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킬 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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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NBA 농구 선수. 포스트업 마에스트로.[5] ''NBA 역대 최강의 센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한 시즌에 득점왕과 챔피언십을 동시에 차지한 5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6]
별명이자 애칭인 '''샤크(Shaq)'''로 불리며, 본인 스스로 '''MDE(Most Dominant Ever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사람)'''라 칭한다.[7] 또 다른 별명으로 '''빅 아리스토텔레스'''도 있고, 자칭 타칭 진짜 '''슈퍼맨'''이라고도 불린다. 또 LA 레이커스의 전설적인 캐스터 칙 헌은 오닐을 빅 펠라(Big Fella)라는 별명으로도 불렀다.[8] 흔히 대한민국에서 1990년대 NBA 4대 센터 중 한 명으로 불린다.[9]
2. 생애
1972년생으로 조셉 토니와 어머니 루실 오닐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셉 토니는 지튼 홀 대학에서 농구 장학금 제안을 받았을 정도로 농구에는 재능이 있는 인간이었지만, 다른 게 막장이었다. 약물 복용에 전과까지 있었고, 오닐이 신생아였던 1973년에 마약 소지죄로 감옥에 갔다. 그 사이 어머니인 루실 오닐은 군인인 필립 해리슨과 재혼했고, 조셉 토니는 출소 후 샤킬에 대한 친권을 포기한다. 이후 샤킬 오닐은 조셉 토니와의 어떠한 만남과 대화도 거부하며, 흥미조차 가지지 않고 있다. 그래도 오닐의 농구재능 하나만큼은 한때 대학으로부터 농구 장학금 제안을 받을 정도로 탁월한 선수였던 토니에게 받았다고 할수 있다.
어쨌든 해리슨은 오닐의 양부가 되었고 성심성의껏 오닐을 아들로써 양육한다. 사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생각보다 마초 문화가 강하고, 거기에 해리슨은 미국에서도 마초적인 문화가 가장 강한 집단인 군인이었기에 그의 양육은 가끔 아동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엄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애정이 없는 학대에 불과했다면 '''그''' 오닐이 나중에 해리슨을 "내 아버지인 위대한 (great) 필 해리슨"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표하거나 자신의 랩 노래에서 '내 아버지는 필이야' 라고 강조할 리가 없다.[10]
실질적 아버지인 필립 해리슨이 독일에서 근무한 덕에 유년시절을 독일에서 보낸 적이 있다. 일화로 군인들과 같이 농구를 하는데 '''당시 이미 2m에 가까운 신장'''을 가졌던 오닐이 너무 잘하자 한 군인이 "너 계급이 뭐냐?" 물었더니 "'''중학생'''''이에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2.1. 아마추어 시절
(이 영상은 국내의 농구 잡지인 rookie 창간호에 부록으로 제공되었던 비디오 테잎과 동일하다.)
고등학생때 이미 괴물 센터로 활약해 소속팀을 2년 동안 68승 1패의 먼치킨 팀으로 만들고 주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으며 루이지애나 주립대에 진학하고 나서는 1991년과 92년에 사우스이스턴 컨퍼런스 올해의 선수에 뽑히고 올 아메리칸 중 한명으로 지명되는 등 최고의 기대주로 손꼽혔다. 오닐이 1992년 NBA 드래프트에서 1픽을 가지고 있던 올랜도 매직에 지명되면서 전설이 시작됐다.
3. 선수 경력
커리어 대부분을 한 팀에서 보낸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하고는 달리 팀을 여러번 옮기며 다사다난한 선수생활을 보냈다. 이러한 모습은 80년대를 주름잡았던 모제스 말론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11]
3.1. 올랜도 매직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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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 시즌 올랜도 매직의 성적을 전년의 21승에서 41승으로 끌어올렸으며 23.4득점 13.9 리바운드 3.5 블록을 기록해 데뷔시즌에 올스타전 주전으로 선발되는 위엄을 과시했고 그 시즌 신인상을 차지한다.[12]
이듬해 마이클 조던이 야구 하러 떠난 사이 사킬 오닐은 득점왕 경쟁에 뛰어들며 2년 만에 리그 최고의 센터 중 하나로 떠오르는 경악스러운 포스를 자랑했다. 경쟁 상대였던 데이비드 로빈슨이 마지막 경기에서 공을 몰아받으며 71득점을 기록해 득점왕은 로빈슨에게 양보해야 했지만 아무튼 1993년 드래프트 직후 크리스 웨버와 트레이드된 다음 올랜도 매직에서 데뷔한 앤퍼니 하더웨이와 함께 신생팀이던 올랜도를 신흥 강팀으로 만들었다.
첫 플레이오프에서는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만나 시리즈 스코어 0-3으로 탈락했다.[13]
오닐의 상승세는 3년차에도 거침없었다. 지난 시즌에 실패했던 득점왕 타이틀 획득에 성공하고 [올랜도 매직을 57승 25패로 동부 1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3-1로 격파, 세미파이널에서 마이클 조던이 갓 복귀한 시카고 불스를 4-2로 꺾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4-3으로 승리하면서 설욕까지 완료한다. 파이널 상대는 하킴 올라주원과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이끌던 전년도 챔피언 휴스턴 로키츠였는데, 오닐은 시리즈 평균 28.0득점 12.5리바운드로 최선을 다했으나 올라주원의 관록 앞에 0-4로 스윕당하고 말았다. 이런 활약상에 그 때 당시 위대한 50인의 NBA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게 되지만 그 때 반응들은 너무 시기상조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14]
1995-96 시즌에는 손가락 부상을 당해 시즌 초반에 결장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은 60승 22패라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진출했다. 상대는 72승의 시카고 불스.(…) 결국 시카고에 0-4로 탈탈 털리고 만다.[15][16] 이후 페니 하더웨이에게 더 호의적인 구단과의 불화와 악담을 계속하던 지역 언론 때문에 올랜도 매직을 버리고 7년 $121M 계약을 맺으며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로 떠난다.
3.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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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 초기에는 유타 재즈의 칼 말론&존 스탁턴 듀오[* 1997 플옵에서 유타 재즈에게 4-1로 패한 다음 1998 서부 결승에서는 '''스윕'''까지 당하자 분을 이기지 못한 오닐은 화장실 거울을 깨부수고 문짝까지 뜯어내며 난리를 치자 제리 웨스트 단장이 그걸 보고는 "이게 무슨 짓이냐. 나는 결승 진출을 '''8번이나 한 끝에''' 겨우 첫 우승을 했다"라는 말을 했고 이에 놀란 오닐은 "8번이요?"라고 반문한 뒤 데꿀멍했다고 한다. (2016년 NBA Finals 2차전을 앞두고 NBA TV에서[제리 웨스트를 인터뷰했는데 이 때 옆에서 샤킬 오닐이 밝힌 이야기다)]나 팀 던컨을 얻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밀렸으나 명장 필 잭슨의 지도 및 코비 브라이언트가 정상급 슈팅 가드 로 성장하며 오닐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하킴 올라주원 등이 내리막길을 걷는 반면 경험이 쌓이고 몸을 불린 오닐이 리그의 지배자가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99-2000 시즌은 오닐의 선수생활 중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67승 15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뒤 득점왕, 올스타전 MVP 그리고 정규시즌 MVP을 모두 차지했는데[17] , 이 과정에서 '''MVP 투표 121표 중 120표[18] 를 싹쓸이'''하는 위엄을 선보였다. 이어 플레이오프에서는 새크라멘토 킹스, 피닉스 선즈,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차례로 꺾은 뒤 노장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와의 파이널 매치에서 평균 38.0득점 16.7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61%라는 입이 떡 벌어지는 모습을 보이며 시리즈 스코어 4-2를 만들며 첫번째 우승반지를 손에 넣는다.
2001년 플레이오프에서는 포틀랜드, 새크라멘토, 샌안토니오를 모조리 스윕해버리는 위엄을 과시했다. 이후 열린 파이널에서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앨런 아이버슨이 투혼을 불태우며 첫 경기에서 패배를 안겨줬지만 샤크와 코비 브라이언트는 이후 무자비하게 4연승을 거두며 두번째 파이널 우승을 차지한다.[19]
이듬해 2002년에는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정규시즌 1위를 차지했던 새크라멘토 킹스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인 끝에 다시 파이널에 진출한다.[20] 제이슨 키드가 이끌던 뉴저지 네츠의 양민 골밑부대는 오닐 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지며 3연패에 성공했다. '''2000년대 초 오닐은 말그대로 대마왕이었다.'''
LA 레이커스와 오닐의 장기집권은 영원할 줄 알았지만 오닐은 발가락 부상 때문에 수술을 받고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한다. 사실 기량 하락보다는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문제가 장기집권의 결정적 패인이었다. 코비는 2인자 자리에서 만족할 선수가 아니였기 때문에 오닐과 코비 사이의 권력다툼은 심해져갔다. 사실 둘이 힘을 합치면 그 유명한 three peat을 넘어서 four peat을 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둘에게는 본인이 메인이 되어서 우승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오닐이 골밑을 흔들다가 수비가 견고해지면 코비 쪽으로 가거나 혹은 코비 쪽에서 흔들고, 난사하다 안 되면 오닐 쪽으로 가는 등 당시 레이커스에게 팀 플레이란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코비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인 로버트 오리나 데릭 피셔 등은 정상적인 자신들의 포지션보다는 오닐과 코비를 받쳐주기도 바빴다. 오닐 아니면 코비라는 극단적인 전술이니 패배할 수 밖에 없었다.[21]
여튼 오닐과 코비의 레이커스는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점점 전설의 4번이 되어가는 팀 던컨과 데이비드 로빈슨 이 마지막 시즌을 맞이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꺾인다. 오프시즌에 오닐은 우승을 위한 염가계약을 맺으라고 칼 말론과 게리 페이튼을 꼬드겨 그 유명한 전당포 라인업을 만들지만 LA 레이커스와의 재계약 협상에서 잡음이 일고, 코비는 덴버에서 성추문에 휘말리며 팀 분위기는 개판이 되었다.[22]
그 와중에도 멤피스, 샌안토니오, 미네소타를 격파하며 어찌어찌 파이널에는 진출했지만 래리 브라운 감독의 디트로이트에게 1-4로 무기력하게 패배하고 만다. 당연히 여론은 최악이 되었으며 코비ㅇ늬ㆍ의 파워게임[24] 에서 패배한 오닐은 캐런 버틀러, 라마 오돔, 브라이언 그랜트와 트레이드되어 마이애미 히트로 향한다.
