀 진로와 기존 현대전자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 진로는 신생팀의 특권을 내세워 추승균 영입을 희망했지만, 서장훈을 데려간다는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결국 추승균을 영입하는 데 성공한 것은 계약금 5억 원을 제시한 현대전자였다.

2.2. 소리 없이 강한 남자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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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97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아마 무대를 떠나 1997-98 시즌부터 프로에 데뷔했다. 군에서 돌아온 이상민, 조성원과 전설적인 외국인 선수 조니 맥도웰이 가세하면서 전년도 최하위였던 대전 현대는 단숨에 우승 후보로 치고 나갔고, 결국 정규 리그 3연패와 챔피언결정전 2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른바 이-조-추 라인의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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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추 라인이 조성원의 트레이드로 해체되고, 신선우 감독이 '토털 바스켓볼'이라는 라인업의 장신화를 구상할 때, 추승균은 여전히 그 구상의 핵심이었다. 이 구상은 어느 정도 실현이 될 듯하다가 결국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이 구상이 한창 가동되던 2001-02, 2002-03 시즌 각각 평균 16.3, 17.5득점으로 팀의 주포로서 역할을 다했다.
그 뒤로도 추승균의 활약은 변함없었다. 매년 두 자릿수 평균 득점은 꾸준히 찍어주었기 때문에, 팀에서는 그를 절대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실제로 KCC가 이상민은 보상 선수로 풀었지만, 추승균만은 절대 보상 선수로 풀지 않았다. 멤버는 자주 바뀌어도 팀의 주전 스몰 포워드는 오로지 추승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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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4 시즌에는 다시 결성된 이-조-추 라인과 찰스 민렌드, RF 바셋과 함께 다시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 이상민이 FA 보상 선수로 이적하고, 조성원이 은퇴한 뒤에도 팀의 주전 3번 자리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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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기간에는 추승균은 지지리도 상 복이 없었다. 주전이니까 식스맨 상은 받을 수 없고, 기량 발전 운운하기에는 성적이 너무 좋았다. 그렇다면 받을 수 있는 상은 MVP인데, 현대가 왕조를 구축하던 시절에는 스포트라이트가 이상민에게 맞춰졌고, 토탈 바스켓볼하에서 그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팀 KCC가 프로농구의 중심이 아니라 조연이었다. 결국 추승균은 그렇게 상 복 없이 은퇴하는가 싶었고, 이 때문에 그가 얻은 별명은 소리 없이 강한 남자라는 참으로 역설적인 말이었다.

