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민렌드
1. 개요
카메룬 출신의 캐나다 국적의 前 농구선수이자 현직 약사.
KBL에 오기 전 이스라엘 리그에서 득점왕을 한 적이 있으며 KBL 외국인 드래프트 1순위로 KCC에 지명 되었다. KCC에서 3년간 뛰면서 우승 1번에 준우승 1번을 기록했고, LG에서 마지막으로 KBL에서의 생활을 마쳤다.
조니 맥도웰과 함께 대전 현대→전주 KCC 출신 특급 외국인 선수 중의 한 명이었다.
2. KBL 입성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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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기록
1992년 Big East 컨퍼런스 소속의 세인트 존스 대학교(뉴욕) 신입생으로 입학한 민렌드는 신입생 때부터 주요 로테이션멤버로 뛰며 시즌 전경기를 소화했고, NCAA 토너먼트에서도 평균 14분을 뛰며 7득점-4.5리바운드의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팀이 토너먼트 2회전(32강)까지 오르는 데 공헌했다.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팀의 주전 파워포워드로 나선 민렌드는, 2학년때 평균 13.8점-7.8리바운드(컨퍼런스 9위), 3학년때 12.7점-8.5리바운드(컨퍼런스 4위)를 올리며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민렌드가 뛰던 시절 Big East 컨퍼런스는 레이 앨런-도니엘 마샬 콤비의 코네티컷, 앨런 아이버슨의 조지타운, 케리 키틀즈-에릭 이버츠[3] 의 빌라노바 등 향후 NBA를 주름잡게 될 슈퍼스타들을 보유한 강팀들이 격돌하던 때라, 민렌드의 팀성적은 컨퍼런스내에서도 하위권으로 추락했고 설상가상으로 민렌드 본인은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1년 유급을 택해야만 했다.
1시즌을 스킵하고 96-97시즌에 복귀한 민렌드는 14.1점-7.8리바운드(컨퍼런스 5위)로 쏠쏠한 활약을 보여줬지만 팀은 여전히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1학년때 이후 다시 NCAA 토너먼트 무대를 밟지 못한채 대학시절을 마감한다.
겨우 6-6(198cm, 착화신장)의 단신 파워 포워드였던 민렌드는 당연하게도 1997년 NBA 드래프트에서 낙방했고, 이후 프랑스 리그에 진출해 3시즌을 뛴다. 프랑스 1부리그 몽펠리에 팀에서 뛰던 99-00 시즌 리그 득점 1위를 차지한 민렌드는, 이후 한단계 높은 리그인 이스라엘 리그로 진출, 마카비 기밧 슈무얼 팀에서 3시즌을 뛰면서 01-02, 02-03시즌 2년연속 득점왕을 차지한데다 02-03시즌에는 리그 MVP, 올스타전 MVP까지 석권하는 대활약을 펼친다.
이후 민렌드가 이스라엘 리그보다 몇 수 아래였던 KBL에, 그것도 트라이아웃까지 참여한다는 소식에, 해외리그를 좀 아는 팬들은 "대체 왜??"라는 반응이 많았었다. 어쨌든 2003년 KBL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보여준 민렌드는 전체 '''1순위'''로 전주 KCC 이지스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3. KBL 행적
KBL 기록
3.1. 전주 KCC 이지스 (2003-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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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민렌드는 시범경기에서는 큰 활약을 하지 못했고, 왜 뽑았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규시즌이 되자 달라진 모습을 보였고 민렌드는 일약 팀의 에이스[4] 로 올라서며 전 시즌 플레이오프에도 진출하지 못했던 전주 KCC를 03-04시즌 정규리그 2위로 이끌었다. 특히 3라운드 직전 서울 SK와의 빅딜로 팀의 계륵이었던 전희철이 나가고 레전드 조성원이 들어오면서 이-조-추 트리오로 대표되던 대전 현대 전성기 시절의 속공 플레이가 살아났고, 민렌드가 이 달리는 농구에 완벽 적응하며 팀 순위가 급상승했다. 여기에 트레이드 마감시한을 앞두고 03-04 시즌 한정 베스트 센터였던 울산 모비스의 R.F 바셋(202.4cm)까지 영입되면서[5] 높이의 약점까지 보강한 전주 KCC는 기세를 몰아 챔프전까지 진출, 2연속 우승을 노리던 원주 TG삼보 엑써스를 4대3으로 이기며 우승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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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 시즌에 본격적으로 고액연봉의 자유계약 외국인 선수들이 들어왔지만 신선우 감독은 민렌드와 바셋 모두를 신뢰하며 나란히 재계약을 맺는다. 