3.3. 마이애미 히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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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에 온 샤크는 우승을 안겨주겠다고 장담한다. 발가락 부상 이후 전성기가 끝나 과거 같은 영향력은 더이상 아니었으나 마이애미 이적 첫 시즌에도 평균 22.9득점 10.4 리바운드를 달성하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전 시즌 동부 4위였던 소속팀을 59승 23패로 동부 1위 겸 전체 2위로 이끌며 2005년 MVP 투표에서 피닉스 선즈의 스티브 내쉬를 턱밑까지 추격했다.[25]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디펜딩 챔피언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와 재회하였으나 상대 센터 벤 월러스, 베테랑 엘든 켐벨 등의 분전에 밀려 아쉬운 성적을 남겼고, 팀도 7차전 끝에 패배했다.
그래도 시즌 MVP 2위 성적을 바탕으로 5년 $100M로 재계약에 성공했다. 다음 시즌에는 오른쪽 발목부상으로 18경기를 결장하고, 감독이 팻 라일리로 바뀐 후 출장시간을 제한받으며 스탯은 많이 낮아졌어도 개의치 않아했다. 2006년 플레이오프에서는 마이애미의 떠오르던 샛별 드웨인 웨이드를 보좌해 조역으로서 네번째 우승반지를 획득하는데 성공. 그러나 이듬해부터는 계속 부상을 입으며 하락세를 겪다가 2008년 2월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된다.
3.4. 저니맨이 된 말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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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는 처음으로 올스타전 출장도 못해보고 플레이오프에서도 1라운드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만나 탈락하면서 이제는 퇴물이라는 소리도 들었으나 오닐은 뛰어난 피닉스 의료진의 힘을 받고 스티브 내쉬의 지원에 힘입어 08-09 시즌에 폼을 약간 회복, 2009년 올스타전에서 악연이 많았던 코비와 오랜만에 같은 팀에서 뛰었고, 공동 MVP를 수상하면서 올 NBA 팀에도 들었다. 하지만 팀은 아쉽게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피닉스 선즈는 연봉 문제 때문에 오닐을 트레이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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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닐의 다음 행선지는 청년가장 르브론 제임스가 혼자 애쓰고 있던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클리블랜드는 2009년 동부 파이널에서 올랜도 매직의 드와이트 하워드에게 인사이드를 털렸던 경험이 있었고 이번에는 이를 막기 위해 오닐을 영입했다. 오닐은 클리블랜드에 오면서 '킹(르브론)에게 반지를' 이라 선언했으나 어느덧 리그 최고령이 된 그에게 큰 힘은 없었고,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2-4로 걸려 탈락한다. 르브론은 이후 디시전 쇼를 벌인 다음 마이애미로 떠나고 오닐은 자유 계약 신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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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 브라이언트가 2010년에 5번째 반지를 얻는 데 자극 받았던건지 샤크는 베터랑 미니멈 계약으로 보스턴 셀틱스와 2년 계약을 맺고 마지막으로 파이널 우승에 도전했다. 그러나 여러 부상때문에 37경기만 출장했고 커리어 로우를 기록, 플레이오프에서는 두 경기밖에 나오지 못했다. 결국 2011년 6월, 은퇴선언을 하면서 커리어에 마침표를 찍었다. 통산기록은 28596득점 13099리바운드(평균 23.7득점 10.9리바운드).
보스턴 셀틱스 시절의 샤킬 오닐은 많은 이야깃거리는 없지만, 심판에게 뭐라고 한 소리 했다가 35000달러의 벌금을 물게 되어 라커룸에서 '''Whhhhhy Whhhhhy Kevin[26] Whhhhhy'''라며 명장면을 남겼다. 이 장면은 샥틴 어 풀의 오프닝으로도 활용되었다. 억울한 샤킬 오닐[27]
2013년 4월 2일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레이커스의 레전드 제리 웨스트, 필 잭슨과 수많은 팬들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면서도 그답게 유쾌한 영구결번식이 열렸다.
2016년 2월 9일, 마이애미 히트도 오닐의 32번 저지를 영구결번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2000년대 초반 NBA를 지배한 정통파 센터였다. 오닐의 골밑 장악력이나 존재감은 매우 높았으며, 인사이드의 오닐에게 볼이 투입될 경우 기본적으로 2, '''3'''명의 수비수가 견제를 했다. 올랜도 시절부터 이런 더블팀, 트리플 팀을 기본으로 끌고 다니면서 페인트존을 초토화시켰고, 2000년대 초반 레이커스의 3 peat 시절엔 그런 파워를 극대화하기 위해 몸을 더 불리면서, 진정 막을 수 없는 선수가 되었다.
이미 LSU 재학중 공식 경기에서 골대를 한번 해먹은 오닐이지만, 루키 시절 올랜도 매직에 있을 때 시합 중 골대를 부숴먹은 사건은 한국에서도 아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것도 두 번이나...[28] 과거 오닐의 스폰서였던 리복에서 이걸 가지고 오닐의 시그니처 슈즈인 샤크 어택을 홍보할 때 많이 써먹었다. 오닐이 골대 박살내는 영상. 중간에 연습경기등이 있긴 하지만, 공식 경기에서 오닐이 골대를 박살낸건 LSU시절까지 포함해 3번이고 NBA에선 2건이다.
오닐이 저지른 저 두 건의 사건때문에 NBA에서는 모든 구장에 예비 골대를 상비할 것을 의무화하는 규정을 신설했으며, 골대 자체도 절대 안 망가지게 하중 규격을 상향했다. 그래서 이때 이후로는 백보드 부서지는 것 외에는 골대 자체가 주저앉는 정도는 잘 안나오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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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오죽하면 중계방송 중에 나오는 선수 스탯에 저 기록이 자랑스럽게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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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엄청난 몸무게와 덩치로 보여주는 헤지테이션 후 스핀 무브를 보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LA 레이커스로 이적한 뒤에는 올랜도 시절보다도 몸을 키워 파워를 증량하고 원래 가지고 있던 스피드와[29] 유연함에 여러 기술들까지 탑재해, 원숙해진 개인공격력은 물론이고 골밑에서 3점 라인까지 커버하는 시야와 패스능력으로 리그의 지배자가 된다. 올스타전을 앞두고 가진 연습에서 마이클 조던과 1:1로 농구 하는 장면에서는 가드같은 스피드로 드리블을 하고 가볍게 스핀무브를 해서 조던을 농락하기도 했다. (물론 진지하게 상대한게 아니겠지만...) 수비는... 키가 216에 체중은 140kg을 상회[30] 하는 파워로 상대 빅맨이 인사이드로 파고드는 것은 불가능한 수준에다, 점프력은 버티컬 70에 손은 솥뚜껑만한 소도둑이 그 축복받은 신체를 완벽하게 컨트롤한다. 다만 레이커스 이적후 불린 몸에 의해 무릎과 발가락(...)이 성하지 못했는데, 이는 레이커스 전성기 이후 샤킬 오닐의 커리어를 계속 괴롭혔다(엄지 발가락의 경우 어마어마한 스피드의 퍼스트 스텝 → 스핀무브 등으로 이어지는 피벗 플레이에 의해 망가졌다는 설이...).
나이가 들면서는 체력적인 문제로 출장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전성기 때는 체력 또한 괴물급으로 경기당 출장시간이 35~40분이었다. 그렇다고 머리가 나쁘냐? 오닐은 NBA 역사에 손꼽힐만큼 BQ가[31] 높은 빅맨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장점인 힘과 높이를 지능적으로 활용할 줄 안다.
NBA 역사상 경기당 30점 정도 넣을 수 있는 엘리트 빅맨 중에서 오닐처럼 공격할 때 행동반경이 극단적으로 골밑으로 제한되는 선수는 없다. NBA팀의 주전 센터라면 당연히 큰 키와 긴 팔을 가졌지만 이는 상대 수비수도 마찬가지인데다가 골밑은 이런 덩치들이 좁은 공간에 집중되어 부대끼는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골밑에서만 공격하면 체력소모가 극심한 데다 부상위험도 높다. 그런데 오닐은 이미 대학교때부터 같은 키의 센터들보다 최소 18kg이상은[32] 더 나가는 몸무게에서 나오는 똥파워로 골밑을 눌러버렸고, 데뷔때부터 NBA에서 상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피지컬의 소유자였기 대문에 골 밑 싸움에서 매번 상대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센터가 기본적으로 강력한 힘과 포스트업으로 골밑을 공략하는 포지션인 것은 맞지만 특급 센터라면 어느 정도는 중거리슛도 할 줄 아는 등 보조수단도 갖추고 있지만 오닐은 중거리슛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그런데도 막을 수 있는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 괴물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덩치와 운동능력, 거대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기술이, 그리고 뛰어난 재치와 시야라는 조합으로 상대 골밑진영을 이리저리 공략하니 수비하는 상대 입장에선 파울 말고는 확실한 대책이 없었던 것이다.
공격스타일을 종합해보면 아마추어 농구나 프로 초창기에서나 존재할 법한, 극단적으로 골밑에 치중하는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흔히 "정통센터는 골 밑에서만 플레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NBA레벨에서는 아주 예전부터 정통센터들은 어느 정도 중거리 슈팅력을 지녀왔다.[33] 위에 언급된대로 NBA레벨에선 골밑에서만 부대끼면서 30점 가까이 넣는게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닐의 가장 큰 장점은 포스트업. 거대한 덩치와 강력한 힘, 탁월한 센스로 자신에게 가장 알맞는 위치를 잡는데 능했으며, 한번 자리를 잡으면 절대 밀려나지 않았다. 발이 느린 편이라 재빨리 움직여 자리를 잡진 못했지만, 대신 앞을 가로막는 수비수들을 '''그냥 밀어내며''' 자리를 잡았다. 또한 시야가 좋아서 별로다 싶으면 바로 킥아웃 패스해주고 다시 자리를 잡고 볼을 요구하는 센스도 있었다. 일단 로우포스트에서 자리를 잡으면 백다운해서 골밑까지 간 다음 훅슛/골밑슛/덩크로 마무리하거나 턴어라운드해서 페이더웨이 한손 슛으로 마무리하는 능력도 있었다. 사실 90년대 센터들은 다양한 기술을 갖고 있었음에도 일부 팬들이 90년대가 포스트업만 하는 센터들의 힘겨루기란 오해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오닐이 거의 극단적으로 포스트업 위주로 농구하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오닐의 경우 포스트업에서 백다운으로 가는 빈도수가 많았으며, 그 위력도 워낙 대단했다.