2.3. 쇠퇴하지 않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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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기량이 쇠퇴할 만도 했지만, 추승균의 자기 관리는 무서울 정도였다.[2] 여전히 두 자릿수 평균 득점을 기록하면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다. 2008-09 시즌 정규 리그 3위로 챔프전에 올라간 KCC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서울 삼성 썬더스와 맞서며 접전을 벌였는데, 7차전까지 가는 접전에서 웃은 것은 추승균과 KCC였다. 추승균은 이 챔프전에서 평균 14.6득점을 집어넣으면서 맹활약했고, 마침내 생애 첫 챔피언결정전 MVP를 수상했다. 이 수상이 KBL에서 10년 넘게 뛰면서 받은 추승균의 생애 첫 개인 타이틀이라는 점은 뭔가 아이러니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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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피니티 건틀렛?)
추승균은 그 다음 시즌인 2009-10 시즌에는 다소 부진하며, 생애 처음으로 두 자릿수 평균 득점에 실패했다. 하지만 챔프전에서는 12.0득점을 기록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그리고 2010-11 시즌에 다시 정규 시즌 평균 10.1득점을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했다. 팀의 주축은 이제 하승진, 강병현 등에게 넘어갔고 본인은 조연에 더 가까워졌지만, 팀의 기둥으로서 추승균이 가진 위상은 이 둘이 감히 넘보기 어려웠다. 불행히도 챔프전 3차전에서 무릎 부상을 당해 시즌 아웃되면서 이렇다 할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지만, KCC의 우승으로 추승균은 생애 다섯 번째 우승 반지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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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 시즌에는 전성기만큼의 활약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확실히 나이가 든 모습이기는 했다. 하지만 꾸준하게 득점을 쌓아가더니 마침내 2012년 2월 26일, 전주에서 열린 SK전 2쿼터에 KBL에서 두 번째로 1만 득점을 기록했다.[3]
2011-12 시즌 PO에서 분투했지만, 전태풍의 부상 공백을 막을 수 없었던 KCC는 모비스에게 0:3 완패를 당했고, 추승균은 3차전 종료 때 가진 인터뷰에서 은퇴에 대해서는 구단과 상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결국 3월 15일 은퇴 기자 회견을 가지기로 하면서 코트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15시즌 동안 남긴 기록은 통산 738경기 10,019득점(역대 3위) 1,715리바운드(역대 15위) 2,066어시스트(역대 8위) 552스틸(역대 13위).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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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시절에는 '''레전드'''였으나,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상당히 좋지 못하다'''. KCC 감독 데뷔 첫 해에는 그래도 선방하긴 했지만, 2년차 시즌에는 최하위로 무너지면서 '''추무능[4], 추에밋, 무능균, 돌승균, 추승질[5], 추석두'''[6] 등의 굴욕이자 치욕스런 별명들로 KCC빠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시즌에도 다시 플레이오프로 이끌긴 했지만, 선수빨이라는 의문점이 항상 따라다녔다. 결국 2018-19 시즌에도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내면서 시즌 초반 자진 사임하기에 이른다. 여러모로 선동열과 비슷한 면이 있는데, 현역 시절에는 팀 레전드에다가 영구결번까지 되었지만, 감독으로서는 선수빨로 밑천이 다 드러난 감독이라는 것과 호성적에도 이미지가 나쁘다는 공통점들이 있다.
특히나 서울 SK 나이츠의 홈구장인 잠실학생체육관에서 감독 대행 시절 포함하여 '''0승 11패'''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심지어 2015-16 시즌 정규리그 우승 당시에도 SK 원정에선 3전 전패를 기록했다.

3.1. 코치 시절


은퇴 후 친정팀이자 집과 같은 KCC의 코치로 활동을 시작했다. [7]
그러다가 2015년 2월에 팀에 2번의 플레이오프 우승을 선물했던 슈퍼스타 출신이었던 허재 감독이 자진 사퇴를 하게 되면서 남은 기간 동안 감독 대행을 맡았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무려 15년을 단 한번에 이적도 없이 계속 죽 지켜왔던 본인의 농구팀을 감독까지 맡게 된 KBL 역사상 거의 최초의 사례다.
그리고 동년 5월 29일에는 마침내 KCC 이지스에서 내부승진으로 3년 계약을 맺고 KCC 이지스 제3대 감독에 취임하게 되었다.
덤으로, 추승균이 은퇴한 뒤 전주 KCC 이지스는 추승균의 공백을 잘 메워내지 못하였다. 당장 2012-13 시즌 초반에는 김태홍이 주전을 보는데 영 좋지 못했고, 결국 이한권을 영입했지만 이한권마저 부상을 당하며 정희재, 최지훈 등의 선수가 스몰 포워드로 출장했고, 심지어는 수비가 영 좋지 못한 김효범마저도 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으며, 그와 동시에 12-13 시즌은 아예 꼴찌로 시즌을 마감하였다. 2013-14 시즌에는 장민국이라는 루키의 발견으로 조금 나아지나 싶었는데, 장민국도 아쉽긴 했지만 발전의 여지를 보여주려는 찰나에 김태술과의 트레이드로 팀을 떠나갔고, 이후 2014-15 시즌부터는 김태홍과 정민수가 주로 출장했는데, 김태홍의 플레이는 가히 OME 급이었다.

