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레이스 그랜트

 

[image]
'''이름'''
호레이스 그랜트 (Horace Junior Grant)
'''생년월일'''
1965년 7월 4일 (59세)
'''신장'''
211cm (6' 11")[1]
'''체중'''
111kg
'''출신학교'''
클렘슨 대학교
'''포지션'''
파워 포워드, 센터
'''드래프트'''
1987년 1라운드 10순위
시카고 불스에 지명
'''역대 소속팀'''
시카고 불스(1987~1994)
올랜도 매직(1994~1999)
시애틀 슈퍼소닉스(1999~2000)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00~2001)
올랜도 매직 (2001~2002)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03~2004)
'''등번호'''
54번
'''수상내역'''
NBA champion 4회 (1991-1993, 2001)
NBA All-Star 1회 (1994)
All-Defensive Second Team 4회 (1993-1996)
'''NBA 파이널 우승 반지'''
'''1991'''
'''1992'''
'''1993'''
'''2001'''
1. 개요
2. 커리어
2.1. 시카고 불스
2.2. 올랜도 매직
2.3. 시애틀, 레이커스, 매직, 레이커스
3. 기타


1. 개요


고글 쌍안경이 트레이드 마크인 시카고 불스 1차 쓰리핏의 멤버였던 선수. 포지션은 파워 포워드로 몸싸움과 공격리바운드,세로수비가 좋으며 받아먹기에 능해서 볼소유도 짧고 실책도 잘하지 않으며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이해도가 높은 BQ를 갖춘 블루워커 빅맨이었다.[2] 가진 슛이 거의 없어서 골밑에서 밀려나면 잉여가 되고, 통산 자유투율이 69.2%로 간당간당한 수준이라는 약점이 있지만 불스 시스템에는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애틀랜타에서 쌍둥이로 태어났다. 9분 차이로 늦게 태어난 동생의 이름은 하비 그랜트로 하비 역시 같은 파워 포워드 포지션의 농구선수이다. 형과 같이 클렘슨 대학에 진학했지만 폭력사건에 휘말려 오클라호마 대학교로 전학을 가서 2학년 시즌을 통으로 날리고 호레이스보다 1년 늦은 88년 드래프트에 지명받아서 워싱턴 불리츠 (1988-1993)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1993-1996) 워싱턴 위자즈 (1996-1998)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1999)등의 팀에서 활동했다.

2. 커리어



2.1. 시카고 불스


1980년대 중반 시카고 불스마이클 조던을 중심으로 팀구성을 짜맞추고 있었다. 조던은 자신의 모교인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출신의 조 울프라는 센터선수를 다음 드래프트에서 선발하길 희망했는데, 불스의 스카우터들이 대학경기를 보러갔다가 그랜트의 플레이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당시 그랜트는 지극히 평범한 대학 커리어를 보내고 있었지만 스카우터들은 불스의 단장인 제리 크라우스를 적극적으로 설득했고 결국 1987년 드래프트에서 불스는 울프를 거르고 그랜트를 전체 10순위로 뽑았다.
동시에 불스에 입단한 그랜트와 피펜은 조던의 맹렬한 훈련시간을 거치면서 성장했고 시카고 불스 1차 쓰리핏의 주역들이 되었다.
다만 그랜트는 팀원들이 모두 공평한 대접을 받아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팀의 에이스였던 조던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일이 잦아 조던과 불스 프런트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3] 1991년 우승 이후 백악관 초청행사에서 조던이 빠졌던 일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훈련으로 조던이 팀 훈련에 불참한 것을 모두 비판한 것.
하지만 이런 갈등이 팀의 성적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고[4] 1993년 파이널 6차전에서는 경기 종료 직전 클러치 상황에서 조던 - 피펜 - 그랜트 - 존 팩슨으로 이어지는 후일 슬램덩크에서 오마주된 그 플레이의 일익을 담당하면서 팀의 스리핏을 견인했다.
1993년 조던이 1차 은퇴를 하며 야구를 하러 떠난 이후로 불스는 '조던이 없어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라는 목표로 선수들이 뭉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피펜과 그랜트의 활약으로 불스는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이 시점부터 피펜과 그랜트도 리그의 스타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피펜은 MVP 투표 3위까지 오르며 이때 처음으로 올 NBA 퍼스트팀에 올랐고, 그랜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전에 출장했다.
그러나 그 때도 짠돌이(...)로 악명높았던 불스 프런트[5][6]는 재계약이 다가온 그랜트에게 턱없이 낮은 금액을 제시. 그랜트는 불스를 떠나기로 결정한다.