그렇다고 오닐이 포스트업 말고 못했던 것도 아니다. 오닐은 당시 센터기준 상당한 볼핸들링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페이스업 상태에서 돌파해들어가는 능력도 괜찮았다. 일단 돌파를 하면 그는 조지타운 센터들의 특기인 러닝훅으로 마무리하거나[34] 바로 골밑까지 가서 마무리하곤 했다. 안그래도 몇 체급은 위인 오닐이 가속 붙은상태로 달려오면 보통 사람은 공포부터 느낄지도 모른다. 다만 2대2 공격에서 픽앤팝은 슛거리가 짧아 당연히 불가능, 픽앤롤은 선호도 하지 않고 잘 하지도 못했다.
오닐은 포스트업 상태에서 백다운 외에 재빠른 스핀무브로 돌파해들어가는 플레이도 위력적이었는데, 스피드 자체도 있지만 이게 무서운 이유가 상대 수비수는 오닐의 무게를 버티느라 죽을 힘을 다해 밀고 있는데 반대쪽으로 돌아버리면 금방 뚫리기 때문이다. 오닐 특유의 센스로 붙힌 별칭은 "Black tornado". 스핀무브를 이용한 돌파나 백도어 플레이 등 다양한 연계플레이가 있는데, 2000년대 서부 결승 7차전 막판에 포틀랜드를 상대로 날린 쐐기포득점이 바로 오닐의 스핀무브에 이은 골밑 컷+코비 브라이언트의 앨리웁 패스로 나온 그림같은 앨리웁 덩크였다. 그 외에 스핀무브가 상당히 좋은 편이라 포스트업이나 페이스업에서 백다운+스핀무브 후 펌프페이크+덩크 콤보를 선보이기도 했는데, 기술 자체도 완성도가 높지만 이걸 NBA에서 가장 무겁고 강력한 오닐이 하면 그 파워에 수비수가 나가떨어진다. 역대급 수비수이지만 4대센터 중 가장 가벼웠던 로빈슨이 아주 제대로 당해 굴욕을 당한 적이 있다.
저 강력한 스핀무브에서 짐작할 수 있지만 덩치에 비해 운동능력이 대단히 좋았다. 점프력은 LA초창기만 해도 거의 림 근처까지 머리가 갈 정도로 높았으며, 스피드는 느린 편이었지만 순간움직임은 상당히 빨랐다. 300파운드를 훨씬 넘는 선수치고 체력도 좋아서 풀타임으로 뛰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그와 덩치가 비슷한 선수들(야오밍 등)이 체력적 문제에 시달리는 걸 생각하면 저 덩치로 평범한 7푸터만큼 오래 뛰어준다는 것만 해도 놀라운 일. 힘은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으니 설명을 생략한다.
본인이 마무리하는 빈도수가 많았지만 패스능력이 좋아 자기에게 수비가 몰릴 때 킥아웃해주는 데도 능했다. 이로 인해 슬래셔 선수와도 슈터 선수와도 조합이 좋았는데, 코비 브라이언트와 뛸 때에는 코비가 돌파해서 수비를 끌어온 다음에 오닐에게 빼주거나, 오닐이 수비를 끌어온 다음 생겨난 공간을 코비가 돌파해오는 조합을 보였다. 물론 코트 밖에서 문제였지만.
슈터의 경우 올랜도/LA에서 모두 호흡을 맞춘 베테랑 가드 브라이언 쇼가 찰떡궁합이었는데, 쇼는 받아먹기 외에도 오닐의 입맛에 딱 맞는 엔트리패스를 넣어주는 가드이기도 했다. 엔트리 패스의 경우는 페니 하더웨이도 오닐이 좋았다고 방송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 올랜도에서 호흡을 맞춘 '3D' 데니스 스콧도 궁합이 잘 맞는 선수였고, 이 세 선수는 오닐과 사이도 원만한지라 은퇴 후 방송에서 자주 언급하는 편이다.
공격에서 유일한 단점은 자유투. 통산 자유투 성공률이 52.5%로, [35] 빅맨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좋은 편은 아니다. 더군다나 이 약점을 고치기 위해서 자유투 연습을 엄청나게 시켰는데도 끝내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 샤킬 오닐은 손이 매우 큰 편 (농구공에 나뉘어진 칸을 기준으로 3칸을 잡을 수준)인데 큰 손이 자유투에 불리하다고, 쉽게 말해 자연스럽게 스냅을 줄 수가 없어서 공을 손가락 위에 얹어서(...) 밀어 던지는 수준이었는데, 당연히 슛 메커니즘 상 매우 불리할 수 밖에 없다.[36] 더군다나 어린 시절 손목을 다쳐 스냅이 자연스럽지 못한 점도 한 몫했다.
수비도 맨투맨 수비는 굉장히 뛰어났다. 높이/파워/운동능력을 겸비한 수비수인지라 그 누구도 오닐 위로 쉽게 득점을 하지 못했으며, 디르크 노비츠키에게 외곽에서 붙어 괴롭힐 정도로 뛰어났다.[37] 키와 점프력, 키에 비해서도 굉장히 긴 팔 덕분에 블럭도 뛰어났으며 이 덕분에 커리어 내내 인유어페이스를 거의 당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안 좋은 습관과도 관련이 있는데, 오닐은 굴욕을 당하는 걸 극도로 싫어해 인유어페이스를 당할 것 같으면 그냥 피해버리거나 파울로 끊어버리곤 했다. 04-05시즌 당시 결별한 코비 브라이언트와의 첫 맞대결에서 코비가 돌파를 해 덩크를 하려고 하자 파울로 끊어버린게 대표적. 이 때문에 그는 능력에 비해 비교적 수비에 들이는 노력이 현저히 적은 선수였으며, 그가 수비수로서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데는 이것도 한 몫했다. 아이러니하게 오닐이 수비수로 가장 뛰어났던 시절은 루키 시즌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펜스 세컨드 팀에 세 차례 오를 정도로 수준급 수비수긴 했지만, 이건 사실 00년대 초반에 90년대를 주름잡은 센터들의 공백를 메울 신예들이 많이 없어서 엘리트 센터들이 일시적으로 씨가 말랐던게 크다. 01년에는 벤 월러스가 성장하기 전이고 03년에는 무톰보가 노화와 부상으로 30경기도 못 뛰었다. 90년대 올디펜스 퍼스트팀 센터 부문은 정말 빡셌는데,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디켐베 무톰보가 모두 90년대에 수비왕을 차지하고 그 밑에 패트릭 유잉도 다른 시대였다면 수비왕도 노려볼 정도라 수비의 달인인 알론조 모닝이 이들이 거의 전부 노쇠하고 난 99년에야 데뷔 7년만에 처음으로 올디펜스 팀에 올랐다. 실제로 무톰보가 수비왕을 차지하고도 디펜스 세컨팀으로 밀린 적이 있을 정도였다. 즉, 90년대에 센터 올디펜스 세컨팀이라도 오르려면 사실상 수비왕급 수비력이 필요했다. 다만 00년에는 수비왕 투표에서 2위를 할 정도로 정말 잘했다. 레이커스 이적 이후 몇년간 플레이오프에서 허무하게 탈락하며 다소 매너리즘에 빠졌던 오닐은 이때 부임한 명감독 필 잭슨이 정비함 체제 하에 살도 빼고, 수비에서도 온 힘을 다하며 생애 최고의 활약을 했다.
축복받은 체격을 앞세운 맨투맨 수비에는 능했지만 가드와 콤비를 이루는 픽앤롤 등의 다양한 2대2 전술을 쓰는 팀 상대로는 느린 발과 설렁설렁한 리커버리때문에 약점을 보였고, 레이커스 이적후 97, 98년 2년 연속으로 픽앤롤 달인들인 존 스탁턴, 칼 말론의 유타 재즈에게 탈탈 털렸다. 필 잭슨이 들어온 이후에 팀 수비 전술을 다시 만들고 나서야 우승을 거둘 정도. 물론 이것도 그나마 나아졌다는 거지 오닐은 평생 좋은 2대2 수비수가 되진 못했다. 느린 발 때문에 외곽에서 거의 쓸모가 없어 가드에게 붙기 힘들어했기 때문에 픽 이후 매번 골밑으로 뒷걸음치곤 했는데, 스탁턴과 말론처럼 두 선수 모두 슈팅력과 돌파력을 겸비한 공격수를 상대할 경우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오픈 찬스가 생긴다.[38]
실제로 압도적인 스탯과 성적뿐만 아니라 3번의 파이널 MVP는 오닐이 리그를 지배해 왔음을 알 수 있다.[39] 막아도 막아도 대책이 안서는 오닐을 위해 '''핵 어 샤크'''(Hack-a-Shaq)라는 전술이 등장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공잡으면 무조건 파울해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어차피 못막는거 오닐의 유일한 약점이자 심각한 약점인 자유투를 물고 늘어지자는 작전.[40] 이로 인해 통산 자유투 시도 개수가 11252개로 통산 NBA 4위를 기록하고 있다, [41] 자유투를 뺀다면 빅맨으로서는 그야말로 완전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샤크가 자유투마저 좋았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5. 예능감
외모와는 달리 유머러스하고 기행을 즐긴다. 르브론 제임스, 드와이트 하워드에게 댄스 비법을 전수해 주는 영상이 있다. <무서운 영화> 시리즈에도 카메오로 출연한 적이 있으며, 음반을 내기도 하는 등 유쾌하다. 본인은 스스로 기자회견에서 자신을 '''"거인 아리스토텔레스(The Big Aristotle)"'''라고 불러달라고 한 적이 있다. NBA에서 가장 엔터테이너적 마인드와 상품성이 풍부한 스타.
본인 별명 뿐만 아니라 다른 선수들 별명도 멋있게 잘 지어준다. 대표적으로 마이애미 시절 팀 동료였던 드웨인 웨이드의 별명 ''''The Flash''''. 폴 피어스의 별명인 ''''The Truth''''나 팀 던컨의 ''''The Big Fundamental''''[42] 등의 별명도 오닐이 지어 주었다.[43] 코비 브라이언트에게도 'Showboat'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는데 썩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어서 그런지 잘 쓰이지 않았다.