3.2. 2015-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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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6 시즌,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빚은 김민구를 '이번 시즌 1군 복귀는 힘드니 KBL D리그에서 뛰게 할 것[8]'이라는 당초 발언과는 달리 바로 1군 경기, 그것도 시즌 개막전에 투입시키면서 팬들로부터 바가지로 까였다. 심지어 솜방망이 징계로 받은 봉사 활동도 나중에 차차 하겠다고 하는 등[9] 정식 감독으로 맞이하는 첫 시즌부터 굉장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팀을 5연승으로 이끌며 감독 역량 면에서는 인정을 받는 분위기이다. 특히 답이 없었던 김태홍을 준수한 3번으로 살려놓으며 찬양받고 있다. 하지만 김민구 건은 여전히 까이고 있다. 다만 공격의 제1옵션인 안드레 에밋에게 너무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있고, 국내 선수들이 미미한 활약을 보여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 '''장판도 에밋빨이었냐'''면서 거품론을 보여주거나, 모 감독의 별명이었던 '''추무능''' 타이틀이 붙여지기도 한다.
또한 전태풍김태술 등을 비롯한 가드진의 활용도 역시나 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2경기가 남은 2016년 2월 17일 팀이 모비스와 공동 1위에까지 올리며 4년만에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지도력을 평가받는 중이다. '''그리고 마침내, 2016년 2월 21일 안양 KGC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승리하면서 모비스의 남은 경기결과와 상관없이 자력으로 2015-2016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짓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22일 열린 2015-16시즌 KCC프로농구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챔피언결정전, 1차전 승리 이후 2~4차전을[10] 원사이드로 털린 것도 모자라서 그래, 6차전은 아예 120점이나 내주는 등 다시 추무능, 무능균, 돌승균 등이라고 꽤 까이고 있다.
에밋과의 재계약에 성공하고, 리오 라이온스를 영입하여 과연 에밋 원맨팀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을 들게 만들었다. '''아니나다를까, 농구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추에밋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016 프로아마 최강전에서 에밋이 빠지고 하승진, 전태풍이 부상으로 결장을 하자 송교창을 빼고 눈이 썩어 빠지는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1라운드에서 상무에게 졸전 끝에 51-71로 참패를 당했다.
3개국이 참가한 2016 아시아 프로농구 챔피언쉽에서는 두 경기 모두 외국인 선수 둘의 득점 점유율이 70%대에 육박하는 심각한 외국인 의존도를 보여줘 까일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11]

3.3. 2016-17 시즌


개막전 이후 에밋이 사타구니 부상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자 팀은 순식간에 최하위권으로 추락했고, 트레이드로 삼성에 보낸 김태술이 부활하면서 점점 더 심하게 까이고 있다. 또 부상을 당한 하승진과 전태풍이 사실상 시즌아웃으로 나란히 전력에서 이탈하게 되자 선수관리쪽으로도 까이고 있다.
하지만 대체로 영입한 에릭 와이즈가 삽질을 거듭하는 리오 라이온스보다 더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고, 괄목할만한 성장세를 보여주는 송교창, 고려대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시절의 슛감각을 되찾은 김지후, 2016 드래프트 최고의 스틸픽이라 불리는 최승욱의 알토란같은 활약, 달리는 농구로 탈바꿈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이현민 등 이적생, 신인급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어 추에밋, 추무능이라는 멸칭을 떼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히 선방하고 있다.
그러나 에밋이 복귀하자마자 팀이 귀신같이 하향곡선을 긋고 있다. 시즌 초반에는 에밋을 까기도 했으나, 에밋이 킥아웃을 줘도 김지후나 송교창 같은 국내선수들이 해결을 못해주기 때문에 '''국내선수가 얼마나 못미더우면 에밋이 혼자 공격하려고 하겠냐'''라면서[12] 선수 육성에 대한 까임도 생겨 차기 추무능이라는 입지가 확고해져버렸다.
결국 KCC는 2016-17 시즌을 꼴찌로 마치면서 '''사상 최초로 꼴찌를 한 전년도 정규리그 우승팀을 이끈 감독'''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3.4. 2017-18 시즌