2.2. 올랜도 매직


앤퍼니 하더웨이샤킬 오닐을 중심으로 젊고 강력한 팀이었던 매직에서 그랜트는 큰 형님 역할을 했고 매직은 마이클 조던이 복귀한 시카고 불스를 제압하면서 1995년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하지만 하킴 올라주원이 버티는 휴스턴 로키츠에 완전히 털려버리면서 준우승[7]에 그쳤다.
그랜트는 96년 불스와의 동부결승 1차전에서 부상을 당해 결국 시즌아웃이 되었고 시리즈 0-4로 패했다. 그랜트가 건재했다면 불스로부터 시리즈를 가져오진 못하더라도 조금 더 선전했을 여지가 있다.
샤킬 오닐이 1996년 FA 계약으로 레이커스로 떠나버렸고 올랜도는 플레이오프는 진출했으나 우승권팀에서 내려왔다 (60승에서 45승으로 15승 감소) 97/98시즌에는 41승으로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98/99 단축시즌에 기대이상으로 선전하며 정규시즌 동부3위를 기록했으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필라델피아에 업셋을 당했다. 2년차부터 10년연속 두자리 득점을 기록했던 그랜트도 이 시즌부터 두자리 득점에 실패하며 노쇠화로 기량이 떨어졌다.

2.3. 시애틀, 레이커스, 매직, 레이커스


시애틀을 거쳐 2001년 레이커스로 이적한 그랜트는 불스 시절 감독이었던 필 잭슨과 매직 시절 동료였던 샤킬 오닐과 재결합, 4번째 우승반지를 손에 넣는다. 우승 시즌 직후 다시 한 번 올랜도로 떠났다가 2003-04시즌 전당포 라인업을 구축한 레이커스에 다시 합류하지만, 배드 보이즈 2기에게 털리면서 다시 준우승. 그리고 그 시즌 이후 그랜트는 은퇴했다.