올스타전 같은 축제에도 가장 필요한 스타라고 평가받는다. 2008년 올스타 전에서는 그것을 온몸으로 보여줬는데, 한 번 '''포인트 가드'''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오닐을 마크하는 선수는 드와이트 하워드. 그만큼 관중들을 유쾌하게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
플로리다 주에서는 '''명예경찰'''이다. 실제로 용의자를 쫓아가서 잡아본 적도 있다고. 또 훈훈한 미담도 몇개 있는데 레이커스의 전설 조지 마이칸의 장례식 비용을 자신이 다 부담했고, 친어머니에 의해 5살이라는 나이에 인신매매단에게 팔리고 성매매를 하게 된 샤니아라는 소녀의 장례식 비용도 다 부담해줬다.
요새는 트위터에 빠져있는 것 같다. 글이 자주 올라온다.
2010년 12월 보스턴으로 이적 후 보스턴 오케스트라에서 명예 지휘자로 활약했다. 역대 지휘자중 최장신으로 기록되었지만 타코 폴이 그 기록을 갈아치웠다고 한다.
사실 이러한 엔터테이너 기질 때문에 그의 커리어가 더 위대해지지 못했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의 스포츠 블로그이자 팟캐스트인 그랜트랜드를 공동진행하는 잘렌 로즈의 경우 "만약 샤킬 오닐이 코비와 같은 멘탈을 가지고 있었다면 '''리그는 멸망했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실제로 두 선수가 레이커스에서 틀어지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러한 농구라는 게임을 대하는 시각의 차이가 작용했는데, 코비는 오닐의 '외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LA 시절 감독이었던 필 잭슨 또한 "(샤킬은) '''10년 연속''' MVP를 거머쥘 능력이 있는 선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됐어야 했다."라며 아쉬운 평을 남겼을 정도다.
6. 미디어믹스?
데뷔 초기의 인터뷰에서, "나의 꿈은 NBA챔피언 , 아카데미상 , 에미상"이라고 할 정도로, 농구 뿐 아니라 영화,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 실제로 그의 레이커스 이적에 대해, 헐리우드가 있는 LA로 이적하여 연예활동을 좀 더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었다.
총 다섯 장의 랩 음반을 내기도 하였는데, NBA에 데뷔하기도 전인 1993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Shaq Diesel'은 두 곡을 빌보드 싱글차트 50위에 안에 올렸고, 한때 빌보드 앨범판매 순위 25위까지 오르며 100만장을 넘게 팔만큼 성공했다. 이후 우탱 클랜의 멤버들과 교류가 두드러지는 2집 'Shaq Fu-Da Return'(1994), 'You can`t STOP the REIGN'(1996)등을 발표하지만, 데뷔 앨범만큼의 성공은 없었고, 2000년대 초반 이후엔 두드러지는 음악활동은 없다. 1994년 발표된 명프로듀서 퀸시 존스의 앨범 'Jook Joint'의 수록곡 'Stomp', 1995년 발표된 마이클 잭슨의 앨범 'HIStory'의 수록곡 '2 Bad'에서도 구수한 랩을 들려준다. 가장 유명한 힙합 작업물을 꼽으라면 역시 그의 별명을 차용한 단체곡 Men of Steel.[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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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여럿 나왔지만 그다지 평가는 좋지않다.[45] 1995년 국내에 비디오로 발매될 때에는 샤킬 오닐의 NBA챔프라는 제목으로 출시된 블루칩스에 출연하였다. 대학농구 리쿠르트(신입생 발탁)의 추악한 이면을 들춘 영화에서 그는 유망주 농구 선수로 등장한다. 이 영화에는 이후 올랜도 시절 동료가 되는 앤퍼니 하더웨이가 출연하기도 하며, 실제로 이 영화 촬영 과정에서 두 사람은 많이 가까워져, 이후 1993년 드래프트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닉 놀테의 연기도 좋다. 더불어 이 영화 감독은 다름아닌 윌리엄 프리드킨이다! 3500만 달러로 제작했으나 북미 흥행은 2300만 달러에 그치며 실패했다.
1997년 DC 코믹스의 영웅 캐릭터인 스틸의 실사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은 적이 있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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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에 주연으로 나온 카잠은 자타공인 최악영화로 악명을 떨쳤던 바 있다. 평단의 평은 '자기 자유투 실력만큼이나 형편없는 연기력을 보여줬다'라고 했다. 그래서 디시인사이드 농구 갤러리에서 만든 '최악의 조합'으로 '샤크의 부업'을 꼽기도 했다. 이 영화의 개봉 무렵 올랜도에서 LA 레이커스로 이적했는데, 친정팀인 올랜도 원정경기 도중 올랜도의 팬 두 사람이 '올랜도에서 네 녀석 영화를 본건 우리 둘 뿐이다ㅋㅋㅋ'라는 피켓을 들고 골려먹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Nostalgia Critic이 다룬 적도 있다. 그나마 2천만 달러로 만들어서 북미에서 1890만 달러를 벌며 망해도 너무 쫄딱 망하진 않았다.(흥행에서)
그나마 무서운 영화 4에서 카메오로 나온다든지[47] [48] 조역으로 종종 나오고 있다. 최신작은 애덤 샌들러의 2013년작으로 7월 12일 개봉한 Grown Ups 2에서 조연으로 나온다. 또한 2014년 개봉한 레고무비에 피규어 및 목소리로 출연하였다.
격투기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UFC가 지금만큼의 인기를 끌지못하던 암흑기에도 꼬박꼬박 대회장을 찾아 관람하였고, 심지어 UFC 경기장에서 멀리 떨어진 마이애미연고의 팀으로 이적했을때는 UFC 경기장이 너무 멀어 찾아가기 힘들다며 마이애미에서도 UFC 대회를 열어줄 것을 주최측에 요구하기도 하였다.[49]
그리고 2009년 WWE RAW 관람 중 쇼 후반부에 빅 쇼와 대립하는 장면을 만들기도 했고 선수 말년에 종종 최홍만에게 도발을 한다든지[50] UFC에서 브록 레스너와 붙고 싶다든지 하는 얘기를 해왔다. 그리고 WWE는 은퇴 후 자유의 몸이 된 오닐을 놓치지 않고 빅 쇼의 경기를 추진한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에서 몇년간 소식이 없어 끝나는 줄 알았는데 레슬매니아 32 앙드레 더 자이언트 추모 배틀로얄 경기에서 깜짝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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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킬 오닐의 인기가 전성기에 달했을 때 오닐의 인기에 편승한 게임도 나왔는데, '샥 푸'라는 게임 이다. 16비트 게임기로 나온 대전액션게임이지만, '''세계 역사상 최악의 대전액션게임'''이라는 평가도 종종 받는 희대의 쓰레기 게임. AVGN도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리뷰한 바가 있다. 샤킬 오닐이 멋지게 쿵푸 포즈를 잡고 있는 표지가 인상적인 이 게임은 섀크의 인기를 믿고 안일하게 만들어 너무 많이 찍어낸 나머지 영미권 인터넷에서는 후일의 영화 엄복동 같은 느낌으로 못 만든 게임을 조롱하는 일종의 밈이 되었는데, 이 밈이 또 인기가 있어서 밈의 인기에 힘입어 후속작까지 제작되었다. 섀크로서는 그렇게까지 나쁜 추억은 아니었는지, 후속작에도 흔쾌히 초상권을 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모션캡쳐와 홍보 영상에도 출연했다. 물론 후속작도 2018 최악의 게임 중 하나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망했다.
1993년에 펩시 광고에 출연했는데, 길거리 농구를 하던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다가 펩시를 찾는데 아이스박스가 텅 비어 실망한 상태에 펩시 병을 들고 있는 꼬마아이에게 얻어 마시려고 하니까 꼬마아이가 '꿈도 꾸지 마요' 하며 거부하자 샤크의 멋쩍은 표정이 일품인 내용이다. 이 광고는 국내에도 방영되었는데 샤크와 꼬마아이 목소리는 더빙이 되었다.
2018년에는 디스커버리 채널의 연례 편성 중 하나인 "Shark Week"의 30주년 특집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름하야 "Shaq Does Shark Week"
방영 전 광고
(''''Shaq''' Week인 줄 알고 승락했는데, 알고보니 '''Shark''' Week였다'고 드립을 친다.)
한편 본편 촬영 중에는, 상어 케이지에 들어간 채 잠수한 샤킬의 주변에 몰려들었던 상어들 중, 약간 몸집이 작은 상어 한 마리가 케이지의 창살 틈새로 난입하는 돌발 사태를 겪기도 했다.
유튜브의 유명한 요리 예능 프로그램 First We Feast에 나와 핫 윙을 먹고 웃긴 표정을 지었는데 너무 웃기는 바람에 밈이 되어버렸다..
이 탈취제 광고에서 귀엽게 몸을 흔드는 것도 밈이 되었다.
7. 그 외
- 은퇴 후에는 SHAQ 샤킬 오닐 최고의 대결 - 스타들에게 도전장을 던지다라는 프로그램에서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들(ex. 알버트 푸홀스)과 대결을 펼치고 있다.[51]
- NBA Open Court라는 시즌제 예능 겸 토크쇼 프로그램에서 패널로 출연중이다. 그런데 썩 좋은 패널은 아닌 것이 자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무조건 끼어든다.(...) 실제로 그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일단 오닐은 애널리스트로는 좋은 목소리가 아니다. 과거 패널에 있었던 크리스 웨버나 같이 진행하는 케니 스미스와 달리 상당한 중저음이기 때문에 비판론자들은 "곰이 웅얼거리는 것 같다(...)"고 까기도 한다. 또 상당히 논리적으로 얘기하는 둘과 달리 아직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내공이 부족하고 진지하지 못하다는 점도 지적한다. 물론 이러한 점은 차차 개선되는 중. 더 심각한 문제는 현대 농구에 대한 공부가 심각할 정도로 부족하다. 지속적으로 까는 팀들이 있는데 사실 그 팀의 경기를 거의 안 보거나, 맨날 똑같은 뜬구름 잡는 얘기(포스트업 빅맨 칭송, 요새 농구는 픽앤롤 농구야, 드와잇 하워드는 나처럼 28-15을 해야 돼 등)만 반복한다던지. 위에 언급된 샥틴 어 풀의 한 에피소드에서 그가 농구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드러났는데, 원래 이 프로는 작가들이 영상과 대사는 전부 준비하고 오닐은 이 대본을 맛깔스럽게 읽기만 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작가진이 엉뚱한 대본을 전달하는 바람에 오닐이 즉석에서 멘트를 준비해야 했는데, 해당 영상에 나오는 선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보면서 "아 저 선수가 이런 바보짓하고 있네요"라고 해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개그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웃으며 넘어갔지만 현역 해설가이자 분석가가 스타급 선수들을 제외한 선수들의 이름을 전혀 모른다는 건 은근히 심각한 문제다. 그래도 최근에 개선된 것 같으며 그의 특유의 목소리는 대체 불가라 몇벛 샤킬이 빠졌을때 "샤킬이 없으니 확실히 다르다" 하고 아쉬움을 표현하는 목소리가 상당히 많았다. 특히 특유의 "저베일 맥기" 의 외침을 대체 불가수준.