그 뒤 새 시즌인 17-18 시즌. 이 시즌에도 초반부터 심하게 부진하며 역시나 팬들에게 '''돌승균'''이라고 까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11월부터는 또 호성적을 보여서 팬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댓글을 보면 선수빨이라는 의견이 다수이며 추승균을 옹호하는 댓글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나 최근 추승균이 보여주는 승부처 에밋고라던가 송교창을 수비툴로 제한하고 공격적 성장을 더디게 만드는 모습 등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판단과 지도력을 보이고 있다. 아무리 봐도 KCC의 영구결번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추승균을 감독으로 계속 둔다는 것은 KCC의 현재나 미래나 한국 농구의 미래에 전혀 득이 될 게 없는 상황. 그나마 딱히 추승균이 감독 자리에 없다고 해도 어차피 재능농구로 이끄는 식이라 문제도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 더 이상 발전이 없다면 한시바삐 감독직 - 지도자 퇴출이 필요해 보인다. 지도자로 농구를 보는 눈이 없을 뿐더러 자신의 선수들 조차 제대로 파악 못 하는 수준.
그리고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함과 동시에 6강에서는 인천 전자랜드를 상대로 1차전부터 4차전까지 패배와 승리를 왔다갔다 반복했다가 5차전에서 간신히 승리를 하며 4강에 진출시켰지만, 4강 플레이오프에서 SK 나이츠에게 1대3으로 대패하여 결국 시즌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자 팬들은 게시판에 추감독 재계약 반대 운동을 벌였지만 KCC 구단 프런트는 추승균과 재계약을 할 심산이다. 그리고 팬들의 반대 운동을 '''리카르도 라틀리프 영입 시도'''라는 초강수로 잠재웠지만,[13] 그 결과 라틀리프는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로 이적하게 되면서 영입 소식은 없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몇 개월동안 아무런 관련 기사도 뜨지 않다가 2018년 6월 22일 기사에서 추승균이 KCC와 2년 재계약에 합의를 한 것이 확인되었다.

3.5. 2018-19 시즌


작년 시즌과 똑같이 여전히 경기 운용 및 선수 기용 면에서 전혀 나아지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며 KCC 팬들에게 끊임없이 비판을 받았다. 에밋고가 브라운고로 바뀐 것 이외에는 거의 바뀐 것이 없을 정도. 덕분에 브랜든 브라운은 거의 4쿼터만 되면 거의 눈에 생기가 없다시피한 모습을 자주 볼 정도였다(...).
이로 인해 작전타임 때 선수들에게 자세한 설명보다 강성이었는지 매번 화만내면서 "가!",'마!" 등의 일명 로보트형 또는 신호등형의 말로 추승질이라는 굴욕스런 별명도 얻게 되었다. 여기에 당첨된 건 현무능인 현주엽이다. 실제로 대학과 프로 모두 한팀에서 생활한 적은 없지만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금메달을 합작했는데 1년 선후배 사이 관계로 친분이 있는 걸로 알려졌다.
지난 시즌보다도 더욱 부진한 성적을 내면서 사퇴 여론이 지속적으로 나오다가 비극을 당했다.
배후세력은 바로 용산고 마피아로 전임 허재 감독과 사실상 후임인 전창진 감독이었다. 그 중심에 최형길 단장에 의해 칼바람을 맞고 말았다. 사유는 KBL 정규리그 우승을 했으나 KBL 플레이오프 우승 실패였다. 정식 감독 데뷔 시즌에 15-16 KBL 파이널에서 오리온에 굴욕적인 참패와 17-18 KBL 파이널에서 사실상 숙적에 가까운 문경은 감독과 김선형 선수의 SK 나이츠와의 4강 플레이오프 패배가 결국 독으로 다가왔다. 2년 재계약 첫해 1 라운드가 조금지난 14경기만에 충격적인 경질을 당했다. 누가 보아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6승 8패를 기록 중이던 2018년 11월 15일, 성적 부진으로 인한 책임으로 구단 측에서 추승균 감독을 해임것이다. 공식 기사에서는 자진 사퇴라고 나왔지만 사실상의 구단측의 경질이다. 정작 추승균 감독은 그냥 쉬면서 농구에 대해 더 공부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추승균을 대신해 오그먼이 주전 뿐 아니라 후보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기용하며 단숨에 팀을 연승행진으로 상승세를 이끌어 내었다는 점에서 오그먼과 비교당하며 더더욱 까였다.[14]
이 모든 문제가 바로 허재의 절친한 형인 전창진을 위한 큰 그림이었던 게 안타까움이 들기도 한다는 의견도 있다.
스테이시 오그먼 또한 역대 KBL 두번째 외국인 정식감독[15] 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전창진을 앉치기 위한 허수아비라는 설과 KT 감독 시절에 나왔던 구설수로 인해 KBL 프로농구연맹에서 징계해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술고문까지 주더니 2번의 KBL 재정위원심판 끝에 징계에서 벗어나면서 쓸쓸히 한국땅을 떠났다.
그리고 예상대로 당해 시즌 종료 이후 전창진이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같은 성적인데도 역시 명장과 원클럽맨의 차이점이 나왔다.
그래도 KCC빠들은 두 감독에 성적 불만이 장난이 아닌 편이다.
참고로, 허재가 실제로 지도자 수업을 잘 시키는 편이 아니었다.
추승균이 코치 시절에도 허재가 심판들에게 강한 항의를 할 때 본인도 화를 냈는데 말리는 모습이 나오거나 아니면 허재가 책임지고 혹독하게 수업을 시켰어야 하는데 허재도 같이 화를 내는 등 그러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추승균의 지도자로써의 실패는 원클럽맨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드러낸 안타까운 사례만 보여주었다.
현재 KCC빠들은 추승균빠와 허재빠 그리고 전창진빠로 삼등분된 상태다.
그리고, 전창진 감독은 기다렸다는 듯이 하승진의 은퇴와 kt 시절 함께했던 전태풍의 이적[16] 이후 이정현과 송교창을 중심으로 팀을 개편하더니 라건아와 이대성의 트레이드로 전력을 끌어올리면서 실패를 당했으나 이대성은 끝내 적응을 못했는데 그 자리를 김지완으로 바꾸면서 혹평이 대박으로 바뀌었다. 역시 감독은 방향성이었는지 경험부족이 낳은 비극을 추승균 감독은 재임 때 그 숙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4. 지도자 이후