하지만 민렌드가 유럽리그 출신이 대다수였던 자유계약 외인들을 상대로도 평균 26.3점-11.5리바운드(득점 2위/리바운드 6위)의 좋은 활약을 펼치친 반면, 이때부터 이상민은 잦은 부상으로 경기력의 기복이 심해졌고, 전시즌 호프를 주고 데려온 바셋은 기량 미달로 시즌개막 3게임만에 퇴출, 또 데리고 온 백인 센터 그레고리 스템핀(196.9cm) 역시 기량 미달로 퇴출당했고, 네이스미스 상 출신의 제로드 워드(198.7cm)를 영입했지만 워드가 워낙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준 탓에[6] 전 시즌보다 5패를 더 하면서(34승 20패) 시즌 막판 치열한 2위 싸움을 펼치다 겨우 정규리그 2위를 수성한다.[7] 이후 플옵 4강전에서 민렌드는 평균 29점-10.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단테 존스 홀로 고군분투한 안양 SBS를 3승 1패로 꺾고 2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하지만, 다시 만난 원주 TG삼보 엑써스에게 높이싸움에서 완패하면서 2년 연속 우승에는 실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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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시즌에도 민렌드는 꾸준히 좋은 활약을 보였지만 이때부터 이미 엄청난 선수들이 자유계약으로 KBL에 입성해 활약하기 시작했고,[8] 이상민과 조성원 등 주전들의 노쇠화에 전 NBA 출신 센터 쉐런 라이트(203cm)[9] 가 평균 13.8점-9.8리바의 초라한 성적만 거두는 등 팀이 전체적으로 다운그레이드 된 시즌이었다. 이후 쉐런 라이트가 퇴출되고 불같은 성격의 아써 롱이 합류했지만 팀은 여전히 연승과 연패를 오가는 롤러코스터 같은 시즌을 보냈고 결국 리그 5위로 간신히 플옵 진출에는 성공한다.
이후 민렌드는 6강 플레이오프에서 팀을 거의 혼자 이끌다시피하며 평균 27.5점-13리바운드를 기록, 신기성-애런 맥기 콤비가 이끌던 리그 4위팀 부산 KTF를 2:0으로 리버스스윕하는 이변을 연출하지만, 결국 4강 플레이오프에서 크리스 윌리엄스와 양동근을 필두로 한 울산 모비스에게 전력차를 절감하며 1승 3패로 패배하고 만다. 시즌이 끝나고 민렌드는 신선우 감독이 지휘하고 있는 창원 LG로 이적한다.
3.2. 창원 LG 세이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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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시즌 창원 LG는 신선우 감독이 부임하면서 전 시즌 베스트 5중 현주엽을 제외한 주전선수 모두가 바뀐 팀이었고, 민렌드는 현주엽과 함께 팀의 베테랑으로서 박지현, 이현민,[10] 퍼비스 파스코(201.3cm) 등 젊은 선수들의 중심을 잡아주면서 창원 LG를 정규리그 2위까지 올려놓는다. 골밑 파트너 파스코가 워낙 굳은 일에 특화된 선수였던 덕분에[11] 민렌드는 오랜만에 수비부담을 덜고 공격에 집중, KBL 입성 후 가장 높은 평균 28.6득점(리그 2위.[12] )에 경기당 2.68개의 3점슛(리그 2위.[13] )을 꽂아넣었다.
그러나 정규리그 3위팀 부산 KTF와의 4강 플레이오프에서 경기 도중 장영재의 도발에 흥분한 동료 외국인 선수 파스코가 심판을 밀치며 퇴출, 영구제명까지 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결국 창원 LG는 상대적으로 우세한 전력에도 불구, 부산 KTF에게 1승 3패로 패하며 시즌을 마감했고, 민렌드 역시 KBL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KBL 외국인선수 제도가 다시 트라이아웃으로 회귀하면서, 만 33세의 민렌드는 우크라이나 리그에 진출,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얼마 후 은퇴했다.
4. 시즌별 성적
5. 플레이 스타일
내외곽을 가리지 않고 득점이 가능하며 운동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스텝을 상당히 잘 쓴다.[14] 특유의 스텝을 이용한 돌파나 페이드 어웨이 점프슛을 즐겨 썼고 KBL에서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3점슛의 빈도 역시 늘어났다. 민렌드가 3점 슛을 쏘기 전 3점라인 앞에서 밟는 특유의 스텝[15] 은 팬들이 보고 있으면 3점 슛 준비 동작임을 대번에 알아챌 정도로 트레이드 마크이다. 팬들도 모션을 알 정도에 혼자 3~4초 정도 볼을 잡고 스탭을 밟기 때문에 수비하는 입장에서도 수비하기 쉬울 것 같은데 의외로 페인트가 꽤 잘 먹혔었다. 민렌드의 4년간 3점슛 성공률은 37.46%로 꽤나 성공률이 높았다.
생각보다 리바운드 능력이 좋아서 리바운드 2위까지 할 정도로 팀에서도 리바운드 비중이 컸고 노련함에서 묻어나오는 수비도 좋았다.