- 방송인 측면에서 보면 하나 문제는 자기가 무시당하는 꼴은 절대 못 본다는 점이다. 찰스 바클리가 사랑을 받는 이유는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자신이 놀림감이 되더라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닐은 장난식으로라도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는 꼴을 못 본다. 남들은, 특히 까마득한 선배인 패트릭 유잉이나 데이빗 로빈슨에게도 바베큐 치킨 드립을 치면서 자기 힘이나 실력을 무시하면 정색하고 부정한다. NBA슈퍼스타들이 자존심이 센 편이긴 하지만, 바클리나 다른 선수들은 진지할 때는 진지하고 웃을 때는 그냥 웃는데 오닐은 웃다가도 자기를 무시한다 싶으면 정색하며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적이 여러 번 있다. 바클리와 아웅다웅할 때 바클리가 당하는 기믹이 대부분인 것도, 바클리는 이런 식의 까임을 웃으면서 넘길 수 있지만 오닐은 절대 못 넘긴다는 것이다. 오닐이 자진해서 웃음거리가 되는 건 본인이 사전에 짜놓은 꽁트를 할 때 뿐이다.
- 사실 패널로서 여러 문제점도 있지만, 인간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웃기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크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자기가 무시당하면 정색하면서 남들을 놀릴 때는 상대 반응이 어떻든 무시하고 계속 자기 할말을 한다. 샥틴 어 풀 항목에서 나오듯이 샥틴어풀에 나오는 것에 대해 맥기 본인이 싫다며 그만 좀 내보내라고 사정을 했는데도 무시하고 계속 내보내면서 비웃었다. 그래놓고 맥기가 비난을 하자 오히려 맥기를 무시하면서 자기 때문에 맥기가 유명해졌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는데, 농구선수가 전국적으로 바보 취급당하며 조리돌림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인터넷에서 인기 좀 많다고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저베일 맥기 항목에도 나왔듯이 이런 점은 맥기의 선수 가치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요소이다.
- 그래도 찰스 바클리와 주제에 대한 의견충돌로 아웅다웅하면서 개그로 방송분량을 확보중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은 여전해서 코비 브라이언트의 발언으로 드림팀에 대한 떡밥이 나왔을 때 드림팀1의 레전드 데이비드 로빈슨, 패트릭 유잉 정도는 바비큐 치킨이나 머스터드 바른 치킨너겟(...)으로 만들어 얼마든지 해치워버릴 수 있다고 한다. 이 날의 주제는 원조 드림팀과 2012년 드림팀 중 어디가 더 강한지였는데, 샼은 뜬금없이 자신이 소속됐던 94년 드림팀이 제일 강하다고 억지를 부렸다... 또 1996년 드림팀이 1992년팀을 이긴다는 등 자신의 드림팀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히 쎄다. 같이 1996년 드림팀에서 뛴 레지 밀러를 대동하는 건 덤. 정작 둘다 뛴 바클리는 1992년 쪽에 손을 들어줬는데, 그런 바클리가 어지간히 못마땅한 반응을 보였다.[52][53] 또 자주 나오는 오닐이 자주까는 사람은 자신을 제치고 2연속 MVP를 따낸 스티브 내쉬. 매번 내쉬 이야기가 나올때 자신을 제치고 이겼다고 항상 까댄다.[54] 단 하킴 올라주원만은 올랜도 시절 파이널에서 4:0으로 털린 경험이 있어서 까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오닐이지만 그도 인정하는 2명이 하킴과 마이클 조던.[55]
- 내쉬 관련해서 뒷 얘기가 있는데, 이 항목에도 언급된 "Shaq vs"의 아이디어는 원래 내쉬의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닐이 2008년 2월에 이를 듣고 내쉬와의 상의 없이 자기의 리얼리티 쇼로 만들었다고 한다.[56] 그러나 오닐 본인은 2008년 8월에 올림픽을 보던 도중에 아이디어가 생각났다고 주장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내쉬는 샤킬 오닐이 동료들에게 "Shaq vs"의 아이디어를 알려주자 "네가 나한테서 훔쳐간 아이디어 얘기하는 거야?"라고 받아쳤다고. 결국 내쉬는 법적 대응을 하려고 했으나, 이를 무마하기 위해 그에게 쇼의 executive producer 직함과 보상이 주어졌다고 한다. 다만 내쉬 본인은 이런 보도 내용을 부인했지만, 오닐이 방송에 나와 항상 내쉬에 대해 안 좋은 얘기만을 하는 걸 보면 둘의 사이가 썩 좋아보이진 않는다.
- TNT 방송 도중 방정을 떨다 나뒹굴어 합성짤이 많이 돌았다(...). 케니 스미스가 언제나하는 코너의 장난이었는데 이 날 갑자기 뭐에 발이 걸렸는지... 사실 오닐은 대체적으로 몸개그에 특화되어 있다. 찰스 바클리와 3점슛 내기를 하고 이기자 브레이크 댄스를 춘다든가 바클리와 케니 스미스의 장난에 나무를 맞고 쓰러진다든가(...). 실제 입담보다는 몸개그가 더 반응이 좋다. 지금은 입담도 많이 나아졌다.
- 현재는 NBA 주관 방송사 TNT의 포스트게임쇼인 Inside the NBA에 패널로 고정출연하며 어이없거나 웃긴 플레이를 한 선수들을 보여주는 Shaqtin' A Fool 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2015년 7월 20일,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역대 레이커스와 불스 선수 각각 5명[57] 을 선정한 다음 "우리 레이커스 팀이 불스 팀을 50차로 이길 듯. 님들 생각은 어떠함?"이라며 어그로를 끌었다. 스카티 피펜은 이에 "님이 LA 시절에 우승한 횟수보다 우리 불스가 우승한 횟수가 2배 더 많은건 팩트인듯?ㄲㄲ" 라는 식으로 발끈했는데, 오닐은 "내가 님이 파이널 경기 뛰는걸 대부분 봤는데 잘하긴 함. 근데 사실 그 분이 대부분 다 하지 않았나? 심지어 스티브 커나 론 하퍼가 님보다 더 인정받아야 한다고 봄. 난 1인자였고 님은 2인자ㅋ"라며 다시 답장을 날렸다.[58][59]
- 레이커스 시절 앙숙이었던 새크라멘토 킹스의 소액 주주가 되며 경영진에 합류하기도 했다.[60]
- 의외로 몸이 유연해서 (선수 시절에도 큰 덩치에 비하면 유연했다) 춤을 잘 춘다. 실제 올스타전에서 르브론 제임스, 드와이트 하워드와 댄스 배틀까지 한적이 있다. 댄스 자체는 셋 다 비슷했는데 가장 재미있게 춘 건 역시 오닐(제임스와 하워드를 왜소해 보이게 만드는 압도적 피지컬을 보며 앞서 기술된 샤크의 장악력을 생각해보자).
- 2012년 배리 대학교에서 교육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로스쿨에 재학중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운동선수로서 최정점을 누리고 은퇴 후 학업에서도 큰 성취를 이뤄낸 점은 정말 존경할 만하다.
-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고학력자임에도 지구 평면설 지지자이다. 본인이 마이애미에서 L.A.까지 차로 여러번 왔다 갔다 해봤지만, 절대 땅이 둥글지는 않더라는 경험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중국이 지구의 반대편에 있다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중력을 부정하였다.
- 엉클 그랜파에 게스트 출연했다. 더빙판 성우는 이장원
- 발이 엄청나게 크다. 선수시절에는 385mm를 신었고 현재는 400mm를 신고 있다고 한다. 원래 일반인보다 키가 큰 농구선수들은 발도 크기 마련이지만 오닐의 발은 비슷한 키의 다른 선수들보다도 더 크다.[61]
- 2016 NBA 올스타전 덩크콘테스트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하였다. 여기서 그는 또다시 예능감을 주체하지 못하는데...예선 2차시도에서 애런 고든과 잭 라빈이 고난이도 덩크를 성공시켰으나, 두 명 모두에게 9점을 선사하여 콘테스트를 지켜보던 모두를 어이상실로 이끌었다..[62] [63]
- 2018년 엉클 드류(Uncle Drew) 영화에 주연 중 하나로 출연하였다. 오래 전 엉클 드류에게 여자친구를 NTR당했던 비련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는데, 선수 시절을 연상시키는 깨알같은 개그들이 몇 있다. 1) 샤크에게 얻어맞은 엉클 드류가 "자네가 처음 넣은 자유투(free throw)구먼" 하는 장면. 2) 동네 여고생 팀(...)과 게임하면서 동료들과 리듬이 잘 안 맞자 "패스 좀 하라고, 코비"라고 일갈하는 장면.
- 올라주원처럼 자신의 시그니처 신발을 어린아이들이 부담없이 신을 수 있도록 비교적 낮은 가격으로 판매하게 했다. 그의 상업성과 스타성, 실력을 고려해봤을 때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 이 때문에 라바 볼이 론조 볼의 시그니처를 엄청나게 비싼 가격으로 런칭했을 때 이에 대해 비판했던 적이 있다.
- 2016년엔 베어 그릴스와 함께 Running wild with bear grylls에 나와 야생을 체험했다. 가면서 나무를 모조리 부수고 가는게 압권.
- 야니스 아데토쿤보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는 듯 하다. 자신의 별명인 '슈퍼맨'을 아데토쿤보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한 적도 있고, 같은 나이 대 본인보다 더 뛰어나고 했을 정도.
- 1986년부터 DJ로써 활동했으며 현재도 'DJ DIESEL' 이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이다. 덥스텝을 주로 틀며 Tomorrowland 2019 메인스테이지에도 등장하였다.