KCC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현대 시절 팀메이트였던 박영진과 함께 용인시에 농구 아카데미를 차렸다. 일반적인 스킬트레이닝이 아닌, 엘리트 선수들에게 기본기를 충실히 습득할 수 있게 하는 아카데미로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제3의 인생 시작한 추승균 감독, 업스포츠와 함께 엘리트 선수 대상 아카데미 열어
야인이 된 후 인터뷰를 통해 감독 생활에 대한 아쉬움을 많이 드러냈다. 추승균 전 감독, “물러나니까 그제야 내 모습이 보이더라”
자신의 후임 감독이 된 전창진 감독이 자신이 뽑고 간 유현준송교창의 성장을 보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재임 중 선수육성에 대한 비판이 있었는데 스승이 제자의 성장을 돕지 못했지만 유산을 남긴 점은 KCC 팬들이 지나고 나서 감사해하고 있다.
SPOTV해설자로 2020-21 시즌 도중 발탁됐다. 해설 데뷔전은 2021년 1월 1일 서울 삼성 썬더스창원 LG 세이커스 경기. 과거 KCC 이지스의 레전드였던 트리오가 양팀의 감독과 해설자로 한 자리에 모여 합동 새해 인사를 했다.[17]
해설자가 된 이후 대부분 팬들의 반응은 '''그는 소리없이 강한 남자가 아니었다'''는 것... 캐스터와 함께 소리도 많이 지르고 추임새도 섞어 가며 흥 넘치는 해설로 인기를 얻고 있다. 한 유튜버가 추승균의 리액션만 모아 편집해놓은 영상
해설경기도 공교롭게도 자신의 친정이자 후임 감독이 된 전창진 감독의 KCC 경기를 집중배정하는 편이다. 이외 게임도 있는편이지만 실제로 친정팀이 좋은 모습을 보일 때 리액션이 신기성급이다. 그리고, 감독 출신이었는데 전술과 전략 그리고 선수태도와 설명은 긍정적인 평을 얻고 있다. 감독으로 KBL PO 우승 실패로 인해 이미지가 좋지 못했으나 방송해설로 바뀌고 있다.
추가로 자신과 친한 선배인 현대-KCC의 레전드이자 LG MVP 출신이었던 조성원 감독이 부임한 창원 LG 세이커스에는 자신도 한 때 친분이 있었던 현주엽 전 감독이 재임하던 때 역대급 몰락사에 마음이 아팠는지 조성원 감독을 생각했는지 LG 토종 선수들이 자신감이 없는 모습에는 안타까운 해설도 같이 해주고 있다. 반대로, 이상민 감독이 있는 서울 삼성 썬더스에는 나쁜습관이 있는 선수들에게는 따가운 질책형 해설도 있다. 무엇보다 이거시 농구입니다라는 어록제조기의 신기성처럼 재미는 있지만 조금 더 나은 평이다.
연장까지 간 LG:오리온전에서는 명장면이 나올 때마다[18] 엄청난 샤우팅을 선보이며 팬들에게 "적성을 찾았다", "직관 온 아재 같다" "축구의 가레스상윤 보는 줄 알았다" 와 같은 웃기다는 반응을 들었다.