돌파할 때 공을 팔꿈치로 꽉 끼고 밟는 스텝 덕분에 아무리 거친 파울에도 대부분 마무리에 성공하고 앤드원을 따내는 등, "농구도사" 같은 모습을 자주 선보이곤 했다.
6. 기타
- 대학 전공이 약학이고 약사 면허를 가진 농구선수이다. 실제로도 비시즌 때는 약국에서 알바를 하였고, 은퇴 후 약국을 개업했다. 비슷한 예시로 브라질의 축구선수 소크라치스가 있다. 무려 의학박사로, 찰스처럼 선수 은퇴 후 소아과 의사가 되었다. 또한 전 프로게이머였던 이주영도 프로게이머 은퇴 후 치과의사로 전향했다.
- 팀동료 이상민의 증언에 의하면, 민렌드는 다른 외국인선수들처럼 이태원에 가서 놀지 않고 방에서 약학 서적을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매년 약사 자격증 갱신 시험을 봐야하기 때문이다.[16]
- 전형적인 한국식 용병이다 보니 본인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한자 이름을 붙인 '민철수'라는 별명이 있다. 실제로 KCC 팬들과 신선우 감독 역시 그를 민철수라고 부르기도 했다.
- 슬하에 2남 1녀가 있다. 아들 찰스 민렌드 Jr (Charles Alexander Minlend, 1997년 12월 19일 생)는 2016년 샌프란시스코 대학교에 입학해 농구선수 이다. 190cm로 포지션은 슈팅 가드라고 한다.
- 아버지는 경제학 박사이고, 어머니는 모국 대통령비서실에서 근무했던 인텔리 집안 출신이라고 한다.
[1] 2005년 캐나다 시민권을 취득했다.[2] 3학년때의 부상으로 1년 유급해 졸업이 늦어졌다.[3] 02-03 시즌을 마지막으로 KBL을 떠나는 바람에, 03-04 시즌 데뷔한 민렌드와 KBL에서 다시 붙지는 못했다.[4] 이 시즌에 득점왕과 리바운드 2위(평균 27.2점-11.3리바운드)를 했으니...[5] 그 유명한 "임대 트레이드" 사건으로, 울산 모비스로 부터 R.F 바셋을 "임대"로 영입하면서 전주 KCC는 다소 아쉬운 기량이었던 주전센터 무스타파 호프(200cm)와, 2004년 드래프트 1R 지명권을 넘겼다. 결국 전주 KCC는 03-04 시즌 우승을 차지했으나, 이때 넘어간 1R 픽이 바로 KBL 레전드 양동근이 되었다.;;;[6] 애초에 포워드 출신인 워드는 외곽 플레이를 즐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만 해도 한국 농구팬들의 생각은 상당히 구시대적 마인드가 강했고 워드가 그 전에 가드-포워드로 뛰는 선수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워드의 이런 플레이는 센터의 본분을 지키지 않는 플레이로 간주되어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 다만 그걸 감안해도 워드의 기복이 심했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닌데 어떤 날은 30점이상 심지어 40점을 폭격하는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은 정말 경기를 말아먹기도 했다.[7] 당시 시즌 중반까지 중위권이던 안양 SBS가 이른바 "단테 열풍"을 일으키며 정규리그 막판 15연승을 질주, 전주 KCC를 코앞까지 추격했지만 결국 1경기 차로 3위에 그쳤다.[8] 크리스 윌리엄스(울산 모비스), 올루미데 오예데지(서울 삼성) 등 NBA와 유럽무대에서 뛰던 선수들이 대거 입성했고, 이바람에 전시즌 최고 외인이라던 단테 존스마저 그 위력이 감소했다.[9] 무려 1994년 NBA 드래프트 전체 6순위 출신으로, 드래프트 동기로는 1순위 글렌 로빈슨(밀워키), 2순위 제이슨 키드, 3순위 그랜트 힐, 5순위 주완 하워드가 있었다. 네임밸류 만으로는 가히 역대 KBL 최고 수준.[10] 신인드래프트 전체 3순위로 갓 입단했을 때[11] 06-07 시즌 평균 9.4점-9.1리바-1.6블록[12] 이때 1위는 무려 35.1점을 기록한 핏마 교주;;;[13] 1위는 2.72개의 방성윤[14] 저 스텝은 피바룰로 바뀌면서 트레블링이 불릴 가능성이 높은 개더 스텝이었으나 FIBA에서도 개더 스텝을 허용하기 시작했다.[15] 왼발을 축으로 오른발을 크게 두어 번 휘저은 뒤 수비가 스탭에 속아 간격이 벌어지면 3점 슛, 벌어지지 않을 시 드리블 돌파로 컷인.[16] 정지욱 기자의 용병닷컴TV 84회 2020.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