- 명센터이자 오닐이 고등학교를 나온 샌안토니오 지역의 영웅 데이비드 로빈슨과의 악연이 있다. 이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오닐의 두번째 올스타전인 94년 당시 서부 빅맨들로부터 집중수비를 당해 처참한 활약을 했는데, 이때 그는 후반기에 스퍼스와 붙은 경기에서 (복수하겠다는 호언장담과 달리) 로빈슨에게 판정패한 오닐과 스퍼스 선수들 사이에서 약간 신경전이 있었다. 바른 생활 사나이였던 로빈슨은 오닐을 그리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고, 당시 인기가 대단했던 어린 오닐에 대해서만 묻는 기자들에게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도 했다. 오닐은 인터뷰 도중 로빈슨에게 인유어페이스를 먹이는 사진이 담긴 자기 농구카드를 내보이거나, 로빈슨을 깔아뭉개겠다고 장담하기도 했다. 오닐은 그 이유에 대해 "로빈슨이 스퍼스에서 한창 인기를 끌고 있을때 내가 어렸을때 사인을 해달라는 요구에 무례하게 대했다"고 여러차례 밝히고 자서전에도 썼는데, 두 선수가 모두 은퇴한 이후 오닐이 밝힌 바에 의하면 이는 새빨간 거짓말. 로빈슨에게 라이벌 의식이 있던 그가 만들어내 퍼뜨린 거짓이었던 것이다.[64][65] 사실 둘은 96년 올림픽 당시 드림팀에서 한솥밥을 먹었고, 이 주장에 대해 로빈슨이 물었을때 오닐이 "미안...거짓말이야"라고 인정했는데 몇년 뒤 펴낸 자서전에 쓴 것이다. 로빈슨은 대인배스럽게 몇년간 계속되는 오닐의 거짓말에 대해 별다른 해명를 하지 않았고, 오닐이 거짓임을 인정하는 인터뷰를 한 이후 이에 대해 묻자 "그 친구는 원래 엔터테이너 아니냐"며 웃어넘겼다.
- 영화계에 케빈 베이컨 지수가 있듯이 NBA에는 샤킬 오닐 지수라는 것이 있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파이널에 올라간 팀원들 중 누군가 한 사람은[66] 오닐의 커리중 어느 시점에서 그와 함께 한솥밥을 먹은 팀원이었다는 것. 이 기록의 시작은 오닐이 데뷔하기도 전인 그렉 카이트부터 시작해서[67] 2019-20년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68]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팀원들이 꼭 유명했다는건 아니고 샤킬이 데뷔하던 시점에 벤치에서 은퇴하기 직전이거나 샤킬이 은퇴하는 시점에 같은 팀 메이트였던 동료들을 포함한다. 이것이 가능한게 나름 샤킬이 꽤나 오랬동안 NBA에서 뛰었다는 점과 동시에 말년에 샤킬이 저니맨으로 이팀 저팀을 왔다갔다 한 경력이 있어서 그렇다.
8. 한국 예능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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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12일에 예능프로그램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에 출연 예정 기사가 떴다. 그리고 서인천고등학교 편에서 진짜 출연했다. 기사 교복까지 특수제작해서 출연했는데, 몸집과 존재감이(...) 정말 거대하다.[69]
샤킬 오닐 본인이 미디어에 노출되어 스타로 주목받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구가 유럽 및 아메리카(북미, 남미), 필리핀이나 중국 등 전세계적인 스포츠고 농구계에서 전세계적인 인지도로 따졌을 때 이런 전설적인 농구 선수가 종편 예능에 나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학교 PD가 샤킬 오닐을 섭외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기사 원본 그리고 2년 뒤 스테판 커리가 무한도전 3점 커리에 나왔다.
오닐은 레이커스 이적 후인 1997년에도 리복주간으로 잠실 롯데월드에 내한했던 적이 있고 당시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다. 다만 이 때는 대단히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 비난의 목소리가 높았다.
9. 관련 문서
[1] 실제로 마이애미에 있는 Barry University에서 인적자원 개발전문 분야 교육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2] 착화신장.[3] 2021년 기준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에서 농구를 하고있다.[4] 2021년 기준 조지아주의 유니온 그로브 하이 스쿨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5] 거의 모든 공격 옵션이 포스트업이다. 가끔 페이스업으로 드리블 돌파를 할 때도 있다. 오닐의 드리블과 볼핸들링 실력은 90년대에 데뷔한 센터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편인데, 한쪽 골대에서 반대쪽 골대까지 단독 드리블을 하다가 깨끗한 스핀무브로 수비수를 제치고 덩크를 꽂아넣기도 했다. 다만 스피드가 느리기 때문에 페이스업을 자주하진 않는다. 워낙에 포스트업 옵션이 강력하기도 하고.[6] 오닐 외에는 NBA 초창기 조 펄크스와 조지 마이칸, 밀워키 벅스 시절 카림 압둘 자바, 그리고 마이클 조던밖에 없다.[7] 자칭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대개 수긍하는 편. 비견될 만한 사람이 고대 괴수 윌트 체임벌린 정도밖에 없다.[8] 사실 '빅 펠라'는 말 그대로 덩치 좋은 선수란 뜻으로, 샤크 뿐 아니라 웬만한 빅맨들은 해설자들로부터 이렇게 불려본 적이 있다. 야오밍도 초창기 샤크를 상대할 때 딸리는 웨이트와 파워를 만회하기 위해 속공 시 죽어라 달렸는데 (야오 사이즈에 쉬운 게 아니다) 이를 두고 휴스턴 해설자들이 "The big fella running the floor!"하고 감탄했다.[9] 원래는 1984년 전체 1번 하킴 올라주원, 85년 전체 1번 패트릭 유잉, 87년 전체 1번 데이비드 로빈슨과 더불어 1986년 전체 1번 지명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즈의 브래드 도허티가 4대 센터였다. 그러나 브래드 도허티가 부상으로 8시즌만에 은퇴를 하고, 1992년 전체 1번 오닐이 리그에 충격과 공포를 몰고 등장하면서 새로운 4대 센터가 된 케이스. 올라주원, 유잉과는 10년이나 나이 차이가 난다. 그만큼 오닐의 데뷔가 엄청났다는 뜻이다. 다만 4대 센터란 용어는 국내에서만 쓰는 용어이다(당연하지만 2000년대를 주름잡은 슈팅 가드들을 일컫는 "6성슈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MVP를 수상하거나 수상에 근접해본 적이 있는 오닐, 올라주원, 로빈슨, 유잉과는 달리 도허티는 훌륭한 선수긴 했지만 써드팀에 딱 한번(쉽게 말하면 해당시즌의 센터들 중 세번째로 좋은 활약을 했다는 뜻이다) 오른 게 다여서 다른 선수들과는 수준차이가 제법 있다.[10] 그의 고정 프로인 Inside the NBA나 Open Court에 보면 패트릭 유잉과 해리슨에 대한 존경심이 종종 튀어나오며, 특히 해리슨을 지칭할땐 꼭 내 아버지, 위대한을 붙여서 지칭한다. 여담이지만 야오밍의 다큐멘터리인 A Year of Yao를 보면 해리슨이 야오와 오닐이 붙는 첫 경기를 보러 자동차를 타고 수백 킬로미터를 운전해왔다면서 "진짜 센터 둘(Two REAL centers)이 붙는 걸 보러 왔다"고 한다. 두 선수는 경기 후 상대방의 아버지 (야오는 어머니도)와 포옹을 나눈다.[11] 다만 모제스 말론은 전성기 시절부터 대부분 팀의 의지로 트래이드되었지만 (한창 때이던 휴스턴, 필리, 워싱턴 이적 모두 타의로 이뤄진 것) 오닐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로 이적했다는 것이 다르다. 96년에 점점 커가는 페니 하더웨이와 팀내 에이스 자리를 두고 약간 불편한 관계가 되자 (다만 둘 사이는 좋은 편이었고, 이때문에 은퇴 이후에도 페니를 많이 칭찬하는 편) 이전부터 자신이 관심 있는 엔터테인먼트 활동도 할겸 FA 때 LA로 옮겼고, 코비와는 에이스 역할+성폭행 혐의 사건 당시 코비의 실언+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둘이 몇년 간 서로의 성질을 긁는 바람에 거의 원수 사이가 되어 이후 마이애미로 옮길때는 트래이드를 통한 것이긴 했지만 본인이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었다. (이적 후 첫 맞대결에서 둘은 경기 전 악수와 포옹을 할때 거의 의무적으로 '''눈도 안 마주치고''' 했으며, 몇년 뒤가 되어서야 서로 웃으며 인사를 했다. 09시즌에는 아예 올스타전 공동 MVP가 되어 서로 웃고 떠들고 했으니 앙금을 많은 부분 떨쳐버린 듯) 하락세가 시작된 이후 피닉스와 캐브스 이적은 팀의 의지, 마지막 보스턴 이적은 자유계약으로 자기 의지.[12] 여담이지만 이런 괴물같은 성적을 기록하고 MVP 투표에서 7위에 올랐음에도 올NBA 써드팀에도 오르지 못한다. NBA는 해마다 리그 최고의 가드 2명, 포워드 2명, 센터 1명을 퍼스트팀(All-NBA first team)으로 선정하고, 그 다음 다섯 명을 세컨드팀, 그 다음을 써드팀에 선정한다. 보통 이 정도 성적을 거두면 올NBA팀은 아주 무난하다는 걸 감안하면 90년대 센터 포지션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이듬해에는 더 심했는데 '''MVP투표 상위 5걸 중 4명이 센터여서''' 패트릭 유잉은 MVP투표 5위에 오르고도 써드팀에도 못 올랐다. 참고로 이해 유잉의 성적은 24.5점 11.2리바운드 2.7블록에 팀은 동부 2위였다.(승률로는 1위 애틀랜타 호크스와 동률) 비록 국내 한정이긴 하지만 4대 센터란 이름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13] 여담이지만 이 때 올스타전에서 2년차임에도 불구하고 득점왕 직전까지 가는 등 무시무시한 기세로 성장하던 오닐이 좀 아니꼬았던 건지, 당시 그가 득점을 하려고 하면 올라주원, 로빈슨, 칼 말론, 찰스 바클리 등 기라성같은 서부의 슈퍼스타 빅맨들이 달려들어 블럭을 하거나 득달같이 파울을 해버리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닐은 동부에서 두번째로 많은 26분이나 뛰고 슛을 12개나 시도해 고작 2개밖에 못 넣고 자유투를 11개 던져 4개 성공해 고작 8점에 그쳤다(참고로 그와 주로 매치업된 올라주원은 개인파울을 네 개나 했지만 블럭을 다섯 개나 했다.). 