5. 플레이 스타일


추승균이 팀에서 맡은 일은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슈팅과 상대의 주축 선수들을 봉쇄하는 수비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추승균은 성실하고 꾸준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데뷔 이후 40경기 미만을 뛴 시즌은 1998-99 시즌 단 한 번이다. 그나마도 45경기 체제에서 방콕 아시안 게임 대표팀 참가 여파로 34경기를 뛴 것이니까 결코 적게 뛴 것은 아니었다. 부상 없이 꾸준하게 뛰면서 현대부터 KCC까지 3번 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그야말로 KBL 역대 최강의 금강불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꾸준한 득점력. 팀의 주 공격원은 슈터 조성원이나 외국인 선수였고, 추승균은 조력자 포지션이었던지라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결국 말년에 이르러 통산 1만 득점이라는 넘사벽 마일스톤을 기록했다. 역시 소리없이 강한 남자. 정규시즌에서 추승균이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넘지 못한 것은 단 한 시즌, 2009-10 시즌뿐이다. 그 외에는 모두 두자릿수 득점을 기록했다. 한 마디로 팀 입장에서는 공수에서 이보다 더 꾸준하게 활약해 줄 수 있는 선수가 없기 때문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선수이다.
추승균의 공격 옵션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위치를 가리지 않는 중거리슛이었다. 페인트존 바로 바깥에서 3점 슛 레인까지 어느 위치에서든 노 마크 찬스가 나면 여지없이 중거리 슛을 성공시켰고, 당시에 뛰던 용병들도 그의 시그니처 기술로 인정했다. 또한 독하게 마음만 먹으면 30~40점대도 넣어줄 수 있기도 했다. 사실 한양대 시절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에이스 노릇을 해왔으니...
그리고 잊어버릴 수 있는 사실 중에 하나는 자유투가 아주 정확하다는 것이다. 커리어 통산 85퍼센트 정도는 된다. 자유투 왕도 많이 했고. 요즘 젊은 선수들의 환장할 자유투 성공률을 본다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또한 수비력도 KBL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비록 나이를 먹은 이후로는 다소 쇠퇴한 감이 없지 않지만, 전성기에는 우수 수비 선수에 2회 뽑히기도 했고, 수비 5걸에 7회 선정되었다. 공격력도 좋은데, 수비력까지 우수하기 때문에서 상대 입장에서는 정말 짜증나고 까다로운 선수.[19] 더군다나 동급최강의 체력[20]과 상위급의 스피드와 힘까지 있어서 상대방으로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21]
PO에서도 뛰어난 선수라서 PO에서 평균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지 못한 시즌은 2007-08 시즌이 전부. 챔프전만 따로 한정지으면, 1998-99, 2004-05 시즌과 부상으로 빠진 2010-11 시즌이 전부다. 그 외에는 모두 두자릿수 득점을 넘기면서 활약했다. 한 마디로 어떤 상황, 어떤 순간에도 꾸준한 능력을 보여주는 선수다. 다만, 너무 꾸준하니까 화려한 맛이 없어서 투표에서 매번 물을 먹었다는 것이 문제.
또한 문경은과 같이 대한민국 농구 선수 중에 득점 순위 2위를 다퉜다. 1위인 서장훈이 너무 넘사벽이라 그렇지... 추승균과 문경은 이 두 사람이 8~9,000득점을 기록하는 가운데 서장훈 혼자 12,000득점을 넘겼기 때문. 결국 문경은을 제치고 2위 자리를 굳힌 후에, 통산 10,000득점도 돌파하면서 KBL에 한 획을 그었다.[22]
다만 국제용으로는 아주 특출난 장점이 없는 탓에 국대에서는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3번으로서 190cm이라는 신장은 결코 큰 신장이 아니며, 운동능력은 동포지션에서도 평균에 못 미쳤고, 문경은처럼 3점 슛이 특출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6. 시즌별 성적