3. 기타


마이클 조던과 팀원들의 불화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당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던 마이클 조던이 동료들에게 폭군처럼 군다는 내용으로 인해 논란이 일어났던 베스트셀러 'The Jordan Rules(1992)'의 저자이자 시카고 트리뷴의 기자 샘 스미스에게 불스 라커룸 내부의 일을 알려줬다고 의심받았고, 지금도 마이클 조던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다. 다만 본인은 샘 스미스와 친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선수들의 관계까지 말해준 적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B.J. 암스트롱도 그 책은 불스 조직의 온갖 사람들의 말들을 종합한거지 전부 호레이스 그랜트가 출처일리는 없다고 말한다.
사실 본인의 주전 도약 과정 때문에 생긴 트러블이 꽤 크고 오래 갔기 때문에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는 찰스 오클리, 빌 카트라이트 항목에 나와 있듯. 이 두 선수의 맞트레이드에 조던이 크게 분노했기 때문.
한편으로 "마이클은 항상 승리를 찾아내는 선수다"라면서 존중하는 발언도 한 적이 있다. 실제로 그랜트는 조던과 동료들 사이에서 인간적인 불화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었지 그의 실력에 대해선 한번도 부정적으로 얘기한 적이 없으며 자신이 뛴 팀과 동료들 중 최고를 꼽으라면 (그는 전성기 샤킬 오닐과 레이커스에서 뛰며 우승을 했었다) "의심의 여지없이(no question)" 조던과 불스를 꼽는다. 위에 언급된 발언도 이 과정에서 나온 것. 즉, 조던이 있는 팀은 어떻게든 승리할 것이란 소리다.
불스의 홈경기에 피펜과 함께 가끔 모습을 보인다.
전 부인과 아들 둘이 있고, 현재의 부인과 아들 하나 딸 셋이 있다. 전술한 쌍둥이 동생 하비는 아들 셋이 있는데(호레이스에겐 조카) 이들은 프로농구선수로 성장하여, 둘째 제리언은 올랜도 매직, 막내 제라미덴버 너기츠에서 활약중이다.[8]
드래프트 동기인 피펜과 굉장히 절친한 사이여서 데뷔하고 똑같은 차를 사고, 같은 동네에 집을 사고, 같은 종의 개를 입양하고, 하루에도 몇번씩 전화하는데다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했으며 서로의 best man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불스의 year book에서 "달 여행을 간다면 누굴 데려가겠느냐"란 질문에 피펜은 "호러스 그랜트"라고 썼다고. 다만 피펜이 조던의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을 따라하기 시작하고 결혼 몇년 만에 이혼을 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친분과 별개로 같이 나가 노는건 자제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90년대 초반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며, 많은 선수들이 원정 경기에서 클럽에 나가 노는 반면 원정경기에 아내 도나를 대동하기까지 했다. 다만 둘은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2020년 5월 20일 ESPN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의 내용 중 90%가 사실과 다르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라스트 댄스는 전체적으로 호레이스 그랜트에게도 매우 우호적인 내용이었고 그가 가장 많이 까이는 음모론, '샘 스미스 기자에게 시카고 불스의 라커룸 생활을 누설했다.(1993년)'도 그랜트가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쉴드쳐주었기 때문에 왜 갑자기 급발진을 하는 지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하는 반응. [9] 아무래도 조던과 그랜트의 앙금은 아이재아 토마스만큼 깊은 것 같다.(?)
다만 갈등의 성격이 조금 다르다. 진짜 원수지간인 아이재아와 달리 조던은 한창 팀이 성장할 시점에 젊고 재능있지만 아직 미숙한 피펜과 그랜트가 우승을 도울 수 있을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고, 이에 둘을 많이 갈궜다. 이중엔 그랜트가 부진하자 이동 중 팀 전용기에서 "그랜트에게 음식 주지 말라"고 농담반진담반으로 갈군 것도 포함된다. 최근 그랜트는 인터뷰에서 이 일화를 거론하며 "당시 난 바로 (조던에게) 받아쳤다. 조던은 말 뿐이었다. 만약 실제로 붙었다면 조던을 박살냈을 것"이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는데, 조던과 딱히 원수진 것은 없지만 강한 조던의 이미지에 반해 자신이 너무 나약하고 여린 것처럼 비춰지는 것에 반발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육체적으론 90-91시즌부터 팀에서 가장 힘이 센 선수가 바로 그랜트였고, 조던 룰즈에는 승부욕이 붙은 조던이 그랜트가 역기를 드는 것만큼 들려고 해서 주변에서 말렸다는 일화도 소개되어있다.
[1] 선수 생활 내내 6피트 10인치로 표기됐었는데, 희한하게 은퇴한 이후부터 6피트 11인치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맨발키가 6피트 10인치일 가능성도 높다.[2] 당시 리그에는 수비, 리바운드 등 궂은 일에 특화된 터프한 블루워커 파워포워드들이 많았는데, 찰스 오클리, 데니스 로드맨, 데일 데이비스, 호레이스 그랜트 등이 대표적이다.[3] 피펜과 그랜트 둘 다 평범한 조던과 훈련하면서 성장했지만 둘의 성격 차이가 컸다. 피펜조던이 혹독하게 몰아붙이면 몰아붙일수록 독하게 받아치는 독종이었고, 이 때문에 조던과 서로 존중하는 사이가 됐다. (조던은 자신에게 도전하는 동료들을 좋아하고 오히려 쥐어사는 동료들을 존중하지 않는다.) 반면 그랜트는 성격이 너무 착해서 조던의 갈굼에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4] 조던과 빌 카트라이트의 불화도 유명하지만 조던과 카트라이트는 1차 쓰리핏 당시에는 이미 화해를 했고, 공동주장까지 맡았다.[5] 시카고 불스 프런트가 제대로 된 금액으로 선수를 잡은 케이스는 딱 2번 있었다. 마이클 조던데릭 로즈다.[6] 조던도 선수 시절 내내 연봉이 높지 않았는데 각 각 96/97, 97/98시즌에 지금도 높은 2,500만 달러와 3,000만 달러 이상에 계약했다. 불스 수뇌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MVP'''가 아니면 재계약에 관심이 없다.[7] 파이널시리즈 0-4 스윕패[8] 농구 집안이 생각보다 많다. 팀 하더웨이 부자, 글렌 로빈슨 부자, 델 커리와 스테판/세스 커리 형제, 가솔 형제, 사보니스 부자[9] 손대범 편집장과 조현일 기자 등 농구 기자들이 함께하는 유튜브 방송에서도 그랜트의 발언에 다들 당황해했다.