그의 백업이었던 패트릭 유잉은 24분 뛰고 20점을 기록한 것과 대조적. 이 때문에 짜증이 난 건지 경기 종료 몇분전에 수비가 좀 느슨해지자 림을 쥐어뜯을 기세로 어마어마한 파워의 슬램덩크를 두 차례 꽂아넣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올스타전은 지금처럼 단순한 이벤트전이 아닌 선수들의 자존심 싸움 측면이 강했기에 일어난 해프닝.[14] 샤킬 오닐은 NBA 선수들 중에서도 자존심이 강하기로 유명한 선수이다. 그런 오닐이 나중에 회상하기를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시기상조였다'' 라고 할 정도였다.[15] 사실 이때 정규시즌 성적 차이만큼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었다. 해설진은 "Many consider this to be the two best teams in the NBA(많은 이들이 이 두 팀이 NBA 최고의 두 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했고, 시카고 선수들도 "올해 내내 올랜도를 '이겨야할 팀'으로 겨냥했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골밑이 허약한 (주전센터 룩 롱리는 당시 29개팀 주전 들 중 최하위수준이며, 데니스 로드맨은 리바운드는 뛰어나지만 신장이 작았다.) 시카고 불스 입장에서는 샤킬 오닐에다 올스타급 파워 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까지 버티고 있는 올랜도 매직은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게다가 외곽은 시카고 불스가 유리했지만, 이 팀에는 조던조차 부담스럽게 여길 만한 떠오르는 슈퍼스타 페니 하더웨이까지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1차전에서 그랜트가 부상으로 물러나고 로드맨의 기습적인 수비에 오닐이 부담을 느끼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39점차 안드로메다 관광을 타버리고, 결국 나머지 시리즈 역시 내주고 만다.[16] 여담이지만 이처럼 오닐은 스윕(한 경기도 못 이기고 시리즈에서 전패하는 것)당할 전력이 아님에도 스윕당한 적이 많았는데 이 점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실제로 마이클 조던도 86,87년에 두 번 연속 스윕당한 적이 있었지만 이때는 팀이 플옵에 턱걸이로 올라가는 반면 상대가 역대급 강팀이었고 패배하는 과정에서 역대급 활약을 펼쳤다. 반면 오닐은 이때처럼 본인의 팀도 우승후보이거나, 95시즌처럼 오히려 본인의 팀이 전력상 우세라고 평가받거나 (95 파이널 당시 휴스턴은 겨우 정규시즌 서부 6위인데다가 홈코트 어드밴티지도 매직에게 있었고, 전력상 올랜도가 앞선다고 전문가들이 평했다), 07플옵에서처럼 동부 4-5위의 대결이었을때도 스윕당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실제로 오닐은 승부근성이 꽤나 강하긴 하지만, 마이클 조던이나 코비 브라이언트 같은 역대급 선수와 같은 독기는 없었기 때문에 불리한 상황에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감독 필 잭슨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그가 농구에만 독하게 집중했다면 10번은 우승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지적한 데 이유가 있는 것. 위 각주의 포인트는 스윕에 의미를 두는게 아니다. '''스윕당할 전력이 아니었는데 한 번 밀리면 와르르 무너지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위에 언급됐다시피 95시즌에 올랜도는 더 강한 전력에도 1차전을 패한 이후 허무하게 무너졌는데 팀이 전력에 비해 모자라는 실력을 보이면 그 팀의 에이스가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팀이 잘하면 에이스에게 공을 가는 것과 같은 논리.[17] 이 과정에서 '''61득점 23리바운드'''로 윌트 체임벌린 이후 최초로 60-20을 달성하는 경이로운 경기도 있었다.[18] 기자 1명이 앨런 아이버슨에게 투표했다. 훌륭한 팀원들 없이 혼자의 힘으로 팀을 이끈 공로를 높이 샀다는게 그 이유. 훗날 2013년 MVP 투표에서도 1표가 카멜로 앤서니에게 가는 바람에 르브론 제임스가 만장일치로 MVP에 선정되는데 실패하는 일이 있었다.이후 이 전인미답의 고지는 달성되지 않다가 어느 한 3점괴물로 인해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19] 1차전 44득점을 넣고도 졌으나 2차전에서 '''거의 쿼드러플 더블(28득점 20리바 9어시 8블록)을 달성할 뻔하기도 했다!'''[20] 나중에 승부조작 스캔들로 구속된 팀 도너히 심판은 이 시리즈 6차전에서 조작이 있었다는 발언을 하는데, 실제로 석연찮은 판정들 때문에 말이 많았다.[21] 3연패 첫번째 시즌에는 그나마 샬럿 호네츠에서 올스타에도 선발되었던 베테랑 포워드 글렌 라이스가 시즌 평득 15점 정도 올려주면서 샤크, 코비의 뒤를 받쳐줬으나 그 이후엔 샤크, 코비가 도합 55점 정도 합작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데릭 피셔가 간신히 10득점 정도를 올릴 뿐 죄다 한자리수 평득이었다. 원투펀치가 엄청나게 강력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원투펀치와 팀 내 다른 선수들의 공격비중이 차이나는 팀은 당대 우승경쟁 팀 중에선 없었다.[22] 이때 코비의 인터뷰는 더 가관이었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 나도 샤크처럼 돈으로 입막음했어야 하냐는 식으로 말을 해 보던 팬들도 벙찌게 만들었다.[23] 11년만의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다.[24] 정확히 말하면 코비와 샤크 둘 다 2인자가 되기는 거부했고, 두 선수 모두에게 맥시멈 계약을 주기는 힘들었던 (오닐의 경우 맥시멈을 줄경우 연평균 3천만불에 가까웠고, 이때 그는 삭감을 거부했다. 근데 정작 마이애미 히트에 가니까 약간 삭감된 금액에 계약했다. ) 레이커스가 더 젊은 코비를 택한 것이다. 특히 이때 레이커스 프런트는 필 잭슨 감독과의 갈등도 있었는데, 오닐은 "날 잡으려면 무조건 잭슨 잡아라"라고 공언한 판이라, 잭슨까지 동시에 잡아야될 상황. 결국 잭슨과 오닐을 포기하고 코비 위주로 팀을 재건하려고 한 것이다. 근데 어이없게 둘을 보내고 맞이한 04-05시즌이 34승 48패로 폭망[23] 하자, 잭슨 감독을 연평균 천만불이 넘는 초거대계약을 안겨주면서 다시 모셔온다.[25] 전직 농구선수들이 모여 노가리를 까는 Open Court란 프로에서 최근에 샤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05년 당시 내쉬는 진짜 MVP가 아니라 동정심으로 탄 MVP(sympathy vote)" 자기가 너무 크고 강해서 매년 탈 수 없으니 준 거라고. 원래 오닐이 떠벌이 이미지가 있지만 이 멘트에 대해서는 미국이건 한국이건 팬들 반응이 매우 안 좋다. 사실 당시 내쉬는 플옵도 못 오르던 팀을 전체 1위로 이끈 대활약을 펼쳤는데 그걸 "동정심"으로 폄훼하니... 게다가 매년 탈 수 없느니 뭐니 할 수도 없는게 그는 시즌 MVP를 평생 한번 수상했다.[26] 케빈 가넷[27] 사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평생 번 돈이 억달러를 훌쩍 넘어가는 오닐 입장에서 그렇게 큰 돈도 아니었고, 선수들이랑 웃으면서 장난치는 모습이긴 하다.[28] 더 충격적인 건 저 두 사건은 각각 1993년 2월 7일, 4월 13일 두 달만에 두 개의 골대를 박살냈다![29]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운동능력이 NBA 평균수치는 가볍게 상회한다고 한다.[30] 그럼에도 체지방률은 10%를 밑돈다. 그야말로 근육덩어리.[31] Basketball Quotient. 농구의 전술을 이해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농구 지수를 의미한다.[32] 이것도 상당히 보수적인 수치. 18kg이면 파운드로 40파운드 정도 됐는데, 오닐은 데뷔 당시 이미 300파운드 언저리의 무게였고, 당시 NBA센터들은 대부분 250파운드 언저리였다. 즉, NBA센터들과 비교해도 대략 22.5kg 이상 더 무거웠는데, 전반적으로 더 가벼운 대학 센터들은 비교도 안 되었다.[33] 60년대 윌트 체임벌린, 70년대 모제스 말론, 카림 압둘자바, 80년대의 로버트 패리시, 이후 4대센터들인 하킴 올라주원, 데이비드 로빈슨, 패트릭 유잉 등...[34] 그의 우상인 유잉의 주특기 중 하나가 바로 돌파에 이은 러닝점프훅이었다.[35] 가장 자유투 성공률이 높았던 시즌은 02-03 시즌의 62.2%.[36] 하지만 똑같이 손이 큰 것으로 유명한 카와이 레너드의 통산 자유투성공률이 8할 중반대인걸 보면... 그냥 못 쏘는 것이 맞는듯. 실제로 오닐과 레너드가 손을 대본적이 있는데, 오닐이 아주 약간 더 크지만 거의 비슷했다. 이 정도면 레너드 역시 3칸을 잡을텐데 이것 때문에 슈팅에 문제가 있단 소리는 없다.[37] 물론 노비츠키는 오닐을 압도하는 스피드가 있었지만, 빅맨이라 제쳐내는데 한계가 있었으며 파워 자체가 너무 차이나서 힘들어했다.[38] 98년 유타에게 힘 한번 못 써보고 스윕당한 것도 같은 이유다. 당시 레이커스는 골밑의 오닐 외에도 올스타 가드 듀오 에디 존스와 닉 반 엑셀, 벤치의 코비 브라이언트가 버티는 공격팀이었기 때문에 절대 스윕당할 전력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주전 파워포워드가 수비가 그리 뛰어나지 못하고 파워가 약한 로버트 오리. 오리는 말론의 파워를 당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오닐이 말론에게 붙을 때도 많았는데(유타는 반대로 센터의 공격력이 약했다) 운동능력이 뛰어난 오닐은 말론의 피지컬은 감당가능했지만 2대2 플레이는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97년 주전이었고 이 시즌에 벤치로 내려온 엘든 켐벨은 발이 너무 느렸다.[39] 단, 그 몸을 유지하느라 정규시즌에는 결장이 잦아서, 정규시즌 MVP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1번밖에 없다. 그럼에도 단기전에서 3번의 파이널 MVP라는 것은 오닐이 우승팀의 진짜 에이스임을 상징하는 것이다.