역대 기록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1997-98
현대
45
236/382
(61.78%)
25/93
(26.88%)
81/94
(86.17%)
628
107
60
42
5
1998-99
34
173/303
(57.10%)
37/101
(36.63%)
98/116
(84.48%)
555
100
70
33
9
1999-00
45
200/318
(62.89%)
50/144
(34.72%)
82/90
(91.11%)
632
117
80
49
6
2000-01
45
219/383
(57.18%)
249/492
(50.61%)
86/109
(78.90%)
614
119
106
33
15
시즌
소속팀
경기수
2점슛
3점슛
자유투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록슛
2001-02
KCC
54
265/500
(53.00%)
63/170
(37.06%)
160/184
(86.96%)
879
133
160
33
8
2002-03
54
295/562
(52.49%)
68/167
(40.72%)
149/176
(84.66%)
943
127
193
87
36
2003-04
54
223/397
(56.17%)
79/191
(41.36%)
119/133
(89.47%)
209
53
25
8
2
2004-05
53
259/453
(57.17%)
81/196
(41.33%)
76/99
(76.77%)
455
135
99
37
2
2005-06
54
190/378
(50.26%)
102/232
(43.97%)
145/166
(87.35%)
943
158
179
43
4
2006-07
40
166/319
(52.04%)
31/90
(34.44%)
107/127
(84.25%)
532
94
135
19
4
2007-08
52
148/318
(46.54%)
72/174
(41.38%)
110/122
(90.16%)
622
94
156
30
2
2008-09
54
184/355
(51.83%)
72/173
(41.62%)
117/133
(87.97%)
701
105
220
45
5
2009-10
46
127/259
(49.03%)
27/102
(26.47%)
68/81
(83.95%)
403
93
118
29
3
2010-11
54
185/356
(51.97%)
22/64
(34.38%)
110/129
(85.27%)
546
81
152
32
2
2011-12
54
151/329
(45.90%)
23/66
(34.85%)
73/83
(87.95%)
444
90
102
32
4
<color=#373a3c> '''KBL 통산'''
(15시즌)
738
(4위)
3021/5612
(53.83%)
782/2072
(37.74%)
1631/1883
(86.62%)
10019
(4위)
1715
2066
552
85

7. 관련 문서


[1] 18-19 시즌 도중 사퇴[2] 카더라 뉴스에 따르면, 늦여름 오프시즌이 되면 용인 KCC 훈련체육관 뒷편 산으로 KCC 선수들이 자주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추승균은 맨 선두에서 후배들을 끌고 올라가고 있었다고 한다(...). [3] 하지만 여기서 KBL이 인색함을 발휘했다. 어떤 프로 종목이든지 간에 마일스톤이 달성되면 협회 측에서 큰 기념 행사를 벌여줄 만한데, KBL 측에서는 '''달랑 꽃다발과 기념 패를 전달한 게 전부'''였다.[4] 이 별명은 원래 부산 KTF 매직윙스,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전임 감독으로 지냈던 추일승에게 붙었던 별명이었으나, 2016년 오리온을 14년만에 우승으로 이끌고 반대로 KCC가 이듬해 최하위로 떨어지면서 이 별명은 추승균에게로 완전히 정착되었다. 또 하나 추일승 감독이 KTF 시절에 지도했던 LG 출신 슈퍼스타였던 현주엽LG 감독도 포함되었다. 사실 추일승 감독은 학구파 지도자로써 무능과는 거리가 있었고, 원래 별명은 농구박사, 바로 추박사였다. 실제로 추일승 감독은 농구인 출신 박사학위 취득자이자 부산 KTF 매직윙스 감독 퇴임 이후 농구사이트를 개설했다. 이 무능은 현주엽으로 넘어갔다. 현주엽의 경우 대표팀 시절부터 절친이었던 현주엽은 예능 프로그램 출신 감독인데, 정작 지도자 경험 없이 LG 감독직을 맡아 LG빠들을 포함해서 KBL 팬들에게 역대급 무능 감독으로 찍히면서 현무능이라는 굴욕스런 별명을 안겼다.[5] 코치 시절부터 매번 화만 내는 모습을 비꼬는 별명. 실제로 현역 시절에도 웃음보다 분노한 모습이 많았다. 마치 허재와 전창진처럼 말이다.[6] 고향이 부산이라서 그런지 야구조원우에 이어 농구조동현을 비꼬는 별명이다.[7] 사실 KCC는 전신 현대 시절부터 국내 코치는 1명으로 가는 편이다. KBL 대표 명장이었던 신선우박종천유도훈을 두었으며, 수석코치급으로 지도자 수업을 유도했다. 그러나, KCC 구단 자체는 수석코치보다 그냥 두는 스타일이다. 이 현상은 최형길 단장이 친분이 두터운 허재를 자신과도 친분이 있는 전창진 감독과 함께 전신 TG 삼보 엑서스 시절 선수 신분을 같이 하는 플레잉코치를 두었지만 보조 코치 및 수석코치의 개념은 아니었다. 참고로, 허재추승균을 수석코치로 둔 게 아니고 보조코치였다. 즉, 공석에서는 엄격하게 대해도 사석에서는 그냥 두었다는 얘기. 만약 이게 전창신 사단이었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8] 기사.[9] 기사.[10] 특히 2, 3차전은 '''20점차 이상'''으로...[11] 이날 경기에서 국내 선수 중 가장 많은 득점인 16득점을 기록했다.[12] 김시래, 조성민 등이 합류하기 이전 LG의 상황과 비슷하다. 하긴 메이스 입장에서도 외곽이 집단 버로우를 타니 본인이 해결하는 게 마음이 편할 것이다.[13] 실제로 팬들은 라틀리프 영입에 적극적으로 찬성을 보이고 있으며, 추감독 재계약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관종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언제 추무능이라고 했냐는 듯이 다시 추사마라고 부르며(...)... 재계약 찬성으로 바뀌어가고 있다.[14] 실제로 팬 게시판을 보면 오그먼을 KBL의 검은 힐만이라고 칭송함과 동시에 ''''승균아 보고 있지? 니가 하지 못하는 역할을 오그먼이 대신 해주네??'''' ''''KCC는 무능한 승균이가 문제였네'''' ''''승균아 담시즌에는 코치로 와서 오그먼 감독 밑으로 기어와서 배워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15] 처음은 전창진 감독이 TG 삼보에서 데뷔했을 때 당시 TG 삼보 코치였고 전자랜드 감독이었던 제이 험프리스다.[16] 전태풍은 최형길 단장 포함 구단을 디스하면서 문경은 감독과 김선형 선수가 있는 SK 나이츠에서 1년 활약 뒤 은퇴를 하게 된다.[17] 중계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급된 바로는 일부러 추승균의 데뷔전을 이 맞대결로 했다고 한다.[18] 리온 윌리엄스의 연장으로 가는 동점 3점슛이라던가, 이종현의 노마크 레이업 실패(...)라던가...[19] 자신은 꾸준히 15~20득점을 하면서 상대방을 0~7, 8점으로 막아대니 마진이...[20] 사실 주희정과 함께 체력으로는 리그 최강의 체력을 자랑하였으며, 상대방으로서 제일 미치는 일이 끊임없이 따라오는(...) 추승균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21] 사실 공수에서 절정의 기량을 뽐냈던 대학 시절의 양희종이 딱 이 모습이었다. 그리고 양희종은 운동능력 부문에서 추승균보다 확실히 뛰어나다.[22] 그러나 김주성이 추승균의 득점을 제치면서 3등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