[40] 기대와는 달리 오닐에게는 그렇게 큰 효과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다.[41] 성공 개수는 5935개로 통산 22위. 13818개를 시도한 칼 말론이 통산 1위(말론은 또한 성공 개수도 9787개로 통산 1위이다).[42] 나중에 이 별명은 미디어 등을 거치면서 ''''Mr. Fundamental''''로 살짝 바뀌었다.[43] 오닐이 수비수를 스핀무브로 제칠 때 브라이언 쇼가 띄어준 랍 패스를 앨리웁으로 연결하는 콤비 플레이를 '''Shaw-Shaq Redemption'''이라고 불렀는데 이런 일화들을 보면 오닐의 어휘구사력 감각이 상당히 탁월했음을 엿볼 수 있다.[44] 피쳐링부터 '''아이스 큐브에 B-리얼에 피터 건즈에 KRS-One'''이다(...).[45] 사실 영화에 나온 농구선수들 중에서 평이 좋은 경우는 정말 드물다. '''농구를 다룬 영화'''를 제외하고, 배역을 꽤 충실히 수행했다는 평을 받은 것은 레이 앨런, 사망유희의 카림 압둘 자바나 나쁜 녀석들의 존 샐리 정도이고, 장 클로드 반담과 함께 더블팀의 주연을 맡은 데니스 로드먼이나 스페이스 잼의 마이클 조던 그리고 본문의 샤킬 오닐 등은 재앙(...)이 따로 없었다.[46] 여기서 자유투가 몇 번 나오는데 대부분 실패, 마지막에 수류탄을 자유투로 성공시킨다…[47] 포스터에도 나오지만, 초반에 잠깐 나오는 역할이다. 돌로 자유투를 던지는데, 상당히 낮은 성공률을 보여준다.[48] 쏘우 1을 패러디하여 본인과 의사라는 사람이 둘이 함께 납치당해서 깨어나서는 발이 쇠사슬로 묶인걸 보고 상당히 당황하다가 살인마의 목소리를 듣고는 "'''코비'''?" 라고 대뜸 물어보는 게 둘 사이를 아는 사람이 보면 상당히 웃긴 장면.[49] 이 때문인지 훗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촬영 때 추성훈을 알아보았다. 추성훈이 자신을 UFC 선수라 소개하자 깜짝 놀라며 다시한번 이름을 물었고, 추성훈이 자신의 일본이름과 별명 '섹시야마'를 말해주자 그제서야 알아보겠다는 듯 포옹한다. [50] 최홍만은 자신에게 영상편지로 도발한 오닐에게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여 역시 영상편지로 답장을 하였다. '''컴온'''이라고. '''농구만 했던 놈, 단숨에 때려눕혀 버린다'''는데... 이 소식을 보고 누리꾼의 반응은 농구만 했던 놈이 겁없게시리... 최홍만, 박살내 버려라!라는 반응과 농구 팬들의 "샼 같은 전설적인 선수가 최홍만을 알아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 같은데?"라는 반응으로 갈리는 듯 하다. [51] 일부 에피소드는 "샤킬 오닐의 무한 도전"이라는 제목으로 엠스플에서도 방송했었다.[52] 이 문장만 보면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오닐은 은퇴후 종종 유잉에 대해 "my idol"라고 지칭하며 존경심을 표했다. 대학시절까지 33번를 택한 이유도 그것 때문. 다만 매직 입단시 이걸 포기한 이유가 당시 33번을 달고 있건 선수가 돈을(...) 요구해서라고 한다. 오닐은 젊은 시절 유잉에게 끊임없이 도발한 것에 대해 "그가 최고라는 걸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극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밝힌바 있다. [53] 그리고 바클리는 비웃었다.[54] 절반은 농담조이긴 하지만 매번 나오니까 패널들도 "아 좀 그만" 을 외친다. 내쉬 그리고 오닐과 한솥밥을 먹었던 그랜트 힐이 오죽하면 "이러니까 우리가 피닉스에서 우승을 못했지 너가 그렇게 자기팀 포인트 가드를 싫어하니까"라고 한탄하는게 포인트. (셋이 한팀에 뛰었다)[55] 하킴이나 조던은 오닐의 프로 초창기 시절 너무나 큰 벽이었다. 팀 전력이 약했어도 프로 초창기에 오닐은 NBA를 파괴하던 괴수였다. 더나아가 3년차 파죽지세로 야구에서 복귀한 조던을 무너트리고 우승을 향해 돌진했지만 하킴에게 94-95 파이널에서 처참하게 박살났다. 오닐은 하킴에게 공수에서 완벽하게 제압당하며 본인은 평균 17득점으로 묶인와중에 하킴은 무려 평균 31득점을 쏟아냈고 그 중 대부분의 득점 매치업이 오닐과 이루어진것이었다. 절치부심한 95-96시즌 그 유명한 시카고의 72승 시즌에 겹치며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시카고와 정면승부를 펼쳤지만 전시즌과 달리 완벽한 컨디션으로 돌아온 조던에게 팀이 유린당하며 완패했다. 참고로 조던은 96시즌 컨파당시 평균 36득점을 뽑아내며 올랜도를 부숴버렸다. 끝내 오닐은 하킴과 조던이 전성기에서 내려오고 은퇴한 이후 LA에 가서야 우승을 했으니 저둘을 인정하지 않을수가 없을것이다.[56] https://www.webcitation.org/5uImWLTL2[57] 레이커스 팀에는 매직 존슨, 코비 브라이언트, 엘진 베일러, 카림 압둘 자바 그리고 본인을 꼽았고, 불스 팀에는 데릭 로즈,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 데니스 로드맨, 호러스 그랜트를 꼽았다. 여담으로 70~80년대 NBA에 해박한 팬들 중에서 "시카고에 아티스 길모어라는 명예의 전당 헌액자가 있는데 왜 호러스 그랜트를 넣었냐"고 지적한 이들도 있었다.[58] 마이클 조던의 경우 얼마 뒤 본인의 농구캠프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그냥 큰 의미 없이 한 말 같습니다. 토론거리(debate)입니다. 결코 (그 결과를) 알 수 없으니까요. 제 생각엔 우리가 그들(레이커스)를 박살 냈을 것 같습니다. 그(샤크)는 그들이 우리를 박살냈을 거라고 생각하고요. 여러분 (팬들)이 결정하세요. 그냥 토론거리일 뿐입니다. (I just felt like he was just talking. It’s a debate. The thing is that we would never know. I think we would have killed them. He thinks they would have killed us. You guys decide. It’s just a debate.)"라고 하며 상황을 수습했다. 천하의 조던이 직접 한 말이라 그런지 샤크는 이후 별다른 코멘트를 달지 않았지만 뜬금없이 얼마 후에 홍콩에서 "역대 최고의 선수는 (마이클 조던이 아니라) 줄리어스 어빙"이라고 인터뷰를 했다.. 사실 저 인터뷰도 기자가 르브론 제임스와 조던을 비교하는 질문을 던진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고(당연히 조던 손을 들어줬다), 전체적인 맥락상 조던을 저격한 것이라기 보다는 줄리어스 어빙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발언에 더 가깝다.[59] 참고로 팬들 사이에서는 레이커스 팀이 50점차(?)로 이긴다는 건 오닐 특유의 허풍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오닐-압둘자바라는 더블포스트의 위력 때문에 레이커스 쪽이 유리하다는 것은 대체로 동의했다.[60] 레이커스 시절 샤크는 새크라멘토 킹스를 새크라멘토 퀸즈라며 대차게 디스했던 적이 있다.(...) Open Court에서 크리스 웨버가 나와있는데 대놓고 깠다. 물론 이 때의 말투는 농담조.[61] 샤킬 오닐이 사이즈 22를 신는다. 그보다 큰 야오밍, 그보다 약간 작은 디안드레 조던이 사이즈 18을 신는다. 손도 발도 엄청나게 커서, 그 손 크기로 유명한 카와이 레너드보다 약간 더 크다. 물론 이건 201cm밖에 안되면서 오닐같은 덩치랑 거의 비슷한 카와이가 더 놀라운 거지만...[62] 미식축구 선수인 오델 베컴 주니어는 트위터로 "저건 10점이라고!"를 외쳤고, 농구광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도 어이가 없어 손사래를 치는 장면이 잡혔다. 함께 심사를 했던 매직 존슨, 조지 거빈, 디켐베 무톰보,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는 오닐의 점수를 보자마자 바로 폭소를 터트렸다.[63] 그래도 뒷말은 별로 없던 것이, 오닐이 9점을 준 이유가 두 명 모두 덩크를 한 번에 성공시키지 못했기 때문. 덩크 콘테스트에선 어떤 덩크를 할 지 모르는 상태에서 오는 기대감이 더 크기 때문에, 한 번에 성공시키는 것이 반응이 좋다. 편파를 한 것도 아니고 두 명에게 똑같은 기준으로 심사했다. 엄격한 기준에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른 고든과 라빈은 이후 결승에서 단 한 차례도 실수하지 않았고, 오닐은 10점으로 화답했다. 그덕에 2016 NBA 덩크 콘테스트는 현재까지도 역대 최고의 덩크 콘테스트로 기억되고 있다.[64] 애초에 무리가 있던 주장인 것이, 로빈슨은 87년 드래프티이지만 군 복무 탓에 89년이 되어서야 샌안토니오에 합류했고 그가 루키 시즌을 보내던 89~90년에 오닐은 루이지애나 주립대에서 1학년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대학생이 된 오닐이 로빈슨과 만났을 순 있겠지만 당시 그는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톱급 아마추어라 "사인 요청하는 어린팬1"이 절대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닐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고등학생 때, 그 전에는 13살 때 이 사건이 발생했다고 했는데 전자라면 로빈슨은 군 복무 중이거나 대학에 다니던 시절이었고 후자라면(85년 아니면 86년 초) 당연히 대학 시절이다.[65] 사실 당시에도 로빈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면 "??"할 정도로 이상한 주장이긴 했다. 로빈슨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바른 생활 사나이로, 선수생활 내내 스캔들 하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인품을 지닌 선수였다. 당연히 팬서비스에도 인색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린 팬의 사인 요구에 무례하게 대응했다는게 너무 로빈슨답지 않았기 때문.[66] 본인 자신도 포함[67] 1984년 보스턴 셀틱스[68] 르브론 제임스, 대니 그린, 라존 론도[69] 61회는 아예 샤킬 오닐 특집이 되었다. 뉴저지에서 학교를 다닌 한승연, 체육계 대선배를 맞이한 신수지가 팬심을 숨기지 못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